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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제사와 신주 / 송 기 호 (Ki-Ho Song)
ysoo 추천 0 조회 92 19.01.20 22: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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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와 신주
Ritual Service and Ancestral Tablet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약 력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문학 박사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


외국인이 한국을 여행할 때에 눈에 선 풍경이 무덤이다. 언덕 위에 동글동글하게 표주박처럼 솟아있는 무덤이 마을 풍경과 어우러지는 모습은 외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에서도 볼 수 없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적인 정경이다.
19세기 말에 한국을 여행했던 한 미국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풍경의 대부분은 묘지들이 차지했다. 묘들은 언덕을 점점이 수놓은 봉긋한 반원의 모임이었다. 마른 풀잎 사이로 간혹 비석이 보였지만 대부분 나무가 없는 구릉 위에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봉분만 솟아올라 있었다. 무덤들은 보통 구릉의 경사진 면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내가 짐작하는 한 이것은 그 위치와 관련된 어떤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곳이 주민들에게 덜 소용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덕의 경사진면은 조선의 농사법에서는 별 가치가 없는 반면 평평한 땅은 길이나 논 그리고 집터 등으로 유용하게 쓰인다(퍼시벌 로웰,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예담, 2001, 144쪽)."


죽은 자를 땅에 묻고 왜 봉분을 만들게 되었는지는 공자의 얘기에서 잘 알 수 있다.


"공자가 이미 부모를 방(防)에 합장한 뒤에 말씀하셨다.

 “내 들으니 옛날에는 묻었을 뿐이지 봉분은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나는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표지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무덤에 봉분을 만드니 높이가 4척이었다(『예기』단궁(檀弓))."


무덤의 소재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 봉분을 만들었다. 물론 공자가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덤을 한자로 ‘묘(墓)’라 하는데, 봉분을 쌓아올리다 보니 높은 언덕처럼 되어서‘총(塚)’,‘ 분(墳)’,‘ 구(丘)’, ‘능(陵)’이란 말도 쓰이게 되었다. 적석총이니 석실분이니 할 때에 총, 분 등이 쓰이는 것이다.

 ‘능’은 중국에서 전국시대 중기에 쓰이기 시작했는데, 왕릉을 특별히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양관, 『중국역대 능침제도』서경, 2005, 20~21쪽). 국왕의 높고 큰 무덤을 흔히 산이나 구릉에 비유했고, 황제의 죽음도 산이 무너진 것과 같다 하여 ‘붕(崩)’ 이라 했다.


봉분은 흙으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고구려 무덤처럼 돌로 쌓은 것도 있다. 또 원형이 있는가 하면 방형도 있고, 고대일본 천황릉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처럼 방형과 원형이 붙어있는 것도 있어 다양하다.


봉분은 후손의 권위를 높여주는 역할도 하였다. 가야시대 왕릉은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선조들의 무덤이 그 나라를 수호하는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왕릉은 크게 만들었다. 흙으로 쌓은 것으로 경주 봉황대 고분이 제일 크다. 지표 부근에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로 직경 82m, 높이 22m로 흙을 쌓아 올렸으니 토량만 해도 엄청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입이 벌어지게 하는 것이 중국의 진시황릉이다.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니 가히 인공산이라 할만하다. 한 번 무덤을 올라야만 그 크기를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를 조성하는 데에 70만명이나 동원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 사카이시(堺市)에 있는 닌토쿠(仁德) 천황릉은 전체 길이 468m, 최대 폭 305m, 높이 35m로 무덤 면적이 48만㎡에 달하여 인공위성 사진에서도 보일 정도다.


봉분은 돌로도 만들었다. 서울 석촌동에는 백제 무덤들이 있다. 지금은 도시화되었지만 1980년대만 해도 마을과 무덤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 무덤들이 돌로 쌓은 것이기에 마을 이름이 ‘돌마을’ 이었고 이를 한자로 바꾸어 석촌(石村)이 된 것이다.


고구려 수도인 지안(集安)에 가면 곳곳에 대형 무덤들이 있다. 지안 시내 전체가 공동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제일 정성을 들여서 쌓은 돌무덤이 바로 장군총이다. 벽돌처럼 네모지게 돌을 깎아서 계단식으로 쌓아올렸으니 흔히 ‘동방의 금자탑’ 이라 부른다. 금자탑(金字塔)이란 피라미드의 번역어이다.‘ 금’자모양으로된탑이란 뜻이니 쇠금(金)자의 윤곽선이 피라미드 외형처럼 삼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금자탑을 이루었다는 말은 피라미드와 같이 큰 위업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에도 있고 멕시코에도 있다. 제일 유명한 것으로는 카이로에 있는 쿠푸(Khufu)왕의 피라미드가 있다. 밑변이 한 변 230m인 사각형이고 높이는 146.5m에 이른다. 쌓아올린 부피를 따지면 장군총의 690여배가 된다. 이 무덤을 쌓은 얘기는 헤로도토스 기록에 보인다.


사진 1. 기자피라미드(우측이 쿠푸왕 피라미드)


" 뒤이어 이집트 왕이 된 케오프스(쿠푸)는 국민들을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빠뜨렸다고 사제들은 말하고 있었다. … 항상 1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3개월씩 교대로 노역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석재를 끌고가기 위한 도로를 건설하는 데 실로 10년에 걸쳐 국민의 고역이 계속됐다 한다. … 피라미드 자체의 건조에는 20년이 소요됐다 한다(헤로도토스 저, 박광순 옮김,『 역사』상, 230~231쪽)."


이 피라미드 건조에 몇 개의 돌이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고, 어떻게 쌓아올렸는지도 논쟁 중이다. 250만개라는 설을 따르면 20년 간 매일 340여개씩 쌓아야 하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이 피라미드 가운데에 있는 무덤칸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이 매일 제한되어 있다. 아침 일찍 언덕을 뛰어올라 숨을 헐떡이며 올라갔더니 이집트 돈만 받고 달러는 받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급히 환전하여 표를 사서 들어갈 수 있었다.

좁은 미로를 타고 올라간 곳에 시신을 안치했던 석실이 있는데, 몇 백만개의 돌 무게를 느껴서인지 모든 사람을 침묵에 빠뜨렸다. 정말 우주의 기운을 느낄 만한 분위기였다. 멕시코 피라미드에 올라갔을 때에도 기를 받는 서양인들이 보였다.


그런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두번째이고, 첫째와 셋째는 멕시코에 있다.

촐룰라(Cholula) 피라미드가 세계 제일인데, 밑변이 각각 380m, 439m이고 높이가 54m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높지 않지만 부피가 이보다 1.2배 정도가 되어 세계 최대인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이 이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성당을 지었다. 그런 까닭에 세계 최대는 지금 볼 수 없다. 세번째가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에 있는 태양 피라미드로서 밑변215m, 높이 63m이다.


이렇게 봉분을 경쟁이나 하듯이 높이 그리고 크게 쌓아올린 것이 세계 곳곳에서 보이지만, 유목민은 사정이 달랐다. 떠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무덤 표시를 해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시신을 깊지 않게 묻고 무덤 표시도 해두었으나 이민족의 도굴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흉노족 무덤처럼 지하 깊숙이 매장했으나, 그래도 도굴이 이루어져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지상에 아무런 표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중세 유럽을 흔들었던 훈족은 흉노족의 후신인데, 그 왕 아틸라의 관은 일시적으로 도나우강을 막은 뒤 강바닥 깊은 곳에 묻었다고 하는 전설이 헝가리에 전해진다(岩村忍, 『元朝秘史』中央公論社, 1963, 188쪽).

지금까지 칭기즈칸의 무덤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무덤 축조에 동원된 인부들을 모두 죽였고, 매장이 끝난 뒤에는 그 위에 말을 달리게 해서 평지로 만들어 흔적이 남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원나라 황제들의 무덤은 모두 오리무중에 있다. 이들이 묻혀 있는 곳은 현재 몽골 북부의 헨테이 산지로 추정되는데, 그 지점을 찾기 위해서 일본과 몽골이 공동으로 수년 간 고도의 장비를 동원했지만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현지에서 신성시하는 곳을 조사한다고해서 주민들이 반대했고, 또 무덤을 찾는다고 하면서 지하자원 탐사를 하지 않았느냐는 의구심도 생겨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망자를 기억하는 방법에는 제사도 있다. 초기에는 무덤 위에 사당을 지었다. 중국 허난성에서 발견된 부호묘(婦好墓)는 기원전 1,300년 전후의 왕비 무덤이다. 도굴되다가 말았기에 대량의 청동기가 발견되어 유명해졌다. 그 무덤 위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음식물을 바쳤던 건물 흔적이 발견되었다(하야시 미아오,『고대 중국인 이야기』솔, 248~250쪽).

우리나라에서도 무덤 위에 있던 건물 흔적이 발견된 경우가 있다. 석촌동 무덤에서는 봉분에서 기와가 많이 발굴되었고, 고구려 장군총 무덤 정상부에도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발해 삼릉둔 무덤에는봉분 위에 건물을 세웠던 주춧돌이 남아 있다.


중국 상(은)나라는 갑골문으로 유명한데, 거기에는 제사와 관계된 내용이 아주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조상 무덤에 소를 바칠까요?”“풍요를 조상에게 기원하는데 불을 피워 희생 제물을 태우는 것이 어떨까요?”등과 같은 물음이 보인다. 1년 내내 제사가 있었고 그 때마다 도살한 가축과 바친 술로 신과 만나는 향연을 베풀게 되어, 이 왕조를 멸망시킨 주나라왕이 상나라는“술에 탐닉하여 나라를 망쳤다”고 훈계할 정도였다(하야시 미나오 책 237쪽).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조상 제사를 모셔왔다.
『삼국사기』에는 유리 이사금 2년(기원 전 25) 2월에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낸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지배자는 따로 사당을 지어서 그들의 조상을 제사지냈다. 이것이 발전하여 조선시대의 종묘가 되었다. 수도가 정해지면 궁궐을 중심으로 해서 좌묘우사(左廟右祠)를 두었으니, 왼쪽(동쪽)의 종묘와 함께 오른쪽(서쪽)에 토지와 곡식의 신에 제사지내는 사직단이 있었다. 지금 종묘가 경복궁보다 동쪽에, 사직 공원이 서쪽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왕실은 그렇다 치고 일반인은 어떻게 제사를 지냈을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절에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보통 절에서 재를 올려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많이 하고 있는 49재는 불교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77재라고도 하는데, 7일마다 재를 올려 고인이 다음 세상에서 좋은곳에 태어나기를 비는 의식이다. 그런가 하면 초상화를 그려 절에 보관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인예태후의 상(喪)에 금나라가 태부감 완안고를 보내서 제사지내게 했는데, 장차 제사하려 할 때 그가 “태후의 화상이 앉아 있는가 서 있는가”고 물었다. “앉아 있다”고 답하니, 그가 “제후의 왕모(王母)가 앉아 있는데 천자의 사신이 절할 수 있겠는가. 영정을 감추어야 들어가서 제사지내겠다.”고 말했다.
이에 왕이 사람을 보내서 재삼 권유하자 이를 좇아서 왕은 마당에 서고 그는 건물로 올라가 재배하고 술잔을 올렸다(『고려사』지, 흉례)."


당시에는 영당(影堂)이니 진전(眞殿)이니 하는 건물을 지어 초상화를 모셔두었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다. 때로는 무당이 제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 차차웅(次次雄)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이 “차차웅은 방언에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고 말했다『( 삼국사기』남해차차웅)."


"병자일, 일관(日官)이“근래에 무당 풍속이 크게번져서 음탕한 제사가 날로 성하게 되니, 유사(有司)를 시켜서 무당들을 멀리 내쫓도록 하소서.”라고 아뢰니 조서를 내려 허가했다(인종 9년<1131> 8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가 아주 중요시되었다. 사대부의 기본 임무는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었다.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제사와 관련된 속담이 많은 것도 이를 반영한다. “제사보다 젯밥”“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듯” “제사를 지내려니 식혜부터 쉰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등등이 있다. 또 회갑상을 ‘산제사 받기’ 라 했으니, 제사상 올리듯이 생존하는 부모님께 음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명절이 거의 매달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설날, 한식, 단오, 추석으로 축소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설날과 추석만이 공휴일로 정해져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이래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면서 생긴 현상으로서, 그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 한다(주영하, 『그림 속의 음식, 음식속의 역사』사계절출판사, 162~163쪽).


다음은 조선사회가 어느 정도 예의를 중시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장령 장선징이 아뢰기를“낭선군 이우가 사촌 여동생의 상에 한 번도 찾아가 조문하지 않았고 상복도 입지 않았습니다. 예의를 멸시하고 행실이 없는 것이 막심합니다. 이밖에 평소에도 교만하고 패려한 태도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파직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징계하라고 명령했다(현종개수실록 5년 <1664> 1월 6일)."


예의를 차리지 않은 사람은 왕족이라도 관직에서 쫓겨날 수 있었던 사회였다. 문중의 제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하고 음복을 통해서 친족의식을 강화했다. 여기에 빠지는 사람에게는 징계를 하거나 아예 친족에서 제명시켜 버리기도 하였다.


조선초기까지는 피를 나눈 후손들이 돌려가면서 제사를 맡았다. 이를 흔히 윤회봉사(輪回奉祀)라고 한다. 재산상속 때처럼 남자이건 여자이건 아무런 차등이 없었다.

윤인미(尹仁美, 1607~1674년)의 처가인 전주 유씨 집안에서 4남 6녀가 4년 간 제사를 돌려지낸 것을 표로 만든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김경숙,「 기제사와묘제」『조선시대생활사』2, 74쪽).


4년 동안에 각 집에서 2~3회 정도의 기제사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담당 차례는 문건으로 만들어 두었다. 둘째 사위인 윤인미는 이미 사망했으므로 그의 자녀가 제사를 대신하였다.


표 1. 윤인미 처가의 기제사 차례


그런데 성리학 이념이 자리잡으면서 이 전통도 바뀌었다. 윤회봉사 대신에 장자봉사(長子奉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아들과 딸의 차별이 생기고 맏아들의 위상은 높아갔다. 딸은 결혼과 동시에 출가외인으로 취급되어 딸과 사위가 제사에서 배제되었고 외손봉사(外孫奉祀)가 금기시되었다.

제사를 맡은 맏아들에게 재산을 더 물려주면서 상속에도 차등을 두게 되었다. 제사를 받을 아들을 낳지 못할 여자는 칠거지악에 포함되어 죄인 취급을 받았던 것도 조선후기의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딸은 출가한 후에는 다른 집안사람이 되어서 남편을 따르는 의리가 중하기 때문에, 성인(聖人)들이 예법을 만들 때 차등을 두었다. 그런데 요즘 사대부집에서는 사위에게 제사를 돌려 맡기는 자들이 많지만, 사위와 외손은 제사를 빠뜨리는 경우가 많고, 제사를 지내더라도 제물이 정갈하지 못하고 정성이 부족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만 못하다. 사위나 외손에게 제사를 윤행시키지 말라(김경숙 글 79쪽 재인용)."


이것은 1669년 부안 김씨 집안의 분재문서 서문에 나오는 당부의 말이다. 사회가 변해가는 것을 느낄수 있다.


제사는 산소에 가서 직접 지냈으나 역시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사당 중심으로 바뀌었다. 왕실 사당은 종묘였고 일반인 사당은 가묘(家廟)라 하였다. 사당 안에는 초상화가 모셔졌지만 이 역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신주로 대체되었다. 조선후기에 와서 4대봉사가 일반화되면서 고조까지의 신주를 모셨고, 그 이상의 조상 신주는 사당에서 내와서 땅 속에 묻었다.


나무 신주에 혼령이 머문다는 생각은 중국 고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토지신을 모신 사(社)에는 그 지역에서 가장 잘 자라는 나무를 심어 토지의 신령이 머물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하나라에서는 소나무, 은나라에서는 잣나무,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처럼 나무에 신령이 깃들인다는 관념이 유교의 나무 신주로 발전하였다(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돌베개, 224쪽).

우리나라에서는 주나라때의 예법에 따라 밤나무로 만들었다.


"영흥과 함흥에 있는 본궁(本宮)의 옛날 위패는 종이로 바른 것이었는데, 임금이 밤나무를 보내서 바꾸도록 봉상시에 명령했다(숙종실록 5년<1679> 3월 3일)."


사실 제사상을 차리는 원칙인 홍동백서(紅東白西)도 중국에서 지방에 따라 생산되는 과일을 배치한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이이화, 『이이화의 역사풍속기행』역사비평사, 241쪽). 그러니 이제 와서 그것을 꼭 지켜야할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제사는 신주에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음은 중종과 신하가 논의한 내용이다.


… 유식한 집안일지라도 기제사를 사당을 세운 집에서 지내지 않고 지방(紙榜)만 써서 지냅니다. 또 제사를 맡고 사당을 세운 집이 곁에 있더라도 그 집에서 지내지 않으니 그 폐단이 큽니다. … ”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제사를 어떻게 신주에 지내지 않고 지방을 쓰는가?”라고 하였다(중종실록 12년<1517> 8월 7일).


이처럼 신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생활에서는 지방을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어머니 기일이다. 제사의 차례는 큰누님 댁이다.
일찍이 휘(큰형 아들)와 함께 청파동에 갔더니 염(작은형 아들)도 막 도착해 있었다. 바로 지방을 써서 제사를 거행하였다. 제사가 다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높이 솟았다. 지방을 사르고 제상을 거두고, 누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면서, 술도 한 잔 하였다(이문건 일기, 1545년 1월 5일 : 김경숙 글 74~75쪽)."


주인공은 어머니 기제사를 큰 누님 집에서 새벽에 지냈다. 그리고 신주를 큰형 집에서 옮겨가지 않고 지방을 썼다.


신주나 지방에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쓴다.

‘부군’은 아버지를 높이는 말이고 ‘학생’은 벼슬에 나가기 전의 선비 신분을 가리킨다.
평생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죽어서나마 한 단계 격상시켜주는 의미가 있다. 혼인 때에 신랑이 사모관대를 착용하는 것도 신분 격상의 뜻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에게 붙이는‘유인(孺人)’도 제일 낮은 품계의 벼슬아치 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필종부의 사상을 반영한다. 아버지 성함은 쓰지 않으면서 어머니는 본관과 성을 쓰는 것도 남성에 딸린 여성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이이화 책 242쪽).
‘현고’는‘훌륭한 아버지’란 뜻인데 원래는‘황고(皇考)’라고 썼던 것이라 한다.


" 이른바 황백부(皇伯父)란 것은 황제의 백부로서 황자(皇子)·황손(皇孫)과 같은 종류입니다. 후세에 황고(皇考)·(皇妣)라고 신주에 쓸 때의 ‘황’ 자는 ‘크다’는 뜻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위로 천자부터 아래로 서인까지 모두 사용하던 것인데, 원나라 때에‘황’자를 피하여 ‘현(顯)’ 자로 통용하게 되었습니다(선조실록 즉위년<1567> 11월 4일).


중국에서‘황’자는 원래 조상이나 하느님의 미칭(美稱)으로 사용되던 말로, 진시황이 이 글자를 차용해서‘황제’란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서민부터 천자까지 모두 ‘황’ 자를 쓰게 되어 참람되므로 후세에 와서 황자를 현자로 바꾸게 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신주는 목숨처럼 여겼다. 오희문이 전라도를 여행하다가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들었을 때에 걱정한 것이 가족과 함께 신주였다.


" 우리 아버님 신주는 동생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정결한 곳에 묻었으면 좋으련만, 만일 이를 모시고 떠났다면 온전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종가 선조의 신주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만일 버려두고 피난갔다면 반드시 불에 탔을 것이니 또한 민망하고 걱정스럽다(『쇄미록』임진남행일기)."


신주는 이처럼 중요시했다. 그러기에 소중하고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간직하는 모양을 일러서 흔히 “신주 모시듯”한다고 한다. 또“신주 개 물어 간다” 는 말이 있는데, 가장 소중한 것을 남에게 빼앗겨 딱한 처지가 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신주는 때로 목숨과도 바꿀 정도였다. 실록에는 불길에서 신주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종종 보고되고 있다.


"황해도 재령의 출신 최유상이 집에 불이 나서 허겁지겁 뛰어나오느라 미처 그 어미의 신주를 모시고 나오지 못했다. 유상이 거센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신주를 안고 나오다가 심한 화상을 입어 끝내 죽고 말았다. 도신(道臣)이 이를 보고하니, 정문을 세워주라고 명했다(현종실록 7년<1666> 3월 7일)."


사진 2. 전동성당의 윤지충 순교상


여기서 출신은 과거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천주학이 들어오면서 신주를 없애고 제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니, 당시 사회로서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행위가 천주교 신자에 대한 강력한 박해의 배경이 된셈이다. 다음은 윤지충 사건에 대해서 정조에게 아뢴 내용이다.


" 서양의 사악한 설이 언제부터 나왔고 누구로부터 전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힌 것으로 어찌 진산군의 권상연·윤지충 두 흉적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사당의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악을 따져 보자면 어찌 하루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용납해 둘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흉적을 고을 송사에 맡겨두는 것은 실로 형벌을 크게 그르치는 것입니다(정조실록 15년<1791> 10월 23일)."


진산군(珍山郡)은 현재 충남 금산군이다. 윤지충(1759~1791년)은 고종사촌인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어머니가 죽자 위폐를 폐지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고 하여 전주에서 사형을 당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가 되었고, 전주 전동성당에는 그의 순교상이 만들어져 있다.


신주를 위해 불속에서 죽은 사람이나 신주를 없애 사형을 당한 사람이나 지금 시점에서 보면 혀를 찰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니, 얼마전에 북한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그렇다. 사실 이 보도가 이 주제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난 8월 집중호우 때“평남 성천군의 광부 김승진은 집이 물속에 잠긴 상태에서 자식보다 먼저 초상화를 구했다”고 전했다. 또 강원도 화양읍 1,000여 가구의 주민들이 자신의 재산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를 먼저 꺼냈고, 봉포 협동농장원인 안성호는 초상화를 싸안고 나오다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평남 양덕 임업설계연구소 설계원 김덕찬은 산사태가 집을 덮치자 아내에게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먼저 건네고 자신은 흙더미에 묻히고 말았다고 전했다. 노동자 강형권도 물에 빠진 5살 딸을 버리고 초상화를 지켰고 산사태에 아내와 자녀를 잃으면서 초상화를 지켜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신주가 초상화로 바뀌기는 했지만,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지키고 그것이 칭찬이 되는 사회는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람 목숨을 버려두고 신주나 초상화를 꺼내게 만들었던 사회적 강박이 전율스럽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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