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경건한 성경연구 –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의 위대한 재발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책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비체험이 아닌 계시의 책을 통해 대대로 구원과 성화의 경험을 보존하였다. 하이코 오버만은 “루터의 새로운 점은 교황이든 공의회든 그 어떤 권위보다도 성경의 권위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이라고 했다. 루터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조명하시는 성령님은 “외적인 말씀”(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다. 루터는 소천하기 전에 1545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1520년에 “하늘에서 임하시는 성령이 없이도 스스로 성경박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확실히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는 성령님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 루터의 생애
①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구리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② 1502년, 19살. 학사학위를 받는다. 57명 중 30등이다.
③ 1505년 7월 2일. 법과대학에서 집으로 가던 도중 그는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고 갑작스런 번개에 놀라 땅에 엎드리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회 수도사가 된다.
④ 1512년 10월 19일, 28세.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위해 비텐베르크 대학에 성경 신학 교수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루터는 그 후 평생 그 자리에 머문다.
⑤ 1525년 6월 13일.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한다.
⑥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 소천
그의 마지막 유언 - “우리는 거지다. 이 말은 사실이다.” 우리는 평생 모든 것을 간구해야 하는 거지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고 그렇게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은혜를 얻는다.
[2] 루터의 삶
루터는 설교자. 비텐베르크에는 읍 교회와 성 교회 두 교회가 있었는데 루터는 읍 교회의 정식 설교자였다. 비텐베르크에는 교회 프로그램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오직 예배와 설교밖에 없었다. 주일마다 새벽 5시 예배에서는 서신서에 대한 설교, 오전 10시에는 복음서에 대한 설교, 오후 예배에는 구약 성경이나 교리문답에 대한 설교가 있었다.
루터는 가정적인 사람. 41살 때부터 62살에 눈을 감을 때까지 그랬다. 자녀를 길러도 보았고 잃어도 보았다. 그의 딸 엘리자베트가 8개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녀로 인한 부담감과 심적 고통을 잘 알았다. 루터는 주일 오후에 설교 두 편을 전한 후에 가족 예배를 자주 드렸다.
루터는 목회자. 교구민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놀라울 만큼 헌신적으로 관여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연구.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 연구의 중요성은 그가 참된 복음을 발견한 일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루터는 성경 연구를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며 역사를 형성해가는 매우 중요한 일로 취급한다. 성경 연구는 복음과 종교개혁과 하나님에게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을 올바르게 해석함으로 “열린 문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고 썼다. 루터에게는 성경 본문 자체가 주석가나 교부들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중요하였다. 성경은 목회자가 땀 흘려 경작해야 할 포도원이다. 그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었다.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독해하는 일이야말로 종교 개혁 시대 설교자의 특권이자 의무임을 확신했다. “언어는 성령의 칼을 보관하는 칼집이다. 언어는 선인들의 사상이라는 귀한 보석을 담아 두는 상자다. 언어는 포도주를 담은 그릇이다. 복음서의 말씀과 같이 언어는 수천 명의 군중을 먹일 빵과 물고기를 담아 놓은 광주리다.”고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신학적인 적수였는데도 불구하고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사용했다. 성경 원어 실력은 루터에게는 매우 귀한 자신이었다. 루터는 성경 원어의 도움이 없다면 성경 연구 과정에서 많은 걸림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소유한 책을 알지 못하고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며 수치다.”고 하였다.
성경 연구에 대한 큰 장애물은 ‘나태함’이라고 보았다. 그는 목회자들에게 부지런함을 촉구했다.
“어떤 목사들과 설교자들은 게으르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 우리의 소명은 보고 연구하고 읽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지나치지 않다. 읽는 부분은 아무지 자세히 읽어도 지나치지 않다. 자세히 읽은 내용은 아무리 잘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다. 잘 이해한 내용은 아무리 잘 가르쳐도 지나치지 않다. 잘 가르친 내용은 그 내용대로 아무리 잘 살아도 지나치지 않다. … 기도하고 읽고 공부하고 부지런해지라.”
그는 교회를 위해 흘리는 땀을 가장 위대하다고 하였다.
“말하고 설교하는 일이 얼마나 중노동인지 … 설교하는 일에 있어서 인체의 가장 뛰어난 부분(머리), 가장 존귀한 지체(혀), 그리고 가장 고상한 일(연설)이 그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며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다. …설교문 작성에는 손가락 세 개면 충분하다. …그러나 온몸과 영혼이 그 일에 매달려야 한다.”
그는 “목회자들은 매일 부지런히 공부에 열중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일로 바빠야 한다. … 목회자들은 꾸준히 독서, 강론, 공부, 사색, 묵상을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건강을 유지하고 몸을 해롭게 하지 않을 만큼 일해야 한다. 일하다가 머리가 상하고 몸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신은 과로를 하는 나쁜 습관이 있고 살아 있는 한 고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고난. 루터는 시련이야말로 신학자를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시편 119편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기도」와 「묵상」만 한 것이 아니라 「고난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열쇠는 의의 길을 걸으며 고난을 받는 것이다. 루터는 “바르게 신학을 공부하는 법”의 “규칙들”은 시편 119편에 자주 제시가 되는 것으로 “기도(oratio), 묵상(meditatio), 고난(tentatio)”이라고 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고난은 “시금석”이었다.
루터는 시련으로 인해 자신이 “꽤 훌륭한 신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잔인한 종류의 무자비한 중상모략을 견뎌냈다. “마귀는 가르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면 가르치는 사람에게 거짓말과 악담과 저주와 호통을 퍼부으며 공격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육체적으로 신장 결석, 두통, 이명 증세, 세균 감염, 심한 변비, 치질로 고생했다. “사흘이나 걸려 치료한 환부가 곧 다시 찢어졌다.”고도 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학자로 만든 원동력은 「고난」이라고 하였다.
기도. 루터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존하였다. 그는 기도가 우리의 모든 사역 속에 배어들게 하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성경 연구를 간섭하시고 붙드시고 열매 맺게 하시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시편 119편에서 시편 기자가 고난 받거나 묵상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기도하는 모습도 발견한다.(18절. 27절. 34절 등) 그는 성경을 연구하는 참된 성경적 방법은 매순간 철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을 맹신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이라고 결론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