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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 약산 김원봉>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약산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한 석정 윤세주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좌권 장군과 함께 은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지도자 등소평을 구한 생명의 은인입니다.
장개석 국민당 군대의 집요한 포위공격을 피해 1934년 10월,
모택동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인 강서성 서금 정강산을 떠난다.
광동, 호남, 광서, 귀주, 운남, 사천, 감숙 등 11개성 18개 산맥을 넘어 368일의 고투 속에 섬서성 북부에 도착한다.
이것을 대장정(Long March 1934. 10 - 1935. 11)라고 부른다.
총 30만의 군대가 3만으로 축소되는 죽음의 행군이었지만 이 장정을 통해 모택동 유격전의 전술,
전략적 가치가 확보되었고 장개석 군대에 대한 홍군의 도덕적 우위를 중국인민 대중에게 각인시켰으며
중국공산당의 위치가 공공하게 되었다.
홍군(모택동군)은 1937. 1, 13. 연안에 입성하여 대륙석권의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한다.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모택동의 ‘Long March'을 가리켜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행군은 이에 비한다면 휴일의 소풍이라 표현했다.
연안하면 밀양 출신 석정 윤세주,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 그리고 조선의용군이 떠오른다.
연안은 모택동의 ‘대장정’이 끝난 도시라서 사람들은 혁명의 도시라 부른다.
황하 상류에 있는 황토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연안은 매년 우리나라에 피해를 주는 황사바람의 근원지이다.
산동성 발해만에서부터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낙양, 산문협을 지나 확 구비쳐 오르는 곳,
동쪽이 산서성이고 서쪽이 섬서성이다. 그 섬서성 북쪽 황하 안쪽으로 연안이 있다.
모택동은 왜 연안을 선택했을까?
연안은 하나의 거대한 황토협곡이었고 사람들은 양 쪽 절벽 기슭에 모두 토굴을 파 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천연 요새이고 항구적인 혁명기지를 구축하기에 안성마춤이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1937년 1월, 연안에 와서 1948년 3월에야 이곳을 떠난다. 11년을 머무른다.
일반사람들에게 모택동은 혁명가로 알려져 있다. 물론 모택동은 혁명가다.
그리고 게릴라 전술의 투사로 알고 있다. 즉, 총칼을 휘둘러 정권을 잡은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대륙을 석권했다. 모택동은 무인이라기보다 문인이다.
그는 총칼이 아니라 붓 한 자루로 천하를 평정했다.
그의 게릴라 전술이라는 것도 중국 고유의 손자병법과 소설 삼국지의 지혜를 빌린 것이다.
그의 혁명이론도 도시노동자, 프로레탈리아 주체사상이라기보다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향토 농민,
대중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일본 육사를 나온 장개석은 서양식 정규군 전략을 전투방식으로 삼은 반면,
모택동은 땅의 점령을 우습게 알았다. 대륙에서는 널 부러진 게 땅이다.
진실로 군대가 점령할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 믿었다.
그래서 모택동의 홍군은 규율이 살아있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홍군의 가장 중요한 단일전술은 공격 시에 주력부대를 집중시키고 이후엔 신속히 분산시키는 것이다.
이합집산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정지된 상태에서는 교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모택동은 붓 한 자루로 지도한다.
모택동은 장정을 통해 계속 땅을 빼앗기고 쫓겨 다녔지만 일반 대중의 마음 속 영토는 계속 넓혀 나간 셈이다.
그는 연안에 도착한 후로도 11년 동안 부동의 구심점 자리를 지키며 천하를 호령한다.
그리고 마침내 1949. 10. 1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역사의 대업을 달성한 사람에게는 천운(天運)이 있다.
모택동이 비록 ‘대장정’을 통해 연안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성공했지만 장개석 국민당군대의 위력은 막강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홍군이 국민당 군대를 이기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물리적 힘의 비례는 1/10 정도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모택동이 중국대륙을 석권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리러니하게도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덕분이었다.
모택동이 연안에 입성한 그 해,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조작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만주에서 중국본토로 진입한 것이다. 중일전쟁은 장개석의 포구를 모택동의 홍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게 했다.
모택동은 항일의 떳떳한 명분 아래 홍군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세력을 확대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아이러니하게 끝을 모르는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이 키운 셈이다.
중국 장안(현재 서안시)에는 화청지라는 온천지역이 있다.
양귀비가 당 현종을 만나러 가기 전, 온천목욕을 한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은 국공합작의 모태가 된 서안사변의
장소이기도 하다. 서안사변(1936. 12. 12-25)의 주역은 장학량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장개석의 부하이다.
그는 내전보다는 항일을 열망하는 동북군의 요구에 따라 공산당 소탕작전을 격려하러 온 장개석을 감금한다.
그리고 장개석에게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당시 장학량이 장개석을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브레인 주은래가 교섭, 장개석을 살려 주고 국공합작에 응하도록 한다.
장학량은 장개석의 국공합작 응낙을 받아내고 오히려 자청하여 그의 포로가 된다.
주은래의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장학량, 이런 멋있는 대인들의 협상에 따라
국공합작은 성립하고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항일연합전선이 형성된다.
장학량은 중국 전 인민의 은인이다. 후일 장개석은 장학량을 도와 서안사변을 일으킨 양호성은 살해한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국공합작의 시대는 중국공산당 세력확장의 시기였고 바로 우리나라 조선의용대의 전성기였다.
조선의용대의 활약이 국민당과 공산당이 이념을 초월하여 함께 싸우던 국공합작시기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연안혁명기념관에 있는 혁명 당시의 연안간부학교 일람표에는 조선군정학교가 들어가 있다.
조선군정학교는 연안 나가평에 있었던 조선혁명군정학교를 말한다.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인 김두봉이 교장을 했고 부교장은 박일우였다.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3번이나 강연을 할 정도로 중국공산당 서열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
김두봉(1890-1961) 부산 동래출신.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초대교장
박일우(1904-?) 평남출신. 용정에서 교사생활. 중국공산당에 입당. 조선의용군 사령관
장개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에게 돈을 주었지만 모택동은 줄 돈이 없었다.
공산당은 가난했다. 그들의 실천론은 스스로 먹을 것을 일구어 가면서 혁명을 하라는 것 이었다.
이곳 연안에 기거하는 모든 부대원들은 스스로 먹을 것을 경작하며 공부하고 전투에 임했다.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의 뿌리는 의혈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의혈단, 조선의용대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라는 인물,
그리고 밀양아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는 이미 이야기 했다.
이곳 화북지역 조선의용대 사람들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중경에 남아 있는 약산 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본부에 있다. 물론 후에 독자적인 조직으로 발전해 간다.
그리고 화북지역의 조선의용대는 가장 맹렬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김원봉과 윤세주가 이념적 갈등으로 김원봉은 상해임정으로 가, 후에 광복군 제1지대로 가고
윤세주는 화북지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같은 밀양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서로 이념적 갈등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다.
김원봉은 화북지역에서의 활동이 중요했기 때문에 윤세주를 보내어 효율적 투쟁을 한 것이다.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만나지 못하고 윤세주는 태항산 십자령 전투에서 전사한다.
윤세주가 죽고 남은 동지들이 연안으로 이주해 학교를 꾸리고 투쟁한 것이다.
국공합작은 오로지 항일투쟁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민들은 항일투쟁이 무엇인지 몰랐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체험이 없고 광막한 대륙의 막연한 천하주의, 중화중심주의만 가지고 있었기에 민족이라는
아이덴터티가 없었다. 소설가 로쉰은 중국인들의 근대적 민족의식 결여를 두고두고 개탄했다.
로쉰(1881-1936) 본명은 주수인. 중국의 대표적 소설가. ‘광인일기’ ‘아큐정전’ 등
아무리 일본이 만행을 저질러도 그것을 민족 대 민족의 투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었다.
몇 천 년을 비적, 마적, 도적놈에게 시달린 사람들이어서 일본침략자를 또 하나의 마적쯤으로 인식할 뿐이었다.
따라서 포괄적인 대일투쟁 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빛나는 주옥처럼 등장한 것이 조선의용대이다.
조선사람들은 구한말의병부터 시작하여 3.1운동을 거쳐 일본의 수없는 만행을 경험하면서 강렬한 민족의식과
애국애족의식, 그리고 일본제국주의 타도의 투쟁의식이 있었다.
물론 조직력과 전투력이 있었고 일본과의 투쟁경력을 통해 일본군을 너무도 잘 알았다.
따라서 조선의용대는 소수지만 중국의 항일투쟁을 리드한 가장 정예로운 투사였다.
조선의용대는 최전방의 돌격부대이고 첩보부대며 선전부대였다.
조선인들은 항일투쟁에 있어서는 중국인들의 대선배였다. 조선의용대의 중요성을 모택동, 주은래, 주덕, 팽덕회 등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약산 김원봉과 주은래는 절치한 친구였고 무정 장군은 모택동의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작전참모였다.
팔로군의 항일투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러나 조선인은 대부분 일본어, 중국어에 능통했다.
선전, 첩보요원으로서는 최적이었다. 그리고 배신을 몰랐다.
조성의용대는 여자도 많았다. 그들은 적의 사기를 꺾고 중국인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일본에 강제징집된
조선학도병들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연극, 영화, 노래, 선전, 삐라, 벽보, 군중집회, 시장연설 등, 온갖 방법을 통해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들은 전방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고 최후까지 남아 싸웠다.
조선의용대는 중국대륙에서 일본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행복해 했다.
조선 땅에서 전투를 벌일 수 없는 한(恨)을 중국대륙에서 풀었던 것이다.
중국항일투쟁을 성공시키는 길만이 일제를 조선에서 궤멸시키는 첩경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이러한 조선의용대의 투지를 지켜본 중국의 대 시인(詩人), 사상가 곽말약은 “조선의용대는 항일투쟁의 가장
용감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최후까지 남아 최선을 다하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는다.”라고 했고,
팔로군 참모장 섭검영은 “조선의용대는 반파시즘 투쟁의 새로운 역량이다. 그들은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위의 모든 사람을 격려시킨다.”라는 찬사를 보낸다.
곽말약(1892-1978) 일본 구주대학 의학부 졸업. 광동 중산대학 문과대학장.
중국인민공화국 성립 후 과학원 원장
섭검영(1897-1986) 홍군의 대표적 주자. 팔로군 참모장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회원
조선의용대는 항일투쟁의 꽃이었다.
중국인들은 조선의용대의 투쟁과 더불어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 태어났던 것이다.
김산은 연안의 중국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수학, 영어,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치졸한 극좌분자들에 의해 토로츠키파, 일본 스파이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김산(1905-1938) 본명은 장지락. 평북 용천출신. 신흥무관학교, 북경의과대학, 황포군관학 교 졸업,
당대 최고의 지성. 중국공산혁명에 참여.
그의 혁명적 삶과 뛰어난 인격, 그리고 인간애에 대한 진실한 족적은 님 웨일즈의 글을 통해 이승에 남는다.
때로 혁명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김산의 이야기는 뒤에 다시 언급한다.
님 웨일즈(Nym Wales 1907-1997) 미국의 혁명적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
산서성, 화북성, 그리고 화남성 이 세 성이 만나는 지점에 태항산이 있다.
산서성 마전에는 팔로군 총사령부가 있다. 팔로군이란 국공합작 후에, 공산당 홍군이 국민당 군대에 편입되면서
8번 째 로군으로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택동의 ‘대장정’에 가담하지 않은 화남의 홍군은 새로 편성되어 신사군이 된다.
따라서 국고합작에 참여한 중국공산당 군대는 화북의 팔로군, 화남의 신사군이 있는 것이다.
그 화북 팔로군 총사령부가 태항산맥 마전에 있었던 것이다.
이 팔로군 총사령부 곁에 우리민족의 항일영웅들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본부가 같이 있었다.
연안은 전투가 미치지 않았던 내륙의 본부였고 마전은 화북전선의 실제 작전본부였다.
총사령부에는 팔로군 부총사령관 팽덕회, 부총참모장 좌권, 그리고 129사단 정위 등소평이 있었다.
또, 그들과 더불어 ‘대장정’을 같이한 무정 장군, 진광하, 그리고 약산 김원봉의 죽마고우인 밀양의 석정 윤세주가 있었다.
마전의 조선의용대 주둔지는 운두저라는 마을에 있었다. 여기에 모택동과 ‘대장정’을 함께 한 무정 장군이 함께 있었다.
김무정(1905-1952) 함북 경성출신. 중공임정 수립에 참여.
모택동과 ‘Long March' 함께 함.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무정은 1942. 7. 최창익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산하로 개편,
김원봉 라인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인 조선의용군으로 발전시켰다.
1942. 5. 일본군 화북방면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1884-1956)는 3만5천의 군대와 중화기를 동원,
항일근거지인 마전 팔로군 총사령부를 싹쓸이하려는 ‘참빗작전’응 감행한다.
팔로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퇴각작전을 수행한다. 일본 비행기 6대가 뜬 상황에서 퇴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좌권(1905-1942)는 황포군관학교 1기생으로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모스크바 중산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홍군 제1군단 참모장으로서 2만5천리 대장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주덕과 팽덕회를 보좌하는 팔로군 작전참모 중 가장 젊고 탁월한 사람이었다. 주은래는 좌권을 두고
“내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 좌권만큼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군사지략가를 찾기란 힘들다”라고 했다.
좌권은 매우 지적이고 논리적이며 냉철하며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팔로군 총사령부의 안전한 퇴각이 난감한 시점에서 퇴각의 퇴로를 열기 위한 전위부대로 30여 명의
조선의용대가 앞으로 나간다. 여기에 평양 출신의 진광하, 밀양 출신의 약산 김원봉의 친구 윤세주가 있었다.
이들이 퇴로를 뚫는 최 전위 용사들이었다. 그 퇴로가 태항산 십자령 고개이다.
지금은 좌권 장군의 이름을 따 좌권령이라 불린다. 마전에서 십자령까지 150리, 이 십자령만 지나면 화북성
서편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령은 옴폭한 분지였고 엄청난 난관이었다.
잘못하면 사방 일본군의 포위로 독안에 든 쥐가 될 수도 있었다.
윤세주와 진광화는 30 여명의 조선의용대와 함께 십자령 양 쪽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올라 간다.
일본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골짜기에 팽덕회와 등소평이 있었다.
팽덕회와 등소평은 조선의용대가 앞에서 처절한 전투로 길을 뚫어 주어 무사히 십자령을 넘을 수 있었다.
훗날, 팽덕회는 6.25 전쟁에 참전한 백만 중공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등소평은 중국의 개방정책을 주도하며
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물고를 텄다. 진광화, 윤세주가 아니었으면 그들은 십자령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좌권은 끝까지 남아 퇴각의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나 일본비행기의 포탄에 맞아 절명한다.
부하들은 그를 전장에 묻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좌권의 묘를 파헤쳐 그의 목을 베어 가지고 갔다.
아직도 좌권 장군의 목은 찾지 못했다. 반면, 진광화, 윤세주는 십자령 고지를 점령한 후,
총탄과 포탄에 만신창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중국인 전우들은 두 사람을 들쳐 엎고 퇴각을 계속했다.
윤세주(1901-1942) 밀양출신. 호는 석정. 약산 김원봉의 죽마고우.
진광화(1911-1942) 평양출신. 본명은 김창화. 중국 광주 중산대학 졸업
그러나 십자령에서 멀지 않은 흑룡동이란 곳에서 1942. 5. 28 두 사람은 절명한다.
중국인 전우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조선의용대의 두 사람 시체를 일본군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며 시체를 메고 천리길을 간다.
1942., 10. 10 등소평 이하 5,000명의 동지들이 모여 섭현 석문촌에서 좌권, 윤세주, 진광화 이 세 사람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지금도 석문촌에는 좌권의 묘와 ‘조선민족영령’이란 글씨와 함께 윤세주, 진광화의 묘가 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대륙의 혁명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그러나 그들이 바랐던 것은 조선의 자유와 독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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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긴글을 나보고 다 읽으라꼬요
요 밑에 있는 <밀양아리랑 약산 김원봉>,,, 또 고 밑에 있는 <보수와 혁신이 공존한다. 안동>도 다 읽으시삼... ㅎ ㅎ
몹정님 헌티 요정도 싸이즈는 거으 고문이라는..
길긴 긴 글 맞슴다.. 그러나 유익하죠..
1942년 5월 일본군의 '참빛작전' 맞서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이 합작해 싸운 항일무장투쟁 최대격전지 태항산 십자령
이곳 십자령에서 팔로군 부사령관 좌권 장군, 조선의용군 윤세주, 진광화 열사가 전사했죠
참 오래전에 선망으로 품고 살아온 시간도 있었는 대
기억 더듬게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知好樂님
'님웨일즈' 아리랑을 통해서 나에겐 아직도 '김산'의 의기 가 서늘하답니다
담에 김산 잘 다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약재 많이 못팔면 우짜지요
참빗작전의 대규모 일본 공격에도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에는 조선의용군의 역할이 대단히 컷지요. 중국공산혁명,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에 참여한 조선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들의 피나는 항쟁이 이념때문에 왜곡된다면 참으로 안타깝겠지요. ....
골치 아파통과
그래두 좀 본 척은 허시래두.. 으음
이게 무신 <세바퀴> 전화퀴즈인가 ?? 통과, 패스 하시게 ㅎㅎ
근디 쪼까 길긴허네.. 나두 긴글 보믄 턱 숨이 막히는디 몹정님께서 어련허시것소.. 으음
약짜면서 만주벌판을 헤매고 있는듯.. 팽덕회(지덜 발음으로는 펑더화이).. 나는 팽덕화로 알고 있었는디, 뒤져보니 요레 나오네.
전쟁 시리즈 속편같다는.. ^^ 몰랐던 내용, 새로 알게된 내용이 많았슴.. 으음
짤 약이 없으깨 만주벌판이고 연해주고 헤매고 다닌다는.... 담에는 봉오동하고 청산리로 헤맬라고요...
이 시기에 팔로군 음악을 담당했던 광주출신 음악가 누구더라?? 아 , 정율성
2007 광주 정율성 국제음악제 ‘팡파르’
중국 현대음악 대부로 추앙받는 광주출신 정율성(1914∼1976) 선생을 기리는 ‘2007 광주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19일 오후 6시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개막됐다.
음악제는 광주시립국극단의 모듬북 ‘태동’으로 막이 올랐다. 이어 박광태 광주시장·정율성 선생의 외동딸 소제 여사의 영상메시지, 임현모 조직위원장의 개막선언으로 이어졌다.
중국 민악단은 고쟁·비파·얼후·양금 등 악기로 ‘미도산가’등 중국 전통 음악을 연주했고,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은 ‘옌안송’ ‘팔로군가’ 등 정율성 선생의 대표곡을 들려줬다.
개막공연에는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음악가, 연주단체 등 모두 500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또 한·중 양국 사회자의 진행으로 중국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방영됐다.
주말인 20일 오후 7시30분에는 대극장에서 피아니스트 백혜선, 성악가 임웅균, 중국의 소프라노 요우홍페이·테너 짱티엔푸가 선사하는 클래식 향연이 펼쳐진다. 광주시립교향악단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서곡, 정율성의 오페라 ‘망부운’의 서곡을 들려준다.
마지막 날인 21일 오후 7시30분에도 대극장에서 중국 합창단과 광주 전국여성합창제 수상팀, 어린이합창단 등 한국과 중국이 연합 합창을 하는 등 아마추어 합창단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어 전 출연자들이 ‘우의와 평화의 행진곡’을 함께하며 3일간 행사를 마감한다.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1933년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뒤 중국 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옌안송’ 등을 작곡해 중국에서 현대음악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다.
/김주정기자 jjnews@kwangju.co.kr
그리고 대륙영화 '황토지'에서 팔로군 역동성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지요.
성함만 얼핏 들었는데 대단한 분이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참을 읽다가 소파에서 눈 한번 붙이고 또다시 읽었습니다. 길지만 흥미진진 재밌고 영화이야기방에 있는듯한 착각을 주시는 우리님들 댓글이 더욱 흥미를 더해주는군요. 知好樂님 하절기인 이때는 약을 제일 적게 짤때이니, 놀멘놀멘 잼있는 역사이야기씨리즈 계속 하시지않을까 기대합니다.
좀 길긴 길지요 ! ㅎㅎ 그 시절 화북지역에서의 조선의용대(군)의 활약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글구 한의원 경기를 꽤고 계십니다요 ! 더위 조심 하시길....,
지호락님 아쉽지만 지금은 이 글을 꼼꼼히 읽을 수가 없어 이렇게 발자국만 남깁니다. 마치 독립운동사 총정리하는 기분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