무대 위에 있는 마술사의 손이 작은 화분 위로 강력한 포스를 내뿜고 있다. 화분에는 흙만 꽉 차 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 흙속에서 싹이 트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가지를 뻗고 자라나 오렌지를 열리게 한다. 마술사는 오렌지를 따서 객석으로 던진다. 의심 많은 관객들은 오렌지의 맛을 보지만, 진짜다. 눈 앞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이 현상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마술을 환상마술이라고 한다.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하고 만리장성을 관통하는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환상마술도, 그 원조는 19세기 비엔나의 환상마술이다. 현대 마술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장 폴 로베르 우뎅의 환상마술을 응용한 영화 속 마술 장면들은 강력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런 영화가 좋다. 신비하고 로맨틱하면서도 스릴러적 긴장감을 끝까지 잃지 않는 [일루셔니스트]는 내 감성과 잘 맞는다. 특히 마술이라는 소재가 주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대중성을 확보하면서도 소재 자체의 신기함에 현혹되지 않고 핵심 이야기를 풀어낸 내러티브 구성은 탁월하다. 신비함을 유지시키는 세피아톤의 화면은 몽환적이다. 아카데미 촬영상에 노미네이트 된 딕 포프의 촬영과 현대 음악의 감성을 영화의 흐름에 맞게 구성한 필립 글스의 음악은 [일루셔니스트]의 성공을 도운 요소이기도 하다.
[일루셔니스트]는 마술사를 소재로 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프레스티지]와 비교해 봐도 훨씬 더 잘 만들어졌다. 대중성도 뛰어나고 극적 구성도 좋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스티븐 밀하우저의 [환영술사 아이젠하임]의 단편소설을 각색해서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은 닐 버거다. [일루셔니스트]는 마술이라는 소재 자체도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보다는 신분 차이를 뛰어 넘는 남녀의 사랑에 더 촛점이 맞춰져 있다.
19세기 비엔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일루셔니스트]는 아직도 대부분의 길이 자갈로 포장되어 있고 가스등이 남아 있는 프라하에서 촬영되었다. 영화의 도입부는 화려한 마술로 포장되어 있다. 비엔나 시민들을 매혹시킨 마술사 아이젠하임(에드워드 노튼 분)은 무대 위로 죽은 사람들의 환영을 불러 일으키다가 공연 도중 사기죄로 체포된다. 그러나 감독은 과거로 플래시백 되면서 영화의 진짜 주제를 풀어놓는다. 고귀한 신분의 오스트리아 공녀 소피와 서민의 아들에 불과한 소년은 남몰래 사랑을 키워가지만 결국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공녀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로 헤어지게 된다.
집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며 마술을 공부한 뒤,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다시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아이젠하임이라는 이름으로 마술을 공연하며 비엔나 시민들을 사로잡는다. 어느날 황태자 일행이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에 온다. 에이젠하임은 관객 중의 한 사람을 무대 위로 불러내 직접 마술을 펼치는데 황태자는 자신의 약혼녀를 무대 위로 내보낸다. 성숙한 여인이 된 소피(제시카 비엘 분)를 보고 에이젠하임은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본다. 황태자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는 두 사람. 이제 영화는 본격적으로 삼각관계의 드라마를 펼쳐놓는다.
황태자와 결혼을 약속한 공녀, 그리고 마술사. 신분간 계층간의 차이가 영화 속에서 두드러지게 탐구되지는 않는다. [일루셔니스트]는 사회성 강한 드라마는 아니다. 그것보다는 영원한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 순진한 로맨스에 가깝다. 닐 버거 감독은 스릴러적 긴장감을 유지시키기 위해 반전의 트릭을 쓴다. 그러나 눈치 빠른 관객은 결말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여서 반전 그 자체의 묘미에 승부를 걸기보다는 극적 긴장감을 유지시키려고 한다. 그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것이 마술이다. 마술은 [일루셔니스트]의 중심 소재이면서 극의 반전을 위한 연막 구실도 한다.
마술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한가? 마술의 신비는 그러나 그 비밀을 알고 나면 너무나 어이없는 간단한 트릭인 경우도 많다. 환상마술은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라 관객의 환상적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많은 신비의 문을 열어젖힌다. 에드워드 노튼은 뛰어난 마술사인 제임스 프리드만에게서 실제로 마술을 배워 영화 속 마술들을 직접 관객들 앞에서 펼쳐보였고, 같이 공연한 제시카 비엘을 비롯해서 촬영에 동원된 관객들로부터 탄성을 받아낼 정도로 프로 수준의 마술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루셔니스트]에서는 권력지향적인 황태자가 극의 또 다른 중심으로 등장하는 데 권력욕에 대한 갈등과 암투가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다루어져서 균형이 조금 비틀거린다. 물론 닐 버거 감독의 촛점은 두 사람의 영원한 로맨스이겠지만, 그것이 제대로 보여지기 위해서는 황제의 권력에 도전하는 황태자의 욕망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었다면 훨씬 더 긴장감은 강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노튼과 제시카 비엘 등 남녀 주연 연기자들은 물론 사건을 추적하는 울 경감 역의 폴 지아메티나 레오폴드 황태자 역의 루퍼스 스웰 등 주변 인물의 연기도 좋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