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명량대첩지 어룩비)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이
서남해 제해권과 호남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은 임진왜란 발발 후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던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육로병진 전략을 막음으로써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남해의 제해권으로 호남의 곡창을 보호하여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고, 육로보다는 효과적인 기동력을 확보할수
있는 수로를 통한 진격을 막고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의병이 봉기하고, 조ㆍ명 연합군이 반격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중에서
명량해전만큼 극적인 경우가 없었다. 1597년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왜 수군에 대패하여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을 금하고
육전에 주력하도록 명할 정도로 위용을 떨치던 조선 수군의
전함은 칠천량 해전에서 거의 파괴되고 살아남은 수군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후 제해권을 장악한 왜군은 여세를
몰아 서해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파직 끝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이 수습한 세력은 전선 12척과 군사 120여명이었다.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재건의 교지를 내렸지만 잔존
수군세력으로는 왜 수군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해상에서 버틸 수 없으면 육상으로 올라와 육전을
도와도 좋다는 명을 내렸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을 옮겨 해남 어란진,
진도 벽파진에서 진을 치다가 서해로 진격하는 왜 수군을
울돌목에서 맞아 일전을 치르게 된다.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나, 조류가 빠른 울돌목을
등지고 싸우는 것보다 울돌목에서 상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명랑해전 하루 전에 진영을
우수영으로 옮기게 된다.
1597년 9월 16일 아침 7시경 왜군은 전함 300여척을
이끌고 해남에서 목포방향으로 흐르는 북서조류를 타고
울돌목을 향해 오고 있었다.
10배가 넘는 왜군 전선에 겁을 먹고 동요하는 군사들에게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고 하며 선두에서 독전하였다.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시작된 전투는 조선 수군이
고군분투한 끝에 조류가 목포에서 해남쪽 남동류로
바뀌면서 왜군 진영으로 빠른 물살이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왜선 31척을 격파하였다.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지휘관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살신성인의 솔선수범의
자세와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탁월한 지략, 죽기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임전무퇴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올해로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지 412주년이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왜 수군의 서진을 막지 못하고 호남의 바다를
왜군에게 내주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그때 벌써
다했을지 모른다.
400여넌이 지난 오늘에도 울돌목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그날의 함성을 묻고 거친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첫댓글 중요한 사료 잘 읽고 마음에 새기고 떠납니다.감사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자료를 사전에 보게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덕분에 역사및 지리 공부를 하였습니다.
진도의 명량대전이 있었던 울둘목을 가 본적이 았는데 조류가 센 시간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마치 내륙의 홍수가 막 진행되고 있는 것 처럼 물살의 흐름의 속도와 소리가 대단하였습니다.
예전에 영도다리 밑도 물살이 세다고 하는데 비교가 되질를 않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