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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년유니온 원문보기 글쓴이: 생생이
'희망의 버스' 후기는 나 자신을 깊이 되돌아 보는 관점에서 써보려 한다. 한진중공업 상황과 '희망의 버스' 일정과 관련하여 알리는 글은 레디앙, 민중의 소리,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에 좋은 글들이 많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 중 레디앙의 글 몇 개를 링크한다. 첫 번째 글은 일단 꼭 읽어보시길 바라고, 두 번째 글은 첫 희망의 버스 제안글이고, 세 번째 글을 희망의 버스 후기글이고, 네 번째 글은 레디앙의 기자의 생각을 담은 글이다.
1.
그리고 김진숙과 ‘85호 크레인’…"그가 내려올 수 있게 하자"
2.
김진숙의 85호 크레인 농성 150일과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연대
3.
[희망버스 1박2일] 정규-비정규직도, 어르신도, 주부도, 날나리도 함께
4.
[기자의 눈] ‘희망 버스’ 교훈…관성 극복, 자발적 참여의 힘
내가 희망의 버스에 타기로 한 실질적인 이유는 절친한 친구가 자신은 가려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든 생각은 기껏 '오랜만에 연대나 해볼까?'라는 가볍고도 건방진 생각이었다. 그 다음을 뒤따르는 생각은 '그래 이건 반드시 가야만 하는 일'이라는 노동운동에 대한 연대에 대한 당위였다. '무심함 → 개인적인 동기 → 당위적 합리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실천과 연대.
심지어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자세히 알지도 못했으며 애써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가면 알 수 있겠지'라는 생각. '정리해고'가 문제라는 것을 안 것은 현장에 도착하고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아니 다행이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은 것)은 희망의 버스에 타려했던 또 다른 이유가 나의 마음 속 어딘가에 깊이 가라앉아 있을 그 무언가가 다시 되살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때문이었다는 것이다.
6월 11일 서울시청 앞에서 희망의 버스에 올라탔다. 청년유니온의 이름으로 참여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총 9명이었고,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친구가 가입을 하여 총 10명이 되었다. 고등학생 일진마냥 맨 뒤로 우르르 몰려가 앉은 레랑스님, 세상아oo님, 태양의 파편님 그리고 재영님, 덕산님은 바로 곯아 떨어졌다. 남미로님만이 홀로 창밖을 보기도 하고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고 젊음의 생기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버스에 탔을까?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더라도 나보다는....
12일 0시가 넘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근처에 도착했다. 우리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부산 주민들은 다들 일찍 주무시는지 불이 거의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아파트들 사이의 적막 속에서 촛불을 들어 반짝거리는 참가자들만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 어두운 암흑 속에서 촛불을 들고 생기있게 미소짓고, 때론 결연한 의지로 입을 앙다물고 있는 청년유니온의 젊은 조합원들은 가히 '희망'이라 할만하다.(아래 사진, 사악한 웃음 짓고 있는 필자는 제외)
내 생각에 이들은 2011년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한국사회에서 피억압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의 자각과 저항, 그리고 다르지 않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바로 옆에서 오감을 통해 느끼고, 이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함께 실천할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더욱 자신을 비롯한 청년들의 처지에 대한 자각과 자신들의 삶에 필요한 가치와 이념을 정립하여 나갈 것이고, 실제로 행동에 나설 것이다. 예상과 바람.
<사무장님 무단 도용>
경찰들은 행진이 불법시위라 방송했지만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영도조선소에는 용역들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외친 "인도쪽으로 모두 붙으세요." 영문도 모르고 인도 앞으로 간 우리를 보며 경찰들은 도로에서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영도조선소의 벽 위로 모자를 쓰고 작업복을 입고 빨간 두건 마스크를 한 노동자들이 마치 영화에서의 매끄러운 전투 작전 수행 장면처럼 차례로 나타나 차례로 사다리를 담 밑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손 잡아드릴테니 걱정하지 말고 올라오세요!" 모두 놀라움과 감동 그리고 불안함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듯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때 치마를 입은 남미로냥이 누구보다도 먼저 거리낌 없이 사다리를 성큼성큼 올랐다. 헉! 이 친구는 겁이 없는 걸까?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고민은 해본걸까? 치마 안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없는 걸까?
어이쿠! 쓸 때 없는 생각들. 지금 남미로냥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닐텐데...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굳이 말로 설명해야 할 것도 아닌 남미로냥의 바로 저것이 지금 내게 결여된 아니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것이었다! 아마도.. 아니 확실하다!
<사무장님 사진 무단 도용>
담을 넘은 참가자들이 입구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의 엄호와 지원 아래에 한진중공업 방패를 든 노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용역들을 몰아세웠다. 소화액이 흩날리고 소화기와 안전모가 날라다니는 아비규환의 '전투'! 실제로는 잠깐의 시간이었겠지만 그순간만큼은 모두가 숨막히게 지켜봤을 것이다. 난 전투도 전투지만 청년유니온의 조합원들을 봤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본다며 그 상황을 걱정하듯이 응시하는 재영님을 비롯한 20대 초반 조합원분들. 쏜살같이 달려가 그 모습들을 영상으로 담는 노련한 미친곰님. 그리고 그 모습을 그러려니 하며 시큰둥하게 쳐다보는 나. 상황이 정리되고 용역이 있던 그 자리에 노동자들이 올라섰다.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한 명망가들이 올라서 발언을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남길 말이 없다. 언제부터일까? 집회현장에서 정치인들을 비롯한 명망가들이 발언을 하면 듣지 않게 된 건...
입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12일로 158일째(16일 162일때) 고공시위 중인 85호 크레인으로 갔다. 바로 앞에서 본 크레인은 골리앗 같았다. 그 중간 35m 높이에서 다섯달 넘게 시위중인 김진숙 위원은 다윗인걸까? 골리앗과 다윗 앞에 참가자들이 우르르 모여 앉았다. 문득 들려온 김진숙 위원의 목소리는 내게 충격이었다. 조용해지고 몇몇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를 환영하는 김진숙 위원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압도했다. 추위에 떨고 더위에 힘빠지는 그곳에서 다섯달이나 지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란 말인가? "조합원들이 6개월 전까지 살아왔던 그 삶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며, 여러분들이 오늘까지 누려왔던 소박한 일상을 그들에게도 지켜주고 싶을 뿐"이라는 그녀의 소박한 바람은 강력한 힘과 의지가 담긴 그녀의 카리스마적인 목소리와 조화되어 긍정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모든 참가자들을 조용하게 만들었고, 숙연하게 만들었고, 눈물 흘리도록 만들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용히 앉아 있던 김여진씨의 조용한 눈물이 뇌리에 박혔다.
<사무장님 사진 무단 도용>
상당수의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숙소에 들어가 자기 시작하고 조금은 조용해진 새벽에 크레인의 중간쯤까지 올랐다. 그리고 영도조선소를 둘러보았다.여전히 아래에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일지 모를 여유와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희망의 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어둠깜깜한 조선소 안에서 노동자들과 용역들의 긴장 가운데 흐르는 적막 혹은 악만 남은 절망의 전투 와중 들리는 함성과 비명 소리가 이곳을 채웠으리라. 그래도 그날 하루만큼은 웃음과 노래, 편안함, 안도, 희망이라는 단어들로 조선소 안을 채웠을 것이고, 이후에도 그러한 것들이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리라. 그것은 나의 바람이기도 하고 나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제서야 내 안에 '의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벽 여섯시가 되어서야 피곤함을 느끼고 레랑스님과 함께 길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아래 사진 왼쪽) 노래소리와 웃음소리 속에서 몽롱하게 꿈과 현실을 오가며 선잠을 자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호통과 흐느낌이 들려왔다.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절규였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얼굴 위에 아침햇살을 가려주던 모자를 치우고 일어나기가 두려웠다. 대학을 다니는 자녀가 셋이라는 노동자 아저씨는 '당신들을 웃고 노래하고 즐기지만 난 정말 하루하루 미치겠다'며 절규했다. 소리지르고 울었다. 아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난 움직일수조차 없었다. 아무도... 크레인에 걸린 대형걸게에 담긴 문구만이 그의 절규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참가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참가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원망은 전혀 다른 것만은 아닌가보다. 그대들은 아는가? 이 노동자의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 마음을! 난 몰랐다. 모르고 싶었다. 알기가 두려웠다. 눈물나는 불편함.
<사무장님 무단 사진 도용>
<사무장님 사진 무단 도용>
몇 시간이 더 지나고 다들 조금씩 잠을 자고나서 크레인 앞으로 돌아오니 판화를 찍어주기도 하고 캐리커쳐를 그려주기도 하고 티셔츠를 판매하기도 했다. 그 공간은 다시 잠시나마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은 판화도 찍고 자신의 캐리커쳐도 받으며 즐거워했다. 즐거운 공간. 크레인 앞의 이 공간은 매순간 용도도 바뀌고 분위기도 바뀌고 의미도 바뀌었다. 억압이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절망의 공간이기도 했고, 김진숙 동지와 조합원들이 목숨 걸고 투쟁하는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고,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함께하는 연대의 공간이기도 했고, 잠시나마 이야기와 먹을 것, 그리고 노래와 웃음을 나누는 해방의 공간이기도 했다.
어떤 공간의 의미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달린 것이리라. 어떤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린 것이리라. 물론 사회적 조건과 물적 토대에 기반해서.. 그 공간에서 공간의 분위기와 의미가 변하는 것 과 함께 심적 변화를 겪은 사람들은 이미 그 핵심주체이기도 하고 앞으로 핵심주체가 될 것이기도 하리라. 특히 미성년자인 덕산님과 레랑스님, 남미로님, 태양의 파편님 세 명의 21살 조합원님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청년유니온 조합원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렇지만 말이다.
<조금득 사무장님 사진 무단 도용>
<조금득 사무장님 사진 무단 도용>
<조금득 사무장님 사진 무단 도용>
이제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한낮이 되어서 본 크레인은 밤에 본 그것보다 덜 무서웠다. 골리앗에 투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붙인 바람개비들은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에서 한진 투쟁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한 것 같았다.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가는 길에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양쪽으로 늘어서서 마중을 해주었다. 박수를 치며 고맙다며 잘가라고 말했다. 모두가 울고 있었다. 양동이 사무장님도 울고 있었고, 세상아oo님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뒤를 돌아 크레인을 보니 김진숙 지도위원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인사하고 있었다. 난 결국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쉼없이 온 힘을 다해 박수를 쳤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힘내세요."
복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기사를 보다가 오마이뉴스 기사에 뜬 사진(마지막 사진)을 보고서야 눈물을 흘렸다. 이 사진은 많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진중공업의 건물은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거대한 자본이며, 85호 크레인은 그것을 지키고 노동자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하수인이고 앞잡이였다. 그 크레인 위에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가 죽었다. 사회적 타살. 지금 그 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동지'가 다섯달 넘게 투쟁하고 있다. 김진숙 동지로 인해 크레인은 투쟁의 상징이 되고 우리와 노동자들을 지켜봐주는 그 무엇이 된다. 그 앞으로 한진의 노동자들이 양갈래로 흩어져 박수를 치고 있다. 결연한 의지로. 참가자들은 앞쪽으로 떠나고 있다. 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떠난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반대쪽으로 걸어갈 것이다. 외로이 남아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다. 한진의 노동자들을 눈 앞에서 볼 수 없게 되고서야 눈물을 흘리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마이뉴스 사진 도용>
조선소에서 빠져 나온 뒤 세상아oo님은 눈물을 보이지 않은 내게 농담으로 '냉혈한'이라고 말했다. 같이 웃기도 했고, 사무장님은 그 말을 자꾸 언급하는 내게 소심하다고 장난반의 핀잔을 주었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마음 깊은 곳의 그것을 핵심적으로 건드리는 단어였다. 한진 투쟁에 대한 무심함, 제3자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듯한 자세, 폭력과 저항에 대한 무감각, 흐르지 않는 눈물... 그야말로 냉혈한이라 불릴만하다.
10년 전 스무살, '이것이 내 삶이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을 지배한 것은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우정, 그리고 투쟁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열정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집단의 관점에서 실패를 하고 그것의 원인이 '이성 없는 감성'과 '이론 없는 실천',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독단'에 있음을 알았다. 인간에 대한 상처,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상처.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러한 문제를 이겨낸 것은 '강철이 되자'라는 이상한 자기 암시와, 이론적 정립을 위한 독서 등을 거치면서였다. 하지만 결국 '이성없는 감성'과 '이론 없는 실천'에 대한 반정립은 '감성을 외면하는 이성'과 '느끼는 실천이 아니라 이론적 당위로하는 실천'에 불과한 것이었다.
두려웠던 것이다. 느끼는 것이. 공감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 여과 없이 직면하는 것이. 그래서 눈물을 보일 수 없었고, 그래서 노동자의 절규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자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삶의 무게는 내게 너무도 견디기 힘든 것이 되었다. 한진 노동자의 삶을 동일시 하는 것, 다양한 운동들의 주체들의 삶을 동일시 하는 것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나 자신의 운동에서 실패를 겪고 인간에 대한 좌절을 하고 무너질 뻔한 나의 트라우마. 완벽하게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고 봉합했던 상처를 다시 파헤치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크레인 위에서 다섯달이 넘게 싸우고 있는 김진숙 '동지'의 강렬한 목소리가 내 마음의 문의 빗장을 풀었다. 김여진의 눈물에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억압과 절망의 공간을 웃음과 희망의 공간으로 바꿔낸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과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에 의해 새로운 '의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잠결에 들은 한 노동자의 절규가 내 마음 문 안에 숨어 있는 '상처 입은 아이'에 직면하도록 했다. 가는 길에 모여 박수를 쳐 준 한진 노동자들이 '상처 입은 아이'를 위로해주었다. 이제서야 그 아이는 숨어 있기를 멈추고 자신감을 가지고 한 걸음씩 걸어나가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가장 앞에서 노동자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고 함께 눈물 흘리던 미친곰님은 다녀와서 서러움이 밀려와서 소리 지르고 싶었다며 연대의 길을 함께 가자고 하셨다. 나 또한 그렇다. 희망의 버스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 철회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는 사회운동을 지향하는 한 사람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거듭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특별히 운동을 이제 시작한,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청년유니온의 20대 초반 활동가/조합원들이 성장할 수 있는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말 자주 인용하는 좋아하는 문구로 마무리 하려 한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안토니오 그람시)
말을 바꿔 한 가지 더 언급하려 한다.
"좌절의 상처로 주춤거리더라도 함께 가는 사람의 위로와 연대로 꿋꿋하게 나아가자."
7월 9일에 희망의 버스를 타고 함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동지를 만나러 갑시다. 함께 많이 느끼고 배우고 싸우고 함께 승리했으면 좋겠습니다.
"7월 9일, 버스는 또 떠납니다" [공개제안서] 2차 ‘희망의 버스’ 185대…'아름다운 소풍날'
- 송경동 시인
첫댓글 1차 희망버스 때 같은 버스에 탔던 귀여운 청년들, 청년유니온 까페에 이런 후기가 있어 2차 희망버스도 알릴 겸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