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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1일 로만탕
로라를 내려서서 12시30분 로만탕 중심가로 들어섰다. 댄디가 오늘 숙박할 로지를 찾으러간 사이 매점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매점 앞 관개수로는 마을 아래로 흘러 버드나무를 자라게 해 마을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밀과 드물게는 완두콩과 겨자밭으로 흐른다. 이곳에서는 겨우 1모작이 된다고 한다.
할머니가 빨래를 하고 있고, 잠시 후 매점에서 나온 여인이 빈 그릇과 술잔들을 들고 나와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소와 말들이 이 물을 먹기도 했다.
댄디와 이도윤씨가 방을 구하고 돌아왔다. 미로와 같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ACAP(안나푸르나 보존지역 프로젝트) 사무실 옆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섰다. 댄디와 다와가 점심식사준비를 하는 사이 짐을 풀고 침상에다 슬리핑백부터 펼쳤다. 너무 낯선 곳이어서 밖으로 나가기도 싫었지만, 그보다는 고소증 때문에 움직이기 싫어 슬리핑백 속에 누워있는 것이 편했다.
잠시 후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다. 옛날 우리나라 절간의 해우소처럼 아래층이 휑하니 내려다보이는 곳간이었다. 이곳 가옥들은 집 내부 윗층에 화장실을 두고 있다.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분비물에는 화덕에서 나온 재를 뿌려 냄새를 없애고, 거름으로 만들어 농사에 이용된다.
화장실을 나오니 천장으로 통하는 통나무 계단이 보였다. 신기한 생각에 계단을 타고 올라 사방 1m 크기로 뚫린 구멍을 통해 나가니 제법 널찍한 옥상에 바짝 말린 노간주 나뭇가지와 땔감나무더미들이 쌀가마 크기로 묶여 가지런히 쌓여 있고, 바닥에는 쇠똥들이 깔려 있었다.
옥상 가장자리로는 야크와 양뿔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쌓아 놓은 나무와 야크와 양뿔들은 백 년이 넘은 것들도 있으며, 이것들은 그 집의 부와 지위를 상징한다고 한다.
옥상에서는 궁전과 회색 벽에 붉은 색을 덧칠한 사원(곰파)과 큰 초르텐들이 휘둘러 보였다. 계곡 건너 사면에는 잿빛 흙가루를 바른 농가들이 보였다.
라면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이도윤씨는 닭을 사기 위해 마부를 데리고 북쪽 마을을 다녀왔다. 이씨는 그 마을에서 한국말 잘하는 농사꾼을 만났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며 그 사람 덕분에 닭을 싸게 샀다고 좋아했다.
저녁식사 후 2층 응접실에서 집 주인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응접실에는 전기불이 들어왔다. 전기는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들어온다고 한다. 무스탕은 봄에는 계곡에 넘치는 물로, 겨울에는 30cm나 쌓이는 눈 때문에 전혀 출입이 안된다, 생활용품은 네팔제보다는 중국제가 더 많이 유통되고 있다는 등의 얘기를 주인으로부터 들은 다음, 소등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 11월2일 로만탕~남걀
아침 8시40분 로만탕과 남걀 마을 관광길에 올랐다. 본래 로만탕 북쪽 계곡 건너 남걀 방면 지역은 ‘910달러짜리 13일 여행허가’를 받지 않았다면 여행이 금지된 곳이다. 그러나 이 날 로만탕에 들어와 있는 트레커는 우리들뿐이었고, 초소에서도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 줬다.
ㄱ자로 꺾이기도 하고 ㄷ자로 돌기도 하는 미로와 같은 골목을 맴돌다가 이곳의 대표적인 사원 4곳 중 한 곳을 찾아 출입구에 닿았다. 모든 출입구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안쪽에서는 사원을 지키는 티베트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입장료 100루피를 움켜쥐고 관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오리무중이었다.
마을주민들 얘기로는 승려들이 외부인들의 접근을 싫어한다고 했다. 게다가 주민과 협상한 후 사원 안으로 들어가더라도 조각품과 그림이 도난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사진촬영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1시간 가까이 관리인을 찾다가 허탕친 일행은 곰파 내부 구경을 포기했다.
곰파 북쪽 초르텐 옆을 지나 계곡가에 이르렀다. 계곡가 바위덩이 위에는 날개 길이가 2m는 됨직한 독수리 10여 마리가 우리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계류를 건너 약 1.5km 올라가니 20여 호 정도 되는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 왼쪽 언덕으로 올라섰다. 작은 불탑(초르텐)에 타르촉이 휘날리고 있는 언덕에서 서쪽으로는 하늘금을 이루는 만사일(6,235m) 아래로 왕의 여름휴양지라는 남걀 곰파(승리의 수도원) 건물이 보였다.
북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코라라(4,660m)와 그 오른쪽 사르바라(5,060m) 능선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동쪽 마을 건너로는 피라밋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 두 개가 약 500m 전방으로 마주보였다. 그 중 뒤쪽으로 높게 솟은 봉우리 꼭대기에 성곽이 보였다. 무스탕을 건국한 아메팔 왕의 무덤이다. 그리고 앞쪽 낮은 봉우리 위의 작은 성곽은 왕비가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언덕에서 남쪽으로 로만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로라 방면 계곡과 우리가 건너온 계곡 사이 구릉 위에 소 혓바닥처럼 생긴 평야지대에 로만탕이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로만탕으로 향했다. 로만탕이 건너다보이는 계류가에서 왼쪽(동쪽) 사면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약 500m 가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가이드 댄디가 어떤 농부에게 한국에 갔다온 타시 파상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농부는 대뜸 손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키며 “저기 가장 큰 집”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농부가 가리킨 계류변 이층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침 타시 파상씨와 부인이 쇠똥을 말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파상씨는 맑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정인성 고문은 파상씨와 포옹했고, 이도윤씨는 파상씨 부인과 너무 길게 포옹해서 뜯어 말려야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파상씨가 한국에서의 고생담을 말할 때에는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에게 그동안 로만탕을 찾아온 한국인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니 고향을 떠나기 전이나 한국을 다녀온 후에도 로만탕에서 한국인은 한 명도 못 보았다고 했다. 저녁에 닭이나 삶아 창(막걸리)하고 대접하고 싶다는 파상씨 부부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에 우리는 손사레를 치며 간단한 선물을 전달하고 로만탕으로 되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 옆 건물이 체크포스트를 겸한 ACAP 사무실이다. 트레킹 허가증에 검인도장을 받을 겸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명록을 보니 2003년에 로만탕을 찾은 트레커는 우리 팀을 포함해서 모두 576명이었다. 한국인은 91년 개방 이후 2001년까지 16명이었고 2002년은 한 명도 없었으며 2003년에는 우리를 포함해 19명이었다.
■ 11월3일 로만탕~타마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여명인 아침 6시 로만탕을 출발했다. 오전 6시47분 로라에 도착한 우리는 마지막으로 무스탕의 수도 로만탕을 뒤돌아보았다. 만사일은 아침 햇살을 받아 맑고 깨끗한 수정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라에서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약 1시간만에 숭다 초르텐에 도착했다. 허허벌판에 유일한 건축물로 그늘을 제공해주는 곳이지만, 쉴 겨를이 없었다. 빠른 걸음걸이로 멀리 앞서가는 정 고문의 뒤를 쫓아야했다. 멀리 안나푸르나와 닐기리가 마주보이는 사막길을 따라 1시간 거리에 이르니 카랑 콜라 건너로 카랑 마을이 마주보이는 언덕 위에 닿았다. 언덕에서 카랑 마을로 들어서는 데 50분이나 소요됐다.
오전 9시20분 카랑 마을을 빠져나와 게미 마을을 향하는 오르막길을 걸었다. 약 6km를 걸어 11시40분 트사랑라(3,870m)에 도착했다. 이도윤씨와 다와가 기다려주고 있었다. 점심 장소로 정한 게미에서 정 고문이 기다릴 것이 염려돼 잰걸음으로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마주보이는 아름다운 협곡을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45분 줄곧 내려서니 게미 마을 아래 게미 콜라에 닿았다.
다리 옆 계류가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사이 트레킹 열흘만에 처음으로 발을 씻었다. 열흘 동안 세수도 못한 몰골이어서 머리도 감으려 했으나 물이 너무 차가워 포기했다. 마침 하학 길에 이곳을 지나던 10살 안팎 어린이들 10여 명이 신기한 듯 구경하는 가운데 식사를 마치고 목적지인 샹보체로 향했다.
절벽 위 게미 마을은 로만탕으로 들어설 때 경유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 보았다. 다리 옆에서 남서쪽으로 올라 방목지대를 지나 사면으로 이어졌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사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약 5km 올라가니 나이라(4,010m)에 닿았다(오후 3시10분).
오후 3시를 넘기니 어김없이 모래를 동반한 강풍이 불어닥쳤다. 목에 감았던 수건을 끌어올려 입과 코를 가리고 나이라를 내려섰다. 20분 내려서니 삼거리에 닿았다. 왼쪽(남쪽) 길은 로만탕으로 들어설 때 길링(3,570m)을 경유해 올라왔던 길이다. 지름길인 오른쪽 직진 길로 들어서서 샹보체로 향했다. 로지와 야영장이 있는 자이테(3,820m)를 지나면서부터 신기하게 고소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자이테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30분 거리인 충가르 초르텐(3,750m)을 지나니 벌써 서산으로 해는 숨어들고 온 대지를 산그림자가 뒤덮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샹보체에 닿을 수 있을지 걱정하며 잰 걸음으로 내려갔다. 오후 4시30분경 검은 야크 두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는 하얀 건물에서 정 고문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쉬어가려나 하는 생각에 집안으로 들어섰다.
난롯가에서 맥주와 안주를 꺼내든 정 고문은 “샹보체까지는 포기하고 여기서 자고 갑시다” 한다. ‘이제야 살았구나.’ 겨우 집 한 채가 전부인 이곳이 지도 상의 타마곤(3,719m)이었다.<로만탕~타마곤 약 32km, 8시간 소요>
■ 11월4일 타마곤~추상
아침 7시, 집주인 세라 텐진(55)과 가족들의 배웅 속에 타마곤을 출발했다. 타마곤부터는 로만탕으로 들어갈 때와 같은 길을 그대로 빠져나왔다. 타마곤에서 50분 거리인 샹보체라(3,850m)를 오르는데 영국인 트레커 두 명을 만났다. 무스탕 안으로 들어와 처음 만나는 외국인들이다. 샹보체라에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5분 거리인 샹보체(3,800m) 로지로 내려섰다.
협곡을 따라 얌다라(3,860m)에 오른 다음, 점심을 먹었던 베나(3,860m) 마을에 닿았다. 마침 상수도 시설이 있어 양치질과 세수를 하며 15분간 휴식을 가졌다. 베나를 출발, 1시간20분 거리인 사마르(3,660m) 마을을 지나 25분 더 걸어가 타글람라(3,624m)에 이르니 타르촉이 바람에 휘날린다. 타르촉 뒤로는 트롱패스 방면 야크와캉(일명 트롱피크·6,482m)과 카퉁캉(6,484m)이 시야에 들어왔다. 야크와캉 아래로 눈을 이고 있지 않은 규라(4,077m)도 보였다.
타글람라에서 절벽 횡단길을 통과해 45분 내려서서 첼레(3,050m) 마을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왼쪽 철다리를 건너 50분 빠져나온 추상(2,980m)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10분이었다.<타마곤~추상 약 18km, 6시간 소요>
■ 11월5일 추상~묵티나스
본래 무스탕 하향 트레킹은 규정상 추상에서 카그베니를 경유해 좀솜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카그베니 체크포스트에서 무스탕을 10일 이내에 끝마쳤다는 확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카그베니에서 무스탕 트레킹을 마쳤다는 확인을 받았다면 좀솜으로 가지 않고, 묵티나스를 경유해 트롱패스를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추상에서 남동쪽 규라(4,077m)를 넘어 묵티나스로 내려선 다음, 카그베니로 나와 좀솜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무스탕 트레킹 소요일정인 10일에서 하루 이상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하다. 묵티나스에서 규라로 올랐다면 다시 묵티나스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규라 북쪽은 무스탕 트레킹 허가서가 있어야 하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규라로 올라가면 안나푸르나를 비롯해서 트롱패스와 다울라기리까지 140도로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좀솜 일원에서 이렇게 광활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곳은 규라뿐이다. 규라에서 파노라마를 즐기고 묵티나스로 내려선 다음, 트롱패스를 넘어 안나무르나 라운드를 끝마칠 계획이다.
추상을 출발하기 전 트레킹 허가서를 댄디에게 맡겨 카그베니로 가서 무스탕 트레킹을 마쳤다는 확인을 받아오도록 했다. 댄디는 카그베니에서 확인을 받는대로 묵티나스로 올라와 우리와 만나기로 했다.
아침 6시15분 추상을 출발했다. 나리콜라로 들어서서 계단식 논밭지대를 지나 35분 거리인 테탕 마을을 지났다. 이어 40분 올라 작은 연못이 나오자 쿡 다와가 왼쪽 넓은 길로 앞장을 섰다. 그의 뒤를 따라 급경사 지그재그 길을 30분 가량 올라가 뒤로 돌아보았다. 추상 방면 협곡이 45도 각도로 조망됐다. 고도계를 보니 해발 3,400m.
급경사에 너무 험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이곳 주민 두 명이 말을 타고 우리를 앞질러 가다말고 고개를 돌리더니 어디를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묵티나스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니 그들은 정색을 하며 길을 잘못 들었으니 다시 내려가 연못에서 남쪽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쿡 다와가 이곳은 처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길을 되돌려 25분이나 다시 내려와 연못에 닿았다. 추상에서 뒤따라온 마부가 말 세 마리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부터는 마부와 말이 앞장을 섰다. 남동쪽 사면길을 올라서자 정면으로 수십만 평 넓이의 고원지대가 펼쳐졌다. 평지 상단부에서 남동으로 절벽 횡단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횡단길을 15분 가량 통과한 다음 다시 경사 45도 흙길을 횡단했다. 오른쪽으로는 수백m 급경사여서 미끄러지면 그대로 천당행이다. 20분에 걸쳐 위험한 사면길을 내려선 다음 계류를 건너 둔덕을 약 40분 오르자 말안장 같은 능선이 하늘금을 이루며 남쪽으로 펼쳐졌다.
‘언제 저기를 오르나.’ 오를수록 힘이 들고 숨이 차왔다. 열 걸음 걷고 쉬어 가기를 수십 번 되풀이하며 30분 올라가니 남쪽 아래로 광활한 초원지대가 내려다보였다. 규라(4,077m)에 다 올라선 것이다.
고갯마루에 세워진 작대기에 매인 타르촉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남동으로는 일명 트롱피크로 불리는 야크와캉과, 그 오른쪽으로 카퉁캉이 올려다보였다. 카퉁캉 오른쪽으로는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하늘금을 이뤘다. 남동으로는 다울라기리와, 더 오른쪽으로는 투쿠체와 담푸스봉이 장엄하게 펼쳐졌다.
규라를 뒤로하고 안나푸르나를 마주보면서 묵티나스로 향했다. 광활한 초원에는 수 백 마리 양떼들이 풀을 뜯고, 그 위로는 다울라기리와 투쿠체가 계속 시야에 들어왔다. 시종 파노라마가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2시간 걸려 묵티나스에 내려서니 미리 도착한 댄디가 로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후 1시40분).
문라이트 로지 2층에 방을 잡은 다음 트롱패스를 넘을 계획을 세웠다. 오늘 4시 식사, 5시 취침, 11시 기상, 밤 12시에 출발, 내일 아침 6시에 트롱패스 도착. 그러나 마부 라빈다가 말을 데리고 그 시각에 트롱패스를 넘을 수 없다고 한다. 갑작스런 라빈다의 배신에 우리는 당황했다. 카고백 6개를 메고 넘을 수도 없는 일이고, 당장 포터들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당을 더 올려주겠다는 제안에도 라빈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라빈다는 자기 집이 있는 좀솜으로 말을 데리고 내려가는 즉시 친구들 3~4명을 모집해 밤 11시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했다.
깜깜한 밤 트롱패스 오르막은 말에게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말에게 헤드램프를 착용시킬 수도 없는 일이기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밤 11시까지는 새 포터를 데리고 올라오겠다는 그를 믿고 좀솜으로 내려보냈다.
우리는 일단 계획대로 움직였다. 오후 4시에 식사를 마치고 방안에 들어가 슬리핑백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앞일이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각이어서 창문을 통해 오늘 넘어온 규라가 올려다보였다.
해발 2,980m인 추상에서 4,077m인 규라까지 표고차 1,097m를 오르는 데도 숨이 가쁘고 힘들었는데, 해발 3,760m인 묵티나스에서 표고차 1,656m나 나는 트롱패스(5,416m)를 6시간만에 오른다?’ 이 표고차를 수첩에다 도표로 그려 놓고 고민을 해야만 했다.
표고차 1,656m를 극복하는 방법은 배낭무게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 밤 10시가 넘도록 궁리한 끝에 등산화는 가장 가벼운 리지화에다 장갑도 가장 얇은 장잡 위에 손가락장갑을 덧끼고, 무거운 수동식 카메라는 포터에게 맡기고 가벼운 자동카메라 한 대만 준비했다.
밤 11시가 되었다. 온다는 라빈다는 오지 않았다. 밤 12시 역시 라빈다는 오지 않았다.<추상~규라~묵티나 10km, 6시간30분 소요〉
■ 11월6일 묵티나~트롱패스~마낭
0시30분 정 고문과 이도윤씨는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라빈다가 늦는 모양이니 이도윤씨는 가이드 댄디와 함께 이곳에 남아 내일 아침에라도 포터들이 도착하는대로 짐을 가지고 트롱패스를 넘어와 마낭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정 고문, 쿡 다와, 기자 일행 3명은 윈드재킷 주머니에 비상용 헤드램프와 초코렛 5~6개씩을 더 넣고 새벽 1시30분 문라이트 로지를 출발했다.
사원 정문을 통과해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헤드램프에 의지해 1시간20분 오르니 오두막집이 나왔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갈 참이었지만, 주인은 문을 잠그고 내려가버려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급경사 오르막길로 20분 더 오르니 두번째 건물이 나타났다. 다와가 세차게 문을 두드리자 집안에서 잠에서 깨어난 듯한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 집이 지도에는 시즌에만 문을 연다는 쉼터였다. 다행히 이곳에서 뜨거운 밀크티를 마시고 뜨거운 물도 수통에 채울 수 있었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급경사를 1시간30분을 오른 4시40분, 고도계가 5,400m를 가리킨다. 이곳부터 수도파이프 굵기의 쇠기둥이 일정한 거리로 박혀 있었다. 눈이 내릴 경우를 대비한 표지용 같았다.
일곱번째 쇠기둥이 나타난 5시40분부터 여명이 밝아오며 주변 산세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헤드램프를 끄고 무거운 발걸음을 더디게 옮겨나갔다. 앞서가는 정인성 고문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고소증세가 나타나더니 슬슬 졸리기까지 했다.
날은 점점 밝아왔다. 휴식할 겸 묵타나스쪽을 뒤돌아보았다. 협곡 건너 멀리 투쿠체가 아침햇살을 받아 주황색으로 빛났다. 오전 6시20분 트롱패스에 거의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하게도 펑퍼짐한 계곡 안으로 길이 이어졌다. 이 계곡만 지나면 트롱패스라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탕 한 알을 입안에 넣었다. 발걸음이 다소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계곡지대를 벗어나 1시간을 더 올라도 트롱패스는 보이지 않았다. 앞서가던 정 고문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때부터 손가락과 발가락이 끊어질 듯 시려오기 시작했다. 고소용 장갑과 중등산화를 포터 짐 안에 넣어둔 것이 그렇게 후회될 수 없었다. 다행히 몸통은 보온이 되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입김으로 호호 불며 오른 너덜지대에서 마주 오는 한국여성 두 분을 만났다. 스님 한 분과 카트만두의 한식당 비원에서 본 적이 있는 문인숙씨였다. “참 고생 많으시네요. 정 고문님은 벌써 트롱패스에서 쉬고 계신데??”라며 매우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트만두에서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과 헤어진 지 20여 분 더 오르자 이윽고 트롱패스 고갯마루에 닿았다. 쉼터(작은 로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 고문이 이끄는대로 로지 안으로 들어가 밀크티 한 잔을 들이켰다. 밀크티 한 잔으로 고소증세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트롱패스에서 북으로 올려다보이는 야크와캉 남릉과 남서쪽으로 올려다보이는 카퉁캉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특히 카퉁캉 북사면은 온통 하얀 눈으로만 두텁게 얹혀 있어 그 아름다움이 더했다.
고개를 떠나 트롱패디로 향하는 길에서는 정면으로 톱날 같은 출루(6,558m)가 마주보였다. 오전 11시 트롱패디(4,450m)를 지나, 레트다르(4,200m)~야크카르카(4,018m)~군상(3,900m)을 경유해 마낭(3,540m)에는 오후 4시47분에 도착했다.〈묵티나스~트롱패스~마낭 30km, 15시간10분 소요〉
한편, 묵티나스에서 포터를 기다리던 이도윤씨는 결국 포토들이 올라오지 않아 현지에서 겨우 포터들을 구해 좀솜으로 내려간 다음, 자동차를 탈 수 있는 베니로 내려와야 했다. 베니에서 포카라~카트만두까지 버스로 나오면서 경찰과 군인들의 검문검색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슬리핑백과 갈아입을 옷 등이 모두 이도윤씨 편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로지에서 윈드재킷 한 장으로 잠을 자야 했다. 세면도구도 없어 베시사르로 나오는 동안 점점 노숙자나 다름없는 몰골로 변해갔다. 우리 대신 그 많은 짐들을 카트만두로 혼자 옮기느라 고생한 이도윤씨에게 감사드린다.
■ 무스탕에서 만난 사람
“한국에서 매 많이 맞았어요” 로만탕 주민 타시 파상씨
무스탕 수도 로만탕에 도착한 날 이도윤씨는 아래 마을로 닭을 사러 갔었다. 마을 주민들이 10여 명 모여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이씨가 이들을 향해 한국말로 “여기 닭 파는 거 없소?”라고 했을 때, 조금 떨어진 담벼락 아래에서 “닭 파는 거 있지요”라는 또렷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똥바(수수로 삭혀서 만든 술)를 빨고 있던 이 사람이 바로 타시 파상씨(52)였다.
처음에 닭 한 마리에 1,500루피를 고집하던 닭 주인은 파상씨가 한국인을 만나 반가워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변했는지 1,500루피에 살질 좋은 암탉 두 마리를 덥석 집어 주었다.
타시 파상씨는 1991년 당시 네팔 공무원 월급이 한국 돈으로 30,000원쯤일 때 거금 50,000루피(약 10만 원)를 들여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와서 처음 취직한 곳은 의정부의 한 깡통 공장. 여기서 일하는 도중 서툴다는 이유만으로 자주 매를 맞았다고 한다.
매를 맞아도 한 달 40만 원이라는 거금(?) 생각에 참을 만했다. 파상씨는 쉬는 날이면 분통함을 삭이기 위해 공장에서 가까운 수락산에 있는 절을 자주 찾았다. 부처님께 의지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깡통 공장에서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웠던 파상씨는 1년쯤 뒤 염색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염색공장에서도 인간 이하의 대접에 툭하면 매를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염색공장을 다니는 중에도 마음을 다스리고, 고향에 두고 온 부인과 어린 남매들 생각이 나면 수락산 절을 찾았다. 이 때 스님의 도움으로 정릉 신흥사에서 잡일 자리를 얻게 됐다.
신흥사 스님들 도움으로 1년 넘게 만족스러운 수입을 올린 파상씨는 94년 고향인 로만탕으로 귀향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딸 치치 앙무(19)와 아들 소남 상부(17)를 인도로 유학보내 놓고, 부인 가르마 구릉(37)씨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두둘겨 맞으며 일해도요 한국 좋아요. 한국 있을 때 삼겹살에 소주 막걸리 많이 먹어봤지요. 기회 있으면 한국 가서 또 돈 벌고 싶어요.”
타시 파상씨는 아직도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을 간직하고 있었다.
글·사진 박영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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