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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계보[王氏]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구려[高麗]의 대족(大族)이다. 고씨(高氏)의 정치가 쇠퇴하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王建)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왕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註 001 3년(932)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하고 〈후당〉 명종(明宗)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했다. 이에 왕건에게 현도주도독(玄菟州都督)을註 002 제수(除授)하고 충대의군사(充大義軍使)에 임명하고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봉하였다.
註 003
진(晉) 개운(開運)註 004 2년(945)에 왕건이 죽고 아들 혜종[王武]이 즉위하였다.
註 005
후한(後漢) 건우(乾祐)註 006 말년에 혜종[王武]이 죽고 아들 광종[王昭]이 즉위하였다.
註 007 송[皇朝] 건륭(建隆)註 008 3년(962)에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등극(登極)하여 만국(萬國)을 차지했을 때 광종[昭]이 사신을 보내 조회했으므로, 공신(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식읍(食邑)을 더하여 주었다.
註 009
개보(開寶)
註 010 9년(975)에 광종[王昭]이 죽고 아들 경종[王伷]이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봉작(封爵)을 청하므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고, 태종황제(太宗皇帝)
註 011가 즉위하자 대순군사(大順軍使)로 고쳐 봉하였다.
註 012
태평흥국(太平興國)
註 013 7년(982)에 경종[王伷]이 죽으니, 아우 성종[王治]이 글을 올려 봉작(封爵) 계승을 원하므로 조칙(詔勅)으로 허락하였다.
註 014 순화(淳化)
註 015 6년(995) 거란(契丹)의 공격을 받자 겁 많고 나약한 성종은 지키지 못하고 신하의 예로 거란[北虜]을 섬기면서 드디어 〈송에〉 조공(朝貢)하지 않았다.
註 016 성종[王治]이 죽고 아우
註 017 목종[王誦]이 즉위하였다. 함평(咸平)
註 018 3년(1000)에 고려 사신 주인소(朱仁紹)가 조회하러 들어와 “고려 사람들이 황제의 덕화(德化)를 사모하나, 거란에게 핍박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를 가상히 여겨 조정에서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격려[褒諭]하였다.
註 019 대중상부(大中祥符)
註 020 7년(1014)에 목종[王誦]이 죽고 아우
註 021 현종[王詢]이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거란을 크게 무찌르고 다시 조공(朝貢)을 바쳤다.
註 022 또 존호(尊號)의 하사와 정삭(正朔)의 반포, 더 나아가 책봉[封冊]을 요청하였다. 진종황제(眞宗皇帝)가
註 023 처음에는 그대로 따르려 하다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난색을 표하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조서만을 반포하였다. 천성(天聖)
註 024 연간에 고려 사신이 여러 번 여진(女眞)과 함께 와서 토산물[方物]을 조공하므로, 천자가 은혜를 내려 답례[報禮]를 특별히 두텁게 하였다. 그 후, 현종[王詢]이 죽고 아들 덕종[王隆]이 즉위했는데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거란을 두려워했다. 드디어 다시 거란을 섬기면서부터 또 〈송에〉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註 025 덕종[王隆]이 죽으니, 정종(正宗)이라고 사시(私諡)하였다.
註 026 아들 덕종[德王] 왕흠(王欽)과 덕종의 아우 정종[穆王] 왕형(王亨) 때에는 조공이 끊기니 또한 송(宋) 조정에서도 사신 파견을 폐지했다.
註 027 정종[王亨]의 아우 문종[王徽]은 희령(熙寧)
註 028 4년(1071)에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조공을 회복했다.
註 029 희령 7년(1074)과 〈희령〉 9년(1076)에도 사신이 연이어 왔다.
註 030 신종황제(神宗皇帝)
註 031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원풍(元豊)
註 032 원년(1078)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안도(安燾)를 국신사(國信使)로
註 033 삼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먼 바다[絶洋]를 건너 고려로 보냈다. 이 때 문종[王徽]은 중풍[風痺]을 앓아 겨우 예식[拜命]을 치를 정도였다.
註 034 이에 의약(醫藥)을 청하므로 폐하께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원풍 3년(1080)과 4년(1081)에도 계속 사신을 보내와 조회했다
註 035. 원풍 6년(1083)에 문종[王徽]이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 무릇 38년이었고 시호를 문종[文]이라 했다. 세자(世子) 왕훈(王勳, 順宗)은 즉위한 지 백일만에 죽고 아우 국원공(國原公) 왕운(王運, 宣宗)이 즉위했다. 이때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양경략(楊景略)을 제전사(祭奠使)로, 예빈사(禮賓使) 왕순봉(王舜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전협(錢勰)을 조위사(弔慰使)로, 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
註 036 송구[朱球]를
註 037 부사로 임명하여, 7년(1084) 7월에 밀수(密水) 판교(板橋)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게 했다.註 038 원풍 8년(1085)에 철종황제(哲宗皇帝)
註 039가 즉위하니 사신을 보내와 조의를 바치고 또한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도 보내왔다.
註 040 선종[王運]이 즉위한지 4년 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종[宣]이라고 했다.
註 041 아들 헌종[堯]은註 042 즉위한 지 1년도 못되어 병으로 폐위(廢位)되니, 고려 사람[國人]들이 그의 숙부(叔父) 숙종[王熙]에게 섭정(攝政)하기를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요가 죽으니, 시호를 헌종[懷]이라고 했다.
註 043 숙종[王熙]이 곧 왕위를 계승하여, 원우(元祐)
註 044 5년(1090)에서 원부(元符)
註 045 원년(1098)까지 조공 사절이 두 번이나 왔다.
註 046 그래서 원부 3년(1100)에 보답하고 위무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은 원풍조례[元豊故事]에 따른 것이다.
註 047 황제(皇帝)가 왕위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이루고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사해[海隅]의 안팎에서 그의 신하가 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덕이 천하[藩服]에 덮이고 은혜가 사해[海隅]에까지 퍼졌다. 그리하여 숭녕 원년(1102)에 호부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栻)에게
註 048 부절(符節)을 가지고 사신으로 가게 명하여, 예물(禮物)을 풍성하게 하고 은덕[恩綸]을 환히 비추게 하였다.
註 049 이는 고려에 은혜를 더 베풀어 포상하고 위무[鎭撫]함으로써 신종[神考]
註 050의 뜻을 계승하여 더욱 크고 융성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숭녕 2년(1103) 5월에 명주도(明州道) 매잠(梅岑)에서
註 051 먼 바다[絶洋]를 건너갔는데, 이때 숙종[王熙]이 거란(契丹) 왕의 이름을 피하여 희(熙)를 고쳐 옹(顒)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종[神考] 때부터 힘써 먼 나라 사람들을 오도록 하고, 하늘이 슬기로운 계책을 도와주므로 인해, 고려 문종[王徽]이 봉작(封爵)을 계승하고 그 뜻을 이어 받드니, 아마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문종[王徽]은 충순(忠順)하여 사리를 따르며 중국을 높일 줄 알고 사신을 대접하는 예와 뜻이 두터웠고 상인들을 만날 때도 역시 체모(體貌)가 있었다. 정치에서도 인자함[仁恕]을 숭상하였으니 나라를 오랫동안 다스린 것이 마땅하다. 숭녕(崇寧)
註 052 2년(1103)에 숙종[王顒]이 죽으니 나이 50세였다.
註 053 〈이어〉 세자였던 왕오(王俁, 睿宗)가 즉위했다. 장흥(長興)
註 054 3년(932) 임진(壬辰)으로부터 현재 선화(宣和)
註 055 6년(1124) 갑진(甲辰)에 이르기까지 왕씨가 나라를 차지한 지 9대이다. 〈그 사이에〉 모두 17명의 왕이 도합 193년을 다스렸다.
註 056
註) 001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年號)로 930~933년이다.
註) 002
사고전서본의 ‘玄’이 옳아 ‘玄菟州都督’이라고 하였다.
註) 003
태조(太祖) 15년(932)에 고려가 후당(後唐)에 대상(大相) 왕중유(王仲儒)를 파견하였고, 다음해(933) 봄 3월에 후당(後唐)에서는 태복경(太僕卿) 왕경(王瓊)과 대부소경겸통사사인(大府少卿兼通事舍人) 양소업(楊昭業) 등을 보내와 태조(太祖)를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봉하였다(『高麗史』 卷2 世家2 太祖 15·16年).
註) 004
후진(後晋) 출제(出帝)의 연호(年號)로 944~946년이다.
註) 005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사망연도는 943년이며, 945년은 2대 혜종(惠宗)의 사망연도이다. 따라서 본문의 개운(開運) 2년은 오기이다.
註) 006
후한(後漢) 은제(隱帝)의 연호(年號)로 948~950년이다.
註) 007
2대 혜종(惠宗)의 사망은 945년이며, 3대 정종(定宗)의 재위기간은 4년(946~949)이다. 또한 4대 광종(光宗)은 혜종(惠宗)의 아들이 아니라 아우이다. 본문에서 광종(光宗)의 즉위 시점에 대한 서술은 옳다. 그러나 3대 정종(定宗) 및 그의 재위기간이 빠져 있고, 또한 광종(光宗)이 혜종(惠宗)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은 명백한 오류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기는 『신오대사(新五代史)』 등 중국의 기록 모두에서 나타난다.
註) 008
송(宋) 태조(太祖)의 연호(年號)로 960~963년이다.
註) 009
송의 건국 다음 해인 광종(光宗) 12년(961)에 송은 광종에게 의대안마(衣帶鞍馬)와 함께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현도주도독 충대의군사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玄菟州都督 充大義軍使 高麗國王)이라는 칭호를 준 것으로 보인다(『玉海』 卷154 ; 『宋史』 卷487 高麗). 광종(光宗) 13년에 고려는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高麗史』 卷2 ; 『高麗史節要』 卷2 ). 광종(光宗) 14년에 송은 광종에게 추성순화 보의공신(推誠順化 保義功臣)을 추가하였다(『宋史』 卷487 高麗).
註) 010
송(宋) 태조(太祖)의 연호(年號)로 968~976년이다.
註) 011
송(宋) 태조(太祖)를 말한다. 재위기간은 976~997년이다.
註) 012
경종(景宗) 원년(元年)(976) 겨울 11월에 송나라에서 좌사어부솔(左司禦副率) 우연초(于延超)와 사농시승(司農寺丞) 서소문(徐召文)을 보내 경종(景宗)을 광록대부 검교태부 사지절 현도주제군사 현도주도독 대순군사(光祿大夫 檢校太傅 使持節 玄菟州諸軍事 玄菟州都督 大順軍使)로 책봉했다(『高麗史』 卷2 世家2 景宗 元年).
註) 013
송(宋) 태종(太宗)의 연호(年號)로 976~983년이다.
註) 014
경종(景宗)이 사망한 것은 성종(成宗) 즉위년(卽位年)(981) 7월이었다. 고려는 성종(成宗) 원년(元年)(982)에 송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의 사신이 도착한 것은 9월이다. 송은 11월에 책봉사를 고려에 보냈고, 이들이 고려에 도착한 것은 성종 2년(983) 3월이다(『高麗史』 卷3 成宗 元年 -2年 ; 『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 『續資治通鑑長編』 卷23 太宗 太平興國 7年).
註) 015
송(宋) 태종(太宗)의 연호(年號)로 990~994년이다.
註) 016
거란(契丹)의 침입은 성종(成宗) 12년(993) 8월이며, 윤10월 서희(徐熙)의 화친으로 거란은 돌아갔다. 다음해(994) 6월 고려는 송나라에 원욱(元郁)을 파견하여 구원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에서 “북방 국경이 겨우 편안해졌으니 경솔하게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옴에 따라 이때부터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었다(『高麗史』 卷3 世家3 成宗 12 –13年).
註) 017
7대 목종(穆宗)은 5대 경종(景宗)의 장자이므로 6대 성종(成宗)에게는 조카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문의 ‘弟’는 착오이다.
註) 018
송(宋) 진종(眞宗)의 연호(年號)로 998~1003년이다.
註) 019
고려(高麗)는 목종(穆宗) 2년(999)에 이부시랑(吏部侍郞) 주인소(朱仁紹)를 송(宋)에 사신으로 보냈다(『高麗史』 卷3 世家3 穆宗 2年). 주인소(朱仁紹)가 송에 도착한 것은 함평(咸平) 3년(1000)이었다(『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 『續資治通鑑長編』 卷47 眞宗 咸平 3年).
註) 020
송(宋) 진종(眞宗)의 연호(年號)로 1008~1016년이다.
註) 021
8대 현종(顯宗)은 7대 목종(穆宗)의 숙부(叔父)이다. 따라서 본문의 ‘弟’는 ‘叔’의 착오이다.
註) 022
현종(顯宗)이 즉위한 때는 1009년이다. 고려가 송(宋)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현종 5년(1014)이다(『高麗史』 卷4 世家4 顯宗 5年). 현종 7년(1016)에 송에 청병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으나 송과의 교류는 계속했다. 이후 고려는 현종 10년(1019)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다음 송에 사신을 파견했다(『高麗史』 卷4 世家4 顯宗 7-10年). 이 기사는 송과의 교류시작과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것을 함께 표현한 것이다.
註) 023
송(宋) 황제로, 재위기간은 997~1022년이다.
註) 024
송(宋) 인종(仁宗)의 연호(年號)로 1023~1031년이다.
註) 025
8대 현종(顯宗)의 아들로 즉위한 9대 덕종(德宗)은 이름이 ‘흠(欽)’이다. 본문의 ‘隆’은 고려 태조 왕건의 부친인 용건(龍建)의 이름으로 서긍의 착오로 보인다. 이와 같은 착오는 여타 중국 문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앞서 정종(定宗)이 세차(世次)에서 빠져 착오가 발생하여 이를 맞추기 위해 가상으로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종 21년(1030) 어사민관시랑(御事民官侍郞) 원영(元穎)을 파견한 이후 송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續資治通鑑長編』 卷109 仁宗 天聖 8年).
註) 026
사시(私諡)는 친지나 제자들이 지어 주는 시호를 말한다. 지위가 낮아 임금에게 시호를 받지 못한 덕망 높은 선비들에게 주위의 사람들이 주는 시호이다. 여기서는 송(宋)과의 국교 단절이후 고려왕이 송의 시호를 받지 않았기에 송 입장에서 ‘사시(私諡)’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에 나타난 ‘정종(正宗)’ 이라는 시호는 『고려사(高麗史)』에는 없다. 중국의 기록에 3대 정종(定宗)의 세차(世次)가 빠져있어 세차(世次)가 맞지 않자, ‘정종(正宗)’을 현종(顯宗)과 덕종(德宗) 사이에 포함하여 세차(世次)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註) 027
목왕(穆王)은 정종(靖王)의 오기(誤記)이다. 목왕(穆王)을 목종(穆宗)으로 본다면 이는 고려 7대 임금으로 이름은 송(誦)이다. 하지만 앞서 목종 송(誦)이 언급되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목왕(穆王)’은 정종(靖宗) ‘형(亨)’이므로 바르게 고치면 ‘정왕(靖王)’이라 해야 한다. 송(宋)은 정종(靖宗) 때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고려는 정종(靖宗) 2년(1036)에 진봉 겸고주사 상서우승(進奉 兼告奏使 尙書右丞) 김원충(金元沖)을 송으로 보내려했으나 도중에 배가 파손되어 결국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高麗史』 卷6 世家6 靖宗 2年).
註) 028
송(宋) 신종(神宗)의 연호(年號)로 1068~1077년이다.
註) 029
문종(文宗) 25년(1071) 3월에 민관시랑(民官侍郞) 김제(金悌) 등을 송(宋)에 파견했다(『高麗史』 卷8 世家8 文宗 25年). 송(宋)은 고려의 사신에 대해 매우 환대했는데, 사신이 해문현(海門縣)에 도착하자마자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 육경(陸經)을 가지제고관반(假知制誥館伴)으로 삼아 맞이했다. 사신의 대우를 당시 거란(契丹)과 함께 중국을 압박한 서하(西夏)와 동급으로 했고, 고려에 보낼 답서의 기초를 작성할 때 지제고(知制誥) 왕익유(王益柔)의 문장이 정교하지 않다는 이유로 파직할 정도였다(『續資治通鑑長編』 卷223·226·227 神宗 熙寧 4年).
註) 030
문종(文宗) 27년(1073) 8월에 태복경(太僕卿) 김양감(金良鑑)과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을 사신으로 보냈다(『高麗史』 卷9 世家9 文宗 27年). 이들은 10월에 중국에 도착했는데 등주(登州)가 아니라 명주(明州)를 통해 입국했다. 사신(使臣)의 입국지가 바뀌면 객사(客舍)·사행로(使行路) 등이 바뀌어야 했기 때문에 김양감(金良鑑) 등은 다음해 정월(正月)에야 표를 올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본문과 같이 희녕(熙寧) 7년(1074)으로 기록된 것이다(『續資治通鑑長編』 卷247 神宗 熙寧 6年 10月). 문종 30년(1076)의 사행은 8월에 공부시랑(工部侍郞) 최사량(崔思諒)이 출발했고, 10월에 도착하여 표를 올릴 수 있었다(『高麗史』 卷9 世家9 文宗 30年 ; 『續資治通鑑長編』 卷278 神宗 熙寧 9年 10月).
註) 031
송(宋) 황제로, 재위기간은 1067~1085년이다.
註) 032
송(宋) 신종(神宗)의 연호(年號)로 1078~1085년이다.
註) 033
국신(國信)이란 양국(兩國)의 통사(通使) 사이에 증빙(證憑)의 문서부절(文書符節)이나 국가(國家) 간에 보내는 예물(禮物)을 뜻한다. 이러한 임무를 띤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라 한다.
註) 034
송(宋)이 고려와의 국교회복에 이처럼 신경을 쓴 까닭은 1004년에 거란과 맺은 ‘단연(澶淵)의 맹(盟)’ 때문이었다. 송은 왕안석(王安石)이 물러난 원풍(元豐) 연간(年間)에 들어서면서 고려와의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위해 2척의 ‘신주(神舟)’까지 건조하는 등 고려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註) 035
고려(高麗)는 문종(文宗) 34년(1080)에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과 예부시랑(禮部侍郞) 박인량(朴寅亮)을, 35년(1081)에 예부상서(禮部尙書) 최사제(崔思齊)와 이부시랑(吏部侍郞) 이자위(李子威)를 보냈다(『高麗史』 卷9 世家9 文宗 34·35年).
註) 036
관청명을 고려할 때 지부족재본의 ‘閤’이 옳아 역주문에도 ‘西上閤門副使’로 풀이하였다.
註) 037
본문의 주구(朱球)는 송구(宋球)이다(『高麗史』 卷10 世家10, 宣宗 元年 8月 ; 『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註) 038
송(宋)은 문종(文宗)의 부고(訃告)를 통보받은 즉시 조위사(弔慰使)를 파견하려 했으나, 사신(使臣)의 편성에 문제가 생겨 지체되었고 계절풍(季節風)·조류(潮流) 때문에 출발 항구를 명주(明州)에서 밀주(密州)로 바꾸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출발이 지체되었다(『續資治通鑑長編』 卷339 元豐 6年 9月 ; 『續資治通鑑長編』 卷341 元豐 6年 11月).
註) 039
송(宋) 황제로, 재위기간은 1085~1100년이다.
註) 040
고려(高麗)는 선종(宣宗) 2년(1085) 3월에 송(宋) 신종(神宗)의 부고를 전달받았고, 8월에 조위사(弔慰使)로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상기(金上琦)와 예부시랑(禮部侍郞) 최사문(崔思文)을 하등보위사(賀登寶位使)로 공부상서(工部尙書) 임개(林槩)와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자인(李資仁)을 보냈다(『高麗史』 卷10 世家10 宣宗 2年).
註) 041
13대 선종(宣宗)의 재위기간은 1083년 10월부터 1094년 5월까지 10년 7개월이다. 따라서 본문의 재위 4년은 서긍의 착오이다.
註) 042
선종(宣宗)의 장자로 즉위한 14대 헌종(獻宗)의 이름은 ‘욱(昱)’이다. 본문의 요(堯)는 3대 정종(定宗)의 이름으로 서긍의 착오이다.
註) 043
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懷)’가 아니라 ‘헌(獻)’이 맞다. 이상과 같은 착오는 『송사(宋史)』에도 보인다. “왕 운(運)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고 아들 회왕(懷王) 요(堯)가 뒤를 이었다(運立四年卒, 子懷王堯嗣. : 『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註) 044
송(宋) 철종(哲宗)의 연호(年號)로 1086~1094년이다.
註) 045
송(宋) 철종(哲宗)의 연호(年號)로 1098~1100년이다.
註) 046
선종(宣宗) 7년(1090)에 호부상서(戶部尙書) 이자의(李資義)와 예부시랑(禮部侍郞) 위계정(魏繼廷)을 보냈다는 내용(『高麗史』 卷10 世家10 宣宗 7年 ; 『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元祐 5年)과 병부상서(兵部尙書) 황종각(黃宗慤)과 공부시랑(工部侍郞) 유신(柳伸)을 보냈다는 내용(『高麗史』 卷10 世家10 宣宗 10年 ; 『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元祐 7年)을 말한다. 당시 송(宋)은 고려와의 교류에 비판적인 소철(蘇轍)·소식(蘇軾) 등 구법당(舊法黨)이 정권을 장악하고 원우령(元祐令)을 내려 사신의 왕래를 제한했다. 원부(元符) 원년(元年)(1098)에 고려조공(高麗朝貢)에 관한 원풍조례(元豐條例)를 복원하면서 교류가 다시 활성화되었다(『宋會要輯稿』 199冊 蕃夷7).
註) 047
고려(高麗)는 숙종(肅宗) 5년(1100)에 조위사(弔慰使)로 상서(尙書) 임의(任懿)와 시랑(侍郞) 백가신(白可臣)을, 하등극사(賀登極使)로 상서(尙書) 왕하(王嘏)와 시랑(侍郞) 오연총(吳延寵)을 보냈다(『高麗史』 卷11 世家11 肅宗 5年). 이는 원부(元符) 원년의 원풍조례(元豐條例)에 따른 것이다.
註) 048
사고전서본과 지부족재본에는 ‘吳拭’이라 되어 있으며, 『고려사(高麗史)』 권(卷)12 숙종(肅宗) 8년(年) 6월(月)에도 ‘吳拭’이라고 되어 있다.
註) 049
송(宋)의 국신사(國信使) 호부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拭)은 숙종(肅宗) 8년(1103)에 고려에 도착한다(『高麗史』 卷12 世家12 肅宗 8年).
註) 050
거란 때문에 중단된 고려와 송의 교류는 고려 문종(文宗)과 송 신종(神宗) 때 비로소 재개되었다. 고려가 사절을 파견하였고(1071, 1074, 1076) 이에 송나라 신종이 원풍(元豐) 원년(1078) 때 사절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서긍은 이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서술하고 있다.
註) 051
매잠(梅岑)은 매령(梅岺)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도경』 권34 매잠(梅岑)에 설명이 있다.
註) 052
송(宋) 휘종(徽宗)의 연호(年號)로 1102~1106년이다.
註) 053
숙종(肅宗)은 문종(文宗) 8년(1054)에 태어나 1105년에 죽었다. 숙종의 사망연도는 숭녕(崇寧) 4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52세이다. 본문의 숭녕(崇寧) 2년과 50세는 서긍의 착오이다. 『송사(宋史)』 역시 숭녕(崇寧) 2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宋史』 卷487 列傳246 高麗 崇寧 2年).
註) 054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年號)로 930~933년이다.
註) 055
송(宋) 휘종(徽宗)의 연호(年號)로 1119~1125년이다.
註) 056
17대는 왕건(王建)의 부(父)인 龍建(용건)[융(隆)]을 포함한 숫자이다. 서긍은 용건과 정종(定宗)을 결락했다. 대신 용건(龍建)의 이름인 융(隆)을 현종(顯宗)과 덕종(德宗) 사이에 넣고 정종(正宗)이라 했고, 정종(定宗)의 이름인 요(堯)를 헌종(獻宗)으로 대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