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 : 2025. 2.22(토)
◈ 곳 : 서울역사박물관(서울 종로)
◈ 참석 : 구로복지회관 역사반원 55명(참가비 ₩15,000)
◈ 해설 : 김남환 선생님
◈ 일정
- 09:50 서울 전철1호선 시청역 4번출구 앞에 집결하여 출석 체크 한 뒤
- 10:10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동하여 견학 시작(입장료 없음)
- 12:50 견학 종료하고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
- 13:00 종로구 나주소 나주곰탕 식당에서 점심식사(주최측 비용 부담)
- 14:00 탐방일정 종료하고 귀가
▼ 약속시간에 맞춰 모임장소로 나가 출석 체크를 한 뒤...
▼ 덕수궁 방향으로 이동하여...
▼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성당의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에 대해 강사님으로 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 예전에는 덕수궁에 속한 전각이었는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개인 사유재산이 되어 버렸다는 설명도...
▼ 예전에 부민관이 있던 곳있데 지금은 서울시 의회가...
☆ 부민관은 1935년 경성부가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에 세웠던 부립극장(府立劇場).
★ 부민관 폭탄 의거(1945. 7.24)
▼ 도로표시의 기준점이 되는 도로원표는 1914년에 설치되었다고 ...
▼ 개성 53, 평양까지 193km...
▼ 덕수궁 선원전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가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었다.《나무위키에서》
▼전차 381호.. 1930년경부터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시내를 운행하였다고...
▼ 흥선대원군의 계보상 조부 은신군(사도세자의 서자로 정조대왕의 이복동생)의 신도비
▼ 종루 주춧돌
《종루는 태종13년(1413년) 종로 네거리에 세워졌다.
세종22년(1440년)에 개조하여 동서5칸, 남북 4칸의 규모를 갖춘 후 몇차례의 이동 및 화재와 중건이 있었으며, 고종32년(1895년) 이후 보신각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전시된 유물은 1972년 지하철 공사도중 발견된 종루 주춧돌 11점으로 그 크기로 보아 조선 전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 이제 서울역사박물관 안으로...
《서울역사박물관은 유서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서울의 대표적 문화중심이 되고자 설립하였다》
▼ 용상에도 앉자 보고...
▼ 성재집 간행 목판(성재집은 조선후기 문신·학자 허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03년에 간행한 시문집)
▼ 성재집의 간행 과정과 비용
《문집간행은 오랜 기간과 막대한 비용이 들어 가는 대규모 사업이다. 1891년에 간행된 허재(1797~1886)의 《성재집》은 문집 서문의 기록과 지출내역장부로 세부내용을 알수 있다. 주요 간행과정과 비용을 소개한다.》
▼ 간행비용이 7,162냥으로 소 140마리에 상당한 금액이며 현재 시세로 8억4천만원 정도 된다고...
▼권율장군께서 김정랑에게 보낸 편지라는데 시력이 좋지 않아 읽을수가 없네요...
▼이의양이 그린 월하탄금도(달빛 아래서 가야금을 타고 있는 노인과 이를 들으며 차를 끓이고 있는 동자)
▼ 주단 색동 저고리...
▼ 졸업증서...
▼ 88올림픽 호돌이 마스코트...
▼ 태평성대의 시대...
▼ 탕평의 시대, 태평의 시대
《우리는 18세기 조선을 탕평의 시대이자 태평의 시대로 기억합니다. 탕평과 태평이라는 단어에는 마치 짝을 이룬 듯한 운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두 단어에는 그 뜻이 맞닿아 있습니다. 탕평은 유교 경전 ≪서경≫에서 비롯된 말로, 임금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할때 임금의 도가 넓고 평탄해져 백성과 나라가 평안해 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조(재위 1724~1776)가 즉위한 18세기 초반의 현실은 탕평과 태평 모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편을 나눠 옳고 그름을 다투던 붕당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마침내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영조는 이를 타개하고자 탕평을 내세워 당파간의 싸움을 멈추고 지혜로운 인재를 등용해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또한 탕평책을 계승하여 태평성대를 꿈꾸었습니다.》
▼ 글과 그림으로 이룬 태평성대
《정조는 글과 그림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입니다. 그는 글과 그림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이상을 드러내며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1792년 어느 날, 정조는 화원들에게 한양의 도시풍경을 그리게 하고 이렇게 완성된 ≪성시전도≫를 주제로 신하들에게 '성시전도 시'를 짓게 했습니다. 이글과 그림은 18세기 한양의 모습을 담아낼 뿐 아니라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평성대를 시각화하여 임금의 공덕을 기리고 앞으로도 태평성대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이상을 담아낸 것입니다. 정조의 바람처럼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은 태평성대로 기억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 지도로 읽는 18세기 서울...
▼ 김정호가 그린 서울
《고산자 김정호(1804?~1866?)는 조선 지도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조선의 지리학과 지도학을 집대성하며 ≪대동여지도≫와 같은 걸작을 남겼습니다. '대동여지도'가 널리 알려 졌지만 김정호는 이외에도 다양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습니다. 그의 전국 지도와 지리서에는 서울을 그린 도성도가 포함된 경우가 많습니다. 김정호는 목판본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도성도의 수요와 유행을 가늠케 합니다.》
▼ 김정호의 수선전도...
▼ 다남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한 병풍 그림
▼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여 널리 유행한 병풍 그림
《≪곽분양행락도≫는 당나라 장군 곽자의(697~781)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가족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곽자의는 안녹산의 난(755~763)을 평정한 공로로 분양왕에 봉해져 '곽분양'으로 불렸고, 당대 최고의 공신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는 아들 8명과 사위 7명을 두었으며 자손들 모두 조정에서 중책을 맡아 세속적 성공을 이어 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곽자의가 후손들과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담은 병풍 그림은 왕실 가례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길상과 기복의 상징으로 여겨져 광통교 그림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 역사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하면서...
▼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하여...
▼ 나주곰탕과 동동주를 곁들여 든든하게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 오늘도 여러 역사적 사실에 대해 열정적으로 해설해 주신 김남환 강사님과
많은 인원이 참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질없이 행사진행에 애를 쓰신 전종철 반장님께
다시한번 감사하다는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