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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에게 조롱당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23:4~12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의 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한 후에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와서 예수님을 갖가지 이유로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장로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고발한 것을 알기에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넨 몇 마디의 말씀은 그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영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 문을 닫은 상태로 예수님 앞을 황급히 떠납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는 이 문제가 어려운 숙제임을 직감하고는 고민합니다. 예수님이 무죄인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고발한 내용대로, 백성을 선동하거나 백성들에게 로마 당국에 세금 납부를 거부하라고 설교를 했거나 한 적이 없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역시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의 왕권은 영적인 왕권이요 세상적인 왕권이 아님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4절에 보면, 빌라도는 무리들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이 말을 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무리들은 빌라도에게 강하게 항의합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가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무리들은 빌라도 총독의 말에 물러서지 않고 더 강력하고 끈질기게 예수님이 유죄임을 주장합니다. 빌라도는 그 기세에 눌려서 예수님을 무죄 방면하여 풀어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 빌라도에게 예수님에게 죄를 선고하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번뜩이는 해결책이 떠올랐습니다. 무리들이 말한 내용 중에, “예수가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였다”는 말을 듣자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 출신이라는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자기가 처리하지 않고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하자는 생각울 했습니다. 너무 기발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이렇게 빌라도가 행동합니다.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본래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바다 서쪽의 디베랴라는 도시에 그 분봉왕 관저가 있어 대부분을 갈릴리 지역에서 지내는데, 지금은 유대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라서 예루살렘에 올라와 헤롯 왕가에게 속한 하스모니아 궁전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 문제를 자기 손으로 처리하지 않고도 마침 예루살렘에 올라온 헤롯 안디바에게 넘기면 자기의 재판 책임을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양심의 가책도 피하면서 자기를 흔들 수 있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도 피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길을 발견하고서 후련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헤롯 안디바의 궁전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결박된 채 세 번이나 장소를 옮겨가면서 재판을 받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 아침 갑작스럽게 예수님을 만나게 된 헤롯 안디바는 어떻게 예수님을 대했을까요? 8절에 그 때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설명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니라”
헤롯 왕은 그 날 아침 예기치 않게 예수님을 보게 되자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지 삼년이 넘도록 그를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헤롯은 예수님을 그 동안 뵙고자 했을 만큼 열렬한 추종자였을까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헤롯 안디바는 이삼년 전에 선지자 세례 요한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이 큰 회개 운동을 일으키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당시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 왕의 아내를 취한 일로 헤롯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군사를 보내어 세례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그리하여 사해 동부에 있는 자기의 여름 궁전인 마케루스 요새의 동굴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생일에 자기 부정한 아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현란하게 춤을 잘 추자, 술김에 흥이 올라와서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은 다 줄테니 말해라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라고 귀족들과 천부장 등 귀인들 앞에서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자 살로메가 자기 어머니에게 달려 가서 물었더니, 그 어머니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 달라고 청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어서 죽이는 것이 자기가 왕비로서 안정된 삶을 사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헤로디아는 과거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으로 바알 숭배하게 만들었던 이세벨만큼이나 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살로메는 왕에게 달려와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 지금 달라는 당돌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롯은 깜짝 놀라서 번민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호언장담하며 잔뜩 허세를 부린 마당이기에 번민하다가 결국 군인 한 사람을 보내어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어린 살로메에게 건네 준 바 있습니다.
그 때부터 이 헤롯은 잠자리도 뒤숭숭하고 늘 두려움과 가책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와 말씀을 전파하며 이적과 기적을 행하니까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예수님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게 되니까 헤롯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유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함이 아닙니다. 자기의 양심의 괴로움을 달래줄 참된 회개의 고백을 드리고자 함도 아닙니다. 8절 하반절에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고 이른 대로,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자 가망한 까닭은 기적이나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종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워하였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오랫동안 매우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만나려고만 했다면 헤롯은 얼마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주된 활동지가 갈릴리 지방이었고, 헤롯 안디바의 평소의 거주지인 분봉왕 관저도 갈릴리 동편 바닷가 디베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역하신 그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롯이 예수님을 그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면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 뵙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헤롯이 내면에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어리석은 기질과 왜곡된 마음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헤롯 안디바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할 마음이 없었기에, 예수님 앞에 자원해서 나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고 때로 고민도 하고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도 보내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죄를 완전히 끊어낼 생각은 절대 없었습니다. 죄악으로 얼룩진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고 참된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는 진정한 영적 갈망이 없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없고 내면의 진정한 안식을 바라며 자신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이 없었기에, 그는 그토록 많은 기회가 주어져 있었지만 예수님의 소문만 귀에 담아 두고 자기 발로 예수님의 집회 장소에 찾아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께 개인적으로 만나 뵙고자 한다는 전갈을 보낸 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헤롯 안디바는 자기의 인간적인 영광과 위엄을 절대로 포기할 마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 왕의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비록 로마 황제의 호의와 로마 제국의 후원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헤롯은 자기가 누리는 인간적인 이 영광스런 지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회기있게 자랑하며 위세를 부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스스로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요 이 모든 자랑과 위엄을 포기하는 것인데, 이것은 죽기보다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 간절히 만나 보고 싶었고, 또 뵐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지만 헤롯 왕은 예수님을 절대로 찾아가지 않았고 그를 정중하게 초대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기를 늘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이적 행하는 소문을 들었을 때 흥분하곤 했습니다. 헤롯이 소문을 주로 전해들을 수 통로는 그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가 예수님의 충실한 여제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복음 8:1 이하에 보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던 여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막달라 마리아와 수산자와 다른 여러 여자들과 함께 예수님 일행을 섬겼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10 말씀에 보면, 이 요안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그 무덤에 갔다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천사로부터 듣고 사도들에게 전해준 여인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안나가 얼마나 굳센 믿음과 진실한 섬김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요안나의 남편 구사를 불러 예수님의 동정을 물어서 그가 행하신 여러 기적과 가르침에 대하여 소식을 자주 듣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소문을 전해 들었을지라도 헤롯 안디바는 그러한 지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헛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적 지식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생명을 살리는 길로 가지 못하고 도리어 생명을 죽이는 완고함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헤롯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을수록 그의 양심은 더 무뎌지고 더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키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킨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놀라워하며 그 기적을 자기 눈앞에서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하여 흥분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자기 눈앞에 데리고 와서 그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마술사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지식을 더 많이 가진다고 해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고 구원자 되신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사모하고 온전히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갈망하는 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도리어 잘못된 방향의 호기심으로 가득차서 더 마음이 완악해지고 영적인 일에 대한 비판만 일삼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와 주의 종들에 대한 추문을 수집하고 역사 속에 남은 기독교회의 죄악들을 마음에 새기고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세상이 교회에 대하여 가지는 비난에 대하여 한통속이 되어 계속하여 종교적인 지식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 주변을 오고가면서도 여전히 은혜받지 못하고 참 신앙의 길에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적셔진 바른 지식이 없이, 인간적인 종교적 지식에 대한 관심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형으로는 헤롯 안디바와 같은 세속 권력자들,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들,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연예인들,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여 나름대로 성공 신화를 쓰고 큰 자부심을 가진 대가들입니다. 이들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외적인 사람들의 환호에 민감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내면 세계와 자기 영혼에 대하여 진실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소욕에는 민감하면서도 영적인 일에는 진지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자기 앞에 영생을 얻을까 하여 달려왔다가 주님 만나 뵙고 힘없이 돌아간 부자 청년을 바라보면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한 바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24)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란 제자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태복음 19:26)
그렇습니다. 인간은 부와 권력과 성공의 자리에 올라서면 그만 교만해지고 세상적인 관심에 온통 마음과 영혼을 다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둔해지고 완고해져서 자기 영혼의 가난함과 비천함과 눈 먼 것과 멸망에 떨어질 위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직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은혜 베푸심을 받아야만 자기 자신을 바로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영혼의 가난하고 비천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목숨을 내걸고 붙잡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고 참되고 영광스러운 부요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날 헤롯이 한없이 해맑은 얼굴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반갑게 맞아서 그 동안 보고 싶었다면서 말을 걸어올 때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여러 말로 물으나’라는 문장은 헬라어 동사의 시상 형태가 미완료 시제로서 헤롯이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묻고 또 물었다는 뜻입니다. 헤롯은 폭발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동안 쌓였던 모든 궁금증을 풀려고 예수님께 질문 세례를 쏟아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체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들었던 바 여러 이야기 속에 자기가 품었던 의문들을 해소하려는 질문들도 있었겠고 이러 저런 기적들을 자기 앞에서 당장 한번 보이라는 주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과 요구에 예수님은 일체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신 까닭은 분명합니다.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한낱 기적 행하는 자 마술사와 광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려고 오신 진리의 증인이라고 전혀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대단한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종교적 마술에 능한 자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일체 침묵으로 대응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6)
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한낱 노리개감으로 생각하는 헤롯에게 아무런 은혜의 수단을 제공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침묵이 헤롯 안디바에 대한 경멸이나 냉소적인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그 심정에는 제 생각으로는 매우 슬프고 안타까움이 가득차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완악한 영혼의 문도 두드려서 구원하시려는 간절함이 예수님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헤롯 안디바에게까지 주님은 이렇게 결박된 채 끌려와서라도 한 시간 정도를 시달리면서 그 자리에 참고 계신 것입니다. 교만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더러운 정욕에 휘둘리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그 영혼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시고자 주님은 그 힘든 발걸음을 내디뎌 찾아오시고 그 고통을 견디고 계신 것이라 이해됩니다. 에스겔서 18:23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주님은 아무리 말을 해도 전혀 깨달을 리가 없는 헤롯 안디바에게 그의 길고 긴 침묵의 대응을 통하여 그 영혼을 향하여 호소하며 돌이킬 것을 말없이 간청하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이러한 대응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주님이 앞서 보내신 바 세례 요한의 목을 침으로써 그를 향하여 주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스스로 끊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세월 주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실 때에 수많은 은혜의 말씀을 전파하며 기적과 이적을 베푸실 때에도 헤롯 안디바는 세월을 낭비하며 한번도 그 은혜의 자리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진정한 신앙의 길에 대하여 알고자 했다면 어찌 주님께서 거절하시겠습니까? 걸인 바디매오가 부르짖어도 가던 발걸음을 멈춰주시고 그를 오라고 청하시며 기다려주신 예수님께서 어찌 거절하셨겠습니까? 그러니 한번도 주님께 찾아오지 않고 그를 진심으로 청하지도 아니해왔던 헤롯 왕이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그의 수하에 둔 종처럼, 그의 손아귀에 운명이 달린 한 죄수로서 생각하면서, 자기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여 이적을 보이는 아첨의 행동을 해보라는 말을 하는데, 어찌 주님께서 그에게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가르침도 줄 없을 만큼 처참한 인격으로 변질된 헤롯 안디바에게는 주님은 다만 침묵으로 자신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제대로 대접하지 않은 자에게 주님께서 어찌 또 다시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헤롯 앞에서 주님의 길고 긴 침묵은 주님의 깊고 큰 아픔과 슬픔이요 괴로움인 것이지, 헤롯 안디바에 대한 경멸이나 무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주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저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할 수 없는 너무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10절로부터 1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예수님을 만난 헤롯이 들떠서 이것 저것 말을 시키고 묻기를 계속함으로써 헤롯 궁은 잠시 재판자리가 아니라 즐거운 연회 자리처럼 재미난 분위기였으나 예수님의 계속된 침묵으로 그러한 분위기가 식어졌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헤롯 왕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발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가 본디 재판자리임을 깨달은 헤롯은 잠시 예수님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고자 생각을 가다듬었지만,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세례 요한을 죽이고 본인이 겪었던 그 오랜 정신적 후유증이 떠올라서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리는 것은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예수님을 희롱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자기에게 침묵하며 아무 대응도 하지 아니한 예수님을 조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때 헤롯에게 예수님을 조롱하기에는 딱 좋은 발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져오라 명한 옷은 왕족이나 귀족들이 왕궁의 잔치에 참여할 때 입는 화려한 파티복과 같은 것이 분명합니다. 화려한 색깔과 황금빛 레이스로 수놓고 여기 저기 빛을 내는 반짝이들이 붙어 있는 그 옷은 예수님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세속적인 옷이었습니다. 그 옷을 예수님께 입혀 놓고 헤롯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면서 “그가 유다의 왕이라고 주장하니 저 옷이 어울린다.”고 조롱하면서 자기의 근위병들과 함께 배를 잡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 중에 가장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로마의 군인들에게 채찍질당하거나 대제사장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것보다 더 고약하고 참기 힘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모욕을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겪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또한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이런 저런 모욕과 멸시를 당하기도 합니다만, 아무리 가혹한 멸시와 모욕을 만난다 해도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그러한 비참한 모멸감을 주는 모욕은 당할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앞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봉사의 일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까닭없는 중상 모략과 멸시와 비난과 모욕을 당할지라도 헤롯에게 당하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묵묵히 그 고난을 감내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2절을 함께 읽읍시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본래 헤롯 왕가와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 간에는 권력 갈등이 늘 있었습니다. 더욱이 빌라도는 거칠고 야만적인 면이 있어서 헤롯 왕가의 왕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헤롯이 자신의 재판권 행사를 하지 않고 예수님을 정중하게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면서 재판권을 빌라도가 행사하도록 양보하자 빌라도는 헤롯에게 고마워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날 두 사람은 예수님 까닭에 원수지간에서 변하여 친구지간이 되었습니다.
무릇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와 복음을 반대하는 일에는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고 단단히 결속하곤 합니다. 평소 교리 차이도 심하고 늘 주도권 싸움을 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모두 일치가 되어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도 세상 사람들, 세상 기관들로부터 항상 공격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고 일치된 핍박을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우리 편이 되어주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결코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싸우다가도 교회를 죽이고 진리의 복음을 가로막는 일에는 금새 한편이 되어 반대편에 함께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 가운데 있는 자들은 내편으로 삼겠다고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를 조금이라도 양보하거나 타협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모든 진리를 양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온 세상이 다 연합하여 공격하여 핍박할 때에 이상히 여기지 말고, 진리를 여전히 붙들고 고난받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도 그러한 차이를 극복하고 교회를 향하여 동일한 박해의 소리를 낼진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사소한 차이를 극복하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연합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세상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 가운데 핍박이 거세지는 이 시대에 교회가 세상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매달리기보다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십자가 진리를 굳게 붙잡고 진리를 결코 양보하지 말고,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세상 가운데 끝까지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는 주의 제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제 생각에 예수님께서 그의 마지막 고난의 순례길에 이 헤롯 안디바에게 끌려와 재판을 받는 여정이 추구된 것은 뜻밖의 일로 여겨집니다. 유월절 명절 시작하는 그 날, 예수님의 사형 판결과 사형 집행이 신속하게 진행되어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나 짧고 빠뜻한 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촘촘한 일정 속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잠시 헤롯 안디바에게 끌려와서 그에게 심문을 받고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가는 이 일정은 없어도 좋은 일정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들은 다 생략하고 이 누가복음에서만 그 일을 지극히 짧게 소개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주님께서 헤롯을 만나셔야 할 필요가 있으시고, 그 만남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영적 교훈이 있다고 생각하셨기에 이 만남을 주선하시고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들에게 묵상하게 하시게 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헤롯 안디바에게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생명과 진리로 충만한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자기의 교만과 허세만 자랑하다가 주님을 조롱 중에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자 세례 요한으로부터 개인적인 설교를 듣는 행운을 얻었고, 오랫동안 자기 영지에서 설교하며 기적을 행하신 주님의 소식을 삼년 반 동안에서 전해 들을 수 있었으며 얼마든지 가서 만날 수 있었던 영적 축복을 받았던 그는 마지막 기회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떠나 보낸 후 삼년 후부터 그에게 환난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은 헤로디아를 유혹해서 데려올 때 자기 본처가 있었습니다. 그는 옆에 있는 나라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변심을 확인하자 곧장 고향 땅 본국으로 도망쳐서 아버지께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분노한 나바테아(아라비아) 왕 아레타스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어 응징에 나섰습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했는데, 로마 황제의 군대 파병으로 인하여 간신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로부터 약 삼년 후에 또 다시 환난이 닥쳐 왔습니다. 그의 처남 곧 헤로디아의 동생 아그립바 1세와 갈등이 생겼습니다. 아그립바 1세가 황제의 총애를 얻어서 헤롯보다 더 넓은 영토,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얻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헤로디아의 부채질에 의하여 헤롯은 로마 황제에게 자기도 더 나은 부귀영화를 누릴 영토와 백성들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아그립바 1세의 모략으로 인하여 헤롯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그의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고 직위에서 추방되고 저 프랑스 남부 리옹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헤롯은 거기서 헤로디아와 함께 외롭게 살다 죽고 맙니다.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다가 도리어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말년을 보내는 일은 그가 예수님을 희롱한 후 삼년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와 진실한 구원과 참된 평화와 안식과 생명을 얻는 절호의 기회를 그렇게 걷어차고 스스로 거둬들인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 모두에게도 헤롯과 같이 교만과 허세와 탐욕의 구석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책망이 주어졌지만 회개치 아니하고 세상 미련을 끊지 못하고 그것들을 계속 붙드는 악덕이 있습니다. 그렇다가 사탄이 만든 결정적 시험의 기회에 많은 사람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더 멀어지는 선택을 하고 더 마음이 완악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기다리며 기회를 주지만 우리 스스로가 마음을 닫아 걸고 헛된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므로 더 마음이 완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헛된 종교적인 관심을 내려놓고 우리 자신의 내면의 진실을 살펴봅시다. 내 영혼의 가난함과 넘어지고 버림당할 위험성을 깨닫고 진정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내 모든 것을 내걸고 붙들고 놓지 않는 참된 신앙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의 모든 계급장을 떼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한 가련한 영혼으로서 주님의 말씀 앞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자가 됩시다.
세상의 모든 것들 재물, 권세, 인기, 건강, 사람들의 평판 이 모든 것은 지나가고 맙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참 생명과 진리의 본체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것들뿐입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서 붙드시어 이 나그네 인생 길을 주님과 동행함으로 참된 평안과 안전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