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동무님.
주 안에서 문안과 함께 답글을 전합니다.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었습니다.
“ 언제인지는 모르나,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보아서도 안 되고 혹은 알레고리 형식으로만 보아도 안된다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아선 안되는 것으로 베리칩이 666이라는 세대주의 예를 들었으며, 알레고리 형식으로만 볼 때의 위험성에 대한 예도 들은 듯 한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인가 목사님이 설명해 준 적도 있는데, 나이 탓인지 머리 탓인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보아선 안되는 이유는 세대주의에 대해 좀 아는 바라 좀 알겠는데, 알레고리 형식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알길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그 말을 표현하는 글자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게 함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요 글자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니, 그래서 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는 것이니, 이 성경을 보고 읽는 자는 우선 당연히 내용을 문자적으로 보고 읽으며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단언적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성경은 먼저는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자에게는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또한 문자가 사용되어서 문구를 이루고 문장을 형성한 문법도 살펴보아야 하고, 문맥을 살펴보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그래야만 되는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요. 성경은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문자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 일반적인 원칙입니다만, 그래서는 안 되는 특별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된 문자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경우가 그렇습니다. 님이 예를 든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666이라는 숫자는 이것이 수를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지만, 이 숫자 자체가 또한 수(數)라고 하는 문자입니다. 이와 상대되는 숫자가 있죠. 144,000입니다. 이들 모두는 이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경우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죠. 가령, 시온 산에 우뚝 선 144,000명을 실제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144,000명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모이단종파에서는 144,000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휴거하여 천상낙원에 들어가는 숫자로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휴거하지는 못한 나머지 구원받은 자는 지상낙원에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서 사용되고 있는 숫자를 문자 그대로 보는데 따른 곡해입니다. 이는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1000년이라는 기간(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보는 경우도 그러하며, 한 때 두 때 반 때, 1260일, 70이레에서 말하는 7년 대환란 설도 그러합니다. 한편,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문자가 사용됨에서는 이것의 문장 속에서, 그리고 전후 문맥 속에서 문자가 담고 있는 뜻이 설명이 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단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설명하려는 우(愚)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낙원, 또는 음부, 지옥, 영영한 불못의 경우가 그러하며 혼, 영혼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단지 문자에만 국한하지 않고 문구의 경우에서도 보게 됩니다. 가령, 에베소서 4장 13절, 15절, 16절에서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그 몸을 자라게 하며”를 성도가 받은 구원을 성화시켜 가야한다거나, 성도의 믿음이 보다 성숙하게 자라가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설명해 나가는 것은 이 문구의 본질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단지 문자적으로 구원이나 믿음을 적용해 나가는데 따른 곡해입니다. 참 많죠. 이런 경우가.....
님이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먼저는 문자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문자가 기록된 내용과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지닌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내용과 이것의 의미를 마음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는 문자가 사용된 본문의 의미를 문장과 문맥 속에서 잘 파악하여 그 내용과 의미를 보아야 하며, 상징적으로 사용한 문자의 경우가 나오면 대개의 경우는 그 문자가 사용된 본문 속에서 그것이 지니고 있는 뜻을 해석하여 설명해 주고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상징적으로 기록된 문자의 경우에서도 이것이 쓰이고 있는 내용과 그 의미를 본문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님이여.
님은 또한“(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보아선 안 되는 것으로 베리칩이 666이라는 세대주의 예를 들었으며, 알레고리 형식으로만 볼 때의 위험성에 대한 예도 들은 듯한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인가 목사님이 설명해 준 적도 있는데, 나이 탓인지 머리 탓인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보아선 안 되는 이유는 세대주의에 대해 좀 아는 바라 좀 알겠는데, 알레고리 형식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알길 원합니다.”라고 하여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알고자 하셨습니다.
알레고리적(Allegorical)인 해석은“성경을 우의적(寓意的), 우화적(寓話的), 풍유적(諷喩的), 비유적(比喩的)으로 해석하는 것”을 이름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 이면에는 이것의 진정한 의미인 영적인 의미가 숨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찾는 것이 영적인 해석이며, 이 영적인 해석의 의미를 담아서 설명하는 것이 설교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영해(靈解)라고 말합니다. 희랍의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나 중세 교부시대에서 알레고리적인 설교를 보게 됩니다. 희랍의 철학자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중세 교부시대에서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횡행한 것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대표자로 알려진 유대주의자인 필로(Philon, B.C. 20 or 30?-A.D. 45? or 54?)의 영향을 중세 시대의 교부들이 받은 때문인데, 클레멘트(Clement), 오리겐(Origen), 제롬(Jerom)을 비롯하여 어거스틴(Augustin)도 알레고리적인 해석, 곧 우화주의적 해석을 취했습니다.
성경에서 적지 않은 곳이 비유가 사용되었습니다만, 성경에서의 비유는 이 비유에 영적인 숨은 의미를 담고서 설교자가 그 의미를 찾아 해석하고 설명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의 비유는 그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해 줌으로써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비유가 말씀되고 있는 본문에는 그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는 의도가 은닉되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나타나 있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늘의 뜻이 감추어진 자에게는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에 있으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에 있고 마음이 완악하여 깨달음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나 알 수 없는 것이 비유를 들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소위‘영적인 해석’, 그러니까“영적으로 해석한다”며, 설교자가 임의적으로 뜻을 해석하여 상징적인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설교자가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해 나가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작금의 교회에 이르러서도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은 더욱 횡행할 뿐이지 그 기세가 사그러들지 않습니다. 가령, 님이 예를 든 것에서 보는 것처럼 666을 과거에는 로마교황이라고 했다가 바코드라고 했고 이제는 베리칩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666이란 숫자의 문자가 사용된 본문에서의 문자적인 해석도 아니며 상징적인 해석도 아닌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임의적으로 영해하는 전형적인 알레고리적인 해석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의 소위‘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주막을 교회라고 해석하며, 상처를 소독하는 것에 사용한 포도주를 예수님이 흘리실 보혈이라고 해석한다거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것을 예수님의 재림을 약속한 것이라거나 하는 모두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에서 알게 해주시려고 하는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임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교훈적 가르침을 삼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해석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에 의한 영적인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잘못됨에 아무런 의식이 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경(원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한다면서도 구약에 나오는 것을 신약에 적용, 연결하면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가령,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내는 말로 그 본문에서‘집’,‘산’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곳이 있는데, 이를 신약에서 예수님이 방문한 ‘집’을 성전이라고 해석하거나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한 장소인 산도 실제는 성전이었다고 하거나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공중에 나는 새’의 경우도 진짜 새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며, 예수께서 비유를 드신 또 하나인‘양 우리 문’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단편적으로 예를 들어서 그렇지, 이러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의한 설교를 듣는 사람은 매우 흥미 있어 하며, 재미있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마치 성경적으로 잘 해석하는 것인양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이요 설교일 따름입니다.
성경을 임의적이요 자의적으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에서 임의적이요 자의적으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할 곳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며 해석하는 사람에 의해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해석자(설교자)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관점에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뜻이 지닌 의미를 지니는 내용에서입니다.
몇 가지를 들어서 알레고리적인 해석과 설교가 잘못된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만, 님의 이해를 돕는데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는지는 저는 알지 못합니다. 혹, 이 답글을 통해서도 여전히 의문이 남으며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하여 다시 질문해 주시면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 잘 설명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이곳은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은 주일입니다. 주 안에서 함께 할 믿음의 형제들....한 주간 믿음 안에서 살아온 분들인데, 주의 성도들을 어떤 모습에 의해서 보게 될지....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실만으로도 기다려집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된 몸으로 있는 것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님이 계신 곳도 내일이 주일인지요. 주 안에서 성령을 통해 갖는 복음의 진리와 함께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목사님 어제 전화 고맙습니다. 성경 말씀의 해석에 대한 것이 많이 선명해졌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가 그 알레고리라는 단어에 부딪쳐, 혹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과 함께 '제게 말씀을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볼 수 있는 그 눈과 마음을 주세요'라는 기도와 함께 절실한 마음으로 드렸던 질문이라 목사님이 부연 설명해줌에 감사함이 참으로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