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몽염 편-제1회: 전장에서 붓을 발명하다
(사진설명: 몽염이 만든 붓)
만리장성의 축조자 몽염 장군
몽염(蒙恬)은 처음으로 장성을 쌓은 것은 아니지만 연(燕)과 조(趙), 진(秦) 등 각 나라들이 각자 축조한 장성을 하나로 연결하고 보수해 만리장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주인공이다.
몽염은 만리장성을 쌓아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았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순시를 위해 천 리가 넘는 도로 치도(馳道)를 건설해 관중(關中)과 북방(北方)의 경제문화 교류에 이바지했다.
군대를 거느리고 외적을 막고 국토를 확장한 몽염은 진나라의 유명한 장군이지만 문화적 자질도 높아 기존의 붓을 개량해 진필(秦筆)이라는 붓을 발명함으로 붓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만리장성을 완성한 장군 몽염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전장에서 붓을 발명하다
벌판은 망망하고 하늘에는 어두운 구름이 드리웠다. 저물어가는 태양을 뒤에 두고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와 처절한 함성이 하늘을 진동했다. 붉은 핏빛에 하늘도 물들고 끔찍한 아우성 소리에 대지가 전율했다.
장군 몽염의 지휘하는 진나라 군대의 전차가 앞장서서 길을 내고 그 뒤로 벌떼 같이 날아간 화살이 흉노 기병의 심장을 명중했다. 이어 진나라의 기마병과 보병이 그 뒤를 바싹 따라 나가며 칼을 휘두르자 흉악하기로 소문난 흉노족의 기마병들이 분분히 말에서 떨어지며 아우성을 쳤다. 혼비백산한 흉노족의 기마병이 황급히 도주하는 것을 본 몽염은 얼굴에 묻은 적군의 핏자국을 문지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내린 기린아’라 불리던 흉노족은 이 전쟁에서 패한 후 단숨에 7백 리를 철수해 사막 깊숙한 곳으로 도주했다. 그 뒤에 흉노족들은 몽염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질겁해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몽염은 그 전쟁을 통해 흉노족들에게 백 년 동안 점령당했던 하투(河套) 지역을 수복함으로써 북부 변강지역에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진나라 군대는 개선가를 높이 불렀다. 몽염이 전차에 서서 핏빛으로 물든 하늘가를 바라보고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니 아름다운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해서 저도 모르게 <시경ㆍ진풍ㆍ소융(詩經ㆍ秦風ㆍ小戎)>을 불렀다.
작은 병거 짐간은 낮은데(小戎俴收)
멍에 끌채 다섯 목 꾸미고(五楘梁輈)
고리의 고삐로 모는데(遊環䝱驅)
음판 끈에는 쇠고리 묶였고(陰靷鋈續)
범가죽 깔개 커다란 바퀴통(文茵暢轂)
내 이 준마는 얼마나 날렵한가(駕我騏馵)
우리 님을 생각하면(言念君子)
온화한 모습이 구슬 같으신데(溫其如玉)
누추한 병사에 계시니(在其板屋)
애틋한 마음 어지럽구나(亂我心曲)
몽염은 강건하고 용감하지만 생각은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책을 많이 읽은 선비의 풍모를 지닌 무장이었다. 그의 조상은 제(齊)나라 출신이었는데 그의 조부가 진소왕(秦昭王)을 찾아 진나라에 와서 지금에 이른다. 그의 조부 몽오(蒙驁)와 부친 몽무(蒙武)는 모두 진나라의 6개국 소탕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높은 벼슬과 많은 봉록을 받았으며 진시황제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
이런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란 몽염은 당연하게 좋은 환경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거문고와 바둑, 서예, 회화 등 사예(四藝)에도 능했다. 몽염은 처음에는 문직(文職) 관리로 있으면서 문묵(文墨)을 일삼았으며 후에 장군이 된 뒤에는 또 진나라의 제(齊)나라 병탄에서 큰 공을 세워 젊은 나이에 진나라 국도 최고의 행정장관을 말하는 내사(內史)직에 임명되었다.
진나라가 6개국을 통일한 후 진시황제는 또 30만의 대군을 몽염에게 주어 북상해 흉노와 싸우고 북방의 변경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오늘 몽염은 황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7백리에 달하는 하투(河套)지역을 되찾고 흉노를 먼 사막의 중심지로 쫓아버린 것이다.
피비린 전투가 끝나자 몽염의 몸에서 다시 우아한 선비의 분위기가 남김 없이 풍기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있는 아름다운 아내를 그리던 그는 사부민요(思婦民謠)를 읊으며 아내가 변경에 있는 남편을 마냥 그리게만 할 수 없어 가족을 데려오려고 작심했다.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거칠고 단단하게 되었던 마음에서 부드러운 정이 용솟음치며 그는 온화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몽염은 꼬리에 피가 묻은 다람쥐 한 마리가 땅에 긴 피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붓으로 땅에 글을 쓰는 것 같구나! 짐승의 털로 붓을 만들면 나무 붓보다 더 좋겠다.”
장인이 자신의 일을 잘 하려면(工欲善其事) 반드시 먼저 연장을 날카롭게 해야 하는 법이다(必先利其器). 대군을 거느리는 장군이지만 몽염은 시문(詩文)을 잊은 적이 없으며 항상 문묵(文墨)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서예를 아주 좋아했으나 나무 붓으로 아름다운 글자를 쓸 수 없어 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다람쥐 꼬리가 땅에 핏자국을 남기는 것을 보고 붓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영으로 돌아온 몽염은 취사병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토끼고기로 식사를 만들고 토끼 털은 전부 나에게 가져오너라.”
저녁에 몽염은 토끼고기 요리를 먹으면서 붓을 만들 생각에 빠졌다.
“어느 해인가 왕(王) 장군을 따라 초(楚)나라를 토벌하러 가는 길에 선성(宣城)을 경유하다가 초나라 사람들이 토끼 털을 빗자루처럼 묶은 다음 가는 대나무 끝에 꽂아서 글을 쓰는 것을 보았다. 후에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정벌할 때는 또 제나라 사람들이 수옥(岫玉)의 끝에 양털을 묶어 붓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여러 짐승의 털이 질감이 서로 다르니 먼저 토끼털 붓을 만들어 보고 좋으면 다시 양털과 이리 털, 여우 털로 만들자. 이렇게 되면 붓이 훨씬 부드러워 글자를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토끼 털 붓은 금방 만들어졌다. 부드러운 붓으로 글을 쓰니 훨씬 거침 없고 멋스러웠다. 새로 만든 토끼 털 붓에 만족한 몽염은 다양한 짐승의 털로 ‘진필(秦筆)’이라 부르는 다양한 붓을 만들었다. ‘진필’은 단단하든 부드럽든 모두 먹을 묻히면 붓끝이 뾰족해지고 누르면 탄탄해서 붓을 놀림에 탄력이 따른다는 특징을 가졌다. 몽염은 또 후세 사람들이 이런 붓을 더 잘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또 <필경(筆經)>을 쓰기도 했다.
몽염은 붓의 선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에 몽염과 연관되는 많은 일화들은 다수가 붓과 연관되며 몽염이 제출한 제필(製筆)의 네 가지 요소인‘첨원제건(尖圓齊健)’은 붓을 만드는 규범이 되었다.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무릇 붓을 만드는 곳에는 모두 몽염의 그림이 그려져 그의 유풍을 따름을 보여준다. 혁혁한 무공을 세운 장군이 길이 길이 미명을 남기게 된 것이 작은 붓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