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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시마*이키섬 기행 중2편의 이야기에서는 이키섬의 "하루노츠지 유적"과 일본보리소주의 발상지인 이키섬의 "이키보리소주" 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안코쿠지<安国寺> 가는 길] 이키시 이키코쿠 박물관의 관람을 마치고 하루노츠지 유적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안코쿠지를 들렸다. 만요(万葉)공원을 꼭 들리고 싶었는 데,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꼭 알아야 하겠기에 어쩔 수 없이 이 만요공원의 주인공에 대한 사적자료 등을 살펴보았다.
학창시절 일본사를 관심있게 공부한 덕분에 기본적인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역시 비화(秘話)속의 스토리는 논문을 쓰듯이 알려고 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 자료 등을 살펴보니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린다.
마치, 한 편의 역사소설과도 같은 스토리를 전개해 본다.
만요공원은 이키섬 남서해안의 작은 언덕정도의 쿠로키(黒木)성터를 정비하여 조성한 공원으로 나라(奈良 ; 서기710~794)시대의 쇼무(聖武;701~756 , 토다이지<東大寺>의 창건자)천왕기인 서기 736년에 견신라사의 일원으로 나라의 도읍지인 헤이죠쿄(平城京)를 출발하여 신라로 가던중 발병(천연두)하여 이키근해에서 병사한 유키무라지야카마로(雪連宅満)의 묘가 있고, 또 동행하던 벗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만가(挽歌) 아홉 수가 만요슈(万葉集 ; 나라시대 말기까지 근 300여년간 귀족을 중심으로 여성, 농민, 군인 등 폭넓게 읊어진 약 4,500여수의 와카<和歌>가 20권으로 나뉘어 실린 가집<歌集>)에 실려 있는 데, 그 만가(挽歌)의 비가 이 공원에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유키무라지의 조상이 이 이키섬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 이키섬은 하나의 나라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자연적, 환경적, 지리적 조건 등이 잘 갖추어졌던 곳이었으므로, 역시 일본열도로 전래 혹은 전파되는 모든 문물과 문화는 이 섬에 먼저 도래하게 되었었다. 그 중에서, 구복(龜卜;거북이 등껍질을 불에 태워서 길흉을 점치는 기술)술이 중국대륙으로부터 일찍 전해져 나라의 조정에서는 이 곳 출신의 우라베(卜部 ; 역술인, 점성술가)를 으뜸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국가대사 등에서 이 우라베의 역할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는 데, 중앙에서 주요 관직의 하나로 두어 나중에는 그 관직명을 진기칸(神祇官 ; 제사와 전국의 코쿠분지<国分寺>를 총괄하는 직)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유키무라지야카마로의 선조(오시미노수쿠네<押見宿禰>;이키에 있는 츠키요미진쟈<月読み神社>를 쿄토의 마츠오타이샤<松尾大社>로 분사<分社>한 사람)가 그 우라베로 나라 도성의 관인이 되었다고 한다. 유키무라지야카마로는 역시 우라베의 자손이므로 그 관직을 이어받았는 데, 쿄토의 마츠오타이샤의 관리인(미야지<宮主>)겸 이키의 시마츠카사(島司;섬의 행정관리인. 그러나 실제로는 부임을 면제받아 직접 행정을 보지않았다고 함)였다고 한다.
유키무라지야카마로는 그러면서, 견신라사 일원(구복<龜卜> 역술인 ; 당시에는 배가 항해를 할 때에는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다)이 되었는 데, 불행하게도 신라로 가던중 배안에서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마치 신의 뜻인양 유키무라지야카마로는 자신의 선조 연고지인 이키섬에 뭍히게 된 것이다.
당시에 이 섬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인연 등 때문에, 그의 주검을 정중히 모시고 제사지냈을 것이라고 하는 구전의 이야기다.
그의 분묘가 12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를 또한 일종의 표류신으로 여기고, 특히 나쁜 유행성 병(천연두 등)을 막는 부적의 의미로의 신앙심 같은 것을 갖기도 하였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의 기일이 11월 8일이라 하여, 매월 8일에 이 곳 사람들은 소*말의 재앙을 막고 오곡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나의 생각은, 유키무라지야카마로가 이키섬 연근해에 이르기전 죽게 되었를 때에, 동료들에게 유언으로 "나의 선친의 연고지이니 나를 그 곳에 장사지내주게나" 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만요슈에 실려있는 그의 와카도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벗들의 만가(挽歌)를 한 수 읽어본다. 물론, 만요슈 중 권15번째에 실려있는 아홉 수중 한 수이며, 공원에 서있는 구비(句碑)의 내용이다.
”石田<いわた>野<の>に宿<やど>りするきみ、家人<いえびと>のいづらとわれを、問<と>わばいかに言<い>わむ ” ("이와타노니 야도리수루 키미, 이에비토노 이즈라토 와레오, 토와바 이카니 이와무")
현대어로 번역해보면, [이키의 이시타 땅에서 영원히 잠들게 된 벗이여, 귀국한 후에, 자네 가족(부인)이 "우리집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먼]이라는 뜻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이키섬이 "이키"와 "이와타"로 지명이 둘로 나뉘어 불리었다고 하며, 또한 "이와타"는 현재의 "이시타쵸(石田町)"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료에 따른 내용을 살펴보니, 당시에 이 일행이 신라에 도착은 하였지만, 신라의 왕은 만나지 못하고 추방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전 해에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냈었는 데, 신라가 임의대로 국명을 "왕성국(王城國)"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빌미로 신라의 사신이 추방당했던 일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의 한반도는 통일신라기 전후의 시기로, 일본의 아스카(飛鳥)나 나라(奈良)에서는 중국대륙의 당나라로부터 많은 문물과 문화를 수입하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그러기 위해서는 견당사(遣唐使)를 보내야 했는 데, 그들은 반드시 신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신라의 협조를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견신라사를 파견하였는 데, 서기 571년부터 882년까지 일본으로부터 견신라사(*순수한 견신라사 즉, 통일신라기에만 왕래한 것은 668년부터 779년까지라고 한다)의 파견회수가 45회 정도라고 한다. 물론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따른 내용이다.
자, 이정도면 이키섬의 "견신라사의 무덤과 만요공원"의 수수께끼는 풀렸다고 볼 수 있을까? 마치, 한 편의 박사논문이라도 쓴 듯한 기분이다.
하여튼, 렌트카는 움직이고 있다. 박물관이 위치한 낮은 구릉의 산 기슭을 오른쪽으로 구비돌아 5분도 채 안되어 좁은 논두렁같은 지름길이 있다. 그 길을 통과하니 안코쿠지(安國寺)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잠깐 주변을 돌아본다.
고풍스런 절 안쪽 6~7백년 되었다는 수령의 은행나무 아래서 잡초를 뽑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는 데, 마치 한 폭의 수채화같은 느낌이다. 인사를 하고서는 마당의 정원과 건물 등을 한 번 둘러본다. 대문 오른편의 크고 평평한 너럭바위 하나가 인상적이다. 마치 고인돌처럼 놓여 있다. 게시판을 읽어보니 그 돌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와 이곳으로 옮겨오기전의 있던 장소와 용도 등이 설명되어 있다.
저 옛날에는 불전앞에 연못이 있었는 데, 그 연못의 다리로 사용타가 연못이 물이 차서 넘치는 등, 그 용도가 쓸모없게 되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스님들 좌선석(座禪石)으로 활용하였다는 얘기다.
이 안코쿠지는 1338년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서기1305~1358, 카마쿠라바쿠후<1192~1338>를 멸하고 무로마치바쿠후를 세움)와 타다요시(直義;1306~1352, 무로마치 초대쇼군)는 원구(元弘)의 난(서기1331~1333년의 고다이고<後醍醐천황을 중심으로 한 카마쿠라바쿠후의 타도운동. 일종의 전란) 이후의 전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종래에 있었던 카이인지(海印寺)를 안코쿠지로 하였다고 한다.
무로마치(室町;서기1338~1491)시대의 귀중한 보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고려판대반야경"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보물창고는 문이 잠겨있어 보물은 보지 못하였다.
보물창고에 대한 궁금증을 가슴에 안은채로 다음 목적지인 하루노츠지로의 길을 재촉한다. 마당에서 묵묵히 제초일을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께 길을 물으니 정중하게 가르쳐 주신다.
[안코쿠지(安国寺)로 들어가는 정문]
[안코쿠지 본당의 모습과 정원 / 카레산스이(枯山水;한자말의 뜻대로 자연의 산과 물이 없이 인공으로 돌*바위와 모래를 이용하여 축소모형의 정원을 꾸미는 일본 전통의 정원형식)식 정원형태로 쿄토의 료안지(竜安寺)의 정원을 떠올리게 하는 괜찮은 분위기의 정원이었다]
[안코쿠지 보물전시관 / 당일은 문이 닫혀있어 보지 못하였다]
[야자수 옆으로 놓여있는 커다란 너럭바위의 비화가 있어 촬영해 봤다. 스님들 좌선(座禅)을 위한 바위였다고 한다 / 한 때는 산몬마에(三門前 ; 이키시 지명)의 교량용으로도 쓰였다고 하는 데, 그에 따른 전설이 있다고 한다]
[*** 후카에진쟈(深江神社)앞의 어느 밭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 데, 원래는 절의 불전앞에 연못을 만들고 그 위의 돌다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물이 넘치는 등 연못의 기능을 못하여, 연못을 메우고 지금의 자리로 이 돌을 옮겨서 스님들의 좌선석(座禪石)으로 이용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 하타호코(幡鉾)강 북쪽의 사루코부치(皿川淵)라는 곳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산몬마에(三門前)라는 곳의 돌다리로 사용하였는 데, "사루코부치의 캅파(河童;물속에 산다는 어린애 모양<인어공주상>의 상상의 동물)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돌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였다"는 전설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불교경전인 "고려판대반야경(高麗版大般若経)"이 이 절의 보물창고(위의 사진)에 전해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591첩이 전해지는 데, 그 중 219첩은 고려국에서 목판인쇄된 것으로, 서기 1046년 4월로 기록된 것이 6첩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고련전기 판본인 대반야경이 이와같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동양의 인쇄역사상 주목되는 유물이란다. 나머지 372첩의 복사본은 남북조(南北朝;무로마치시대 초기) 시대의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 그런데, 서기 1994년 9월에 493첩이 이곳 보물전에서 도난당했다고 한다.
[하루노츠지(原の辻) 가이던스(Guidance)] 안코쿠지(安国寺)를 출발하여 2~3분여를 달렸을까, 조그마한 다리가 하나 보이고, 다리 건너편에는 넓은 주차장과 체육관같은 큰 건물이 보인다. 건물의 입구 맞은 편으로는 하루노츠지 유적지가 보인다.
다리는 하타호코하천을 가로지르는 약 4~50m정도 길이의 일반교량이다. 다리를 건너니 곧바로 오른편으로 하루노츠지 가이던스 주차장입구이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건물 입구쪽으로 다가가니 정면으로 보이는 "하루노츠지 가이던스(春の辻ガイダンス)"라는 건물명칭중 "가이던스(ガイダンス;Guidance)"라는 외국어 표기가 돋보인다.
순수 한글사용이나 한글표기를 강조하는 우리와는 대조적인 부분의 한 예이다. 여기서의 외국어표기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듯 하다. 먼 옛날과 현대의 역사적 원근감(遠近感)이 보다 확연해지면서 이 곳의 역사적 의미를 좀더 부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언어적 표현기교"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다.
사실, 일본은 외래어나 외국어 사용이 우리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일본에서 얼마간 체류해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정서에서 이런 현상을 얘기하면 상당한 시각차를 엿볼 수 있겠지만, 나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시비를 논하는 것보다는, 장단(長短)의 판단을 각자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좋지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나친 상상은 생두통의 근원이라. 각설(却說)하고, 다음으로 스토리를 잇는다.
건물정면의 출입구 한쪽으로는 임대용 자전거 몇 대와 장식된 목조상징물이 하나 놓여있다. 관광마차였다. "야요이유메(やよい夢; 야요이 꿈마차, 즉, 발굴된 야요이 유적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는 데, 이 마차를 타고 BC2~3세기부터 AD1~2세기경의 야요이시대를 상상하며 찰나적 꿈속의 시간을 여행해볼 수 있는 마차라고나 할까? )"라 이름 지어진 행사용 마차인 듯 싶다.
궁금한 것은 미뤄둔 채로 건물내로 들어서려니, 임대용으로 준비해 놓은 자전거가 시선을 끈다. 고개숙여 가까이 보니, 특이한 무슨 장치가 페달기어부분에 장착되어 있다. "인텔리전트 & 플렉시블 에너지 시스템(Intelligent & Flexible Energy System)"이라는 지능형 유연에너지 발생공급장치였다. 일본의 "야마하"라는 회사의 로고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영문으로 적혀있는 장치이름을 머리속에 되뇌이며 생각해보니 장치의 개요가 대충 짐작이 간다. 일반 자전거에 너무 고급스런 장치가 달려있는 듯 하여 자세히 살펴봤는 데, 예전에 많이 보았던 소형엔진자전거의 진보된 형식의 전기축전지식 자전거라고 이해하면 될까? 다만, 충방전의 지능성 기능을 보완한 전자회로식 전기자전거임이 관심의 촛점이겠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발명과 발견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사람마다 관심분야는 제각각이겠지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여행의 참맛을 느낀다.
관심의 자전거에 대한 궁금증이 어느정도 풀렸을까, 이제 현관문을 열고 건물안으로 들어간다.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우리를 맞이하는 환한 미소의 여성 가이드가 테이블의자에 앉아있다. 관람티켓을 사려고 하니까, 무료라며 안내자료를 소개하면서 관람실을 안내한다.
관람실은 실내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어 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은 기념사진부터 부탁하여 한장 찍고서는 전시물을 둘러본다. 사진촬영이 가능한가 싶어 물으니, 가능하단다. 전시물의 양이 과히 많은 것은 아니기에 거의 모두를 카메라에 담고서 특징적인 것을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본다. 하루노츠지 유적지의 발굴과정과 발굴에 사용된 도구 및 측정계기류, 그리고 그에 따른 주요 촬영사진 등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건물의 명칭 그대로 "하루노츠지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안내하는 방인 것이다. 즉, 이 "하루노츠지유적"이 일본의 타이쇼(大正;서기1912~1925)시대에 향토사학가 마츠모토(松本友雄)씨 등에 의해 발견되고 학계에 보고된 이래로 꾸준히 발굴이 이루어졌는 데, 1980년경부터는 본격적인 발굴이 계속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러한 발굴과정과 결과물 등에 관한 주요 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시관으로 꾸며진 것이다.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유적지를 발굴하고, 또 그 유지를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과 수고와 비용이 필요하였을 것인 데, 그러한 내용들을 대충 보고 실감하니 감회가 새로울 따름이라.
이제, 전시관을 나와 건물복도를 따라서 가이드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보니, 마치 학교의 어린이 과학실험실 같은 방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방의 가운데 공간바닥에는 넓게 자리가 깔려있고 몇 개의 똑같은 유형의 도구와 함께, 한 쪽 모서리 쯤에서는 사이좋게 보이는 남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야요이 시대의 마제(磨製)석기 장식물을 만들고 있으며, 목걸이용 옥을 다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저쪽으로 여러대 놓여있는 도구는 성냥과 라이타 등이 나오기 전의 시대에 불을 일으키기 위해서 고안되어 사용되었던 도구이고, 내방객들을 위한 체험도구라고 한다.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서 형님은 저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각각의 장면을 연출하니 제법 재미가 솔깃하다. 가르쳐 준대로 하면서 형님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제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 역시도 연마의 장면을 연출하며 사진의 모델이 되어본다.
웃음띤 분위기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야요이목걸이를 보여주는데, 갑자기 기념으로 갖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얘기를 하니, 고개를 갸웃하면서 미소로 응답한다. 다만, 만들어 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새 만드느냐고 물으니, 다듬어진 옥에 끈매듭만 하면 된다면서 금새 숙련된 모습으로 이쁘게 매듭된 야요이 목걸이를 하나씩 만들어서 준다. 이쁜 아가씨한테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았는 데, 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주차장의 렌트카에 있는 베낭에서 마지막 남은 우리의 전통 젓가락 셋트가 마침 인원수에 맞아 가져다가 나누어 주니 좋아라 한다. 일본인들은 수저를 사용치 않고 젓가락만을 사용하니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일본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젓가락을 양복의 안주머니나 핸드백 등에 휴대하고 다니기까지 하는 데, 괜찮은 선물인 듯 하여 준비해온 것인 데,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에 나누어 준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한참을 재밌게 추억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 이 두 남녀 스텝은 체험교사인 것이다. 방문하는 내방객들에게 역사를 체험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서 그 방을 나와 복도 맞은 편 넓고 높은 공간의 방으로 들어간다.
천정도 높고 꽤 넓다. 이제야 체육관 형태로 지어진 건물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 쪽에는 무대장치가 꾸며져 있고, 무대 앞쪽으로는 관람객을 위한 의자가 상당수 놓여 있다. 그리고 무대 맞은 편의 절반 정도의 공간은 특산물 시장이었다.
상설무대로 꾸며져 있는 공연장소는 "이키카구라(壱岐神楽)"라고 하여, 이곳 이키섬에 전해지는 "신에게 제사지낼 때에 행하는 무악(舞樂)"으로, 지금은 8월 첫주말의 축제(마츠리)기간이나 특별한 행사시에 공연된다고 한다. "이키카구라"는 다른 곳과 좀 다르게 전해지고 있는 데, 1987년 1월에 중요무형민속문화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키카구라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제신(祭神)예능으로, 다른 지방의 카구라단원이나 카구라시(神楽師) 등이 연주하는 카구라와는 달리, 카구라 춤이나 음악 모두를 신관(神官;진쟈의 관리와 제사를 관장하는 사람)만이 연주할 수 있는, 매우 신성시하며 신앙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일본에서 카구라의 기원은 남북조시대(서기1336~1392년)쯤부터라고 한다. 고문서 등에 서기 1435년 경에 가무인원수 등을 기재한 내용의 문서들이 있는 것에서 무로마치(室町)시대의 초기에는 이미 행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 당시는 현재의 정형화된 모양의 형식이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 후로 신도식(神道式)으로 바뀌면서 점차 그 형식이 정형화 되어 현재에 전하는 카구라가 되었다고 한다.
이키카구라는, 그 규모에 따라서, 헤이(幣)카구라*코(小)카구라*다이(大)카구라*다이다이(大大)카구라 등 넷으로 나뉜다. 각각의 규모에 따른 연주곡목이 많이 있는 데, 너무도 구체적인 듯 하여 읽어본 것으로 만족한다. 다만, 이키카구라의 연주곡목중의 특징이 있는 데, 카미스모(神相撲)가 그것이다. 다른 지역의 카구라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곡예적인 연주곡목으로 사람의 시선을 끈다고 한다.
그리고, 부외로 "풍년(추수감사)춤"와 "풍어(豊漁;해상안전과 대어만족, 어업의 번영을 기원)춤"이 행해진다고 한다.
관객석이 3~40석은 될까? 비록, 이번에는 보지 못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어 올 때에는, 시기를 맞추어 꼭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맞은 편의 특산물시장을 둘러본다. 사고싶은 것도 많이 보이지만, 역시 여행중이기에 자제를 한다. 이곳의 명산인 과자류 2~3가지와 기념엽서를 한장 골라서 산다. 사고나서 잠시 쉬려고 하니까 판매도우미 아가씨가 "원두커피 한 잔 드릴까요?"라고 물어온다. 마침, 마시고 싶은 생각이 그윽했던 터라, 쾌히 응답을 한다. 잠시 후에 커피를 대접받았는 데, 너무 싱겁지 않냐면서 다시 한 잔 준비해 주겠다고 한다. 구태여 사양할 필요가 없으니, 잔을 받아들고 맛있게 마신다.
커피 맛이 왜 그렇게 꿀맛이던지, 구수한 향기를 맡으며 커피를 마시고, 잠시 대화를 나누다 시간을 너무 지체할 수 없어 밖을 나온다. 잘 마셨다며 고마움의 인사를 나누고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벌써 오후 3시다. 현관문 출입구 근처에 놓여있는 벤치에 전시관 가이드아가씨와 60세쯤 되어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 긴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지만, 본인도 약 30여년 전에 우리나라의 경주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키섬에 관한 좋은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마침, 마주보이는 "야요이 유메"관광마차에 관한 궁금한 것이 있어 물었더니, 알려준다. 축제나 특별한 행사시에 사용하는 데, 마차에 사람을 태우고 두 마리의 이키소가 끌는다고 한다. 추억의 마차위에 가이드아가씨와 함께 타고서 기념촬영을 하면서 잠깐의 행복감에 빠져본다. "우리 혹시 지금 허니문여행중 아니니?(ㅋㅋㅋ~~~)"
시간적으로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함께 한 시간동안 어느새 깊은 정이라도 들은 것 같은 느낌에 헤어짐의 인사가 좀 어색해진다. 내방객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었는 데, 비수기라 내방객이 없어서 꽤 심심할 것도 같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이제 "하루노츠지 가이던스" 건물을 나와 맞은 편에 있는 하루노츠지 유적지공원을 향한다.
[하루노츠지(原の辻) 가이던스(Guidance) / 하루노츠지 유적을 소개하고 안내하는 곳이다. 내부에는 유적전시관과 역사체험코너, 특산품 판매코너, 이키카구라(壱岐神楽;신에게 제사지낼 때 하는 무악<舞樂> 상설무대코너 등이 시설되어 있다]
[하루노츠지 가이던스 현관입구]
["야요이노유메(弥生の夢;야요이의 꿈)호"라는 관광마차 / 축제(마츠리)기간 등에 사용하는 데, 두 마리의 이키소(壱岐の牛)가 끌는다고 한다 / 이걸 타고 하루노츠지 유적지 공원을 한 바퀴 돌면은 저절로 꿈속의 야요이 시대를 마음 껏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노츠지 유적지 관람을 위해 준비해 놓은 유료 임대자전거 / 동력자전거라 사용하면 편리할 것 같았다 / 사용료는 1시간에 250엔이고, 건물안 특산품시장코너에서 접수를 받는다고 적혀 있다 ]
[무엇인가 복잡한 장치가 부착되어 있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인텔리전트 & 플렉시블 에너지 시스템(Intelligent & Flexible Energy System)"이라는 지능형 유연에너지 발생공급장치였다. 일본의 "야마하"라는 회사의 특허품인데, 전자회로를 채용하여 동력용 축전지의 충방전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특별하게 고안된 장치였다. 특히, 이륜차의 스쿠터 등에 많이 응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루노츠지 유적 전시관 / 입장은 무료였다. 하루노츠지 유적의 발굴과정을 자료화 하여 상세히 전시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충분치 않아 자세히 읽지는 못하고, 촬영이 허락된 곳이라 디카에 무조건 담았다]
[하루노츠지 유적지 일대의 축소모형으로, 주변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 전시관은 건물의 좌측 입구 넓은 홀 한칸으로 되어 있다. 실제의 발굴유물들의 다수는 박물관에 전시보존되고 있다 ]
[유적의 발굴조사와 발굴과정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시하고 있다. 사진의 아래 쪽에는 발굴에 사용된 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다]
[역사체험코너로 남녀 두 명의 스텝이 관리하며 체험교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야요이 시대의 마제(磨製)장신구 제작모습을 연상하며 준비된 재료로 실제 해보는 장면이다. 만들어 놓은 몇 점이 있어 선물로 하나 받을 수 있냐고 하니, 짧은 시간에 시연을 보이며 형님과 함께 각각 하나씩를 만들어 준다. 그런 아가씨스텝이 너무 이뻐서 마침 선물용으로 준비해온 전통 젓가락 셋트를 하나씩 선물했더니 좋아라 한다]
[하루노츠지 가이던스 역사체험코너의 체험교사 아가씨가 직접 만들어 준 일명 "야요이마제석목걸이"이다. 위의 사진은 아래 사진의 줄에 매달린 돌장식품을 갈아서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식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장식품을 끈매듭을 이용하여 목걸이로 만든 것이다. 이키섬에 오는 배 위에서 매듭에 관한 얘기를 잠깐 했었는 데, 여기서 바로 이 역사체험교사가 그 응용의 예를 직접적인 시연으로 보여준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꽃문양 매듭을 멋지게 만들어 보였다. 매우 의미있는 선물이었다]
[성냥과 라이타 등이 나오기 전까지 옛 날에 불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수직막대가 수평막대의 상하운동에 따라 회전을 일으키도록 고안된 장치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아래 판재에 까맣게 타있는 부분이 마찰열에 의해 슻으로 변한 모습. 형님의 시연모습이 아주 작품이다]
[이키카구라(壱岐神楽;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하는 일본 전통의 무악(舞樂)으로 각 지역마다 특색이 있다. 각종 악기의 연주와 춤으로 연출되는 데, 축제기간 등에 실제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무대는 상설무대로 항상 볼 수 있도록 오픈되어 있다. 무대 반대편의 공간은 특산물 시장코너이다]
*** 이키카구라에는 타이코하지메(太鼓始め)를 비롯한 칸파이(勧盃), 카미아소비(神遊び)등 약 32종의 상연목록이 있는 데, 규모별로 헤이(幣)카구라*코(小)카구라*다이(大)카구라*다이다이(大大)카구라로 나뉜다. 각 규모별로 위의 상연목록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다.
[특산물 시장코너로 이키의 다양한 특산물이 전시판매되고 있다 / 기념엽서 등 몇 가지를 구입하였더니, 판매 여직원이 원두커피를 아주 맛있게 서비스해 준다]
[전시관 가이드 스텝과 야요이유메호에서!!]
[하루노츠지(原の辻)유적지] 하루노츠지 가이던스관의 관람을 마치고 이제 유적지 공원을 돌아보기 위해서 서둘러 공원입구를 들어선다. 아직은 공사가 진행중에 있었는 데, 공원 안쪽은 낮은 구릉형태의 지형에 잔디가 넓게 덮혀있고 원시시대의 가옥구조물이 복원되어 제 모습을 찾고 있으니 제법 공원의 완성미를 엿볼 수 있었다. 옛날 야요이 시대의 가옥구조를 복원하여 당시의 왕도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충분치 못하여 부지런히 돌아보며 내외부 가옥모습을 일단은 카메라에 담는다.
맨 위쪽 구역에는 울타리가 하나 더 있는 데, 그곳은 신성한 곳으로 왕이 신께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가장 인접한 곳에는 왕의 주거지가 자리하고, 아래쪽으로는 곡식창고나 집회소, 외국 사절단의 숙소, 교역관의 숙소 등이 차례로 복원되어 있다. 300여미터 저 앞쪽으로는 하타호코 2급하천이 흐르고 있고, 그 건너편 약 3Km쯤 전방에는 우리가 들렸던 박물관이 보인다. 나즈막한 산속의 숲과 잘 어우러진 박물관의 건물과 전망대가 아주 보기에 아름답다. 카메라 줌으로 당겨서 찍으니, 한 폭의 작품사진이 된다.
하타호코천변 인근에는 그 옛모습의 선착장이 원형그대로 발굴되었다고 하는 데, 이 유적지발굴에서 그것이 말해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하겠다. 이곳 왕도를 둘러쌓고 다중(多重 ; 외호와 내호 등)으로 구축되어 있는 환호(環濠 ; 외부침입을 막기위해 만들어 놓은 호로 물이 흐르도록 되어있다)의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모양이다. 하타호코천변을 마주하는 방향으로 파수병 망루가 높게 세워져 있는 데, 그것만 보아도 이 왕도의 야요이시대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넓은 야요이시대 왕도 "하루노츠지"공원을 단숨에 돌아보려니, 이제 발바닥이 땀에 젓는 듯 하다.
잠시 한숨을 돌리며 하루노츠지 유적지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그러니까, 이 "하루노츠지(原の辻) 유적지"는 기원전 2~3세기부터 기원후 3~4세기에 걸쳐서 형성된 대규모한 다중환호(多重環濠) 집락지로, 아시베쵸와 이시타쵸에 걸쳐있는 대지를 중심으로 동서, 남북 공히 약 1Km 사방으로 펼쳐져 형성된 것이다. 헤이세이(平成) 7년(서기 1995년)에 하루노츠지 유적은 "위지왜인전" 속의 이키코쿠(一支國) 왕도로 특별지정되었다. 현재도 발굴조사 도중이라서 일본의 고대사를 새로이 써야할 만큼의 발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야요이 시대의 유적에서는 중국의 청동제 거울*마차의 부속품*동전*조선반도 제조의 기와질 토기류나 구리소재*일본열도 각지로부터의 토기류 등, 일본열도와 중국*한반도와의 중계지로써 교역이 왕성하게 행해졌음을 증명하는 유물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최근에는 진멘세키(人面石 ; 사람의 얼굴모양으로 다듬어 만들어진 석조물)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뭉크(Edvard Munch ; 서기1863~1944, 노르웨이 출신의 19~20세기 표현주의 화풍의 화가로 "외침"의 작자로 유명하다. 현재 1000노르웨이크로네 지폐에 그의 초상이 도안될 정도로 노르웨이의 국민적 작가였다)의 그림같은 독특한 것으로 3~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란다. 또, 대저울(사오바카리<棹秤>) 에 사용하는 저울추(오모리<錘>) 같은 것이 출토되어, 이것이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기존에 7세기로 되어있던 최초도량형정비시기가, 이보다 400년 이상이나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물적인 교류만이 아닌 문화의 교류도 이루어졌는 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뼈를 이용한 길흉을 점치는 "복골(卜骨)문화"가 있다.
이 하루노츠지유적의 형성은 기원전 2세기경에 새로운 해상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많은 해녀(海女; 남녀해녀의 통칭)들이 이키섬에 건너와 정주를 시작한 것이 그 시원이라고 한다. 물론, 그 정주인들은 왜인(倭人;일본인의 구칭)들만이 아니라 조선반도로부터의 도래인도 가세하여 구릉부에 생활의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릉부의 주변에는 환호를 파고, 선단부에는 거주구역을 조성하였으며, 구릉의 북서부 저지대(천변인근구역)에는 선착장을 구축한 것이다. 묘역은 환호의 바깥 멀리에 계획적으로 배치하는 등, "해상의 야요이도시"로서의 기능을 겸비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하루노츠지유적은 동아시아의 대륙이나 조선반도 등과 일본본토를 잇는 교류와 교역의 거점으로 번성한 것이다.
기원전후(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저지대에 조성했던 선착장과 환호가 메워지고, 이를 계기로 더욱 강인한 다중의 환호를 다시 파고, 구릉의 중심부(현재의 복원지)로 거주구역을 옮김과 동시에 중심부의 가장 높은 곳에 제의장(祭儀場)을 만든 것이다. 다시 판 환호에 맞춰서 묘역도 더욱 바깥쪽으로 넓혀져 가게 된다.
이러한 재정비 과정을 통하여, 하루노츠지 유적은 "해상의 야요이도시"에서 "해상의 왕도(王都)"로 탈바꿈을 꾀하여,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기록된 "이키코쿠(一支國)"의 왕도로서 교역*교류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게 된다.
이렇게 번영이 극에 달한 왕도도, 야요이 시대에서 고분시대로 시대가 변하면서 "해상로"가 크게 변하게 된다. 그럼과 동시에, "교역의 거점"에서 "교역의 중계점"으로 바뀌어 교역의 거점집락지로서의 기능을 일어가게 된 것이다.
헤이세이 12년(서기 2000년)에, 이곳 하루노츠지 유적은 야요이 시대의 것으로는 일본 국내에서 세 번째(시즈오카켄의 토로<登呂>유적지<1943년 발굴>, 사가켄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지<1986년 발굴>) 로 국가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럼과 동시에, 유적지 일대의 공원화 조성이 진행되고, 나가사키현립 매장문화센터 이키시립 이키코쿠박물관 건립이 함께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써, 이키섬은 명실공히 작은 섬 규모에 걸맞지 않는 역사유적 도시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재밌는 것은, 왕도 유적지에 여러채의 야요이식 건물이 복원되는 데, 하나의 건물에 들어간 비용이 엔화로 약 150만엔(한화 약 2,100만원)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쯤이면, 하루노츠지유적을 찾은 보람은 갖게 되는 것일까?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하루노츠지공원를 다시 나와 하루노츠지 가이던스 주차장을 향한다. 주차장에 이르기 전에, 잠시 하타호코천을 들른다. 우리가 지나오면서 통과한 교량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천변 주위의 자연경관을 살펴본다. 흐르는 물은 얕았지만, 제방의 높이가 상당한 것을 보니 우기에는 꽤 많은 양의 물이 흐른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 같다. 넓은 평야가 형성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하타호코천의 덕택인 것이다. 이 이키섬에서는 타니에천(谷江川; 카츠모토쵸와 아시베쵸 지구를 동쪽으로 흘러 현해탄에 면하는 아시베항으로 이어지는 2급하천으로 하타호코천에 이어 두번째로 큰 하천이다)과 함께 중요한 수원지 역할을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하타호코(幡鉾)천은 코우치천(河內川)이라고도 불리는 데, 수원지의 표고는 135m로 아시베쵸 유타케(湯岳)지구의 서쪽에 있는 호코노키야마(鉾の木山)라고 하는 산이다. 수원지의 표고가 낮기 때문에 구배도 완만하고, 유역의 대부분이 표고 50m이하이다. 코우치(河內)분지에 형성된 후카에타바루(深江田原)평야 뿐만 아니라 천변을 따라 거의 전역이 수전(水田)으로 이용되어 이키섬 최대의 곡창지이다. 본류(本流)에 비하여 유역면적이 비교적 넓고, 내린 비가 동시에 하천으로 몰리는 데, 게다가 흐름이 완만하고 구비가 많은 탓으로 유역에는 홍수가 빈발하였다. 서기1952년부터 1959년까지 경지정리사업에 수반한 하천개수공사가 이루어지므로써 하타호코천은 직선화가 이루어졌다. 서기1992년부터 2004년에도 하천개수공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그런데, 거듭되는 하천개수공사로 원래의 담수어종 등이 그 개체수를 일어 지금은 거의 재래담수어종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하루노츠지 유적이 위치하는 곳은 이 하천의 하류유역에 속하는 것이다.
하여튼, 이 조그만 섬에 이렇게 넓고 좋은 옥토평야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신통하고 기이할 따름이다.
감탄사를 거듭 자아내며, 점점 지는 해를 아쉬워하면서 우리는 또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하여 차에 오른다. 좋은 여행은 이렇게 배고픔도 잊게 하는 것일까? 역시, 여행은 철학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갈구한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이럴땐 시간을 잡아두는 요술좀 부릴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일 뿐이다.
[하루노츠지 유적지 공원전경 / 항공사진을 촬영할 수 없으니, 가이드북에 있는 사진을 디카로 촬영하여 올려봤다. 유적지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봐야 어느 정도 실감이 날테니 말이다. 사진의 번호에 따라 설명을 부연해 본다]
-. 이키코쿠(一支國)의 거점이었던 하루노츠지 중심지역을 복원한 것이다. 17개동의 건물에 각각의 풍정을 상정(想定)하고, 실내에는 그 풍정을 이미지화 한 시설을 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 소형 고상(高床)식 창고군(1) - 제사에 사용하는 식재료를 수납하기 위한 소형 창고로 상정하였다. 측면은, 통풍이 잘 되도록 널판벽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 왕의 주거 - 제례의식 장소에 인접하는 대형의 수혈(竪穴)식 주거였던 점으로부터 이키코쿠의 왕이 생활했던 주거지라고 상정하였다. 실내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거울과 검 등이 비치되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3. 주 제의전(祭儀殿) - 제사의식을 행하기 위한 건물로 이키코쿠를 위하여 왕이 신과 대화하는 의식을 행하던 건물로 상정하였다. 하나의 통나무를 재단하여 만든 외향(外向)열림식 쌍문과 마루판횡목받침재(마루의 널판하부를 횡으로 지지하는 각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 특징이다.
4. 단층집의 행랑전 - 주 제의전과 주축(主軸)을 거의 같게 하여, 주 제의전에서의 의식을 위하여, 왕이 몸을 청결히 하고, 예복을 갖춰입는 부속건물로 상정하였다. 내부에는 목판의 마루방과 맨흙의 황토방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5. 곡물창고 - 수확한 쌀과 보리 등을 보관하는 곡물창고로 상정하였다. 실내는 곡물의 양에 따라 공간의 조절이 가능하도록 방구획을 설정해 놓았다. 곡물창고이므로 쥐 등의 침입방지 장치를 창고의 기둥마다 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6. 역관의 집 - 제의장의 동쪽에 위치하는 원형평지식 입벽(立壁)건물로, 한국의 남해안 지역에서 엿볼 수 있었던 주거구조와 유사한 것에서, 중국이나 조선반도와 왜나라의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도래계의 통역관과 그 가족의 주거지로 상정하였다.
7. 사절단의 숙소 - 제의장의 동쪽에 위치하는 대형의 평지식 방형 입벽(立壁)건물로 교역사의 집과 같은 식으로, 섬밖으로부터 이키코쿠를 방문한 사절단의 별채 숙소동으로 상정하였다. 남쪽면은 삼나무 껍질을 이용한 착탈식 문의 출입구와, 창문이 1개소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8. 파수병초소 - 제의장의 동쪽에 위치하고, 망루와 인접하는 타원형의 평지식 입벽건물로 병사들의 대기장소로 상정하였다. 내부에는 무기*무구 외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과 식료, 장작, 의류 등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9. 망루 - 제의장의 동쪽에 위치하는 가로세로 각 2칸의 전(全)기둥의 건물로, 취락지의 동쪽인 하타호코(幡鉾)강의 하구언방면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로 상정하였다. 당번의 병사가 감시근무중에 무언가 이상증후를 발견했을 때에는 울림목판으로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10. 교역사의 집 - 제의장의 동쪽에 위치하는 대형의 평지식 방형 입벽건물로, 교역을 관장하는 자와 그 가족이 생활했던 집으로 상정하였다. 대형이었던 점에서 섬밖에서 이키코쿠를 방문한 사절단의 별채 숙소동으로도 사용되어, 벽쪽으로 깔개를 펴는 방식으로 숙박하였으리라 여겨진다.
11. 교역물 창고 - 인접한 장소에서 사오바카리(棹ばかり;대저울)의 추인 켄(権;저울추)이 발견된 것에서, 교역물품을 수납하기 위한 창고로 상정하였다. 철기의 소재(판상<板狀>쇠도끼), 청동기의 소재 등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12. 촌장의 집 - 제의장 북쪽에 위치하며, 집회소로 상정되고 있는 대형 입벽건물과 쌍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집회소를 관장하고 민중을 통합하는 역할인 마을의 지도자적인 사람(촌장)이 생활한 주거지로 상정하였다. 삼나무 껍질을 이용한 착탈식 문이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13. 집회장 - 제의장의 북쪽에 위치하는 대형 평지(平地)식 입벽건물로, 농업과 어업 등 다양한 직종의 우두머리들과 이키코쿠 주거인들이 모여서, 서로 대화하며 전통을 육성해온 집회장으로 상정하였다. 내향열림식 문과 창문을 1개소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14. 사절단 하인의 체류장 - 사절단장의 체류장에 인접한 수혈(竪穴)식 주거로, 사절단장의 하인들이 체류한 숙소로 상정하였다. 하인은 사절단장의 심부름과 호위 등을 행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15. 사절단장의 체류장 - 일반적인 수혈식 주거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게 크고, 또 취락지의 중심에 위치하는 점에서 외국사절단을 영접하는 장소와 그 사절단의 우두머리들이 체류한 건물로 상정하였다.
16. 사절단용 식재창고 - 사절단장의 체류장에 인접한 고상식 건물인 점에서,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집기장식류와, 사절단이 휴대하고 온 것 등을 보관해두는 창고로 상정하였다. 토벽의 고상식 창고로 쌍문개방식의 문이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17. 소형 고상식 창고군(2) - 제사에 쓰이는 제기(祭器)류를 수납하기 위한 소형창고로 상정하였다. 내부에는 제사때에 사용하는 조리용구*식기*예복*장식품*악기*제기 등이 보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루노츠지 유적지에서 발굴된 중요한 유물]
-. 하루노츠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내심 관심을 안가질 수 없다. 그 중에는 일본의 역사를 새로이 고쳐써야 할 정도의 중요한 것도 있다고 한다. 진멘세키(人面石;사람 얼굴모양의 석제유물)나 켄(権 ; 대저울의 추)이라고 하는 유물이 그것이다. 아직은 정확한 것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에 밝혀지면 일본열도에서의 도량형정비시기가 40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된다고 한다(현재 일본의 도량형정비시기는 AD7세기로 되어있다). 이 얼마나 획기적인 역사적 이벤트인가? 여기서는 그들을 포함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점을 열거해 본다.
1. 카센(貨泉) - 중국에서 통화(通貨)로 사용되었던 금(金 ; 서기 14년 주조)이다. 야요이 시대의 왜나라는 통화에 따른 교역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대륙으로부터 "통화"로써가 아니고 "교역품"으로써 유입된 것이다. 그 밖에도 고슈센(五誅銭 ; 기원전 118년 주조, 서기 40년 재주조)과 타이센고쥬(大泉五十 ; 서기 7년 주조) 등의 통화도 하루노츠지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2. 조선계 무문(無紋)토기 - 조선반도에서 제조된 토기다. 몸통부에 부착된 소뿔같은 형태의 손잡이 등, 야요이 토기에 없는 특징도 지닌다. 그 밖에도 원과 삼각형의 점토가 첨착된 무문토기와 동굴식 가마를 사용하여 제조된 기와질 토기와 도질(陶質) 토기 등 회색이면서 경질의 토기도 발굴되었다.
3. 진멘세키(人面石) - 사람얼굴 모양으로 만들어진 석제유물이다. 노르웨이의 화가인 뭉크가 그린 "외침"과 닮았다. 눈은 반쯤까지 파여지고, 입은 머리 뒤까지 뚤려있다. 눈썹과 코 등은 가는 선으로 조각하여 얼굴을 표현하고 있다. 조상신에게 기도를 올릴 때에 이 진멘세키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4. 나이코카몬(內行花文)거울 - 전한(前漢)시대 말이나 후한(後漢)시대 초에 중국에서 제작된 청동거울(기원 전후~1세기 전반)이다. 야요이 시대의 청동거울은, "위신구(威信具 ; 위엄과 신망을 나타내는 소장품)"의 하나로써 힘있는 자가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도 호카쿠키쿠시신(方格規矩四神)거울, 타츄사이몬(多チュウ細文)거울, 쥬타이(獸帶)거울 등 여러가지 청동거울이 발굴되었다.
5. 코코야시(코코야자)피리 - 남쪽 섬으로부터 해류를 타고 떠내려온 코코야자의 열매를 가공하여 만든 악기다. 표면의 중앙에 크기 2~3밀리미터 정도의 구멍이 4개, 표면 윗부분에 같은 크기정도의 구멍이 2개 남아있다. 야요이인의 풍요로운 감성과 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복코츠(卜骨;점뼈) - 점에 이용된 사슴이나 멧돼지의 어깨뼈를 복코츠(卜骨;점뼈)라 부르고, 열(熱)을 낸 나무막대를 점뼈에 갖다대어 뼈에 금이 생기는 모양을 보고 그 일의 길흉을 점쳤다. 나라의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나 풍어풍작(豊漁豊作) 등을 점칠 때에 이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7. 켄(權 ; 저울추) - 대저울의 추로 켄(權)이라 불렀다. 통화(通貨)라는 개념이 없는 물물교환의 사회에서, 교역을 원할하게 행하기 위하여 이용되었다. 대저울로는 무게를 중요시하는 적은 양의 귀중한 것을 저울에 매달고, 저울대의 끈을 들어올려서 저울추의 무게와 균형을 맞추는 식으로 해서 물건과 물건이 교환되었다. 교역을 행하는 시장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켄(權)은 "권력(權力)'의 어원이 되었다.
8. 포경선각토기(捕鯨線刻土器) - 고래와 배의 선각화(線刻畵)가 그려진 옹기다. 고래의 선각화에는 작살이 고래에 여러개 꽂혀있듯이 보이기도 하여, 고래를 포획하고 있는 장면으로 여겨진다. 토기에 사슴과 사람의 그림이 선각으로 그려진 예는 많이 볼 수 있지만, 고래와 배를 선각으로 그린 예는 매우 드물다. 바다로 둘러쌓인 이키섬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선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루노츠지 유적지공원의 야요이시대의 재현모습 / 아직은 진행형이라고 해야겠다 / 위인왜인전의 이키코쿠(一支國) 도읍지의 중심구역이다 / 가장 높은 곳에 의식을 치르는 장소가 있고, 왕의 주거, 외국사절단 영빈건물, 상류계급층의 주거 등이 재현되어 있다 / 사진의 야요이시대 가옥 한 건물의 건축비용으로 150만엔(한화 약 2천만원)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야요이 시대의 재현가옥구조를 촬영해 보았다 / 그중 일부이다 / 외관의 모습]
[각각의 가옥 입구에는 이처럼, 푯말로 설명해 놓았다 / 이 가옥은 왕의 주거다]
[내부의 모습은 각기 신분이나 용도에 맞게 꾸며놓았다]
[교역(交易)창고 / 외국이나 일본 본토와의 교역을 위한 교역품의 창고다 / 철의 원료, 비단, 약초 등이 있었다고 한다]
[교역사의 집 / 외국과의 교역일을 도맡아서 하는 교역사의 집이란다. 사절단의 교역사를 맞아들여 거래상담 등 정보교류를 행하였다고 한다 ]
[집회소 / 농업이나 어업 등 각 영역의 장(長)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장소]
[하인의 집 / 외국에서 온 사절단장의 하인들이 머무는 집. 이들은 주로 사절단장의 심부름이나 호위역 등을 하였다]
[파수병초소 / 망루의 파수병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아 경비에 임하는 병사들의 대기초소다]
[역관의 집 / 외국사절단과의 의사전달역을 해주는 통역관이 머무는 집이다. 도래인이나 그의 자손들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사절단용 창고 / 영빈건물에 체재하는 사절단장을 위한 창고로, 외국에서 들어 올 때에 휴대품으로 가지고 온 물건을 보관해 두는 창고다]
[부속전 / 주제의전에서 행하는 축제나 의식행사에 임하는 왕이 몸을 청결히 하고 예복을 갖춰입는 장소다]
[사절단의 숙소 / 중국대륙이나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사절단의 상급자가 머무는 숙소다]
[식재료 창고 / 축제나 의식에 공양할 제사음식 재료를 저장해 두는 창고. 특히, 엄선된 수확물과 술 등을 두었다]
[촌장의 집 / 촌장은 사람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한다. 이웃의 집회소를 도맡아 관리한다]
[토기부지 / 일반 토기와 석기 등과 함께 축제에 사용된 토기가 이곳에 고스란히 버려져 있는채로 발견된 장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제의장(祭儀場)구역은 울타리로 구분되어 있는 데, 그 입출구의 재현모습이다]
[하루노츠지 유적지로부터 올려다 보며 멀리서 촬영한 "이키시립이키코쿠박물관"의 모습이다 / 박물관이 소재하는 낮은 구릉의 산은 오츠카(大塚)산이라 하고, 오츠카야마 고분의 소재지이다]
[하루노츠지 유적지 앞으로 흐르는 하타호코(幡鉾)천의 모습(하류쪽) / 얕게 흐르는 물과 잘 정비된 하천의 모습]
[하타호코천의 상류쪽 모습 / 좌측으로는 박물관의 전망대가 보이고 강의 오른쪽이 하루노츠지 유적지이다. 다리위에서 촬영하였다]
[인도지(印通寺)항] 하루노츠지 유적지 공원을 출발하여 이키섬 남서쪽에 위치한 인도지항을 오는 길은 농촌의 모습 그대로에 현대화된 가옥구조 등 잘 정비된 도로가 어우러져 살기 좋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연출한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인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 ; 1923~1996, 본명은 후쿠다테이이치<福田定一>, 소설가, 논픽션작가, 평론가)씨가 서기1985년경에 쓴 "이키*츠시마 가는 길(壱岐*対馬の道<'길을 가다/街道をゆく'의 시리즈>) "에서는, 이곳 이키섬의 풍경이 매우 옛스럽고 시골스럽게 묘사됨을 엿볼 수 있었는 데, 오늘 내가 보는 이키섬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매우 현대적이고 평화스러운 지상낙원처럼 보였다. 싱가폴의 센토사섬이 잠시 머리속에 덧그려지기도 했는 데, 다름아닌 모노레일 때문이다. 1990년도에 센토사섬에 갔었을 때에 모노레일을 타고 섬을 돌아본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 데, 철도가 없는 이곳에 그러한 모노레일 교통계획을 세우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물론, 센토사섬에 비하면 이키섬은 턱없이 넓은 섬지역이지만, 특별히 고산지대도 없을 뿐더러, 섬 전체가 역사유적의 보물과 다름없기 때문에, 관광시설 차원에서 그러한 교통편의를 마련해 보는 것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수요가 경제적 타산성에 얼마나 부합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하여튼, 이러한 재밌는 상상을 할 수 있으리만큼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섬임에는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런 저런 상상속에 인도지항이 속해있는 이시타쵸 중심가에 우리 차는 진입하고 있었다. 항구의 모습은 어느 도시나 비슷한 분위기를 띄우지만, 이 섬내에는 산업체가 집결되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기에 도시 자체가 평온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다른 일반적인 섬지역에 대하여 이키섬의 특징은 매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겠는 데, 대형 신축건물(항만의 훼리터미날 건물이 대표적이다) 등이 그에 대한 반증으로 도시발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도지(印通寺)항에서는 일본 큐슈북단 사가켄(佐賀県) 카라츠(唐津)시의 동항(東港)과를 잇는 훼리가 운행되고 있다. 훼리터미날 부두를 둘러쌓고 있는 방파제와 작은 섬 하나가 매우 돋보인다. 섬속의 작은 진쟈의 입구에 세워진 토리이가 항내의 분위기를 더욱 일본스럽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넓게 시설된 부두의 진입로 화단에 식재된 높이가 20~30m이상 되는 야자수와 터미날공원이 분위기를 더욱 상승시켜주는 데, 터미날에서 시내쪽을 바라보니, 바다위에서 유영하는 고래의 모습이 조형화된 지붕의 신축한 도서관건물이 한층 아름답다.
인도지항 전체의 모습을 상공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에 어떤 형태일까를 생각해 보았더니 오메가형태를 띠고 있었다. 훼리터미날 빌딩이 들어서 있는 일직선의 부두접안시설이 꽃술이라면 바깥쪽 타원형으로 에워쌓고 있는 주택가옥과 도로가 꽃잎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두의 훼리터미날 공원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인도지항의 항구적 특색을 감상하고서, 이제 시내 중심가의 우체국건물과 도서관건물을 양켠에 두고 그 사이를 통과하여 고노우라항 가는 길로 빠진다. 200여 미터쯤 지났을까, 도로 좌측으로 "토진가미(唐人神)"이정표가 보인다. 그 이정표를 보고서 300여미터를 진행하면서 창밖을 보니 해안을 매립하여 평탄하게 닦아놓은 부지가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다.
목적지인 토진가미는 그리 멀지않는 곳에 있었다. 역사유적지라기 보다는 그저 마을의 서낭당정도로 이해하면 될 정도로 조금은 초라한 모습처럼 보였다.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토진가미 유적지푯말과 주변을 잠시 둘러본다. 토리이를 지나 약간 경사진 협로를 타고 5m정도를 들어가니 곧바로 좌측으로 상징물들이 보인다. 조릿대나무와 잡목처럼 가지가 우거진 상당한 수령의 나무숲속에 둘러쌓인 비석림(碑石林)이 오밀조밀한 모습으로 작은 진쟈를 이루고 있다. 매우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남성성기 모양의 비석이다. 얼굴에는 재밌는 미소를 띄우면서 다른 비석의 비문을 보려니 그늘져 어둡고 침침하여 보지 못하고 한참을 멍한 모습으로 지켜보며 생각에 잠긴다. 사실, 겉으로는 "이것도 무슨 볼거리라고?"할 정도로 싱거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 장소의 유래 등의 내용을 알고나면 매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앞서 소개한 시바료타로 선생이 "이키*츠시마 가는 길(壱岐*対馬の道)"에서 언급한 내용을 잠시 빌려서 얘기해 본다.
이키에는, 당나라사람(토진/唐人 ; 실제로는 떠내려온 조선반도의 사람일 것으로 추정한다)을 제사지내는 곳이 많았는 데, 이것은 먼곳으로부터 온 손님을 신(神)에 가까운 존재로 숭배하는 민속이 서일본의 섬들과 바닷가 마을들에 있어왔다는 것이다. 시바료타로 선생은 향토자료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이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데, 연고불명의 조난자의 시체나 바다속에서 주워올린 돌들도 지방에 따라서는 에비스(恵比寿 ; 칠복신의 하나로 상가<商家>의 수호신으로, 오른손에 낚싯대를, 왼손에 도미를 들고 있는 신)라 부른다고 한다. 에비스가, 단순히 이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타지역으로부터 온 사람*시체*물건" 까지도 그 의미가 확대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그 지역의 생계의 수호신이 되어 복과 재물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토진가미도 그와 마찬가지의 신앙세계일 것이라는 얘기다. 이 토진가미의 유래는, 그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세경(서기1300~1500년경의 시기)에 젊은 당나라 사람(토진/唐人 ; 실제로는 떠내려온 조선반도의 사람일 것으로 추정한다)의 하반신이 해안가로 떠내려와, 그것을 이 지역의 어부가 장사를 치르고 제사를 모셨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표류해온 신인 것과, 연고불명의 조난자라고 하는 것에 영락없는 에비스신이라는 신비적 농도에 확신을 갖고, 게다가 당나라 사람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당연한 얘기가 아닐 것인가.
이 지역의 어부들은 이 무덤을 숭배하여 대어를 기원하였을 것이지만, 다만, 하반신뿐이라는 것 때문에, 그 후로 특별한 이익이 부가되어 차츰 그 정도(하반신 정도의 대어를 의미)만 되었다.
또, 안내게시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그 후로, 허리아래의 성기관의 병에 영험함이 있다고 하여 이 지역의 사람들이 이것을 성신(性神)으로 숭배하고, 메이지초기(1870년대 초반)까지는 참배자가 끊이질 않았고, 마침내는, 부부화합*좋은 인연*순산(順産) 등의 신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순산 혹은 남녀공히 성기관의 병의 성신(性神)으로 축시(丑時;오전1~3시)참배를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라는 내용이다.
시바료타로 선생은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에 지금에도 위의 내용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일본사회의 하나의 특징은, 원시사회 이후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한 편으로는 과학적인 사고가 이렇게까지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모순되는 것 없이 태연스럽게 동거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라고.
아울러, 다른 자료에서는 이 무덤이 소재하는 곳은 다소 높은 언덕배기인 데, 이곳 인도지항 부두의 신설공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바로 앞이 바다였고, 바다쪽으로 상당히 돌출되어 나와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주변의 대부분이 매립이 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얘기다. 이 얘기가 뒷받침을 하니, 무엇인가 실마리가 풀리듯이 납득이 간다.
섬지역 사람들의 민간신앙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엇인가 섬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문화적 단면을 엿볼 수 있었던 좋은 사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이제, 또 가야할 시간이다. 다음의 목적지를 향하여 귀여운 애마의 고삐를 붙들고 채찍을 해야만이 이같은 재미있는 전설적인 얘기들을 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다음에 갈 곳은 "이키보리소주"공장이다.
이키보리소주공장을 가기 위하여 부두 한 켠의 토진가미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와 평탄한 평야지를 통과하며 우리는 애마의 채찍을 열심히 가한다.
[인도지(印通寺)항 터미날의 모습 / 이키섬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사가켄의 카라츠(唐津)시의 동항(東港)간의 일반훼리가 운행되고 있다. 터미날 동편의 인근해안에는 나가사키공항과 연계하는 이키공항이 있다]
[인도지항구 공원의 잘 정비된 모습 / 곧게 뻗은 야자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도지항 터미날 맞은 편에 있는 작은 섬과 진쟈의 모습 / 천혜의 항구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큰 배는 출입하기가 어려울 듯 보였다]
[마린바루 이키*이시타도서관 건물 / 건물모양(고래가 유영하는 바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도지항 터미날에서 촬영하였다]
[인도지항 훼리터미날입구에 세워져 있는 이키섬 관광안내도]
[토진가미(唐人神)]
[토진가미(唐人神) 토리이의 모습 / 인도지항을 돌아나와 훼리터미날 건너편에 있었다. 토진가미의 앞쪽은 원래 바다였는 데, 항구개발과정에서 매립하였다고 한다. 토진가미는 약간 솟아있는 산모양인 데, 원래의 모습대로라면 앞쪽이 돌출되어 바다로 둘러쌓인 형상이었다고 한다]
[ 토진가미의 유래와 인도지항 포구주변의 산책코스 안내도 / 일본의 중세경(서기1300년경)에 한 젊은 당(唐)나라 사람(실제로는 한반도인일 것이라 추측함)의 하반신이 떠내려와 이 지역의 어부가 그 것을 장사지내고 제사 또한 지냈는 데, 그것이 유래되어 현재에 전한다고 한다. 하반신부 생식기의 병에 영험한 효능이 특별하여 성신(性神)으로 숭앙되고, 부부화합*부부연*임산부 안산(安産) 등에 신통력이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남녀생식기의 병에 영험한 신이라 하여 지금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토진가미의 작은 진쟈 / 남성 성기의 조형물이 아주 인상적이다]
[이키보리소주공장] 토진가미에서 이키보리소주공장까지 오는 길은 많이 구비진 도로이면서도 거의 평탄하고 마치 농로같은 기분이 드는 도로변의 정경이다. 이키보리소주공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오후 5시가 된다. 이키섬의 주 도로변에 있고, 또 술병모양의 광고탑과 글씨가 지나가는 길손들의 눈에 쉽게 뜨이도록 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넓은 주차장과 함께 상가가 조성되어 있는 데, 자세히 보니 상당히 큰 규모의 마트였다. 주차장편에서 보이는 이키보리소주공장과 광고탑이 매우 상징적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특징적 광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장 촬영하고서는 정문을 찾아 공장내부로 들어간다. 공장사무실 입구는 미닫이 유리문으로 되어있어, 건물규모에 비해서는 조금 초라한 분위기다. 물론, 오래된 건물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어울린다고 할 수 있겠다. 입구의 오른편 적당한 공간에는 창업당시(약 100년전)에 사용하던 술도가니와 솥을 아름답게 전시해 놓아 눈길을 끌었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데스크가 사무실과 붙어있어 여직원 2명이 앉아서 열린 유리창문 사이로 인사를 하며 우리를 맞이한다. 견학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고 하니, 무료라면서 안내를 한다. 안내데스크 맞은편으로는 숙성실이 보인다. 순서대로 관람을 하면서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지하숙성실과 중간2층구조의 넓은 실내공간에 주류판매데스크와 시음코너 등이 벽의 장식물과 함께 꾸며져 있다. 벽에는, 회사의 설립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변천사 등 회사창립과정에 관한 역사자료들이 걸려있고, 상품의 변천사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음코너는 많은 내방객들이 동시에 시음가능하도록 3~4개의 테이블 위에 넓게 준비되어 있고, 술의 종류 또한 상당히 많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은 거의 마감시간대라서, 방문객은 우리팀 뿐이었는 데, 본인은 운전을 해야하니 술은 전혀 마실 수 없는 형편이고, 입맛만 다시는 격이다. 애주가 형님에게는 더없는 좋은 시간이 되겠지만 말이다.
회사의 창립일가를 보니, 야마우치(山內)씨로 되어 있다. 서기 1903년도에 창업했다고 하니까, 약 108년의 역사를 가진 회사인 셈이다. 일본의 기업들은 보통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데, 이 회사도 어언 1세기라는 나이를 갖게 되었으니, 내로라 하는 전통기업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이키의 보리소주는 이키시가 보리소주의 발상지로 알려져, "이키소주"는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의 협정에서 산지보호를 받도록 되어있다. 이키시에는 모두 7개의 소주공장이 있다고 하니, 면적에 비하여 한 상품의 생산자밀도가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겠다.
중간층에서의 관람을 마치고 안쪽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또 하나의 방이 있다. 그 방 또한 전시실인 데, 산뜻한 분위기에 밝은 이미지를 풍기니, 더욱 쾌적한 기분이 든다. 보다 놀라운 것은 방의 한쪽편에 마련되어 있는 화장실이 매우 조화롭다. 이키섬에 와서 이키시립이키코쿠박물관의 화장실의 청결함과 쾌적함에 매우 감동했는 데, 여기서 또 화장실의 내장설계기법에 감동을 받는다. 처음에는 자판기 휴게실정도로 생각했는 데, 확인해 보니, "아뿔사!" 화장실이었다. 괜히,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 전시실은 이키보리소주의 제조비법 등의 유래나 제조과정의 기술, 자사홍보와 관련한 포스터자료 등이 사방 벽에 게시되어 있다. 아울러는, 소주 증류기의 진보형태를 볼 수 있는 실물이 시대별로 세 가지가 전시되어 있다. 최초의 것은 도기제품인 데, 이름은 "조선의 구식 투구모양 증류기(朝鮮古式兜釜)" 라 되어있는 데, 옛날에 조선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 증류기 전시코너 오른편 안쪽으로는, 우리의 헛간같은 방에 농사에 사용되던 각종 농사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리소주의 주재료가 보리와 미곡이다보니 이곳 이키섬 평야지에서 재배하고 수확하는 데, 필요한 각종 농사도구들을 전시해 놓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들여다 보니, 어릴적부터 많이 보아왔던 농사도구들이 대부분이다. 나 역시 농촌출신이니 대부분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 저것, 내용들을 살펴보려니, 공장사무실의 책임자 한 분이 들어오면서 이제 곧 마감시간임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잠깐 전시물을 소개하는 데, 역시 이키보리소주의 제조비법이 조선반도와 관련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도 "이키보리소주"의 제조비법에 대한 근원지를 알기 위하여 상당기간 노심초사 연구하고 알아보았는 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반도 경상북도 안동지역의 "안동소주"가 그 근원지임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언젠가, 경상북도 안동지역의 "안동소주"공장을 다녀온 적이 있는 데, 비법이 가장 근접하고, 시대적 정황으로 볼 때에,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면서, 매스컴에 보도되었던 내용이 있을 것이라면서 애써 찾아 설명해주려고 정성을 다한다.
그 시기는 대략 서기1400~1500년 경으로 보고 있는 데, 당시의 일본에서는 전국(戰國)시대이자 무가정권시대였는 데, 벼농사에 대한 과세(課稅)는 엄중하고, 보리농사에 대한 과세는 그다지 엄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섬 사람들은, 보리를 주원료로 중국(한반도의 경상북도 안동지역의 제조비법으로 봄)으로부터 전해진 제조법을 살려서 이키 특유의 소주를 만들어 내었는 데, 그것이 16세기경부터 이키가 "보리소주발상지"라고 일컫게 된 동기기 되었다고 하는 얘기다.
보리소주 "이키(壱岐)"는, 보리(2/3)와 쌀(1/3)를 원료로 하여 이키에서 몰래 전해오는 비법을 계승하여, 1900년(메이지<明治>33년) 창업이래 연구개량을 거듭하여 만들어낸 본격소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마감시간이 다되어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반지하 형태로 만들어진 조그만 규모의 숙성실 저장창고다. 위스키(Super Gold)용으로 장기간 숙성중에 있다고 하는 데, 스페인산 쉐리(포도와인류)숙성용 오크통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공장책임자로부터 짧은 시간이나마 중요한 설명은 어느정도 들었고, 우리는 또 다음의 목적지로 가야하기에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데, 형님께서 "소주 한 병 구입할 수 있냐고 물으니," "조금 비싸지만, 여기서도 판매는 하고 있다"면서 안내한다. 친절하게도, "가능하면 훼리터미날 등의 주류판매점이 더욱 저렴하니, 그곳에서 구입하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견본세트나 있으면 한 셋트 구입할까 하였는 데 없다. 형님만, 기호에 맞는 한 병의 보리소주를 구입하고서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벌써 오후 6시다.
공장을 나오면서, 출입구 옆쪽으로 놓여있는, 이 공장 최초의 술도가니와 솥을 다시 한 번 보면서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겨 차에 오른다. 다음의 목적지는 고노우라(郷の浦)항이다.
고노우라항으로 이동하면서 이키섬에서 "이키보리소주"가 갖는 의미를 잠시 생각해본다. 이키섬에서 생산되는 단순한 술의 상품으로서의 가치만이 아닌, 나름의 역사적 소중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의 원료인 벼나 보리를 재배할 수 있는 지리적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과 토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시대에 당시의 정치적 조세제도의 영향으로 보리농사가 많이 재배되어 보리소주의 제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중국이나 한반도와의 문물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이를 통해 유추해보고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등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키보리소주공장 본사 / 일본 보리소주의 최초 발상지인 이키보리소주공장을 찾았다. 내방객을 위하여 관람코스를 아주 잘 해놓았다. 술도가의 모습을 배경으로한 외부광고가 인상적이다. 메이지(明治) 33년(서기 1900년도) 창업했음을 술독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
[보리소주 발상지라 적혀있는 주차장 안내광고탑 / 건물 좌측으로는 대형마트와 상가건물이 연이어 있다]
[보리소주 숙성실의 모습]
[술도가니의 큰 글씨는 "이키코쿠(一支国) 이키보리소주(壱岐麦焼酎)"라 적혀 있고, 아래의 푯말 내용은, 술도가니의 글씨처럼, 1말들이 술도가니나 술병에 희망하는 문자를 새겨서 구워진 술도가니와 술을 함께 판매한다는 뜻이다]
[당사의 표창내역 등 회사의 소개와 인사말 ] "보리소주 "이키(壱岐)"는 대맥(大麥) 2/3와 쌀누룩 1/3을 원료로, 멀리 15세기경부터 이키에 은밀히 전해진 비전(秘傳)을 계승하여 메이지(明治) 33년(서기 1900년) 창업한 이래로 연구개량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본격소주입니다. 전국주류감평회에서 제 14,15,16 회의 3회연속 우등상의 영예를 가지고 명예상을 수상. 후쿠오카 국세국 주류감평회 최고리본상을 수상. 전국주류감평회에서 8년 연속 우등상을 수상함에 따라 토지(杜氏 ; 술만드는 기술자) 총대표로서 국장표창을 수상. NHK종합 텔레비젼의 소주특집에서는, "보리소주가 만들어지기까지(麦焼酎が出来るまで)"를 본 공장에서 촬영하여, 전국에 "보리소주 발상지"로서 소개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품질본위를 기본으로 하겠사오니, 이후로도 더욱더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아래 사진의 내용이다.
*** (당사 모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보리소주양조기술이 한반도에서 전해졌을 것이라 생각하여, 언젠가 한국을 방문해서 알아보았다고 한다. 경북 안동소주공장을 찾아갔는 데, 그 제조비법 등이 유사하고 그 시대적 정황 등이 일치하는 점이 많아 "이키보리소주"의 기원이 한반도의 경북 안동임을 잠정 확인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보리소주의 최초발상지인 "이키보리소주"의 기원이 우리나라의 경북 안동소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흥미로운 데, 술맛의 비교는 어떨까? 은근한 소믈리에 정신을 떠올려 본다 ) ***
["이키보리소주"의 창업자 및 역대 주인의 초상이 내방객 견학코스 2층 통로의 벽에 걸려있다]
[이키보리소주회사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코너 / 전시된 병을 통하여 상표의 변천과정을 볼 수 있다]
[당사에서 현재 출하되고 있는 주류의 시음코너 / 운전해야 하는 본인으로서는 절대 마실 수 없었다. 여기서 음주하고 운전하다 걸리면 제공한 업주에게 엄청난 벌금(보통 300만엔이라고 한다)이 부과된다고 한다. 입맛만 다시는 꼴이 되었다. 애주가 형님은 "물 만난 물고기"에 비유하면 섭하지 않으리라... ㅋㅋㅋ]
["보리소주 이키"가 만들어지기까지]
*** 먼저, 1차용 쌀을 준비하고
<1> 1일째- 자동누룩제조기에, 쌀을 씻어서 찐다음 누룩밑을 넣는다
<2> 2일째- 자동삼각 누룩띄움방에 자동누룩제조기로부터 누룩을 옮겨 쌀누룩을 완성시킨다
<3> 3일째<7일간>- 1차 술빚기 단계로 누룩과 효모를 추가하여 1차 모로미(여과전의 술)를 만든다
<4> 9일째<14일간>- 2차 술빚기 단계(1차 술빚기 단계에서 만든 모로미에 물과 보리<2차용 원료인 보리를 깨끗이 씻은 후에 자동찜기를 거친 것>를 추가해 알코올발효를 시켜서 모로미를 만든다
<5> 23일째 증류기에 모로미를 넣고 증기를 보내어 소주를 만든다
<6> 저장숙성단계로 술도가니나 오크통, 탱크 등에 넣어 약 2~20년간 숙성시킨다
<7> 원주(原酒)를 도수에 맞추어 조절한 후에 출하용 병에 담는다
<8> 시장에 출하한다
[보리소주 이키의 역사 - 그 첫번째 이야기] "풍성한 자연과 역사가 길러낸 독특한 맛'이라는 표제어로 보리소주의 이키에서 발상된 역사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이키는 중국문화의 중계지점으로 다양한 생활문화가 싹터 란비키(ランビキ;화란에서 전해진 증류기술)에 의한 소주의 증류방법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키는 섬 전체가 평탄하고, 나가사키에서 두 번째로 넓은 수전(水田)을 지녀 해산물과 함께 매우 혜택받은 섬이다.
그러나 전국(戰國 ; 서기1467~1573, 센고쿠다이묘가 난립하던 시대 약 1세기를 일컬음)시대부터 에도(江戸 ; 서기1603~1868, 토쿠카와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에 임명되고 토쿄에 도읍을 정한 이후 메이지정부군에 의해 함락되기끼지의 265년간)시대에 걸쳐, 벼농사에 대한 과세(課稅)는 엄중해지고, 보리농사에 대한 과세는 그다지 엄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섬 사람들은, 보리를 주원료로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제조법을 살려서 이키 특유의 소주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16세기경부터 이키가 "보리소주발상지"라고 일컫게 된 동기다.
보리소주 "이키(壱岐)"는, 보리(2/3)와 쌀(1/3)를 원료로 하여 이키에서 몰래 전해오는 비법을 계승하여, 1900년(메이지<明治>33년) 창업이래 연구개량을 거듭하여 만들어낸 본격소주이다.
[견학코스중에는 이키섬에 농민들이 사용해 오던 농기구 등이 수집되어 함께 전시되고 있다.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지만, 몇 종류는 색다른 것도 있다]
*** 이키는 옛부터 쌀과 보리가 많이 수확되었다. 그래서 쌀과 보리를 이용한 소주양조가 성행하였다. 경작에 사용한 옛날 농구를 갖춰서 전시해 놓았다. 농경에는 소가 이용되었다.
[사진의 오른 쪽은 소주제조를 위한 증류장치 등이고, 왼쪽은 화장실이다. 실내전시공간과 어울리게 화장실을 아주 깔끔하고 아름답게 해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소주제조에 사용된 증류장치의 시대별 변천사를 볼 수 있겠다 ]
*** (1) 가장 오래된 사진좌 앞쪽의 것은 "옛날 조선식"으로 카부토카마(兜釜;전쟁시 사용하는 투구모형의 증류솥)로 일본의 전국<서기1467~1573>시대부터 에도<서기1603~1868>시대까지 사용하던 증류기다. (2) 사진 왼쪽 뒤의 것은 메이지<서기1868~1912>시대부터 쇼와35년<서기1961년>까지 사용하던 것이다. (3) 오른쪽 앞의 것은 쇼와36년<서기1962년>부터 쇼와55년<서기1981년>까지 사용하던 것이다.
[지하 저장고의 오크통 숙성실이다. "이키 수퍼골드(Super gold)"라는 위스키의 숙성실이다]
*** 이 오크통은 스페인에서 "쉐리(스페인산 고급포도와인으로 보통 식전에 음용)"용으로 사용되던 화이트 오크통이다. "이키 수퍼골드"는 이 오크통에서 숙성을 기다린다.
["이키 수퍼골드" 의 지하숙성실 내부의 모습]
["이키"보리소주 창업당시(약 100년전)에 사용하던 술도가니와 솥을 공장입구에 아름답게 전시해 놓았다]
[고노우라(郷ノ浦)항] 이키섬에서는 동서남북 어디서나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데, 자동차로 거의 25분 이내의 거리이다. 따라서, 장소에서 장소로의 이동은 거의 수분이내에 이동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우리가 이키보리소주공장의 견학을 마치고 고노우라항에 도착할 무렵의 시간은 거의 해질 무렵이었다.
이키섬 주도로(일본 국도)에서 고노우라항구로 가는 진입도로는 다소 완경사의 내리막길이다. 도로주변으로는 도심의 상가 등이 형성되어 있고, 조금 더 내려가니 포구해안 위를 가로지르는 붉은 색깔의 고노우라대교가 무지개를 그리고 있다. 그 아래로 고노우라 훼리터미날 공원과 광장, 그리고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진입하면서 부두를 바라보니, 뉴츠시마 일반훼리가 정박중에 있다. 시간을 보니, 츠시마의 이즈하라항에서 15시 25분에 출발하여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으로 가는 중에 이곳 이키섬의 고노우라항에 기항하여 잠시 정박중인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저 배를 타고 이 부두로 어제 이 시간에 도착해서 하루밤 지내고서 오늘 하루 전일일정으로 이키섬여행을 하도록 되었었는 데, 교통편의 연계성이 원활치 못하여 반대쪽의 아시베항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여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서 터미날 주변을 돌아보기로 한다. 우선은, 잔디밭 돌화단으로 조성된 터미날 작은 공원이 너무나 예술미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보고, 이미 작년 3월의 일이지만, 이키시립 이키코쿠박물관의 개관을 알리는 대형광고판이 공원의 맞은 편에 우뚝 서있다. 이 고노우라항은 이키섬의 관문역할을 하는 항구이므로 터미날건물도 세련되고 커보였다. 터미날 정면의 항구는 어항만으로 형성되어 있고, 뒷면에는 여객선 부두로 활용되고 있었다. 섬의 다른 항구와는 달리 하카타와 이즈하라간 운행하는 고속훼리(비너스호)가 기항하기도 하는 데, 이 고속훼리의 최대속력은 43노트로 츠시마와 부산을 왕래하는 드림플라워호(최대속력 38노트)보다 5노트나 빠르다. 거의 최신모델인 듯 싶다. 북한 보유의 반잠수정이 53노트이니, 일반 여객선이 43노트라는 것은 굉장히 빠른 것이다.
훼리터미날 정면의 어선부두 맞은 편에는 이키호텔이 신축건물로 도시미관과 분위기를 한층 상승시켜주는 듯 서있다. 부두가를 잠시 산책하노라니 부두방파제 저편 하늘에는 이미 석양빛의 붉은 노을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등대지기의 가삿말의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위에 자고~~~"처럼, 지는 해의 저녁놀을 얼음처럼 얼려서 그대로 잡아두고 싶은 심정이다. 때마침, 자그마한 어선 한 척이 방파제 끝의 등대앞을 통과하여 이쪽 어선부두로 들어오고 있는 데, 카메라 렌즈에 잡히는 정취가 제법 작품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제목은 "2011년 정월초하루 이키섬 고노우라항의 방파제 등대에 걸린 석양과 만선으로 귀항하는 고기잡이 배 한 척"으로 하면 어울릴까? 우연의 일치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작품인지 스스로의 도취에 취하여 한 참을 감탄하며 미소를 날렸다. "오늘의 이 작품값은 백만달러짜리야!" 하면서 자아도취의 기분으로 부두를 돌아서, 이제는 터미날 건물 안쪽을 들어가 본다. 이미 배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에 손님은 없어 한적하다. 왔다 간다는 증거의 표식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고, 신문 자동판매대를 이야깃거리로 기념촬영 해본다. 내측 부두로 다시 나오니, 훼리 뉴-츠시마는 이제 하카타항으로 가기 위하여 부두를 벗어나고 있고, 한 이키아가씨가 애완견을 데리고 산보를 하고 있다. 하얀 유니폼에 애완견과 달리는 모습을 하나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빠른 손동작으로 셔터를 눌러본다. 이제, 해는 완전히 낙조되어 석양빛마저 보이지 않으니, 발길은 다시 다음을 재촉한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렌트카 이용시간은19시까지다. 이제는 마지막 코스로 한 곳을 정하여 들렸다가, 다시금 아시베항으로 가야 한다. 잠시 생각다가, 적당한 곳으로, "원숭이바위(사루노이와;猿の岩)"공원으로 정하였다.
"어둡기 전에 도착해야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있는 데", 하면서 열심히 가속페달을 밟는다.
[고노우라(郷ノ浦)항 훼리터미날 빌딩] 이키시(섬)의 관문역할을 하며, 섬의 남동부에 위치하는 항구이다. 츠시마의 이즈하라항과 후쿠오카의 하카타항간에 운행되고 있는 일반훼리와 고속훼리의 기착지 항구이다.
[고노우라(郷の裏)대교] 대교뒷쪽이 고노우라시내다. 부두에서 바라보는 무지개모양의 대교의 모습이 제법 눈길을 끈다.
[고노우라 훼리터미날 내부통로와 매표창구]
[터미날 내부의 관광안내소] 전국 어느 지역이나 관광안내소(대중교통연계장소나 도시의 관문위치)가 있고, 또한 이용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시설이 잘되어 있다.
[2010년 3월에 개관한 "나가사키현립매장문화센터/이키시립이키코쿠박물관개관" 대형광고판]훼리터미날 빌딩진입로에 큼직하게 서있다. 마침, 촬영할 수 없었던 전망대와 박물관 옥상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신문자동판매기] 자동판매기 천국인 일본의 단면을 이 신문자동판매기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훼리터미날 광장의 공원과 고노우라대교의 절묘한 조화] 사진 찍느라 신경좀 썼는 데..., 일몰후의 사진이라 약간 흐릿하다.
[고노우라 주변지도]
[뉴츠시마호 일반훼리 / 하카타-이키 고노우라 - 츠시마 이즈하라 운행 / 부두이탈시의 촬영사진]
*** 배의 제원 - 전장/93.20 m, 총톤수/1,776톤, 항해최고속력/19 knots, 여객정원/839명(1등실,2등지정실, 2등일반실), 차량적재대수/약 80대, 설비/안내실*자동판매기*스카이라운지*공중전화*급탕*냉수기*게임코너
[고노우라항의 일몰과 내항의 정취] 마침 일몰의 찰나적 시간에 만선의 모습으로 귀항하는 어선 한 척이 너무도 절묘하게 나의 아마추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방파제의 등대가 한 몫을 하니 한 폭의 절묘한 작품이 탄생하다.
[고노우라 훼리터미날 맞은편에 있는 이키호텔 / 고노우라항구의 분위기를 한결 상승시켜준다]
[애완견과 산보하고 있는 한 이키아가씨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쿠로사키(黒崎)반도/사루이와(猿岩;원숭이바위) 가는 길] 고노우라항 훼리터미날에서 원숭이바위공원 가는 길은 꽤 먼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이면 도착할 수 있겠다 싶어 여유있게 갔는 데, 의외로 멀다. 실제 거리상으로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큰 도로에서 쿠로사키반도로 진입하는 도로는 거의 일차선 수준이다. 구비진 도로에다 좁기 때문에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어 시간이 제법 걸린 것이다. 왕래하는 차량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산하다. 사루이와 공원에 도착할 시간쯤에는 금방 어둠이 깔리면서 사방이 깜깜해지는 순간이었다. 기념사진이라도 촬영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그마저 할 수 없다. 공원에 가로등도 밝혀져 있지않다. 자판기코너에서 내빛이는 불빛만이 유일하다. 다녀갔다는 증거는 남겨야겠기에 기념이 될만한 곳을 찾아 어렵게 카메라에 자취를 남긴다. 이키섬의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아보고자 달려왔지만, 어두운 밤공기에 어우러진 이키섬의 밤바다의 정경만을 허탈한 심정으로 바라만 보다 돌아나온다.
쿠로사키반도 일부는 "데아이노사토(出会いの里;만남의 동네)"라 하여 연인이나 가족들의 소풍장소로 좋을 법한 자연공원이 원숭이바위와 연계하여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는 렌트카 반납시간이 임박함에 따라서 원래의 아시베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어두운 밤길에 조심운전을 하면서 쿠로사키반도를 되돌아 나온다. 어둠속에 중학생 정도의 한 학생이 반대쪽에서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다. 조금은 무서울 것도 같은 데, 늠름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니, 어두운 밤길에 제법 담력이 쌓여서 무서움을 덜타는 모양이다. 아마도 등하교길이 학교와 다소 먼듯 하다. 자못, 쓸쓸해 보이면서도 대견하다는 생각을 해보며, 나의 유년기 시절을 떠올려본다. 쿠로사키반도의 비좁은 1차선 진출입로를 빠져나와 2차선 대로에 접어드니 벌써 렌트카 반납시간인 19:00시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쿠로사키(黒崎)반도/사루이와(猿岩;원숭이바위) 공원] 이곳은 꼬리를 보이고 있는 원숭이와 꼭 닮은 기이한 자연조형물의 "사루이와(원숭이바위)" 공원이다. 높이 약 45m의 해식애(海蝕涯)의 현무암질이다. 이키섬 탄생신화에 따르면, "이키국은 살아있는 섬(生き島)이다. 신께서 바다에 이 섬을 잉태하실때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여덟개의 기둥을 세워서 서로 이었다. 그 기둥이 꺽인채 남았는 데, 그것이 바위로 변하였고, '오래바시라(折れ柱;꺽인 기둥)'라 불리고 있다"고 한다. 그 여덟 기둥 중의 하나가 이 사루이와(원숭이 바위)이다.
[다녀간다는 징표로 주변의 상징물을 카메라에 담으며, 따끈한 자판기 커피로 갈증을 달래다]
["원숭이집"이라 하여, 이 지역의 역사자료전시관 및 특산물판매점이다 / 이 반도에는 쿠로사키 포대(砲臺) 유적지가 있고, 건물 뒷편으로 진입로가 있다]
["원숭이집"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 일부의 모습과 이키특산물관련 게시물]
*** 카지매(搗布 ; 감태,대황), 유베시(柚餅子 ; 된장*쌀가루*밀가루*설탕 등에 유자즙을 넣고 반죽하여 찐 과자), 츠바키아브라(椿油 ; 동백기름), 시오모즈크(汐海雲 ; 큰실말, 식용해초) 등의 이키특산물을 판매하고 있다는 광고게시물이다.
[공원이지만, 자동판매기코너의 불빛만이 네온사인처럼 밝다. 이키섬의 특징중의 하나는 공원마다 야간에는 가로등 불빛이 하나도 켜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야간에는 인적이 드무니까 그렇기도 하겠다. 특히, 관광 비수기라서일까?]
[아시베항 가는길의 카츠모토쵸(勝本町)이야기] 운전이 제법 익숙해졌을까?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도로표지판을 보면서 운전하다보니, 지름길을 놓쳤다. 갈림길에서 유노모토(湯の本)온천방향(이키섬의 북단인 카츠모토항 가는 도로와 접속되며, 이키섬 동북방향에 있다)으로 으로 빠져야 되는 데, 원래의 오던 길목에서 봐둔 이정표만 생각하면서 되돌아 나오다 보니 다소 돌아가는 격이 되었다. 물론,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다.
카츠모토쵸(勝本町) 항구를 가보지 못함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더우기는 지나가는 길(아시베항 가는 길목)에 이키섬 고분군을 코앞에 두고서 그냥 지나쳐야 함이 더욱 아쉬웠다. 아무래도 시바료타로 선생의 "츠시마*이키 가는길(対馬*壱岐の道)"에서의 "카츠모토쵸 이야기"라도 잠시 넉두리해야만 아쉬움이 달래질까 싶다.
카츠모토쵸는 이키섬의 북단을 중심으로 이키섬 네 개의 유인도중 와카미야시마(若宮島)를 안고 있다. 또, 카츠모토쵸에는 고분군이 다수 소재하고, 에도시대 하이카이시(俳諧師;5,7,5,7,7조의 31자로 된 일본 와카풍의 작가) 카와이소라(河合曾良;1649~1710)의 묘소가 있으며, 또한 조선통신사 신유한(申維翰;1681~1752, 본관은 영해<寧海>, 호는 청천<靑泉>, 조선후기 문신으로 1713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함, 1719년 일본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지음)선생 일행의 체류지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카츠모토항은 츠시마해협과 면하고 있는 데, 고대로부터 북쪽의 관문으로 대륙(한반도, 중국대륙)과의 교통의 요충지로 번영하였으며, 에도시대에는 고래잡이기지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키섬 주변의 좋은 어장을 살려서 오징어, 방어, 도미 등의 어업을 중심으로 한 약 700여척의 어선을 보유한 서일본 유수의 어업기지로 발전해 있다.
이번 기행을 하면서 재밌는 수수께끼를 하나 찾았는 데, 다름아닌 지명의 유래와 그 공통점이었다. 츠시마의 북항인 히타카츠(比田勝)의 "카츠(勝)"의 한자와, 이키섬 북항인 카츠모토(勝本)의 "카츠(勝)"의 한자가 무엇인가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졌을 것이라고 하는 의문점을 가지고 여행내내 궁금해 했었다. 특히, 두 항구 모두 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륙쪽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공통점이다.
아울러는 카츠모토의 "모토(本)"의 한자는 "바탕 혹은 근원"이라는 의미를 갖기에, 어떠한 전쟁에서 승리의 계기 등을 마련해준 지역적 특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예측이 비슷하게 맞아 떨어져 잠시나마 자기도취에 빠지기도 하였는 데, 이 어찌 재미있는 일이지 않으랴? 물론, 츠시마의 히타카츠는 아직 그 실마리를 풀기 전이지만 말이다.
그럼, 그 전설에 따른 이키섬의 "카츠모토(勝本)"란 지명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진구(神功)황후의 전설"이 바로 그것인데, 진구(神功)황후(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서기 201~269년에 정사를 보았다고 함)의 한반도 삼한(三韓)정벌 때에 이 곳에서 돛배의 순풍을 기다리느라 체재하다가, 마침 좋은 바람으로 출발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지역의 이름을 "카자모토(風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삼한정벌의 승리로, 귀국하는 도중에도 이 곳을 거치게 되어, "카츠모토(勝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과 관련성이 있는 듯한 내용이기에 지명의 유래를 설명한다는 측면에서만 언급한다.)
카츠모토포구의 북단에는, 서기 717~724년에 창건된 쇼모구(聖母宮;진구황후가 오진<応仁;실존의 最古일본천황 혹은 진토쿠천황과 동일인으로 추정>천황을 낳았다는 것에서 유래됨)이라는 옛 진쟈가 있는데, 이 진구(神功)황후의 유허지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서기 1770년 경에는, 일본의 "고래잡이왕(捕鯨王)"으로 일컬어져, 코노이케(鴻池)家*미츠이(三井)家와 함께 일본 3대 부호로도 알려졌던 도히(土肥)家가 여기서 살았는 데, 쇼모구(聖母宮)진쟈는 이 도히家가 매우 돈독하게 신앙한 곳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서기1591년에는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반도를 침략하기 위한 보급로를 구축하기 위하여 카츠모토성(현재는 시로야마<城山>공원)을 축성하기도 하였는 데, 지금은 그 성터만 남았다고 한다.
농촌과 어촌이 병존하는 카츠모토쵸는, 매일 열리는 새벽시장(朝市) 등에서 이제 갖잡거나 채집한 산과 바다의 산물이 진열되어 지역의 사람과 관광객으로 붐비기도 하단다.
시바료타로 선생은, "츠시마*이키 가는길(対馬*壱岐の道)"에서 카와이소라와 조선통신사 신유한의 이야기를 재밌게 다루고 있다.
먼저, 신유한은 1719년에 조선통신사 제술관(製術官)으로 일본(토쿠가와 바쿠후)을 방문하였는 데, 이 때에 조선통신사 선단이 츠시마를 경유하여, 당년도 6월 27일에 이곳 이키섬 카츠모토항에 입항하여 10일간 체류하였다고 한다. 그 때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머물 수 있었던 곳은 진코지(神皇寺; 이전의 이름은 류구지<竜宮寺>였다고 함) 정도의 절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절은 지금에는 그 터만이 남아있다. 신유한의 해유록에 그려진 카츠모토항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 전혀 다르게 적혀있는 모양이다. 해유록에서는, "산 밑에 관사를 짓고, 그 크기는 약 100여칸, 구비구비마다 도로가 통하고, 미닫이문으로 나뉘어진 방이 있으며, 방에는 유카타(목욕가운), 뜨거운 찻물, 변소를 두어, 그 지음새는 매우 정교하다. 그러나 정교하지만, 좁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지붕아래에 통신사 일행이 머물면서, 햇빛을 가리는 차양은 해변에 접해 있어 뜰도 없고, 실로 음울하다"라고 적고 있다.
시바료타로 선생의 글에 따르면, 조선통신사가 머물렀던 숙소터에 작은 불단이 마련되어 오체(五體;전신)와 연화대가 일체로 주조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7세기의 것)"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 지역민들의 후덕한 인정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선생은 말하고 있다. 선생은 이 불상이 이 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을 "조선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불교가 수난을 당하던 시대에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 일본인 누군가가 가지고 들어온 것이 아닐까"하는 아이러니한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에 재차 여행하게 될 때에는 꼭 찾아보고 감상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다음은, 카와이소라(河合曾良) 하이카이시의 얘기인데, 카와이소라는 이곳 사람이 아니고 나가노켄(長野県) 수와시(諏訪市)의 사람이다. 서기 1649년에 태어나 35세 때에 마츠오바쇼(松尾芭蕉 ; 서기 1644~1694년, 에도시대 전기의 하이쿠<俳句 ; 5,7,5의 17음의 일본정형시>의 시인, 옛 지명의 이가우에노<伊賀上野、지금의 미에켄 서부지역>에 태어나, 29세 때에 에도에 입성하여 하이카이<俳諧;하이쿠、렌쿠의 총칭>의 전통을 세우고자 함, 오쿠노호소미치<奥の細道>*노자라시키코<野ざらし紀行> 등 기행문 다수)에게 입문하여, 바쇼몬토테츠(芭蕉門 十哲 ; 마츠오바쇼의 훌륭한 10인의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마츠오바쇼의 최후의 여행이 된 " 오쿠노호소미치<奥の細道>" 등에 제자로서 동행하는 등 매우 총애받는 제자였다고 한다.
카와이소라가 카츠모토에 묻히게 된 이유는, 서기 1710년(61세 때)에 쇼군(将軍;토쿠가와이에노부<徳川家宣;서기1709~1712년, 에도바쿠후 제6대 쇼군>)의 쥰켄시(巡見仕) 일행의 수행원(35명)중 일원으로 이 곳에 방문하게 되었는 데, 여행의 과로 등으로 병상에 눕게 되어, 결국은, 당시에 해산물 상가를 운영하고 있던 나카후지(中藤)家에서 향년 62세의 생애를 마쳤다. 소라의 묘는 카츠모토성터 중턱의 노만지(能万寺)의 나카후지(中藤)家의 묘지에 있다. 카와이소라가 쥰켄시의 일원으로 발탁된 것은, 그만큼 문장가로서 탁월한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쥰켄시 일행은 이 곳에서 츠시마로 이동하게 된다.
이제는, 이키섬 역사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인 고분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고분군의 이름과 그 의미만이라도 기억에 남겨야 될 듯싶어 자료의 사진과 함께 그 내용을 더듬어 본다.
이키에는 현재에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약 270기의 고분이 존재한다고 한다. 커다란 바위로 꾸며진 석실위에 흙으로 덮힌 고분을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라 하여, 분명히 귀신이 만든 귀신의 소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러한 고분을 "귀신의 바위집""귀신의 집" 등이라 일컽는 등, 이키에는 고분이 귀신과 연관하여 많은 전설을 낳고 있다.
지금부터 약 1400여년전, AD4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일본지역을 중심으로 거대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분구(墳丘)를 지닌 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경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하시하카(箸墓;나라켄<奈良県>)고분이 최고 오랜된 전방후원분으로 되어있어 같은 모양의 고분이 각지에 확대됨과 동시에 키나이(畿内 ; 쿄토,오사카지역)지방에 성립된 고분시대의 정치력(야마토정권)도 확대되어 갔다.
고분시대의 일본열도는 야요이시대에 연이어서 대륙 및 한반도와 교류를 행하면서 적극적으로 진보된 문물을 입수하였다. 특히, 5~6세기에 걸쳐서 조선반도로부터 전해진 가마에서 토기를 굽는 기술(스에키<須恵器>의 출현), 금속공예그릇, 토목건설기술, 토목건축기술, 기마<騎馬> 풍습 등의 선진문화는, 이후로의 일본열도가 국가를 형성해 가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키 최고(最古)의 고분은 AD 5세기 후반에 축조된 오츠카야마(大塚山 ; 이키시립 이키코쿠박물관의 소재지의 산)고분이지만, 이키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고분은 AD 6세기 후반~7세기 초에 걸쳐서 건축된 것들이다. 기원후 6~7세기경의 이키는, 섬의 중앙부에 이키를 다스리던 수장과 그 일족이 거주하고 있어, 대형의 거석(巨石)고분을 계속적으로 축조했다고 여기고 있다.
축조된 고분중에는, 나가사키켄 최대의 전방후원분인 소로쿠(双六)고분, 섬내에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인 츠시마즈카(対馬塚)고분, 나가사키켄 최대급의 원분(円墳)인 사사즈카(笹塚)고분 등이 카츠모토쵸에 소재하고, 기타 오니노이와야(鬼の窟)고분 등이 아시베쵸에 소재하고 있다.
이들 거석고분 주변에는 유리바타케(百合畑)고분군(카츠모토쵸 소재) 등의 소규모한 원분(円墳)의 고분군이 다수 축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분구(墳丘)의 규모가 거석고분에 비하여 소규모이지만 거석을 이용한 석실의 구조와 현실(玄室) 천정부의 형태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보여진다.
AD 7세기 초에는 섬내 각지에서 고분의 축조가 성행하게 되는 데, 그 중에서 특징적으로 잘 알려진 고분은 오니야쿠보(鬼屋窪)고분(고노우라쵸)으로 고래잡이모습의 선각화(線刻畵)를 볼 수 있다.
수장의 묘를 비롯한 고분의 석실에서는, 죽은 자에게 바쳐진 여러가지의 토기류 외에, 금동제의 마구와 도검장식류, 도검, 창, 철제화살촉 등의 무기류와 농기구류, 유리구슬 등이 발견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부장품들중에서는, 대륙과 조선반도에서 만들어진 것도 다수 포함하고 있어, 당시의 이키섬이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보고 느낀대로의 현장감있는 리얼리티를 연출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함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다음 기행을 기대해 보면서 카츠모토쵸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어야 될 듯 싶다. 넉두리도 넉두리다워야 이야기도 재밌어지는 것 아닐까?
카츠모토쵸의 즐거운 상상속에서 우리의 이키애마는 어느덧 아시베항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두운 밤길임에도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서인지 금방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다. 운전시간이라고 해봐야 고작 30분 미만이긴 하지만, 운전석 구조가 우리와는 정반대인 곳에서의 초보운전이기에 다소는 긴장되는 것이 당연하다. 도로표지판이 차량의 진행하는 방향의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안전상 좋을 것도 같은 데, 반대쪽 차로변에 세워져 있어서 야간운전에는 전조등 불빛이 미치지 못하여 다소 불편한 감을 느꼈다. 우천시같은 때는 그러한 불편함을 더욱 느낄 것도 같은 데, 다음 기회에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잠시 고개를 갸웃둥 해본다.
아시베항구 내에 있는 토와(東和)렌트카 차고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7시 20분경이었다. 20분 초과한 셈이지만, 오차범위내라 생각하고 차고지에 자동차키를 꽂은채로 주차를 하고서 차에서 내린다.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하고는 밖으로 나온다. 유류비는 선불로 지불했는 데, 아마도 사용한 연료는 반도 안될 듯 싶다. 하여튼, 안전운행으로 오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또 있겠는가? 영업시간이 오후 7시까지라서 차고지를 열어둔채로 퇴근한다면서, 혹시라도 조금 늦게 되면 차고지에 그대로 주차시켜놓으면 된다고 하였기에 부담없이 차고지를 나온다.
고노우라항이나 인도지항처럼, 훼리터미날 근처가 번화한 편이 아니라서 식당이나 편의시설의 이용이 조금은 불편한 듯 하다. 영업중인 식당이 두,세곳 보이는 데, 점심도 거른 탓에 배도 고픈터라 가까운 곳을 찾았다.
[이키섬내 대표적인 고분]
*** 1. 소로쿠(双六)고분(나가사키켄 최대의 전방후원분)
2. 사사즈카(笹塚)고분(다양한 종류의 금동제마구 부장품이 함께 매장되었던 원분(円墳)
3. 오니노이와야(鬼の窟)고분(이키섬내 최대길이의 원분)
4. 효제(兵瀬)고분(원둘레도랑형상의 도랑을 가진 원분)
5. 츠시마즈카(対馬塚)고분(이키섬내 2번째 크기의 전방후원분)
6. 카케기(掛け木)고분(이키섬내 유일한 도려내기식 가옥형 석관을 가진 원분)
7. 오츠카야마(大塚山)고분(이키섬내 가장 오래된 고분)
8. 묘우센지(妙泉寺)고분(원분군으로 6세기전반~중엽의 것으로 추정/금동제 귀걸이, 스에키 등)
9. 타이바루텐진노모리(大原天神の森)고분(전방후원분/5~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
10. 오고메(大米)고분(원분/6세기말~7세기초의 것으로 추정/거석고분/대소의 5척의 배와 대형어류의 선각화가 있어 어로집단의 수장묘로 추정)
11. 오니야쿠보(鬼屋窪)고분(고래잡이모습의 선각화가 있는 고분)
12. 카마부타(釜蓋)6호분(거석고분의 주변에 축조된 군집분)
[렌트카 반납후의 저녁만찬] 우리가 찾은 곳은 아시베훼리터미날 인근에 있는 훼밀리레스토랑 "토토로"인 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님은 없고 화분으로 가득찬 실내는 불빛으로 환하다. 50대 전후반쯤 되어보이는 남자 주인이 손님을 맞이한다. 요리사를 겸하는 모양이다. 배도 고픈터라 넉넉한 음식으로 고르려니 생선가스셋트요리가 괜찮을 듯, 주문을 서두른다. 잠시 숨좀 돌리는 듯, 기다리자 에피타이저음식이 먼저 나온다. 니혼슈(일본청주)를 함께 주문하고 있으려니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여자어린이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와서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딸아이라고 하는 데, 귀염이 물씬 넘치는 녀석이었다. 음식 가져다 놓는 것도 야무지다. 준비해온 남은 선물이 있었으면 주고도 싶었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니 어쩌랴. 공치사라도 해줘야지. "덕분에 맛있는 음식 잘먹을께" 하면서 허기진 배를 달랜다. 밥보다는 미역국이 일품이다. 평소에 미역국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오늘의 미역국은 어찌나 꿀맛인지, 밥은 아직 반이나 남았는 데, 국은 이미 동이 났다. 마주앉은 형님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도 미역국이 정말 맛있단다. 아무래도 미역국요리방식이 독특한 모양이다. 하나씩을 더 주문하니 금방 나온다. 아무래도 추가로 나온 미역국은 맛의 효용가치가 다소 떨어지는 듯, 처음의 것보다는 맛이 덜한 듯 하다. 이미, 허기는 달래졌기 때문에 그러리라 생각하면서 술잔을 한 잔 기울이니, 얼굴색이 좋아지며, 기분도 얼큰해진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외국인이라서인지 주인이 옆에 동석하며 말을 건넨다. 자신의 딸아이가 토쿄에서 학교를 다니는 데,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며, 자기도 몇마디 할 수 있다면서 대화중에 한마디씩 해본다. 한국방문경험은 아직 없지만, 기회를 만들어보겠단다. 대화도중에 갑자기 화제가 전환된다. 레스토랑 넓은 벽에 대형사진 한 장이 붙어있는 데, 드넓은 초원위에 부채꼴 모양의 무성한 가지가 많이 뻗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끌었다. 어느 나라인지 궁금하여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단다. 레스토랑을 개업하면서 무심코 눈에 띄어 확대하여 붙혀놓은 것인 데, 나무가지의 무성함만큼이나 자신의 레스토랑사업도 번창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그랬단다. 한 참을 대화하다보니 벌써 저녁 9시가 가까워진다. 생각같아선 시간좀 더 보냈으면 하였지만, 손님이 한 분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자리를 일어난다. 즐거운 저녁만찬의 시간을 마치고 인사를 하면서 레스토랑을 나온다.
*** 아시베항 주변에는 음식점도 많지않다. 렌트카를 반납하고 서둘러 식사를 하였다. 대부분 영업을 일찍 마치기 때문이다. 아시베훼리터미날 인근에 있는 훼밀리레스토랑 "토토로"의 내부모습인 데, 식당은 넓었지만, 손님이 없어 조용하고, 가정집의 거실같은 분위기였다]
[점심도 거른지라 배도 고프겠다. 형님! 적당히 골라~유~]
[주방의 풍경/주인이 직접 요리를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딸아이가 서빙심부름을 하는 데, 제법 귀여움을 토했다]
[장식물과 화분이 많아, 마치 작은 식물원을 방불케 하기도...]
[메뉴는 단순하지만, 양이 많아 허기진 배가 금방 고무풍선이 되었다. 미역국이 맛있어 두 그릇씩 뚝딱하다. 물론, 요금 또한 추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 ㅎㅎㅎ ]
[광활한 벌판위의 느티나무 한그루. 식후 화제가 되어 한참 동안을 그림의 나무에 대한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어딘지는 잘 모르고, 그저 그림이 좋아서 벽을 장식하였다고 한다. 나무가지의 무한한 번성이미지가 이 가게의 무한한 발전과 무관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 사진을 벽 장식용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쇼니(少弐) 공원 가는길] 새벽 2시 20분에 츠시마의 이즈하라항에 가는 배를 기다리자면 아직 5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인근의 쇼니공원을 둘러보고자 가로등불빛 밝게 비치는 큰 도로를 타고서 산보하는 기분으로 밤길을 거닌다. 부두인근의 마을은 가로등 불빛아래 전형적인 항구마을의 분위기 그 자체이다. 어항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질서정연하게 홋줄에 매여 계류중이고 이제 내일의 새벽아침을 기다린다.
아시베항 해안도로를 타고 300여미터를 걸어가니 무카이마치(向町)어구창고를 끼고 가는 방향의 오른편으로 타니에(谷江)천 하구인 세토(瀬戸)포구에 높다란 교량이 놓여있다. 다리 아래로는 어선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무지개다리형태를 띠고있다. 교량위의 중간지점의 난간에 서서 주위를 살피니 아시베항 내해쪽으로는 멀리 훼리터미날이 보이고 부두에 계류중인 어선들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져 아시베항구의 아름다운 운치를 연출하고 있다. 카메라에 잡힌 밤항구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교량의 위쪽으로는 타니에천이 구비져 상류를 향하는 데, 좌우천변으로는 도로와 마을이 연이어진다. 교량 바로위의 마을앞은 반원을 그리며 작은 어선들이 여러척 계류하고 있다. 마을은 조용하고 통행하는 차량 또한 거의 없다. 정월 초하루의 아시베항구의 밤은 너무도 조용하다. 우리나라같으면 설날 대명절로 사방이 북적일텐데, 일본은 양력설을 챙기기 때문에 우리와는 정반대이다.
다리를 지나 터벅터벅 도로를 타고 전진하니 500여미터를 지나면서는 진행방향의 좌로굽은 도로는 약간 비탈지며 오르막길이다. 목적지인 쇼니공원에 거의 다다른 셈이다. 굽은 도로로 진입하기전 꺽이는 모서리부분에는 조그마한 진쟈가 하나 있다. 방파제 앞으로 바다를 등지고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진쟈가 말해주는 것은 이곳 섬주민들의 소박한 민간신앙이겠다. 일터인 바다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기원을 위한 정성이 바로 이 작은 진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정한 날에 이루어지는 정성이 아니라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느때나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평범한 행위인 것이다.
섬사람들의 소박하고 일상적인 이러한 민간신앙을 생각해보며, 우리는 다시금 경사진 도로를 타고 비탈진 마을길로 진입한다. 150여미터나 올랐을까, 쇼니공원에 거의 다다를 무렵에 인상적인 일본의 전통가옥을 하나 발견한다. 자세히 보니, "후게츠(豊月)"횟집이다. 아마도 고급 횟집인듯 싶다. 마치, 성곽같은 모습의 가옥구조라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쇼니공원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가로등 하나 밝혀져 있지않은 암흑의 세계였다.
[쇼니공원 가는길에 아시베방향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해수면 위로 비춰지고 있는 야간 불빛들이 너무 아름답다]
[마음속의 작은 진쟈] 츠시마와 이키섬에서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아주 작은 진쟈가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촌지역의 섬사람들은 바다의 자연을 접하면서 생업에 종사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바다 위의 일터로부터 무사귀환을 바라는 기도의 습관이 몸에 베었다. 그래서 이와같은 작은 진쟈가 해안가나 마을의 골목교차로 등에 많이 세워져 있다]
[쇼니공원 가는길에 괜찮은 횟집같아서 촬영해 봤다]
[이른바 드라이도크랄 수도 있는 개인 조선소에서 어선을 수리하고자 레일위에 올려놓은 모습]
[쇼니공원 가는길의 어선들 계류부두에서 찍은 사진 / 너무 작고 귀여워 찍어본 작은 배의 사진]
[쇼니(少弐)공원 야간산책] 공원이라 하여 나름의 기대를 걸고 찾아왔건만, 전혀 예상밖의 공원분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로등이라도 밝혀져 있으면, 주변이라도 감상하며 잠시라도 머물텐데, 전혀 그럴정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먼저,원구(元寇)의 칩입기인 코안노에키(弘安の役;서기 1281년)시에 전사한 쇼니스케토키(少弐資時)씨를 제사지낸다는 이키진쟈(壱岐神社)를 찾아봤다. 역시 캄캄한 암흑세상이었기에 카메라후레쉬에 의존하여 사진만 한 장 촬영하고서 되돌아 나온다. 공원의 주차장에서 앞으로 저멀리 내다보이는 현해탄바다위의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불빛을 감상하며 잠시 시간을 보낸다.
이곳, 쇼니공원은 원구(元寇)의 2차 침입 때인, 코안노에키(弘安の役;서기1281년)시에 큐슈북부지역의 슈고(守護;일본의 카마쿠라*무로마치시대의 소국(小國)단위의 군사지휘관 및 행정관직)였던 쇼니츠네스케(少弐経資;서기1226,1229~1292년)의 장남인 쇼니스케토키(少弐資時;서기1263~1281년)씨가 부친을 대신하여 이곳(후나카쿠시<船匿>성)에 슈고다이(守護代 ; 슈고의 하위직)로 있었는 데, 원나라 군대(元寇)가 침입하여 장렬하게 싸우다가 19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를 기리기 위하여 이키진쟈를 세우고(서기 1944년) 제사를 지내며,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그의 묘가 있다.
일본의 키타큐슈(北九州)지역의 역사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 쇼니(少弐)씨와 원구(元寇)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기에 자료를 찾아 그 시대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본다.
일본 키타큐슈(北九州)지역에서의 쇼니(少弐)씨는, 헤이안(平安;서기794~1185/1192년)시대 말기부터 카마쿠라(鎌倉;서기1185~1333년,일본열도의 무가정권의 시작)시대 초기에 걸쳐 무장이었던 무토스케요리(武藤資頼;서기1160~1228년)가 다자이후(大宰府;지금의 후쿠오카켄 서부지역인 치쿠젠<筑前;7세기경>국의 지방행정기관)의 차관(次官)인 다자이쇼니(大宰少弐)에 임명되면서 비롯된다.
무토스케요리는 헤이안시대에 우대신(右代臣) 등을 지내며 천황과의 혼인관계등으로 섭정을 행하는 등 조정의 막강한 실세역할을 해오던 후지와라(藤原)씨의 후예인 후지와라히데사토(藤原秀郷;생몰연대 미상, 헤이안중기 무장)씨의 혈통인 무토요리히라(武藤頼平;생몰년대 미상, 헤이안말기~카마쿠라초기의 무장)의 유시(猶子;메이지시대 이전까지 존재했던 타인의 자녀를 계약관계에 의하여 친자관계를 맺고 그 후견인이 되는 제도)가 되어 무토(武藤)씨의 가명(家名)을 잇는다. 무토스케요리의 출생월일은 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쇼니씨는 무토스케요리의 양부(養父)인 무토요리히라의 가계보로 따지면, 무토요리히라의 선조인 후지와라히데사토(藤原秀郷)의 후예가 되지만, 무토스케요리의 핏줄로 따지면, 선조미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무토스케요리는 헤이케(平家 ; 위의 후지와라家와 비슷한 맥락이나, 위세는 후지와라家에 미치지 못함)의 무장이었지만, 이치노타니(一の谷;겐페이갓센<源平合戦/헤이家와 후지와라家의 싸움>의 하나,서기1184년) 싸움에서 후지와라씨에 투항한 후에 후지와라노요리토모(藤原頼朝;헤이안말기~카마쿠라초기의 장군, 카마쿠라바쿠후의 초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의 가신이 된다. 헤이씨(平氏)의 멸망후에 다자이쇼니(大宰少弐)에 임명되어, 헤이씨편이었던 큐슈의 무가(武家)에 대한 카마쿠라(鎌倉)편의 통솔자로서 친제이부교(鎮西奉行;큐슈의 고케닌<御家人>의 지휘통제를 맡았던 직위)를 비롯한 키타큐슈(北九州)제국의 슈고(守護;지방의 군사통제 및 행정의 총책)가 된다. 후지와라노요리토모의 발탁이 그 후의 쇼니씨가 융성하는 계기가 된다.
무토스케요리의 아들 쇼니스케요시(少弐資能; 서기1198~1281년)대부터 "쇼니(少弐)"라는 성(姓)을 정상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카마쿠라시대에 분에이노에키(文永の役;서기1274년), 코안노에키(弘安の役;서기 1281년)에 원구(元寇)가 침입, 쇼니스케요시는 다자이후의 책임자로서 아들인 쇼니츠네스케(少弐経資;쇼니씨 제3대, 서기1225?~1292년)와 쇼니카게스케( 少弐景資;서기1246~1285년) 등과 함께 일본군의 선두에 서서, 원나라 대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코안노에키때에는 쇼니츠네스케의 아들인 쇼니스케토키씨가 이키에서 전사, 쇼니스케요시 자신도 전쟁중의 깊은 중상으로 죽게 되는 등, 일족으로서 커다란 희생을 치루게 되었다. 이러한 공 등으로, 전후에는 키타큐슈에서 최대의 슈고다이묘(守護大名)까지 성장하여 쇼니씨의 최고 성장기를 쌓아올렸다.
그러나, 카마쿠라시대 후기에 쇼니스케요시의 사후, 쇼니츠네스케와 쇼니카게스케사이의 가독(家督)상속분쟁 등을 시작으로 주변소국과의 갈등관계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흥망성쇠을 거듭하다 남북조(서기 1331~1392년;일본황실이 2개로 분열된 시기)시대와 무로마치(서기 1338~1491년)시대, 센코쿠(戰國;서기 1491~1603년)시대, 등을 거치며 쇼니씨 17대인 쇼니후유히사(少弐冬尚;서기1529~1559년)를 마지막으로 쇼니씨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쇼니(少弐)"는 일본 키타큐슈(北九州)지역의 군사통제 및 행정관청인 "다자이후(大宰府)"의 관직명이었으며, 카마쿠라바쿠후의 초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이었던 후지와라노요리토모(藤原頼朝)에 의해 무토스케요리(武藤資頼)가 "다자이후 쇼니"직에 임명되면서 "무토(武藤)씨" 일족이 "쇼니씨"라는 성씨를 갖게 되었고, 이 쇼니씨(少弐氏) 일족은 일본에 무가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카마쿠라(鎌倉;서기1185~1333년)시대부터 토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서기 1542~1616년)가 천하통일을 이루어 에도(江戶;지금의 토쿄) 바쿠후시대를 열기전까지 약 400여년간 일본의 키타큐슈지역에서 존재했었던 명문씨족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럼, 지금까지는 일본 키타큐슈지역에서 한 때의 명문씨족이었던 쇼니씨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원구(元寇)"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겐코(元寇)"는, 일본의 카마쿠라시대 중기에, 그 당시에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원나라(몽고제국)가 고려국을 복속하고, 그 복속정권의 연합군대를 이끌고 두 번에 걸쳐서 일본의 키타큐슈지역을 침략한 것에 대한 호칭이다. 1차 침략의 분에이노에키(文永の役;서기1274년)와, 2차 침략의 코안노에키(弘安の役;서기 1281년)가 바로 그것이다.
원나라의 일본침략이유는, 서기1260년에 몽고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후의 원나라 황제)은, 서기1268년에, 제2대 황제 오고타이(서기 1185~1241년, 칭기즈칸의 3남으로 칭기즈칸의 왕위를 계승함)이래의 현안이었던 남송(南宋)공략을 개시하는 한 편, 이미 복속한 고려국을 통하여(중국 元왕조에 관하여 쓰여진 역사서<正史>인 "원사일본전<元史日本傳>"에 따르면 일본복속을 요구하기 위한 사절을 보내는 것은 고려인으로 원나라의 관리였던 조이<趙彛>의 진언으로 행하여졌다고 한다... ...) 1266년에 일본조정에 처음으로 복속할 것을 요구하였는 데,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 분에이노에키(文永の役)
-. 일본의 분에이(文永) 11년 3일(서기 1274년 11월 3일)에 흔도(欣都)*김방경(金方慶) 등이 이끄는 몽고인*한족*여진인*고려인 등 비전투원을 포함한 총 4만여명을 태운 원*고려군 연합함대(고려군은 약8천명)가 조선반도 남해안 월포(月浦;현 경남 마산시 合浦)를 출발한다.
-. 원나라군대는 동년 10월 5일 오후 4시경에 츠시마 코모타(小茂田)해안에 상륙한다. 츠시마 슈고다이(守護代;카마쿠라*무로마치시대 슈고의 하부관직) 소스케쿠니(宗助国;서기 1207<?>~1274년, 카마쿠라 중기의 무장)가 80여 기마로 응전하지만 전사하고, 원*고려 연합군은 츠시마 전체를 제압한 후에 7일간에 걸쳐서 섬전역을 유린한다. 같은 날, 츠시마 사스우라(佐須浦)에서 쇼타로 헤이지로(小太郎兵衛次郎)병사가 출항하여 하카타(후쿠오카)에 알린다.
-. 동년 10월 14일, 원*고려연합군은 츠시마에 이어서 이키섬을 습격, 이키 슈고다이인 타이라노카게타카(平 景隆 ;서기 ?~ 1274년, 카마쿠라중기의 큐슈무사) 가 100여 기마로 응전하지만, 대응하지못하고 다음날 히즈메(樋詰)성에서 자결하고, 원*고려연합군은 츠시마섬을 제압한다.
-. 10월 16일, 17일에는 큐슈 북서부에 있는 히라도(平戶)*노코노시마(能古島)*타카시마(鷹島)의 마츠우라토(松浦堂 ; 헤이안시대부터 센코쿠(戰國)시대까지 히젠<肥前 ; 현재의 사가켄과 츠시마와 이키를 제외한 나가사키켄 지역> 마츠우라지방에서 조직된 무사단의 연합체로 수군(水軍)으로 유명하다)의 기지를괴멸시킨다.
-. 츠시마*이키의 상황이 하카타에 전해지고, 쿄토와 카마쿠라를 향하여 급보가 발송된다. 일본측은 쇼니씨와 오토모씨(大友氏)를 비롯한 큐슈의 고케닌(御家人 ; 쇼군의 하급무사)을 중심으로 하여 다자이후에 결집하기 시작한다.
-. 원군은 동년 10월 19일 저녁무렵에 하카타만에 출현하여 만의 서쪽 끝인 이마즈(今津)에 정박한다. 동년 10월 20일(태양력 11월25일) 새벽에 선단은 동진하여 사와라군(早良郡 ; 현 후쿠오카켄 소재)을 습격하다가 방어진의 수비로 일시 주춤하다가, 다시금 하카타만 이곳저곳으로 상륙을 한다.
-. 하카타만 서부로 상륙한 원군과 일본군(마츠우라토와 쇼니씨<少弐景資>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밤이 되어 전투를 멈추고 일본군은 다자이후로 복귀한다.
-. 그 후에, 한 때는 일본군에 되밀려 후퇴했던 원*고려 연합군이었지만,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동년 20일 저녁, 원군은 하카타를 점거하였지만, 하루종일 격전한 끝에 화살이 동이 나고, 군의 편제가 와해되어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한다. 이로 인하여, 다자이후 공략을 체념하고, 하카타 시가지에 불을 놓아 전소시키고 철퇴하게 된다.
-. 분에이노에키(원군의 1차 일본침략)는 이것으로 끝나게 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당시의 원군 철퇴의 상황을 적고 있는 데, 그 당시 철퇴하는 날 밤에는 큰 바람과 비때문에 함선이 난파하는 등의 큰 손실이 있어, 동년 11월 27일(태양력 12월 26일)에 조선반도 남해안 합포(현재의 마산)에 귀환하였을 때는, 출병시의 4만 병력중 1만 3,500여명을 잃은 나머지 병력뿐이었다고 한다.
*** 코안노에키(弘安の役)
-. 1279년에 남송정복을 완전히 마친 원나라는 일본과의 동맹이나 남송에 대한 견제가 필요없게 되었는 데, 쿠빌라이는 일본으로부터 도망쳐온 수부(水夫)로부터 사자(使者)의 처형에 관한 보고를 받는다. 특히, 통상의 사자보다도 고위직제(禮部侍郞)였던 두세충(杜世忠 ; 서기 1242~1275년9월27일, 원나라 관료)의 처형소식에 화가난 쿠빌라이는 일본재침략의 계획을 세운다. 서기 1280년에는 침략준비를 위한 정동행성(征東行省 ; 원나라가 고려를 복속한 후에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기 위하여 설치)을 설치한다.
-. 서기 1281년 (일본 코안<弘安>4년)에 원*고려군을 주력으로 한 동로군 4만과 군선 900척, 舊남송군을 주력으로 한 강남군 10만과 군선 3,000척, 합계 14만과 군선 4,400척의 군대가 일본을 향하여 출발한다. 동로군과 강남군은 이후에 합류할 예정으로 동로군이 먼저 출발한다.
-. 동년 5월 3일에 동로군은 합포(마산)를 출항한다.
-. 동년 5월 21일에 동로군은 츠시마내해에 도착하여 세카이무라다이민보(世界村大明浦)에 상륙한다.
-. 동년 5월 26일에 동로군은 이키에 상륙하고, 일부는 나가토(長門 ; 야마쿠치켄)에도 습격한다.
-. 동년 6월 6일에 동로군은 방책루가 없는 하카타만 북부의 시카노시마(志賀島)에 상륙을 시도하지만, 일본군의 분에이에키에서의 학습효과로 인하여 쉽게 상륙하지 못한다. 6월 8일에는 잇따른 일본군의 합세로, 동로군은 어쩔수 없이 마츠우라군의 타카시마(鷹島)로 철퇴하여 강남군을 기다린다.
-. 일본측은 사전에 방어체제를 정비해 놓고 있었는 데, 하카타만 연안에도 약 20km에 이르는 방책루를 축성하여 전쟁을 대비하였기 때문에 원군의 상륙은 매우 어려웠다. 이것은, "공격측은 수비측의 3배의 병력을 갖춰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공격3배의 법칙"(보불전쟁<1870~1871;불란서와 프로이센왕국간의 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시에 독일육군의 연구에 의해 경험적으로 논해진 것)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이 방책루는 매우 튼튼하게 축성되어 높이 3m, 폭이 2m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의 병력 또한 쇼군이 32명에 기타 다른 지역에서 지원군이 다자이후에 결집하여 그 수가 25만 기마에 이르렀다고 한다.
-. 동년 6월 18일에 강남군은 총사령관(아라칸)의 발병으로 총사령관 교체문제 등의 이유로 동로군보다 늦게 중국 강서성의 영파(寧波)를 출발한다. 강남군의 신임 총사령관인 아타카이(阿塔海 ; 서기 1234~1289년)는 타카시마(鷹島)의 상륙이 유리하다는 정보를 받고, 동로군에게 타카시마내해에서 합류하기를 독촉하는 선발대를 파견하여, 6월 26일 경에 선발대가 츠시마에 도착한다. 동로군은 합류하기 위하여 이키로 이동하였지만, 일본군이 대응하여 접전한다. 강남군은 그 일부가 이키에서 합류하고, 나머지 대부분이 히라도 근해에서 결집한 후에, 27일에는 히라도 타카시마로 이동하여 큐슈본토 상륙을 꾀한다. 하지만, 일본군(마츠우라토)에 의하여 저지당하는 등, 그 이후로 여러번에 걸쳐서, 동로군과 강남군이 합세하여 상륙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 동년 6월 30일(태양력 8월 15일) 밤중에 태풍이 엄습하여, 해상상태가 5일간이나 거칠어진다. 7월 5일경 파도가 잔잔해지자 일본 무사단의 소토전(掃討戦)이 시작된다. 4,400척의 군선은 거의 괴멸된다. 특히, 아타카이가 이끄는 강남군의 피해가 컸다. 동로군의 생존병은 19,379명이었다고 고려사는 적고있다.
-. 동년 7월 2일에는 이키섬에 남아있던 원군과 일본군의 싸움이 벌어진다.
-.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나라 수군은 대륙으로 퇴각하지만, 군선에는 생존자 전원을 수용할 수 없어 타카시마에 남겨진 인원도 많았다고 한다.
-. 동년 7월 7일에는 일본군이 또 타카시마를 급습하여 잔류군을 괴멸하고 군선을 불사른다. 원군으로 귀환한 병사는 나중에 풀려난 포로를 포함하여 전체의 1~2할정도라고 한다. 이 싸움으로 원군의 수군전력의 3분의 2이상이 손실되고, 남은 군선도 상당수가 파손된다.
-. 이후, 쿠빌라이는 1287년에 3차 일본공격을 계획하지만 실패한다.
*** 카미가제(神風)의 유래 - 분에이노에키 때에 원나라 군대의 퇴각에 대하여 일본측 사료에서는 하루 밤 자고나니까 원군의 배가 소실되고 없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카마쿠라 후기의 공경(公卿)이었던 히로하시카네나카(広橋兼仲;서기1244~1308년)의 일기인 "칸츄키(勘仲記)"에는, 전문(傳聞)으로써 역풍이 분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사료, "고려사" 등에는, 퇴각 도중에 비바람이 일어나 다수가 좌초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측의 사료에는 기록이 없다. 기상학적으로는 과거의 통계에서 태풍의 도래기록이 없기 때문에, 태풍이외의 기상현상이라는 견해도 취해지고 있다. 분에이노에키에 대해서는, 태풍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현재에는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코안노에키에 대해서도, 당시의 일본이 알 수 없었던 강남군 괴멸이유를 태풍과 열대저기압의 영향이라고 하면서도, 하카타 내해의 동로군은 그것과 다른 이유로 괴멸하였다는 설도 있다.
분에이노에키에 관해서, 현재는 괴멸적인 피해가 있었는지의 여부도 포함하여 많은 의문을 갖게 하지만, 코안 4년 7월 30일부터 다음달인 윤달 7월1일(태양력 서기 1281.8.15~16)에 걸쳐서는 쿄토에서도 격심한 비바람에 시달렸다는 내용의 일기류가 기록에 보이기 때문에, 코안노에키에서의 동로군과 강남군의 괴멸원인은 태풍일 것이라는 설은 현재에도 유력시되고 있다.
또, 당시의 군가인 "겐코(元寇)"의 가사에도 "코안 4년 여름쯤"이라는 일절이 있지만, 분에이노에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고 있지않다.
당시의 일본 국내에서는, 대원(對元)전쟁을 일본의 신(神)과 원나라의 신(神)간의 싸움이라고 보는 관념이 널리 공유되고 있어, 노래부르는 것이나 여러 진쟈 등에 따른 구부려 기도하는 것은 일본신의 힘을 강화하는 것으로 인식되어(天人相關說 ; 유교의 교의의 하나로, 하늘과 사람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상), 일본을 구한 당시의 폭풍우를 카미가제(神風)라고 인식하였다. 또, 카미가제의 관념은 "신국사상(神國思想)<일본을 신국으로 간주한다>"으로 발전하여, 에도시기와 메이지시기를 거쳐, 태평양 전쟁시의 "카미가제토코타이(神風特別攻擊隊)" 등에까지 이른다.
불빛 하나 없이 적막하기 이를데 없는 쇼니공원에서의 머무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곳의 역사공부를 위한 시간은 너무도 길고 진지하기만 하였던 듯 하다. 이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야겠기에 올라오던 길을 따라 다시금 아시베훼리터미날을 향한다. 코너의 조그만 진쟈(하코자키<箱崎>진쟈라고 되어 있었다) 를 지나면서부터는 해안부두길을 따라서 거닐어보았다. 방파제 안쪽으로는 조그만 선박수리소가 있고, 여러척의 어선들이 잇대어 계류하고 있다. 사람 한, 두명이나 탈 수 있을 정도의 단정같은 어선도 있었는 데, 귀여워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초여름밤 정도의 밤날씨에 비유하면 좋을까, 정월 초하루의 겨울밤답지 않은 이곳의 밤공기를 쏘이며 2시간여를 거닐었던 것같다. 훼리터미날에 도착하니 밤 10시를 좀 지나고 있었다.
[야간산책을 위해 약 1km 정도를 걸어 도착한 쇼니(少弐)공원, 역시 이 공원에도 가로등이 켜져있지 않다. 멀리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바다와 주변의 모습만 어렴풋한 불빛속에서 감상해본다]
[쇼니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키관광안내도]
[이키진쟈(壱岐神社)]
*** 원구(元寇), 코안노에키(弘安の役)시에 전사한 쇼니스케토키(少弐資時)씨를 제사지내는 진쟈이다. 서기1944년에 본전이 조영되고,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이키의 진쟈중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진쟈의 경내에는 "쇼니스케토키(少弐資時)" "원구(元寇)의 섬 이키"라 쓰여진 기가 여러개 세워져 있다. 배전(拜殿)에는 쇼니스케토키(少弐資時)씨의 싸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놓여있다.
[아시베항에서 츠시마 이즈하라(厳原)행 배를 기다리며<1>] 쇼니공원의 산책을 마치고 아시베항의 훼리터미날에 돌아와서 터미날 2층의 대기장에서 휴식좀 취할 수 있겠지 하면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보니 실망스럽게도 문이 잠겨있다. 아래층 매표소 입구는 어떨까 싶어서 열어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어휴! 예상밖이로구나" 하면서 한참을 주위를 서성이다가 별다른 방법이 없을 듯 하여 일단은 터미날광장 쇼니동상 맞은 편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잠시후 형님의 베낭속에서 인삼주가 나오고, 나의 베낭속에서 쥐포안주가 나오니 야외술상으로는 그만이다. 그런데, 술잔이 없다. 하는 수 없이 휴대하고 있는 자그만 물병에 나누어 따르며 한 잔 거하게 마시며 이키섬 아시베항 정월초하루의 밤정경을 머리속에 그린다. 하지만, 시간은 아직도 요원하다. 새벽 2시까지니, 아직 3시간여를 기다려야 한다. 따끈한 국물을 안주삼아 마시는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이것도 긴 시간을 버티기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번화한 대도시 중심가라면 네온사인의 불빛아래 마냥 거닐어보기도 한다지만, 이럴때는 우리나라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야간 포장마차가 진정으로 그리울 뿐이다.
평소에 피지않던 담배를 형님으로부터 얻어서 입에 물며 시간을 보낸다. 형님은 벌써, 명당자리를 찾았다며 그곳으로 안내한다. 밤이슬과 바람을 피할 수 있으니 한결 나은 듯 싶었다. 이따금씩 주차장에 들리는 행인이 있었지만, 이곳의 밤은 가로등불빛이 있다는 것 외에는 정말로 시골밤의 고요함 그 자체이다. 물론, 터미날 대로 맞은 편의 M-1파칭코야는 네온사인을 번쩍이며 저홀로 신바람에 젖어있는 요술박스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대박을 축하하는 팡파레소리가 은은하게 밤의 고요를 깨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통행차량도 거의 없이 조용하다. 형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보낸 시간이 2시간 가까이 되었을까, 이제는 시간도 자정을 지나고 있다.
!!!. 2011년 2월 4일 금요일 맑음(츠시마 약간 흐림)
[아시베항에서 츠시마 이즈하라(厳原)행 배를 기다리며<2>] 자정을 지나면서 파칭코야의 네온사인도 그 움직임을 멈춘다. 새벽시간까지 영업을 하는줄 알았더니 시골이라서인지 자정까지만 하는 모양이다. 잡기에는 소질이 있지만, 평소에 도박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서 많은 일본체험을 하면서도 한 번도 파칭코야에 들어가보지 않았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 여행할 경우라면 한번쯤 체험해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가져보지만, 하여튼 별로 흥미가 없다. 아니, 흥미가 없다는 것보다도 아예 흥미를 안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밤의 고요는 다시 시작된다. 이 때쯤이면은 터미날문을 개방하겠지 하였는 데, 깜깜 무소식이다. 시간이 갈수록 형님의 앉아있는 모습이 점점 공간평수를 늘려간다. 술기운에 이제 슬슬 잠이 오는 모양이다. 나중에는 완전히 새우잠 모양의 재밌는 모습으로의 이미지 변신이다. 나는 선채로의 모습으로 일관하며 가끔씩 별로 맛도 없는 담배만 입에 물며 불침번을 서는 꼴이다. 사방이 고요해지니, 이제는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이키소의 울음소리가 감회가 새롭다. 이키소는 지금 이키시 브렌드로 등록을 하여 명품소로 일본전역에 각광을 받고 있는 중인데, 마치 우리의 한우와 같은 격이다. 강원도의 횡성한우나, 충청도의 홍성한우 등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나에게도 애틋한 "한우스토리"가 있는 데, 얘기를 하다보면,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듯 하여 여기서는 그 이야기의 시작에 그친다.
하여튼, 우리 역사에서 농경문화가 싹트면서 축력의 이용은 획기적인 문명의 진보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곳, 이키에서도 지리적 환경의 좋은 조건하에 일찌기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기에 축력의 이용은 당연한 발상이었겠다. 그러한 이키섬의 역사현장에 이키소도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육우로의 명품브렌드로 우리들의 일상에 가까이 하고 있지만, 기계화 영농이전의 농업사회에서의 소의 가치는 진정 대단했던 것이다. 어릴 적에 우마차를 타고 시골의 5일장에 다녔던 일을 생각해보면, 이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아프리카 짐바브에같은 나라에서는 몇 마리의 소를 소유하고 있느냐가 부의 척도이고, 배우자를 맞이하는 데도 소가 그 역할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하지않던가. 어쨌거나, 이키소의 울음소리는 나의 지루한 밤에 애틋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이제, 새벽 한 시가 지날무렵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문이 열리겠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예상했던대로 1시 30분 경이 되면서 터미날 안쪽에 등이 밝혀지면서 당직자가 문을 열고 있었다. 부두 한켠에서 터미날을 바라보니 2층의 격실 하나가 불이 켜져 있었는 데, 당직실이었던 모양이다. 형님을 깨워서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서 2층의 대기실에 먼저 올라가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면을 하고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우선은, 예매했던 표를 승선권으로 바꿔야겠기에 1층의 매표창구로 간다. 오늘의 손님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우리 둘 이외에 한, 두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제, 50분정도 후면 츠시마 이즈하라행 배가 온다. 2층의 대기실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서, 카메라 바테리의 충전을 위해서 콘센트를 찾으니 마침 벤치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있다. 적당히 꽂아두고서 잠시 가면을 취한다. 당장 이즈하라에 도착하면, 렌트카를 빌려서 또 운전대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손님은 거의 없다. 피곤했던 탓인지, 금방 잠에 든다. 조각잠이 피로회복제로는 그만이다. 잠시 잠이 들었나 했더니, 벌써 출발시간이다. 훼리 치쿠시가 벌써 부두에 들어와 계류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섬주섬 충전중인 카메라를 챙겨 베낭을 들춰메고 훼리치쿠시에 오른다. 하선손님도 한산하지만, 승선손님도 한산하다.
[아시베항 맞은 편에서 영업중인 "파칭코야". 저녘 8시경 이후에는 대부분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파칭코야의 네온사인만이 이키의 고요를 잠깨운다.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겉에서 보고 감상하는 데 그쳐야 했다. "우리는 미성연자이기 때문에... ㅋㅋㅋ"
[파칭코야도 자정을 지나면서 영업을 마치는 데, 네온사인도 멈추고 다소 지루한 시간이었다. 다소 추운 날씨에 적당한 공간에서 새벽배(2시 30분경)를 타기 위해 기다리다. 한국의 포장마차가 그리워지는 경우이다
[아시베항에서 츠시마 이즈하라행 야간훼리를 타다 / 훼리치쿠시 선상에서] 터미날 대기실을 나와 승선입구를 통하여 배에 오르자마자 방을 찾으니 일반실의 방은 완전히 축구장 모습이다. 손님은 별로 없고 온통 내 세상이다. 전원콘센트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충전을 위해서 카메라를 콘센트에 꽂아두고서 잠시 중앙로비의 안내데스크에 들렀더니, 여러가지 안내팜플렛이 많이 놓여있다.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겨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이 배는 사우나 시설은 없었다. 부산-후쿠오카, 시모노세키, 오사카 간에 운행하는 국제훼리에는 아주 쾌적한 사우나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피로회복을 위하여 아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데, 이 배는 국내선이라서인지 그런 시설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제, 2시간 정도의 단잠을 자야할 시간이다. 겉옷을 이불삼아 잠을 청한다. 달콤한 꿈속으로의 여행의 시작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꿈의 연장선에서 해양국가 일본에서는 마도로스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 꿈을 이루고 있을까? 안내 데스크에 꽂혀있던 팜플렛의 내용을 사진으로 담아서 이야기로 꾸며본다.
[배의 주요설비와 선원이 하는 일의 소개] 배는 항해사등 갑판부 승조원과 기관사등의 기관부 승조원으로 운항한다. 그 외에 식사를 준비하는 사무부도 있다.
-. 항해사(Deck Officer) : 해도에서 항로를 선택하여 레이더와 쌍안경으로 주변을 살피면서 조종타와 기관을 이용하여 선박을 조종한다. 해역의 기상과 조류의 흐름상태, 항로표식 등을 숙지하고 있다. 정박중에는 선체의 보수 및 화물적하 등의 감독을 행한다. 경험을 쌓아서 장래에는 선장이 된다.
-. 기관사(Marine Engineer) : 자가용차량의 수십배에서 수백배 이상의 출력을 가진 주 엔진과 그 밖의 기기의 구조 등을 완전히 숙지하여, 운전과 정비를 행한다. 고장시에는 응급조치와 수리를 행하고, 정박중에는 부품의 교환등, 기기의 정비를 행한다. 경험을 쌓아서 장래에는 기관장이 된다.
-. 범선(帆船) : 바람의 힘으로 항해하며,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낭만이 넘치고, 승선하고 싶은 욕망이 느껴지는 배이다.
*** 배의 맨 꼭대기 레이다부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배의 구조물들에 대한 설명을 부연한다.
-. 레이더(Radar) : 야간이나 안개시에도 주변의 배의 움직임을 알게 해준다.
-. 콤파스(Compass) : 방향각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이다.
-. 브릿지(Bridge) : 배를 조종하는 선교(조종실)이다.
-. 위드라스(Windlass) : 앵커를 올리거나 내릴 때에 사용하는 모터구동장치이다.
-. 불바우스 보우(Bulbous Bow) : 구상선수(球狀船首)라고도 하며, 배의 조파(造波)저항을 억제하여 속력을 빠르게 해주는 구조이다.
-. 트러스터(Thruster) : 배의 부두접안 및 이탈시에 배머리를 횡측으로 이동하게 해주는 소형 프로펠러추진장치이다.
-. 앵커(Anchor) : 배가 부두에 계류하지 않고 해상의 어느 곳에 계류시 수중에 내려져서 배를 이동하지 않게 한다.
-. 갈레이(Galley) : 승조원의 식사를 위한 조리실이다.
-. 기관실(Engine Room) : 배의 추진력과 전력 등을 생산하는 기관이 설치되어있는 격실이다.
-. 프로펠라와 조종타(Propeller & Ship's Rudder) : 배의 추진과 침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 현창(舷窓 ; Scuttle) : 파도의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장치된 방수창문이다.
-. 마스타(Master) : 송수신 안테나와 항해등이 장치되어 있다.
-. 구조용 보트(Life Boat) : 비상시의 구명정이다.
[선박의 종류] 화물선(수출등을 위한 화물콘테이너등의 선적이 가능한 선박), 탱커(Tanker ; 액체화물의 전용운반선), 터그보트(Tug Boat ; 바지선이나 대형선박을 예인하는 데 이용되는 예인선박), 카훼리(Car Ferry ; 여객전용 선박), 고속훼리(여객전용 고속운행선박), 연습선(해양학교 등 항해실습 등을 위한 교육용으로 제작된 선박) 등.
[해양국가 일본의 마도로스 인큐베이터/교육기관] 일본의 대표적인 선원 양성기관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해상기술학교(중졸자격의 자가 입학할 수 있고, 3년과정으로 고등학교졸업동등자격을 함께 얻을 수 있다), 해상기술단기대학교(고졸자격의 자가 입학할 수 있고, 2년과정으로 졸업시에는 4급 해기사의 항해와 기관의 해기면장를 취득할 수 있다. 또, 해기대학교에 진학하여 3급 해기사의 면장을 취득할 수 있다),
-. 해상기술학교에는 국립오타루(小樽)해상기술학교(혹카이도 오타루시 소재), 국립타테야마(館山)해상기술학교(치바켄 타테야마시에 소재), 국립카라츠(唐津)해상기술학교(사가켄 카라츠시에 소재), 국립쿠치노츠(口之津)해상기술학교(나가사키켄 미나미시마하라시에 소재)가 있다.
-. 해상기술단기대학교로는 국립미야코(宮古)해상기술단기대학교(이와테켄 미야코시에 소재), 국립시미즈(淸水)해상기술단기대학교(시즈오카켄 시미즈시에 소재), 국립나미카타(波方)해상기술단기대학교(에히메켄 이마바리시에 소재)가 있다.
-. 일본의 해기(海技)대학교(http://www.mtc.ac.jp)는 효고켄 아시야시(芦屋市)에 소재하고 있다.
[츠시마 이즈하라항 훼리터미날]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일까, 배의 안내방송소리에 깨어보니 벌써 배는 츠시마의 이즈하라항에 도착해 있다. 서둘러 짐을 챙겨서 형님과 함께 하선을 준비한다. 새벽 5시가 지나 이제 동틀무렵의 시간이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기에 이즈하라항의 2층 대기실 벤치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니, 아예 잠을 청한다. 손님이 거의 없고, 이키의 아시베항과는 달리 아늑하고 온화한 온도에 저절로 잠이 스르르 쏟아진다. 공공장소지만,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서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었다. 이제, 날이 새면 렌트카를 이용하여 츠시마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 다음 이야기는 츠시마*이키섬 역사*문화기행<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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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이렇게 정성이 깃들여진 글은 한번 읽고 지나치기에는 아깝습니다.
개인 블로그를 만드시거나 홈페이지를 개설하셔야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그 수 많은 사진들을 올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번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라 복습해야겠습니다.
이키섬의 신비스러움에 관심을 갖는 것도 재밌는 일일것입니다.
관심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옛날 역사책에는 "일지국(一支國)"이라 소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근래에 "하루노츠지"라는 야요이시대의 "왕도"가 거의 발굴이 끝남에 따라서 "이키섬의 역사적 가치"가 더욱 높아진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츠시마에는 철도는 없지만, 대신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많네요.
언젠가 싱가폴의 센토사섬을 다녀온 적이 있는 데, "모노레일"이 썩 어울리더군요. 면적이 다소 넓기는 하지만, 이키섬 역시 모노레일을 시설하면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관광수요 등의 경제성을 고려는 해야겠지만.~~~~
잘 봤습니다 ^^
아니, 보았다라기 보다는 읽었다는 표현이 어울릴것 같습니다.
간만에 책을 읽는 듯한 자세한 여행기였습니다. ^^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