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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 님의 ~
遺跡따라 傳說따라 順天紀行
大韓民國 모든 박,씨(朴氏)들은 일가(一家) 이면서
근본 은 신라인(新羅人) 이다.
그러니까 서라벌(半月城)에서 혁거세대왕 으로 부터
시원(始原)이 되었고 왕권통치(王權統治)를 하였던
성골출신(聖骨出身) 들이다.
그리고 1000년 후대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에 이르러
아홉 분 의 대군이 계셨는데... 국당공 한분빼고...
여덟대군 들 께서 분봉(分封)으로 각 지역 에서 봉작
(地方分權)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으니 필자 는 여덟대군
가운데 江南大君(순천박씨) 의 후손(後孫) 이다.
여덟대군 중 한분 이셨던 우리의 선조 "강남대군(江南大君)"
께서는 順天으로 봉작( 封爵 )을 받으셨고. 세밀한 기록은
전 해 지지 않아 안타깝지만 장기 거주던 일시거주를 하였던
어쨌던 이곳 순천에 거주 하면서 백성을 다스렸을 것은 분명한
사실 일 것이다.?
그래서 순천(順天)이 순천박씨 의 관향(貫鄕)이 되었다고
순천박씨 대동보(乙酉譜序)에 확실하게 기록 되어 있다.
筆者는 어렸을 적부터 막연하게 순천(順天)을 동경 하고
그리워 하였는데 먼 옛날 조상님 의 관향(貫鄕)이 이곳
이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조상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순천 곳곳에서
삶의 구석구석 을 느리고 천천히 선조님 의 유물유적(遺蹟)
이곳저곳 을 찾아 다니며 旅行과 탐구(探究)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나마 늘 갖고 살았던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회(機會)는 그리 빨리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다부지게 작정하고 그 여정(旅程)의 시작을
오늘 감행 하기로 하고 배낭하나 달랑메고 출발. ~하였다.
첮날 찾은곳은 정승공 난봉할아버지 의 사당과 난봉산성
(蘭鳳山城) 이다.
순천 에는 시제(양력4월1일)때 몇번...
그리고 종친(宗親) 몇분을 모시고 난봉산을 올랐던 적은
있었지만...
그러나 대충대충 돌아 보았기에 이번엔 천천히 꼼꼼하게
난봉산성과 그 주변 사료지(史料址) 들을 직접 탐구하면서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산성(山城)은 순천시 인제동, 저전동, 남정동, 덕월동,
상사면(上沙面 ) 흘산리(屹山里)에 걸쳐 있는 인제산 의
중턱에서 부터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는 퇴뫼식 토석(土石)
의 혼합산성 이다.
산정상 높이는 해발346.2m이라고 한국지리원 지도 에
정확하게 표시 되어있다.
성곽은 장구(長久)한 세월의 흔적으로 무너져서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별로 없었지만 그 흔적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다.
성곽의 높이는 1.5∼3m 정도이고 너비는 넓은 곳이 9m
정도에 달하며 주위 둘레는 400m 정도 되는데 전체 형태는
원형(圓形)에 가까웠다.
그리고 성곽 내(城郭內) 에는 피내골
(왜군들의 피가 흘러내리던 골짜기)
억만골, 처마골(말을 기르던 골짜기),
산죽배기(화살을 만들던 곳), 서당골,
큰무쟁이, 용지골, 절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고
유적(遺跡)으로는 방형(方形)의 용지(龍池:
승평부사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작은 샘)와
박난봉 장군의 사당지(용지가 있는 약 700여 평의
평평한 곳에 축대와 기와편 들이 있음)가
남아 있었다.
이 사당지(祠堂址)에는 마가사(摩訶寺)라고 하는
박난봉 장군께 공을 드리기위해 지어진 사찰 도
있었다고 전해 지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았다,
<종친들의 유지를 모아 재건해야 할 유적이다>
이 산성은 고려 정종 때 박난봉(朴蘭鳳) 장군께서
왜적(倭敵)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순천시문화원
향토지 에 또렸하게 실려 있었다.
傳 해오는 이야기에 의 하면 난봉장군 이 사망후에
인제산신(麟蹄山神)이 되었으며 박난봉장군이 묻힌
인제산성(麟蹄山城) 안 에는 장군의 혼백(魂魄)이
가득 해서 비오는날(雨天) 이나 달 밝은 밤 이면
병마(兵馬)가 울부짖고 뛰어가는 소리가 온 산천에
진동(震動)하여 누구 하나 무서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때 아전 이한생 의 꿈에 박난봉 장군 께서 홀연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 ‘신당(神堂)을 지어 나를 모셔주면
마을을 지켜주겠다’ 라는 말을 남기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한생 은 신당을 짓고 박난봉 장군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무당(巫堂)이나 승려(僧侶)들도 머물지 못하고
떠났던 마을 에는 평온(平穩)을 되찾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주민들이 걱정없이 편안(便安)하게 살았다고 하는
말이 전(傳)하여 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소 신화적(神話的)인 요소(要素)가
있긴 하지만, 순천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전설
(傳說)을 굳게 믿어오고 있었다.
들머리 : 상인제마을→능선→정상(1時間)
날머리 : 정상→능선→월곡마을(40分)
남제동
남제동 은 본래 순천군 장평면 지역으로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총폐합에 따라 장평면의 남정리·신흥리·
남제리 와 도리면의 지정리 일부 를 병합 남정리 라
하였다.
1931년 11월 1일 남정리, 인제리는 순천읍에 속했으며
1949년 8월 14일 순천부 신설에 따라 순천부에 속했고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 시행에 따라 순천부가
순천시로 바뀌고 동제 실시에 따라 순천시 남정동,
인제동으로 운영하다가 1964년 1월 7일 순천시의
33개동을 16개동(행정동)으로 조정(시조례 제174호,
1963.12.18)하면서 남제동이라 하여 현재 이르고 있다.
피내골, 억만골·,서당골·용지골,·큰골, 등의 지명 이
아직 까지 남아 있으며, 상인제 북서쪽 골짜기인 억만골에는
임진왜란 때 순천이 겪은 비극의 한 역사를 전해주는 '
억만골과 피내또랑' 전설(傳說)이 전 해오고 있는곳 이다.
난봉산(일명:南山,인제산)
난봉산 은 해발 346.2m이며, 지도상 에는 남산 으로
표기 되어 있다.
남제동 의 면적은 순천시 전체면적 의 약 0.28%인
2.56 ㎢이며 난봉산 을 배경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주거지역 이며 상사면, 풍덕, 저전, 장천, 도사동 과
접 하고 있다.
2018년 11월말 4,901세대 12,658명이 살고 남자는
6,382명 여자는 6,276명 이다.
지정문화재는 없고 유적으로 방형(方形)의 용지(龍池)
와 박난봉 장군의 사당지(용지가 있는 700여평의
평평한 곳, 축대와 기와편 들이 있음)가 있다.
월곡마을
마을 이장 000씨 는 월곡이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삼베로 유명 했었다고 자랑을 한다.
“당시 월곡 삼베 라면 남도에서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당시에 삼을 굽는(삼베를 삶는) 대형가마가 5개
있었는데 다른 마을에서도 월곡으로 찾아 와서 삼을 구어
가곤 했다”고 증언(證言)해 주었다.
그리고 이장 000씨는 “60명 넘는 동네 어른 들 중에
수의로 마포 한 벌 준비 안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이라며 “새마을운동 이 한창이던 70년대 이후
마포 밭은 물론 가마나 가마터 심지어 길삼을 하던
직조기 들도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며 서운해 한다.
향토학자 한분이 인제산 위의 건물터에 대해서 말했다.
박난봉장군 사당터가 틀림없이 맞다 “주춧돌의 간격이
절이나 큰 건물형태가 아니라 영정을 모시는 집 형태로
그 간격이 아주 좁게 되어있었다”며 “수해가 나던 해
주춧돌 위에 있던 사당(廟)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 형태가 뚜렷이 드러났다”고 증언(證言)해 주었다.
고려 때 의 장군으로 순천 인제산에 성(城)을 쌓고
웅거 하면서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을 막았고,
작고한 후에는 고을을 지키는 인제산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박난봉 장군(朴蘭鳳將軍) 은 고려정승 까지
오른 어른이다.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된 순천 난봉산성(蘭鳳山城)을
찾기위해 향토학자 한분과 함께 산을 올랐다.
筆者 의 손에 들려진 자료는 고작 ‘난봉산성은 고려 때
순천출신 의 박난봉 장군이 쌓은 산성(山城) 으로써,
성의 이름은(城名)은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전 해진다’ 라는 몇 줄의 기록만 있을 뿐이었다.
성의 역사와 규모(城의歷史와 規模)
난봉산성 이 언제 처음 축성(築城)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아직은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전설(傳說)에 신비감 이 있어 더욱 좋았다.
최근 발간된 순천시사(順天市史)를 들여다 보면
난봉산성에 관련된 기록이 여기저기 조금씩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난봉산성은 읍성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순천시 매곡동 뒷산을 중심으로
약 700m에 걸쳐 건축된 산성
(혹은 매곡산성(梅谷山城)이라고도 함)이다.
이 성(城)은 당시 도성북문 밖의 외곽방어를 맡았던
순천지역 의 요새지로 짐작 된다고 하였다.
지금도 산에 오르면 성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성석
(城石)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먼 옛날 조상님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난봉산성을 소개하고 있는 고문헌(古文獻) 가운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옛 성터
가 있다”고 아주 짧막하게 나타나 있을 뿐, 성(城)의
규모나 연혁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른 문헌에 비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記錄)한
‘조선보물고적 자료’ 에는 성의 명칭이 ‘난봉산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城)의 규모나 형식에 대해서는 “높이 2~4간(間),
둘레 약 400간의 방형누지(方形壘址)로써
난봉산의 남향으로 돌출한 일지맥(一支脈)의
산정(山頂)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순천 사람들은 성이 있는 산을 언제 부터인지
‘난봉산(蘭鳳山)’이라고 불르는것을 좋아 했다.
이러한 지명은 박난봉(朴蘭鳳) 장군의 묘소 가
산의 동남쪽 기슭에 있어서 더욱더 확실(確實)한
연고성 을 갖는다.
박난봉장군 은 순천 박씨 중시조인 휘 박영규
(견훤사위)의 4대 손으로 고려 정종 때 정승까지
오른 분이라 되어있다.
직위(職位)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러 평양부원군
(평양 :순천의 옛이름) 으로 책봉되고 고려정승 까지
오르신 분이다.
박난봉 장군에 대한 전설(傳說)
난봉산성은 박난봉 장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순천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신화처럼 전해오고 있으니 역사는 유구한 것이다.
박난봉 장군 은 특출(特出)한 영웅(英雄)의 자태를 지닌
이곳 출신의 군장(軍將)으로서, 인제산 에서 마을 뒤편
진산(珍山)에 이르기까지 성을 축조(築造)하고 그곳에
웅거(雄據)하며 왜구(倭寇)를 무찔렀으니 생전 에는
순천의 영웅(英雄)이였고 사후(死後)에는 인제산의 산신
(山神)이 되어 고을의 안녕(安寧)과 우국충정(憂國衷情)
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박난봉 장군의 전설은 神話的인 부분이 상당이 있지만
순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수 있는 ‘강남악부’에는
인제산성에 대한 이야기와 박장군 의 이야기를 수록
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
박난봉 장군에 대한 구전(口傳)은 이외에도 몇가지가
더 전해 지고 있다.
‘인제산 에 있는 용마발터는 박난봉 장군이 탔던 말의
발자국 이다’라든지, ‘박 장군이 난봉산 죽도봉 에서
인제산 까지 말을 타고 휘휘 날아다녔다’는 이야기가
그 것이다.
태생(胎生) 부터가 신비감 마저 드는 인물 이기에 더욱
영웅적 인 이야기가 전해 지는것 같다.
옛 선조의 유적을 답산후 난봉산성 을 돌아 나오는
筆者의 가슴에는 다 알지못해 아쉬운 마음과 그리움
영웅적 조상(祖上)에 대한 뿌듯한 자랑거리와 자부심
이런것이 모두 조상의 음덕(蔭德)이 아닐까 생각하며
난봉산성 을 천천히 내려왔다.
순천만(順天灣)
갈대 밭으로 유명한 순천만(順天灣) 에는 또하나의
이름이 있다.
순천만의 입구쪽은 여자만 이라 따로 부르는데,
고흥군에 속하는 여자도(汝自島)가 만 안에 있기 때문
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어디서 어디까지가 여자만 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순천만인지의 경계는 명확하게
그어져 있지 않다.
두 이름 다 건설부 지명위원회에서 1961년 4월22일
자로 동시에 지명되어, 국립지리원 지형도에 두 이름이
다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의 만에 두 이름을 쓰는 것은 어쩐지
어색 하기만 하다.
순천만 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순천시 해안에는
갯벌과 염습지가 잘 발달하였다.
만의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파도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빗물을 타고 흘러온 흙과 모래들이
수로 주변에 두툼한 퇴적층을 이루면서,
일년 에 서너 차례만 해수에 잠기는 염습지가 형성된
것이다.
염 습지 를 기반으로 갈대들이 무성히 자라났다.
갈대들은 갈수록 세력을 넓혀 가는 퇴적층을 좇아,
바다를 향해 뻗어간다.
동천과 이사천 합수지점부터 나루곶이 하구에 이르는
수로 주변과 인안제방 언저리에는 드넓은 갈대밭이
형성되었다.
갈대밭과 갈대밭 주변의 갯벌은 풍부한 먹이와
서식처를 제공하기 때문에 천연기념물 제228호인
흑두루미를 비롯해 검은머리갈매기·황새·저어새·
노란부리백로 등의 희귀 조류 10여 종을 비롯, 140여
종의 조류가 서식하거나, 겨울을 나고 간다고 한다.
순천만은 순천시내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져 있다.
순천만 해수역은 75㎢에 달하며, 순천시가 순천만에
접하는 해안선의 길이는 약 25km(도상거리),
해룡면~도사동~별량면으로 이어진다.
간조 시 드러나는 갯벌은 연장 12km, 너비 1km로
총면적 21.6㎢. 이 중 갈대밭은 5.4㎢이며,
하구 염습지는 총 27㎢에 달한다.
순천만 드넓은 갯벌에서 주민들은 고막을 기르고,
더 깊은 물목에는 대나무 막대를 세우고 그물을 놓는
발(듬장 혹은 게장, 갯장)을 설치하여
고기를 잡으며 살아간다.
별량면의 끝인 고흥 경계에서 해룡면의 끝인
여수 경계까지 이어지는 순천 해안은 인간이 어떻게
바다에 기대고 그것을 아끼며 살아가는가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최상의 학습장이다.
별량면 화포 해안과 해룡면 와온 해안은 갯벌과 사
람을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이다.
일출 무렵이나 일몰 무렵, 갯벌이 활짝 드러나는
썰물 때를 맞춰 가면 더 진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순천만 갈대밭.
드디어 그 앞에 섰다. 뭍 생명을 끌어안고 살리는
바다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둑 위로 올라가서 갈대들을 내려다본다.
어느새 어두워져서 멀리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없어서 술렁거림마저도 없다.
저녁 해는 안내를 끝낸 병사처럼 돌아서서
산을 넘어가 버린다.
갈대들은 인사도 나누기 전에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
안내자 없이 둑길을 헤매느라 아까운 저녁 해를 3
0~40분 동안이나 허비해 버린 것이다.
이 해안이 가장 아름다웠을 시간을, 이 갈대밭이
가장 빛났을 시간을, 길 찾기에 허비해버린 것이다.
인안제방 갈대군락에 해가 뜬다(대대동)
그러나, 오늘의 태양은 좋은 안내자였다.
어떤 나침반보다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내가 헤매는 동안 가장 아름답게 빛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둑을 올라 바다 앞에 서는 순간,
임무를 마친 병사처럼 산을 넘어가 버린 것이다.
태양은 넘어가 버렸지만 구름은 붉다.
저 붉은 여운에 의지하여 얼마동안은 더 머물 수
있겠다.
어디까지가 길인가.
어디서 끝나는가. 둑을 따라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달려본다.
천천히 천천히 새들이 놀라지 않게. 그러나 놀란 것은
오히려 필자 였다.
한 무리의 새들이 꾸럭꾸르럭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간다.
갈대밭 위를 날아 좀더 깊은 바다쪽으로 간다.
철새. 초겨울 부터 이른 봄까지 서남해안을 찾아오는
가창오리떼. ...
그런가 보다.
저 새들은 밤에 오히려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낮 동안은 갈대숲에서 쉬다가 어둠이 내리면 활동을
개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눈 밝고 발톱 사나운 맹금들을 피해 어두운 하늘을
날게 되었으리라.
조그만 몸을 감추려고 무리지어 날며 거대한 구름처럼
위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추운 곳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향이 눈에 덮이면
따뜻한 남쪽 나라 의 겨울을 찾아오는 것이지 싶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건만,
저 새들은 스스로 살만한 땅을 찾아온 것이다.
바람이 이는 곳까지 왔다.
새들이 사라진 하늘에 별(星)이 돋는다.
뚝 위의 갈대들이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또 한 무리의 새떼가 달의 뒤쪽에서 나와 바다 위로
날아간다.
바닷물이 천천히 밀고 들어온다.
갈대들 발치 에서 물이 빛난다.
어둠 속에서 갈대들이 좀 더 몸을 크게 흔든다.
휘청 누웠다 일어서는 것들도 있다.
길은 더욱 나빠지고, 필자는 되돌아가서 따뜻한 것을
먹고 마시고 싶다.
갯장에서 돌아오는 어선(별량면 학산리 화포 포구)
갈대들을 남기고 마을로 간다.
갈대밭 가까이에서 쉬고 싶은 소원이 이루어졌다.
참꼬막 안주에 반주로 배불리 먹고 포구로 나가본다.
별이 유난히 많이 뜨는 밤.....이다.
가느다란 초승달이 한쪽 눈으로 웃는 밤.
만조(滿潮)를 이룬 포구에선 닻돌에 묶어놓은 배들이
출렁거린다.
갈대들은 허리까지 잠기는 물 속에서 헤드랜턴 불빛에
깜짝 놀란다. .
화포 포구는 순천만 동쪽 기슭에 있다.
화포 의 아침은 활기가 넘친다.
좁다란 선착장(船着場)에 어선이 들어온다.
갯벌 안에 둘러친 갯장에서 고기를 걷어서 돌아온다.
갯장은 듬장 이라고도 하고, 게가 든다고 게장이라고도
하고, 그냥 발이라고도 하는데,
대나무 막대를 울타리처럼 둘러서 꽂고 그 안에 그물을
놓아 밀물 때 물결을 좇아 들어온 고기를 썰물 때
나가서 털어오는 것이다.
그 그물은 장어 통발처럼 들어갈 수는 있어도
다시 나올 수는 없는 구조로 되어있을 것이다.
새벽에 물을 보러 나갔던 배들은 이마에 불을 달았다.
석탄을 캐는 광부들이 이마에 랜턴을 붙이는 것처럼
순천만의 어선들도 조타실 앞에 불을 하나씩 달고
나갔다 온다.
듬장에서 털어 온 고기에는 뻘이 많이 묻었다.
그래서 큰 바구니 같은 데 담아 바닷물에 흔들어
뻘을 씻어낸다.
뱃전에 엎드려서 흔들흔들 뻘을 씻어내는 모습은
익숙하고 활기차다.
그러면서도 조용하다.
모두들 말없이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있다.
뻘을 씻은 고기는 배 위나 선착장에 둘러앉아
선별작업(選別作業)을 한다.
종류가 같은 생선 끼리 같은 함지 그릇에 담긴다.
툭툭 던져지는 것은 아주 작은 게(蟹)들이다.
일찍 다녀와서 작업이 끝난 어부는 삿대로 배를 밀어
물 위에 띄운다.
그사이 바다가 밀고 들어온다.
일을 끝낸 사람들은 새벽의 수확물을 자동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해뜰 무렵의 화포 포구.
갯장에서 돌아온 어선들이 선착장 주변에 모여있다
우명은 화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모퉁이 하나
돌아서면 있다. 우명에는 선착장이 없다.
우명 사람들은 배는 바다 가운데 두고
스치로폴 덴마를 밀고 온다.
물이 얕아지면 그것마저 바다에 묶어두고
물속을 걸어서 온다.
허리에 잠겼던 물이 허벅지로, 무릎으로, 종아리로,
발목으로, 수위를 낮출 때까지,
물 속을 걷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손에는 무거운 바구니를 들었다.
두 사람이 마주 들고 오는 바구니 속에는
갖가지 고기가 들어있다.
젖은 고기는 무겁다.
죽어서 차곡차곡 포개진 잔고기들은 더욱 무겁다.
그러나, 그들은 늘 하던 대로 바구니를 나누어 들고
물을 걸어서 뭍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들이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탈 때 해가
떠올랐다.
그들이 바구니를 마주 들고 물 속을 걸을 때
해는 한껏 빛나고 붉었다.
후광 우명의 어부들은 세상에서 가장 밝은 후광을
둘렀다.
대대포구의 아침은 화포나 우명쪽보다 조금 늦다.
나루곶이 산자락 에 가려 해가 조금 늦게 뜨기
때문이다.
화포와 우명의 일출을 보고 달려오니 물안개 가
곰실곰실 피어오른다.
좁다란 수로를 사이에 두고 갈대들은 둑을 만들었다.
물안개 속에서 밤을 보낸 갈대들은 허리가 꼿꼿하고
한결 싱싱하다.
나루곶이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해를 마주하고 보면
갈대꽃이 광섬유처럼 빛난다.
해가 높이 오를수록 물안개는 점점 엷어지고,
갈대둑은 모습이 선명해진다.
햇살이 퍼질수록 갈대들은 빛나는 개성을 버리고,
무리 속으로 들어가 빛깔과 키를 맞춘다.
대대포구의 배들은 조금 늦게 움직인다.
통통통 소리를 내며 수로를 빠져나간다.
잔잔하던 수로에 물결이 일고,
갈대들은 광섬유처럼 빛나는 꽃송이들을 펼쳐
놓는다.
대대포구 의 아침.길게 이어지는 갈대 둑 사이로
어선이 출항하고 있다.(좌측)대대포구
나루곶이의 물안개.산자락과 수로 사이에
갈대둑이 띠를 만들고 있다.
흑두루미는 가까이 오지 않는다.
둑에서 멀리 떨어져서 논다.
망원경으로 보면 날개를 터는 놈,
가다가 돌아서는 놈,
다른 새를 잡으러 다니는 놈,
사람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한다.
수면 위에서 몸을 곧추세우며 날개를 털 때 보면
그들이 과연 큰 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순천만 새들에게도 구역이 있는지 다른 새들은
흑두루미 곁으로 가지 않는다.
작은 새들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논다.
고기를 잡는지 새끼를 돌보는 중인지 알 수 없지만,
멀리서 보면 모두가 즐겁고 한가롭게 노는 것 같다.
우명 일출,밀물이 몰려든다.불어나는 바다에 선
낡은 목선이 출렁거린다(별량면 학산리)
둑 안쪽은 논이다.
순천평야.
이 논들도 아주 옛날에는 갈대밭이었을 것이다.
육지에서 흘러온 흙이나 모래들이 퇴적해 가는 속도
만큼 사람들도 바다를 먹어 들어간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갈대밭은 조금 더 깊은 바다로 밀려나고,
논과 집들도 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어제 저녁에 보던 새들이 한 차례 머리 위를 선회하고
멀어져 간 뒤 하늘은 그지없이 맑고 조용해졌다.
칠성초들은 갈대밭 언저리에서 서성댄다.
어느 사진가의 사진과 대조해보면 광활하도록
붉은 빛은 많이 사라졌다.
낙안읍성(樂安邑城)은 조그마한 성(城)이다.
화살을 날리고 창칼을 쓰던 때의 성곽이 반듯하게
남아서 마을을 감싸고 있다.
성안에는 고만고만한 초가집들이 오손도손 모여있다.
오래된 빛은 이 성 안에 다 모여 있었다.
어느 집에선 지붕을 타고 올라간 박덩이가 내려올
날을 기다리고, 어느 집에선 초가지붕을 인다.
사다리가 놓이고, 이엉이 올라가고, 아래쪽부터
차례로 이엉을 두르고, 용마름이 올라가고, 용마름을
묶고, 가장자리를 다듬고, 지붕에서 사람이 내려오고
사다리를 치우고 나면 내년 이맘때까지 일년은
따뜻하고 비 샐 일 없을 것이다.
해가 나루곶이 능선을 넘어온다.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갈대들은 아리송하고 황홀한 빛을 띤다(대대포구)
조선시대의 객사를 보고 동헌을 보고 누각을 보고
거목들을 보며, 동문에서 서문까지,
서문에서 동문까지, 한 바퀴 돌아 나왔다.
동문 쪽 성곽 위로 오르니 지붕들이 모두 눈 아래 있다.
금전산은 돌산. 이마가 희고 빛난다.
나무들은 얼기설기 단풍이 들었다.
머지않아 잎새를 떨굴 모양새다.
예전에는 그토록 소중하던 성곽이 이제는 유적에 속한다.
수도와 전기가 들어온다지만 옛집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은가.
노르스름한 지붕 아래서 빨래가 말라가고, 흰둥이와
누렁이는 낮잠에 빠져있다.
저 낮고 노르스름한 지붕들이 향수를 일깨우고,
잊어버린 옛날을 떠올린다.
내 몸이 어느 날 문득 이곳에 있게 된 게 아님을
더욱 알게 된다.
성 밖에 는 고인돌이 있고, 감나무엔 다닥다닥
감이 익었다.
콩이며 찐쌀이며 호박이며 엿기름이며 참기름
들기름 이며, 밭에서 길렀거나 나무에서 얻었거나
산에서 얻은 것들을 파는 난전도 있다.
빛 바랜 비치파라솔 아래 할머니들이 그것들을
들고 나온 것이다.
파는 이도 여자.
사는 이도 여자.
목화를 기르고 베를 짜고
날마다 보리방아를 찧고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양잿물에 빨래를 삶던
옛날은 그리 먼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빨리 잊고 빨리 버렸는가.
낙안읍성에 와서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옛사람들은 시신을 돌 아래 두고 싶어했다.
맹수가 많아서였을까.
주검조차 그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푸설푸설한 흙보다는 무겁고 두터운 너럭바위 아래서
마지막 잠을 자려고 했다.
그러나 그 꿈은 몇 천 년 되지도 않아 파헤쳐지고
옮겨졌다.
이미 흙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관을 보호하고 있던
덮개돌들만 이 넓은 호반으로 옮겨놓았다.
낙안읍성 동문밖에는 민속장이 벌어졌다.
콩, 찐쌀, 땅콩...,
산비탈과 밭에서 거둔 것들을 들고 나온 낙안 읍성 주민들,
초가지붕 이는 날 짚으로 어엉 을 엮고, 사다리로 올려서
지붕 위에 덮고,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대나무로 누르고,
용마름를 씌우고,가장자리를 잘라주면 공사가 끝난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주암호도 그렇다.
비가 올 때만 물이 풍부하고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가뭄으로 목이 타던 폐단을,
많이 있을 때 모아서 아껴두었다가 두고두고 이용하는
호수를 만들 줄 알게 된 것이다.
고인돌 아래 묻히고자 했던 선사시대 사람들은
거대한 호수가 자신들의 무덤자리까지
물에 잠기게 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을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주암호반 고인돌 공원은 그야말로 공원이다.
호반의 공원. 넓고 시원하다.
잔디밭 안의 고인돌들은 잘 배치한 정원석 같다.
어디에서도 무덤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고,
노인들은 느릿느릿 걸으며 볕을 즐긴다.
호수는 모든 이를 반기듯 반짝인다.
나는 느긋하게 머물며 풍경을 즐기고 싶다.
상사호 안에는 수몰로 생긴 섬이 있다.
호반도로는 멋진 드라이브코스.
송광사는 오래 전부터 와보고 싶던 절이었으나
기대했던 분위기는 아니다.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절 마당 한 바퀴 휘돌아 나올 뿐인데,
주차료 2,000원에 입장료 3,300원이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아이를 모델로 사진을 찍으려면
돈부터 달라고 한다더니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관광객에 시달려서일까,
일주문 밖 사천왕들은 아주 근엄하다.
조그만 계곡을 두 번 건너 나무로 깎은 진짜 사천왕
앞에 서니 그제사 마음이 풀리고 여유가 조금 생긴다.
좁다란 통로에 포개놓은 거대한 구유 때문이다.
구유가 이렇게 크고 우람하려면 이 구유가 된 나무는
얼마나 늙고 우람했을 것인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곰은 쓸개를 남기듯,
이 나무는 죽어서 송광사에 구유를 남겼다.
이 구유 에 밥을 담았는지 국을 담았는지
소죽을 담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야말로 부처님의 모습 아닌가.
사람들은 신기한 물건처럼 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고
송광사와 구유를 겹쳐 지니고 간다.
그러나 절이 중생들의 구유가 될 수 있었던 시절은
멀리 가버린 것 같다.
화포(花浦)로 간다.
화포의 석양을 보러간다.
지금쯤 다시 간조가 되어 드넓은 뻘밭이 드러났을 것이다.
석양의 갯벌 그 번들거리는 뻘밭을 보고 싶어서...
벌교를 거쳐 화포로 오니 생각했던 대로다.
출렁이던 바다는 만 밖으로 몰려나갔다.
뻘밭 가운데 조그맣게 웅크린 수면에 배 몇 척이 떠있고,
사람들은 갯장에 나가 발을 고치고,
자기들 뻘밭에서 꼬막을 캔다.
뻘밭에는 널빤지를 밀고 나간 자죽들이 길게 나있다.
육지에 밭두렁 논두렁이 있듯이 뻘밭에도
무수한 금이 그였다.
꼬막밭을 구분하는 울타리다.
그 울타리 재료는 대나무막대다.
순천지방 대나무들은 바다에서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배들이 모여있던 선착장도 뻘밭 가운데 드러났다.
배들은 좁은 수로에 이마와 옆구리를 맞대고 모여있다.
간조 때 바다로 나가려면 저 수로를 따라가야 한다.
거대한 뱀장어처럼 꿈틀거리는 수로를 따라 가면
몇 개의 섬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반대쪽은 어떨까.
와온 의 석양을 보러 가는 길에 대대에 들렀다.
갈대는 대대동에 가장 많기 때문이다.
새들은 여전히 물 위에서 바쁘고, 날아도 멀리 날지 않는다.
낮에 나는 새들은 마을 가까이로 오지 않고 바다 위를 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배가 한척 눈부신 후광을
두르고 있다.
이제 우리도 저 배가 가는 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와온 으로 가는 길.~ 또 한 차례 헤맨다.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하수종말처리장 앞까지 내려와
버린 것이다.
억새들이 우거진 수로를 따라 합수지점까지 가본다.
생활하수와 공장 폐수들을 걸러서 바다로 보내는
기계소리 우렁차다.
억새들은 둑 위에서 야윈 꽃을 털고 있다.
홀씨를 만들어 날려보낸 씨앗들은 살만한 땅을 찾아
날갯짓을 바삐 하고 있을 것이다.
식물도 날개를 단다는 것.
날개를 달아서 살만한 땅으로 날아간다는 것.
이 둑방에 와서 다시 느낀다.
사람들이 쓰고 버린 물빛은 검고 악취가 나지만,
태양은 이런 곳에서 더욱 크고 빛난다.
해가 산머리를 넘어가기 전에 시내에서 숙소를 찾아야겠다.
와온의 아침은 조용하면서도 싱그럽다.
공기가 그렇고 풍경이 그렇다.
바다는 또다시 멀리 달아나서 드넓은 갯벌을 드러내었다.
후미진 갯벌에 발을 치고 게를 잡고 꼬막을 기르며
늙은 남자는 바위덩이 엉성한 제방에 앉아 대나무를 가른다.
뭐에 쓰실 거예요?
고추나무 붙들어주는 데 쓸 겁니다.
바다에서 소임을 다한 막대들은 뭍으로 올라와서
고추 이랑 지지목이 된다.
땅이 기른 것들을 바다에 세우고, 바다에서
쓸모없이 된 것들을 거두어 땅의 나무를 세우는데
쓰고 있는 것이다.
저 근검, 저 지혜야말로 오늘날의 부흥을 이끌어낸
옛 어른들의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칠성초가 있다.
일곱 빛깔로 몸이 바뀐다 해서 칠성초라고.
오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는 풀.
대대동에서도 풀이 죽어 와온 해안까지 밀려왔다.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수로 주변에 가늘가늘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다가 들어도 잠깐 들었다 나가는,
너무 짜지도, 너무 밍밍하지도 않은 중간지대 모래톱에
뿌리를 내리고 여름 한 철을 보내고,
가을이 와서 온몸을 붉히며 익었다.
온몸이 붉디붉은 열매로 익어 아침햇살을 들이킨다.
해 뜰 무렵이면 건물 그림자가 갯벌 쪽으로 누워
오소소 떨기도하지만,
그럴 때마다 잎새를 더욱 단단하게 무장했다.
그들을 만나려고 수로를 따라 내려간 발자국 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칠성초와 함께 물 속에 잠길 것이다.
갯벌 체험장은 순천만 해수랜드 뒤쪽에 있다.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물렁물렁한 뻘밭이 기다린다.
통나무를 엮어 길을 만들어두었다.
바다를 향해 뻗어 가는 다리.
그러나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목사리 때여서
사다리도 통나무길도 물에 불어 미끌미끌하다.
호미나 갈쿠리 같은 연장 하나도 없이 이 길을 끝까지
따라간들 꼬막 한 마리 캐지 못할 것이다.
바다만 보면 갯벌만 보면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어떠한 뻘보다 사람이 무겁다는 걸 안다.
뻘밭 위에 서서 우명과 화포를 바라보니
어느새 나도 순천만 여기저기에 발자국을 찍고
다녔음을 알게 된다.
이제 이 아침에 이곳을 떠나면 언제 또 돌아올 것인가.
돌아보며, 돌아보며, 멀어져 간다.
상사호 호반도로를 한 바퀴 돌아오려고 한다.
상사호 남쪽과 서쪽 호반을 돌아가서 선암사를 보고,
북쪽과 동쪽 호반을 거쳐 순천만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제 오후 화포를 보러 가지 않았더라면,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바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행은 명승지 순례가 아니다.
나는 순천의 포인트를 순천만 둘레로 잡았고,
땅과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어서,
가던 길로 한번 더 가고 있는 것이다.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에서 갈라져 상사호 옆으로 올라왔다.
길은 호수보다 높고, 호수는 저수량이 적어 언저리
산들이 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상사호 남쪽 호반을 따라 선암사로 가는 길은 고개를
넘어설 때마다 절경이 드러나서
갈망을 적시기 좋은 길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으면 죄가 되리니.
이쪽에 있으면 저쪽이 궁금해지는 생리를 숨긴다면
이 또한 죄가 되리니.
경치가 빼어난 곳마다
차를 세우고 건너편 산과 길과 호수에 어리는 그림자를
사진에 담는 것은 나 혼자 보고 즐기려는 것이 아니니,
좁은 노견에서 비상라이트를 깜박이는 차를,
무거운 돌을 싣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는
저 트럭도 이해해 주리라.
선암사가 가까워지자 마을이 가깝고 오밀조밀해진다.
명찰은 명산에 깃드는 법이니 그 그늘에 마을이
융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활엽수 잎새들 시들어 떨어진 뒤 산자락은 휑하니 비어 가는데,
빨갛게 익은 감은 눈에 띄는 열매다.
어느 집은 이미 따서 껍질을 깎아 매달았고,
어느 집은 오늘 마침 따는 중이다.
할머니 감 따세요.?
~예.
이 할머니 감 따던 막대를 내려놓고
홍시 감을 하나 쥐어준다.
잡솨 봐요. 달아요.
처음 보는 불청객에게 감 한개를 들려주고
할머니는 다시 대나무막대를 든다.
수확한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온 사람들.
몸에 배인 친절과 사랑에 절하며 감을 받는다.
선암사에는 볼거리가 세 가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쌍둥이 삼층석탑과,
정수원 안 깊숙한 불당에 모셔놓은 철불,
동부도 서부도를 비롯한 부도밭이다.
그럼 승선교는 그만 못하단 말씀이세요?
거기 비하면 그렇지요.
조계산 주봉을 뒤에 우뚝 세우고,
육조고사(六朝古寺)는 낡아간다.
‘朝’는 ‘祖’와 같은 뜻이니,
선종 6대조 혜능선사를 기리는 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은 모서리가 떨어지고,
돌담은 담장이가 휘감았다.
오래된 돌길을 밟고 부도밭으로 통하는 길은 나무들이
가지를 내려뜨려 보물은 아무에게나
문을 여는 법이 아님을 알게 한다.
정수원 앞에 이르면 낡은 대문이 맞이한다.
열린 문 안에는 잔디 깔린 뜰이 있다.
뜰은 넓고 조용하다.
이 뜰에서 보면 조계산이 한결 가깝고 다정하다.
오래된 부엌을 지나,
작은 불당 앞까지 나를 안내한 학승은
합장하고 멀어져갔다.
부처님은 안에 계신다.
금도 은도 구리도 아니다.
무쇠를 달구어 몸을 지어드렸건만
미소가 소박하면서도 청청하다.
삼배하고 사진을 찍으니 다시 웃으신다.
당신의 그 소박하고 썩지 않는 미소를
중생들의 세상으로 전함을 용서하소서.
선암사를 나오니 해가 정수리에 올랐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천수답 논두렁으로 올라가서
산을 크게 담는다.
너무 밝은 시간에는 산도 안개를 만들어서 눈앞의
것들만 선명하다.
이럴 때 나무들은 뿌리까지 빛을 빨아들이고,
땅위의 물방울들도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렇게 모든 사물들이 빛나는 태양 아래서
큰 숨을 쉬는 동안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상사호 반대쪽 도로를 달린다.
상사호는 물이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아름답다.
규모가 너무 큰 호수보다 아담한 호수가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아젤리아호텔 부근에는 섬이 있다.
내륙 속의 산봉우리가 인공호수 안으로 들어가서
섬이 된 것이다.
그들과 함께 그들을 둘러싸고, 호수도 조름조름
낮잠에 빠져있다.
호반 곳곳에 쉼터가 있어
그때마다 차를 세우고 물을 내려다본다.
등나무 햇줄기가 처마를 만들어 눈부신 햇살을 가려준다.
호수 건너편 산자락들은 희미한 윤곽을 드러낸 채
하나로 겹쳐있다.
아침에 지나온 길을 건너다보는 사이, 풍경이 눈에 익는다.
이제 순천의 자연은 거의 다 보았다.
그러나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다.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이다.
순천왜성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가 성을 쌓고
주둔하던 곳이다.
광양만에 접한 산봉우리 하나를 전라도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성 둘레엔 해자를 파서 섬처럼 만들고,
예교라 불리는 부교를 놓아 건너다녔다니,
우리 땅의 지형을 속속들이 연구하고 노략질한 흔적인 것이다.
남해안 800리에 걸쳐 26곳에 이런 왜성이 있었다니,
얼마나 기막히고 부끄러운 현장인가.
이제 그 왜성들은 거의 없어지고 온전한 형태로 남은 곳은
순천왜성뿐이라 한다.
우리 정부는 1997년 이런 왜성들을 사적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치욕도 역사에 속한다.
오히려 드러내놓고
후세들에게 바른 역사를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진실이다.
다음을 위해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작은 자랑을 위해 큰 부끄러움을 감춘다면
치욕은 되풀이 될 것이다
순천 왜성(順天倭城).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들었다.
오솔길로 올라가니 석성이 가로막는다.
왼쪽으로 모서리를 돌아서면 길은 ㄱ자로 꺾인다.
오른쪽 모서리로 돌아서면 왼쪽으로 꺾인다.
그들은 조총을 쓰고 우리는 화살과 칼을 쓰던 전쟁이었다.
저 모서리 뒤편에 몸을 숨기고 이편 모서리를 향해
총알 한 방 날리면,
우리 병사들은 백발백중 넘어졌을 것이다.
명량대첩으로 기세가 꺾인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왜군들이
황급히 물러날 때까지,
왜구들은 이 높직한 산 위에 올라 순천만과 여수만을
한 손안에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위로 올라서니 바람이 달려온다.
이 바람엔 400년 전의 피비린내가 섞여있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갯벌은 광양만이다.
광양만은 순천만과 달리 공장이 많고 시끄럽다.
기계소리가 들썩거린다.
개발 이익을 위해 세상은 달려가고 있다.
성 위에는 넓은 공터가 황토를 드러내고,
깡마른 소나무들이 허리가 휘어져서 돋아있다.
일본인의 상투 같은 대(臺)가 하나 광양만을 내려다본다.
왜성대(倭城臺).
대 위로 올라가니 깡마른 소나무들이 허리를 굽힌다.
해는 다시 기울고 돌아갈 길은 멀리서 가로등을 밝히며 온다.
내가 사흘 동안 순천에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대지 않은 순수한 자연이라 생각 되었다.
노산 박종문 朴鍾文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