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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나포리라 불리는 통영은 유·무인도 합해 570여 개의 섬(유인도 44개)을 거느리고 있다.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일본이 남해와 서해로 향하는 길목인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을 설치하였고, 이를 줄여서 ‘통제영(統制營)’이라 불렀던 것이 통영(統營)이 된 것.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면서 오늘의 통영시를 이루었고, 청마, 윤이상, 박경리를 비롯한 이름난 예술인이 많이 난 곳이다.
오늘 산행은 통영지맥의 끝 구간.
통영지맥(統營枝脈)은 낙남정맥 대곡산(大谷山 542.8m)에서 남으로 분기하여 고성반도와 통영시가지를 뚫고 한산도와 미륵도의 배웅을 받으며 서쪽
갈목마을에서 끝이나는 약 40km의 산줄기다.
천암산(天岩山 257.9)은 높이는 낮지만 우뚝 솟은 정상에 바위가 도드라져 지어진 이름으로 남해바다 조망이 뛰어나다.
풍수학상으로 보면 천암산이 주산인데 높이가 낮아 객산인 미륵산에게 주산 지위를 내준 꼴이다.
명정(明井)고개는 평림에서 명정동으로 넘나드는 고개.
이 고개에는 육로 개설 이전부터 있었던 제주도 하루방을 닮은 석장승이 한 쌍 있다.
원래 한쌍이었으나 도로를 확장하면서 장승 1기가 매몰되었고, 후에 장승 1기를 발굴했으나 머리부분이 없어 새로 제작해 세운 것이다.
장골산(179.2)의 어원은 확인할 길이 없고, 여황산(艅艎山 173.9)은 여항산(艅航山)으로도 알려져 있어 어느 명칭이 정확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망일봉(△望日峰 149.3)은 해를 바라보는 산이니 해맞이 산인 것.
굿산(126.5)인지, 뭇산인지는 더 모호하다.
그런 다음 통영지맥을 이탈, 용남면으로 방향을 틀어 14번 국도를 지나 일봉산에서 삼봉산을 이어가게 되는 것.
하지만 나는 시간의 제약으로 1·2봉을 어깨에 짊어지고 삼봉산(△三峰山 247.3)만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날머리 음촌(陰村)은 산그늘이 빨리 내려앉는 음지였고,, 양촌(陽村)은 햇빛이 잘 드는 양지였다.
여러 산을 잇는 중간에는 도심지를 거치게 되어있어 빠뜨릴 수 없는 유적지를 찾아 보았다.
충렬사와 통제영, 그리고 동피랑 벽화마을과 청마문학관이다.
서피랑의 서포루와 시립박물관도 눈에 밟혔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마저도 주마간산이었을 뿐.
여황산에 세워진 망루는 북포루(北舖樓)다.
동피랑엔 동포루, 서피랑엔 서포루가 있어 방향만 다를 뿐 한 세트이다
그 아래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있고, 세병관(洗兵館 국보 305호)은 통제영의 객사(客舍)였다.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東軒)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그건 객사의 동쪽에 있다는 것일 뿐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이다.
국왕의 전패가 모셔져 있어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이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다.
세병관(洗兵館)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挽河洗兵)’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
시의 마지막 구절은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라는 뜻.
천하장사를 시켜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못쓰게 하리라는 의지, 즉 종전(終戰)을 의미한다.
‘피랑’은 통영 말로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한다.
동피랑마을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로 이루어진 대표적 달동네였다.
처음 터만 남은 동포루를 복원한 뒤 공원을 꾸밀려고 하였다가 벽화마을로 재탄생되었고, 이제는 누구나 찾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이 되었다.
코스:갈목버스정류장~전망대~천암산~명정고개~장골산~여황산(북포루)~충렬사~통제영지(세병관)~동피랑벽화마을~청마문학관~망일봉~
굿산(뭇산)~미늘고개~14번국도~굴다리~임도(일봉산,이봉산)~삼봉산~임도~음촌마을표석
<클릭하면 원본크기> 산행궤적.
18km에 6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는 충렬사와 세병관, 동피랑 벽화마을을 들렀기 때문.
<고도표>
<클릭하면 원본크기> 통영시 지도.
<클릭> 국제신문의 천암산, 장골산, 여황산.
<통영지맥>
처음엔 한실재에서 오를려고 하였다가 통영지맥의 끄트머리인 갈목마을로 변경을 하였다.
갈목마을 버스 정류소.
버스 정류소 맞은 편 계단길이 들머리.
이정표엔 천암산 정상이 1.9km.
잘 닦여진 등로엔...
데크가 놓여있어 남해바다 조망이 시원하게 열린다.
쉼터와 조형물이 있는 산길은...
어느새 암릉으로 변하고...
역광의 하늘 아래엔 신비한 기운이 감돈다.
우리가 올라왔던 갈목의 점점이 떠있는 섬들은 장도와 필도와 콩알만한 별이섬. 오른쪽의 섬은 장구도.
진행 방향으로 천암산이 암봉을 드러낸다.
마치 동물의 척추인 듯 암릉이 도드라지더니...
남으로 푸른 바다가 열린다.
아무렇게나 생긴 선바위는...
보는 데에 따라 입이 툭 불거진 고릴라의 모습이기도 하고...
모자를 쓴 이목구비 선명한 누군가가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도 하다.
오목하게 또아리를 튼 인평동 민양마을 포구엔 올망졸망한 배들이 피항을 하고 있고, 멀리 좌측으론 미륵산이 뽕긋하다.
가까이 보인 섬에 아치형 다리가 놓여있어...
가까이 당겨보니 아주 운치있는 다리이기도 하고 풍랑이 일때면 방파제 구실도 하는 상항도와 중항도다.
컨테이너 구조물은 산불감시 시설인 듯하고...
우측으로 눈만 돌리면 미륵도가 막아선 아름다운 풍광.
좌측 미륵산 아래 케이블카 터미널이 어렴풋하다.
돌탑에서...
돌아보는 우리가 걸어온 능선.
미륵산을 다시 한번 조망한다.
통영대교 방향 멀리 한산도.
데크 시설에서 바라보는 곳엔...
천암산 정상목이 서있다.
기념사진을 찍은 뒤...
삼각점.
통영의 산불감시초소는 아주 아름다운 전원주택을 닮았다.
또다시 돌탑.
도드라진 전망바위 돌탑에서...
혜성아파트 갈림길을 지나...
평림쪽 해수로를 건너 통영지맥이 천개산과 벽방산을 향하는데, 그렇다면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벽방산인가?
철탑이 철거된 자리. 곳곳에 태양광이 설치되면서 이제는 철탑도 조금씩 없어지는 건가?
진행방향 좌측에서 콩볶듯 뽂아대는 총소리가 올라온다. 아하~ 사격장이 있었구낭.
둘레길 걷듯 편안한 산길은...
벤치와 쉼터가 있어 천천히 쉬어가기 좋은 곳.
다시 산불감시초소.
식재된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좌로 크게 꺾어지는 지점의 이정표는...
약수암 갈림길. 우리는 명정고개 방향이다.
사면을 돌아...
돌아보는 곳에 체육공원이 있고, 체육공원 뒤로 직등하면 될 것이지만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명정고개로 내려서서...
북포루 방향의 이정표를 따라 도로를 건너면...
석장승 두 기가 뻘쭘하게 서 있다. 머리 부분이 없어진 돌장승은 이 뒤 울타리 밖에 조그만 돌덩이의 모습으로 소외되어 있다.
안내문.
명정고개에서 북포루로 오르는 길은 쭉쭉빵빵 솔숲이 도열한 길.
널따란 묘지를 통해 올라도 되지만 묘지 좌측 뒤로, 아니면 임도를 계속 따라도 된다.
어차피 커다란 헬기장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
헬기장 좌측으로 에돌아 다시 솔숲길을 올라...
반듯한 길을 따르면...
고대와 현대가 교차하는 군사시설을 지난다.
장골산은 아무런 표시가 없이 이정표만 서있고...
그 옆자락에 선답자들의 시그널만 나풀거린다.
그래서 그만 흰색 매직팬으로 낙서(?)를 하게 된 것.
여황산 북포루로 향하는 길 안부엔 체육시설이 있고...
곧 바로 북포루로 성큼 올라서게 된다.
여황산엔 북포루가 있다. 여황산은 중국의 고사에서 따 온 산 이름이고, 북포루는 통제영의 북측 경비 초소였다.
고대 중국 오(吳)나라의 한 임금이 호화로운 장식이 된 ‘여황’이라는 배를 무척 아꼈지만 전투 중 적국인 초(楚)나라에 넘어가고 말았다.
절치부심하던 오 왕은 다시 전쟁을 일으켜 기어코 여황을 되찾았다
여황은 ‘호화롭게 장식한 배’라는 뜻도 있지만 제대로 진용을 갖춘 전함(戰艦)을 상징한다.
포루(舖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인데 이것을 포(舖)라고 한다.
통제영에는 당시 세병관을 중심으로 동쪽 동피랑에는 동포루, 서쪽 서피랑에는 서포루, 북쪽에는 북포루가 있었다.
남쪽은 바다이니 별도의 산상 초소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북포루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정상주를 곁들인 식사를 한 뒤 화장실 옆으로 내려선다.
바쁜 일행들은 망일봉만 쳐다보고 동쪽으로 질러 내려갔지만 나는 충렬사와 세병관을 답사하기 위하여 국제신문의 가이드(B팀)를 따랐다.
이정표엔 문화빌라 방향.
대숲이 쳐진 하산길엔 통영성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내려서는 방향 언덕배기에 우뚝한 정자가 보여...
살짝 당겨 보았더니 세 포루 중 하나인 서포루다.
충무삼일교회를 벗어나자...
충렬사와 서피라아의 주차장에 우리 버스가 대기중이다.
이 지점이 1차로 B팀들을 모우는 곳.
주차 관리실의 주차요금표.
충렬사 계단을 오르며...
관람료를 확인하지만 경로는 무료.
통영 충렬(사적 제236호)는 이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다.
1606년(선조 39)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웠으며, 1663년(현종 4) 사액(賜額)되었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2층 누각 강한루(江漢樓)
강한(江漢)은 군사요충이며 장강(長江 양자강)과 한수(漢水)가 만나는 곳으로, 이름난 중국 호북성의 경승지라고 한다.
1840년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이, 여기 경남 통영시 통제영 내에 누각을 지을 때 추금(秋琴) 강위(姜瑋)가 충무공의 위업을 강한과 관련된
고사에 연관 지어 강한루(江漢樓)라 명명했다. 현 누각은 전형적인 조선의 팔각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강한루 안내판.
충렬사 현판에 '계묘 시월 선사'. 계묘년(癸卯年 1663년)에 선사(宣賜 사액을 내렸다)
숭무당(崇武堂)은 충렬사 재정을 관리하던 곳이고,
경충재(景忠齋)는 지방인의 자제를 훈육하던 곳.
솟을 삼문인 내삼문(內三門) 안으로 들어가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정당(正堂).
정당과 내삼문의 안내판.
열린문 충렬사에서 묵념.
충무공의 영정.
통영 충렬묘비((統營 忠烈廟碑) 안내판. 충무공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
충렬사 안내판을 뒤로하고 바삐 충렬사를 벗어난다.
세병관으로 이동 중 보이는 서피랑 와옥은 숙박집. '한옥 스테이'인 셈.
충렬사에서 되돌아나와 도로 표지판의 세병관방향.
통영 문화원을 지나...
다시 좌로 꺾어 세병관, 통제영 주차장 30m에서...
'통제사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라' 라는 '통제사이하계하마비(統制使以下皆下馬碑)'를 지나...
외삼문인 망일루(望日樓)를 통해 통제영 내로 입장을 한다. 물론 경로 우대.
'통영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에 설치되어1895년에 폐영이 될때까지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수군 본부였다.
임진왜란때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망일루는 광해군3년(1611년) 우치적(10대)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45년(1769년) 이국현(128대)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것을 다시 세웠다.
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금지를 알리는 큰종이 있어서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된 것을 다시 2000년에 중건하였다.
산성청(山城廳)은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44년(1718년) 오중주(83대) 통제사 때 건립했으나 소실된 것을 최근에 중건하였다.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 안내판.
지과문을 들어서며...
지과문 현판을 올려다 본다. 지과문(止戈門)은 중지한다는 ‘지(止)’와, 창 ‘과(戈)’이다.
전쟁을 중지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두 글자를 합치면 ‘무(武)’ 자가 되므로, 전쟁을 준비한다는 상반된 뜻이 있다.
글쓴이는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1908~1991) 선생.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은 통제영의 객사로 이경준(6대)이 통제영을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김응해(35대)가 1646년 규모를 크게 다시지었으며 채동건(194대)이 1872년 다시 고쳐지었다.
현판은 서유대(徐有大)의 글씨.
정면9칸.측면5칸의 9량구조 단층팔작집.
경회루.진남관과 더불어 조선건축물 중 바닥이 가장 넓은 건축물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백화당(百和堂)은 선조36년(1603년) 이경준(6대)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를
맡았고 지방장관이 임명했다.
백화당 안내판.
공내헌(工內軒)은 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을 말한다.
12공방은 제반군기와 진상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1593년 이순신이 한산진에서 시작했으나 임란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을 생산하였다
총방(총房)은 말총을 엮어 망건.탕건.유건 등을 만들던 곳이며, 입자방(笠子房)은 흑립이나 벙거지.삿갓.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이다.
상자방(箱子房)은 버들나무 등을 엮어 상자를 만들던 곳이나 현재는 염장(대발)공방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염장기능보유자 조대용(114호)이 일을 하는 공방으로 염장이란 발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패부방(貝付房)은 자개를 붙여 나전제품을 만들던 곳으로 국가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송방웅).전수조교10호(양옥도)가 활동하고 있다
12공방 곳곳을 주마간산으로...
화원방(畵員房)은 각종지도 및 군사적 목적의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던 곳.
화자방(靴子房)은 신발을 만들던 곳이고, 안자방(鞍子房)은 말안장을 만들던 곳.
동개방은 활과 화살 제조방.
석수조는 물을 저장하여 자개 등을 갈고 닦는 등의 작업을 하던 곳.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놓은 것.
표제도 송덕비.추사비.거사비,사적비.불망비.타루비.유애비.선정비 등으로 다양하다
병고(兵庫)는 선조 37년(1604년) 제 6대 이경준 통제사 때 통제영 설치와 함께 세워졌다.
통제영 병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현재 대포, 창, 무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운주당(運籌堂)은 인조23(1645년) 이완(21대)통제사 때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
운주는 운주유악지 중에서 나온 말로서 군막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말이니 즉 통제사가 통제영에서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운주당 대청마루.
운주당제영 함안총쇄록 발췌(안)
신거장곤공무보(身居將곤功無補)/ 몸이 장수 직책에 있으면서 나라에 도움을 줄 티끌
어연애구송교서(於捐埃口誦敎書)/ 만한 도움도 없고 입으로만 글을 외워 가르쳤네.
면유참췌어군여(面有참悴於軍旅)/ 얼굴엔 군대생활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많은데.
운주당주련 함안총쇄록 발췌(밖)
분성주잡용청잠(紛城周잡聳靑岑)/ 통영주변에는 푸른 산들이 높이 솟아있고
간간수죽우송림(間間脩竹又松林)/ 산마다 긴 대나무 송림이 가득하네
만호생가춘기난(萬戶笙歌春氣暖)/ 집집마다 젓대소리에 봄기운 따뜻한데
일정시화우성심(一旌詩話雨聲深)/ 한 깃발아래서 공부하는 소리 빗소리에 잠기네
부지후회장하지(不知後會將何地)/ 장차 어디서 만날지 모르지만
원견제공시일심(願見諸公是日心)/ 모두가 충무공의 충심을 보길 바라네.
경무당(景武堂)은 인조23년(1645년) 이완통제사 때 지은 통제사의 작은 집무실로 이충무공의 뜻을 크게 우러러 본다는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내아(內衙)는 통제사가 거처했던 곳으로 지방관청의 안채에 해당된다. 현재 안방, 대청, 부엌, 찬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제영을 주마간산하고...
바깥에 있는 이정표를 살펴본다. 동피랑 벽화마을을 향하여...
시내 사거리를 건너...
동피랑 벽화마을로 들어서며...
올려다 보지만 동포루는 보이지 않는다.
<클릭하면 원본크기> 안내도.
갈리버 인 동피랑 벽화.
달동네였던 동피랑마을은 이렇게 벽화를 통해 되살아 난 것.
<클릭하면 원본크기> 안내판. 길따라 한 바퀴 한 뒤...
시장통으로 들어간다. 이 길은 국제신문의 트랙.
그리곤 해안을 따라 동호로를 걸은 뒤...
우측으로 꺾어지는 지점으로 이순신공원을 배웅한 뒤...
계단을 통해 통영기상대로 오른다.
계단 중간쯤에서 좌측으로 '청마문학관'이 있다.
청마문학관으로 들어가지만 관람은 시간 제약상 할 수 없었고,
<관람안내>
계단을 통해 청마생가로 오른다.
<클릭하면 원본크기> 안내판. 거제도 산방산 자락 둔덕골에도 청마기념관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태어나 세 살까지 살았던 곳은 거제도이고, 그 후 통영으로 이사를 하였던 것.
청마의 대표시 ‘행복’은 청마 유치환이 정운(丁芸) 이영도에게 보낸 시이다.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것은 통영여중 교사시절이었고, 정운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 딸 하나를 두었고, 청마는 9살 많은 유부남이었다.
청마생가는 새로 지붕을 단장하고 있었다.
통영기상대를 우로 쳐다보며...
청마문학관 안내판을 지난다. 문학관은 2,000년도에 개관하였다.
포장도로 삼거리에서 마주 보이는 산자락으로 붙는 줄친 길이 망일봉 들머리.
오름길 중간에 팽나무 고목.
2층 팔각정자가 있는 봉우리가 망일봉.
망일봉의 삼각점.
정자 옆 나뭇가지에 望日峰 149.3이라 적은 시그널을 걸었다.
평이한 산책길 벤치가 있는 130봉에서...
좌측으로 꺾어 들어간다.
임도를 건넌 뒤...
낮은 둔덕같은 능선을 이어가면...
군데군데 무덤들이 있는 공동묘지.
봉우린지 아닌지 무심코 걷다...
폐가를 만나면서 gps를 확인하니, 에고~ 굿산인지 뭇산인지 지나버렸네. 150여m를 빽하여...
gps가 가리키는 잡목숲에서 굿산을 확인한다. 남의 표지기에 굿산(일명 뭇산 126.5)이라고 적어 놓았다.
다시 폐가를 지나...
포장 임도인 듯한 길을 지나...
능선을 고수하다 철탑에서 우측으로 치고 내려섰더니...
아래엔 포장도로.
포장도로를 따라...
통영옷칠미술관 안내판이 있는 '미늘삼거리'에 내려선다.
미늘삼거리에선 남해안대로를 따라 인도를 걷다가...
도로 우측 이지비아 아파트 쪽으로...
내려선뒤...
남해안도로를 굴다리로 건넌다.
굴다리 건너 도로 저쪽을 바라보니 자동차 정비공장.
이젠 도로 좌측으로 내려가...
청구마트와 청구아파트 정류장 앞 굴다리는 패스하고 ...
다음 굴다리를 건넜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여기를 건너지 않고 다음 굴다리를 건너면 쉬웠겠다.
그런 뒤 두 개의 도로 밑을 더 통과한 뒤...
좌측 도로와 나란히 따르면...
삼봉산 이정표가 있고,
좌측으로 굴다리를 쳐다보며, 이 굴다리를 통과하는 게 정답이었음을 확인한다.
휘어지는 임도를 흘리며 산길로 붙지만...
금세 다시 임도를 만난다. 이 임도는 일봉, 이봉, 삼봉산을 에두르는 길.
유적 답사로 인하여 지체된 시간을 당길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일봉산과 이봉산은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수밖에 없다.
한 짐 짊어지고 가다 이봉산으로 붙을려고 하였지만...
일봉산과 이봉산 사이의 안부도 패스하며...
나즈막한 안부를 올려다 본다.
다음 이봉산과 삼봉산 사이의 안부에선 어쩔 수 없이 붙기로 하였다.
안부에선 앞서간 일행들을 조우하였고...
한결 여유로워진 나는 숲속 이름모를 가을꽃에도 눈길을 보냈다.
♬ There's a white house in a town. 산불감시 초소도 언덕위의 하얀 집이다.
한마음산악회 시그널 뒷면에다 三峰山 247.3이라 적고 서명을 하였다.
삼봉산의 삼각점.
삼봉산의 데크전망대에선 거제방향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동달리 방조제와 쭉 뻗어나간 장평리 반도. 그 앞 아치형 해간교 건너 해간도.
바다 건너 거제도 별학산과 안치봉 줄기. 그 뒤 고개만 살짝 내민 암봉은 산방산인 듯하다.
해간교와 해간도를 당겨 보았다. 해간도는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 살짝 당겨보면 화도와 고동산이 한산도로 내달린다.
일행들은 벌써 앞서 떠났고, 나는 그제사 임도에 내려선다.
돌아 보는 나무계단과...
<클릭하면 큰사진> 삼봉산 등산 안내도.
구불구불 임도를 내려서다 햇볕이 잘 드는 마을. 우리가 내려서는 날머리는 음촌인데, 저기가 아닌감.
이름이 틀린 게 확실하다. 양촌인 걸.
서서히 산그늘 내려앉는 돌아보는 길.
큰 도로에 내려서자 움트리 식품회사에서 우리 버스가 보인다.
음촌마을 표석이 있는 지점. 표석은 검은 빛깔의 오석(烏石).
이 뭐꼬? 도로 건너 양촌마을 표석이 나란히 서있다. 음촌의 표석과 대비되는 황석(黃石).
그 옆에 재실(화산재)이 있어 들여다 보았다.
유자가 주렁주렁 열렸다. 여기가 통영이니...
버스 옆 산기슭에 열녀비. '사인진양강공수성배김녕김씨열행기실비'
맞은 편의 또다른 효행비. '고사인진양강재한효행기실비'
- 행복(幸福)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