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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퇴계 이황-23
이장희 추천 0 조회 11 15.11.10 22: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퇴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일찍이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어 노래하는 기생이 눈앞에 가득하였을 때 문득 한 가닥 환희심이 일어나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기미(機微)는 살고 죽는 갈림길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이 말은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의미심장하다.

퇴계는 ‘화려하고 시끄럽게 쾌락에 빠지는 것’과 ‘그것에 초연할 수 있는 평상심’을 ‘살고 죽는 생사의 갈림길(機則生死路頭也)’로 보고 있음인 것이다.

특히 퇴계는 술을 경계하고 있었다.

일찍이 15살 되던 해 송재공을 따라 안동에 갔을 때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진 실수를 한 이래로 술에 대해 평생 근신하였다. 퇴계는 병약했으나 술은 즐기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는 퇴계가 만년에 도산서당에서 지은 시 중에 술에 관한 시가 서너 수 나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퇴계는 직접 집 뒤의 산속에 술 빚는 창고를 두어 서당에 손님이 찾아오면 산봉우리로 불러 술을 마셨다고 한다.‘달밤에 이 문량이 도산으로 찾아오다(月夜大成來訪陶山)’란 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좋은 밤 함께 즐겁네/좋은 손님들 찾아오니, 산봉우리 넘어 불러/탁주잔 기울여 마시네.

관란헌에 셋이서 솥발처럼 앉아/그윽한 마음 열고, 다시 난초 배에 올라/달 놀이 하다 돌아왔네(良夜同欣好客來 隔岑呼取濁 盃 臨軒鼎坐開幽款 更上蘭舟弄月回).”

이밖에도 절우사(節友社) 화단의 매화가 늦봄에 피어나자 읊은 퇴계의 시는 아취(雅趣)를 느끼게 한다. 그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지금 어찌 필요하리오/난초향기 같은 말.

하늘가에 옛 친구들/볼 수가 없어, 그대 더불어 날로 아무 일 없이/술잔 기울여 마시네(今者何須蘭臭言 天涯故人不可見 與爾日飮無何尊).”

이처럼 술을 좋아하던 퇴계였으나 평생 술을 절제하여 취하지는 않았다. 술에 대한 경각심을 퇴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벼슬에 올라 서울에 있을 때에 늘 사람에 이끌려 날마다 술을 마시고 놀았다. 그러나 얼마 뒤 한가한 날에는 문득 심심한 마음이 들어서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다.”

“또 내가 일찍이 금문원(琴聞遠:제자))의 집에 놀러간 일이 있었는데, 산길이 몹시 험하였다. 갈 때는 말고삐를 잔뜩 잡고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길 험한 것을 아주 잊어버리고 마치 탄탄한 큰 길을 걷듯 하였으니, 마음을 잡고 놓음이 이처럼 심히 두려운 것이다.”

퇴계의 두 번째 고백 역시 학문의 길은 몹시 험한 산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항상 말고삐를 잡고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하며, 마치 탄탄한 큰길처럼 함부로 가면 낭패를 본다는 내용으로 제자들에게 내리는 경책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젊은 날의 퇴계는 마음을 다잡고 거경(居敬)의 마음으로 한결같이 학문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특히 퇴계는 ‘거경궁리’를 주창한 정이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심법의 근원으로 삼고 있었다.

“흩어진 마음(心)이 거두는 마음을 찾는 까닭이 흩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所以求 放心之心是乃 放心之法)”

실제로 퇴계는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신 통일하는 심법에 홀로 매달린다.

 

심지어 퇴계는 한발짝 걸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한걸음에 집중되는지 아닌지 혼자서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핏 보면 이 발걸음 하나도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퇴계는 깨닫는다.

발걸음 하나가 습관적이거나 일상적이 되지 아니하고 마치 천지가 움직이는 것 같은 무게를 지니기 위해서는 한걸음 동안에 온 마음이 그곳에 실려 있어야 하는데, 한걸음 동안에 이미 만감이 교차하고, 나중에는 걷는다는 자의식이 생겨나 마음이 산란해지고 분열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선불교에서 우리가 무심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하나하나 끊어서 숨을 들이쉴 때는 오직 들이쉬는 것만 생각하고 내쉴 때는 오직 내쉬는 것만 생각하여서 나와 외계가 혼연일치되는 무심에 들어가는 것을 정진하듯 퇴계는 심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이 독특한 걸음공부를 혼자서 연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마음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젊었을 때 나는 걸음을 걸으면서 마음을 실험해 보았는데 한걸음 동안에 마음이 오직 한걸음에 머물러 있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먼 훗날 도산서당에서 제자 김성일이 퇴계에게 마음이 어지러운 까닭을 묻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다.

“대개 사람은 이(理)와 기(氣)가 합해서 마음(心)이 되는 것이니, 이가 주인이 되어 기를 거느리면 마음이 고요하고 생각이 한결같아서 스스로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지지마는 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기가 이기게 되면 마음은 어지럽기 그지없어서 사특하고 망령된 생각이 뒤섞여 일어나 마치 물방울바퀴가 둘러 도는 것 같아 잠깐 동안의 고요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은 생각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실없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경(居敬)만한 것이 없으니, 경하면 마음이 한결같고, 마음이 한결같으면 생각은 스스로 고요해지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 이덕홍이 ‘거경(居敬)’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퇴계는 주자의 가르침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이 일을 하려면 반드시 뜻을 세움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뜻을 삼지 않으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 비록 뜻을 세웠다고 해도 진실로 거경하여 이 마음을 바로 지키지 않으면 또한 범연(泛然)히 주장이 없어져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나날을 보낼 것이니, 다만 실속 없는 말에 그치게 될 것이다. 뜻을 세우려면 모름지기 사물 밖으로 높이 뛰어 넘어서야 하고 거경하려면 항상 사물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과 사물로 하여금 어긋나지 않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말할 때도 모름지기 경해야 할 것이고, 움직일 때도 모름지기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도 모름지기 경해야 할 것이니, 잠깐이라도 이 경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 말은 학자의 생활에 가장 절실한 것이니 반드시 깊이 체험하여 실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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