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술은 기호식품이다.
그러니 즐겨 먹는 사람이 많다.
그 즐겨 먹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나다.
성인이 되면서 술을 마주했으니 벌써 반세기를 맞이하나 보다.
젊은 날은 주로 직장동료들과 모임에서 술잔이 오가고, 차츰 여유가 생겨나면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연인과도 마시는 등 술자리의 다양성이 생겨난 듯하다.
신기한 것은 아직도 술맛을 잘 모른다.
사람들은 막걸리를 먹으면서 이 술은 맛있다는 표현을 하고, 소주를 마시면서 이 상표는 목 넘김이 부드럽다는 등의 표현으로 술맛을 표시하지만, 반세기 동안을 먹어온 술인데 아직도 술맛을 어떻다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분위기로 술을 마신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혼술 생각이 난적도 한 번도 없다.
애주가는 혼자서도 잘 먹는다고 하던데 어쩐 일인지 혼자 있을 때 술 생각은 전혀 나지 않고 누군가 함께 했을 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상대가 먹자고 제안하니 마시는 게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술 문화다.
그러니 모임이 아닌 경우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된다는 표현이 맞다.
모임은 대부분이 저녁에 이루어지니 술은 당연히 저녁에 회삿일이 끝난 뒤 친구든 직장동료든 연인이든 만나 즐기는 식품이지 사실 낮술을 먹을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퇴직하고 흔히 말하는 백수 생활을 하면서 문화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낮술이 주고 밤에 거의 약속을 잡지 않는다.
연유는 그렇다.
주말에 테니스모임에서 늘 경기를 한다.
아침 일찍부터 만나 게임을 하고 아침 겸 점심을 하면서 생겨난 문화가 낮술이다.
차를 몰고 온 사람은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차를 두고 온 회원끼리 한 두잔 하던 술이 차츰 그 양을 배가시켜 요즘은 알딸딸하도록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술이란 게 원래 그렇다.
처음 한잔은 쓰고 힘들지만 두잔 석잔 먹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서서히 마비가 오고 그다음엔 술이 술을 마시고 시간이 지나면 술이 인간을 잠식한다.
술이 인간을 잠식한 이후가 늘 문제다.
이미 술이 인간을 잠식했으니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이 술기운에 휩쓸려 먹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자게 되는데 이게 상당한 후유증을 유발한다.
낮술을 먹었으니 당연히 해 질 녘이면 고주망태가 되어 잠이 들어 내일 아침까지 무사히 잠을 자면 다행인데 꼭 자정쯤 되면 술이 깨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그 이후가 문제다.
술에 취해 잤지만 이미 필요한 만큼 잠을 충분히 잤으니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함께 사는 부인한테 놀자고 할 수도 없고 혹여 심기를 건드려 불편하여 화라도 내면 미안하니까 쥐죽은 듯이 지내는데 이게 정말 고역이라는 얘기다.
낮술은 백수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러니 주말이면 언제나 한잔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고 먹다 보면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취해 후회가 자정이면 밀려온다는 사실을 엄연히 알면서도 술에 잠식당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밤새 잠 못 이루는 하얀 밤을 지새우고 나면 늘 후회한다.
괜히 많이 마셔 오늘 일과마저 지장이 있다고 후회하면서도 늘 같은 경험을 하는 그것 보면 때론 서글프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함께 사는 늙은 아내도 걱정스럽게 말한다.
죽으려고 그렇게 대책 없이 먹냐며 이해 불가라는 표정이다.
예전부터 있는 얘기 중에 낮술에 취하면 제 아비도 몰라본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낮술이 위험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취하는 속도가 빠르니 스스로 억제할 수 있는 기능이 빨리 마비되어 폭음할 위험성이 존재한단는 얘긴데도 멍청하게 낮술을 즐기고 있으니 때론 스스로 멍청해 보여 허허로운 웃음을 짓게 된다.
아내와 약속을 했다.
밤낮을 가지지 않고 소주 한 병 이상은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아내는 손가락 걸면서 빙그레 웃고 있다.
아마 몰라도 그게 쉽게 되겠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중 임을 안다.
술맛도 사실 모르면서 분위기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는 술이 나에게 주는 해독은 사실 많다.
제일 싫은 게 낮술에 취하는 날엔 밤잠을 못 자 뒷날 하루를 망가트린다는 것이다.
토요일에 낮술을 하면 일요일 경기는 완전히 망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연습경기고 건강을 위한 취미생활이니 승패와 관련이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실력 발휘가 안 되고 엉망이면 당연히 기분을 잡치기 때문에 싫다.
그래서 아내와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는 너그러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약속을 함으로써 부담과 의무감을 부여하여 성공에 이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밝은 날 마시는 술맛은 좋긴 하나 보다.
함께 하는 이들도 거부하거나 자제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경우가 일반화되었으니 상당히 매력이 존재함은 인정해야겠다.
어두운 밤 술을 마시는 그것과 차이는 시간이 무진장 길어 여유로워 많은 양을 취하기 때문이겠지만 우선은 동호인이라 같은 운동을 하고 늘 보는 편안함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일이란 온전한 하루를 위해, 늙어가는 내 건강을 위해서 낮술이건 밤술이건 양을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술은 좋은 음식이다.
먹으면 늘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러나 과하면 결국은 건강을 해치고 뒷날 일정을 망가트리니 새로운 음주문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맛있다.
단 세 마디 단어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기엔 후회가 많아 나는 오늘 이후 그 달콤한 유혹에서 탈피하겠노라 다짐한다.
완전 절주가 현명하지만 그럴 수는 없고 적당히 마시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