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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松島)는 소나무가 많은 섬인가
지금 마을 이름이나 산 이름, 고개 이름, 골짜기 이름, 들(野) 이름 등에 속칭으로 불리는 우리말 이름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속칭들이, 한자로 된 행정명에 눌려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게다가 이런 속칭들이 원래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속칭의 뜻이나 그 유래를 알고 있는 연로한 세대들이 떠나고 나면 점점 더 그 말뜻을 잃어버릴 것이다.
일예로, 경북 경산시 남산면의 동네 이름을 언뜻 보아도, 쪽골, 갈말, 들기, 무너미, 이르실, 솔안, 서리골 등 10여 곳이 있는데, 이 속칭 마을의 행정명에서 그 뜻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나, 그것이 원래 의미에 맞는지 그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쪽골은 ‘쪽 람(藍)’ 자와 ‘골 곡(谷)’ 자로 된 남곡(藍谷)이란 행정명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쪽풀이 많은 골’이란 데서 지어진 이름인지, ‘쪽 즉 작은 골’이라서 그렇게 지어진 이름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갈말의 행정명인 갈지(葛旨) 또한 ‘칡이 많아서 지어진 이름’인지, 아니면 ‘갈풀을 많이 재배해서 생긴 이름’인지를 알지 못한다.
솔안의 행정명은 송내(松內)다. 글자대로 하면 ‘소나무 안’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마을에 가 보면 소나무가 없다. 서리골의 행정명은 반곡(盤谷)이다. ‘반(盤)’ 자는 ‘서릴 반’ 자다. 어떤 기운이 ‘서린 골’이라는 뜻이다. ‘서리가 많이 내리는 골짜기’라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또 서리는 ‘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니, ‘산의 사이에 있는 고을’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것이 담고 있는 한자가 원래 속칭이 의미하는 것과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말 뜻에 꼭 맞게 바꾼 게 아니라 아무렇게나 적당히 옮긴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명이 한자로 바뀐 것은 크게 두 차례다.
그 첫 번째는 신라 경덕왕이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쓰면서 땅이름도 중국식 지명으로 바꾼 것이다. 그때 지금 우리가 쓰는 큰 고을들의 이름이 대부분 한자로 바뀌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에 “영동군(永同郡)은 본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 이를 그대로 쓰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길다’의 뜻인 ‘길(吉 long)’을 그런 뜻을 지닌 한자 ‘영(永)’ 자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말 ‘길동군’이 한자어 ‘영동군(永同郡)’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지명들은 그런 추세에 맞추어 중국을 모델로 하여 점차 이름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조선에 이르면, 그러한 한자 이름들이 점차 각 지역에서 힘을 더해 갔다. ‘ᄀᆞᄅᆞᆷ’이 ‘江’으로, ‘뫼’가 ‘山’으로 바뀌어졌음은 모두가 잘 아는 바다.
두 번째 크게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일본은 우리의 혼을 빼버리기 위하여, 원래의 지명을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바꾸어 버렸다.
인왕산의 한자 표기는 원래 인왕산(仁王山)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를 ‘인왕산(仁旺山)’으로 바꾸었다. 왕(旺) 자는 일본을 뜻하는 日과 王을 합친 것으로, 일본이 조선의 왕을 누른다는 뜻이다. 종로도 마찬가지다. 조선 시대 종로의 한자는 ‘鐘路(종로)’로 썼다. 보신각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민족정기를 말살하고자 ‘종’ 자를, 쇠북을 의미하는 ‘鐘(종)’ 자에서 술잔 즉 작은 종지를 뜻하는 ‘鍾(종)’ 자로 바꾸어 鍾路(종로)로 고쳐버렸다. 큰 북이 아니라 작은 술잔으로 깎아내린 것이다.
인천의 송도(松島)는 일본의 군함 이름인 마츠시마(松島)호를 그대로 따와서 붙인 이름이다. 송도호는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끄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전함이다. 당시 인천은 일본의 해군 기지로 쓰였다. 그래서 인천의 곳곳을 일본의 장군이나 제독, 그리고 군함 이름을 따와서 지명으로 삼았다. 이처럼 송도(松島)는 소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엉뚱한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말 지명을 아무런 원칙도 없이, 상부의 명에 의하여 면서기 마음대로 바꾸었다. 시쳇말로 엿장수 맘대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유한 우리말 땅이름을 많이 잃어버렸고, 그나마 그럴 듯하게 한자로 바꾼 이름도 원래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한자어로 우리 앞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잘못 붙여진 이름이 지금껏 사용되는 지역도 부지기수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전봉준 장군의 옛 집이 있는 정읍시 이평면(梨坪面)은, 동진강 배가 드나든 들판이라 해서 ‘배들’이라 불렀는데, 일본인들이 먹는 배로 착각해 이평(梨坪)이라 이름 붙였다. 바다를 오가는 배가 터무니없는 먹는 과일 이름인 배로 바뀐 것이다.
인천 남구의 수봉공원은 일본인들이 수봉(壽鳳)이라고 고쳤으나, 원래는 서해쪽으로 하천이 자리잡아 눈이 쌓이면 물이 불어나, 봉우리가 그 물에 비친다는 의미인 수봉(水峯)공원이었다.
또 여수시 돌산읍 두문리(杜門里)의 본래 이름은 두문리(頭門里)다. 두문리는 ‘바다로 가는 첫머리 마을’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일제는 문을 꽉 닫는다는 뜻인 두문리(杜門里)로 바꾸었다. 숨 막히는 마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이 땅을 강점하여 땅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였다.
그런데 우리 손으로 지은 땅이름도 긴 세월이 흘러오면서 본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뀐 것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쓰고 있는 한자 이름을 보고 섣불리 그 뜻을 추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예는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없어서, 고유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우리 역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우리말 땅이름인 ‘아사달(阿斯達)’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으니, 바로 요임금과 같은 시기이다. …… 다시 도읍을 옮기니, 그곳을 궁홀산(弓忽山)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부르기도 한다.”
란 구절이 있다.
또 단군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은나라 무정 팔년 을미년에 / 아사달(阿斯達)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란 구절이 있다.
단군 이야기를 기록한 권람(權覽)의 응제시주(應制詩註)에도 “상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 그곳이다. 그 사당이 지금도 있다.”고 하였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문화조에는,
“이곳의 진산(鎭山) 구월(九月)은 세상에 전해오기를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본래 고구려 때는 궐구현(闕口縣)이었다. ‘궐구’란 이름은 단군신앙과 관련하여, 천제(天帝)가 하늘로 올라갔던 관문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문화현의 구월산(九月山) 지맥인 남쪽의 아사달봉(阿斯達峰)에는 단군이 신으로 승천했다는 단군대(檀君臺)가 있으며, 신라 때에는 궐산(闕山)이라 불려졌다. 궐산이란 이름은 단군의 궁궐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전해온다.
이상의 여러 문헌 기록과 전설을 참조하면, 아사달(산)은 궁홀산, 금미달, 구월산, 궐산 등으로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들 이름들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 수수께끼를 풀려면 먼저 아사달의 본뜻부터 알아야 한다.
아사달(阿斯達)은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표기한 것인데, 이 중 ‘斯(사)’ 자는 그 첫소리 ‘ㅅ’이나 그 계열 즉 ‘ㅈ, ㅊ’등을 나타내는 데 쓰인 글자다. 그러니 ‘아사(阿斯)’는 우리말 ‘앗, 앚, 앛’을 표기한 것이다. 이 ‘앗, 앚, 앛’은 ‘작다, 아우, 첫, 다음(次)’의 뜻을 가진 말이다. 이런 뜻은 다 ‘작다[小]’라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앗이(아시), 앚이(아지)’는 아우란 뜻이며, 처음 하는 빨래를 앗이(아시)빨래라 한다, 또 ‘소+아지’가 송아지가 되고, ‘말+아지’가 망아지, ‘돝+아지’가 ‘도야지(돼지)’가 된 것도 그런 연유며, ‘앚+어머니’는 작은어머니 곧 아주머니고, 앛ᄋᆞᆫ설(아ᄎᆞᆫ설)이 작은설(까치설)을 의미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손자나 조카, 생질을 ‘아ᄎᆞᆫ아들’이라 한 것도 또한 같다. 벼슬 이름 아찬(阿飡)은 대상(大相 큰 제상)에 대하여 소상(小相) 또는 차상(次相 次는 長보다 작다)이란 뜻이다. ‘앛ᄋᆞᆷ(아침)’은 그날의 처음(처음은 무엇이든 크지 않고 많지 않다)이란 뜻이다. 이 ‘앗’이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朝 あさ)가 되었다.
그러면 아사달(阿斯達)의 ‘달(達)’은 무슨 뜻일까? 이는 고구려어로 ‘산’ 혹은 ‘땅’이란 뜻이다. ‘달(達)’이 땅임은 현재의 ‘양달, 응달’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니 아사달(阿斯達)은 ‘작은 산’ 또는 ‘첫 땅’이란 뜻이다.
서울특별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도 이런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높이가 287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현재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어 쓰인다.
그러면 아사달(阿斯達)에 대한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사달(阿斯達)이 궐산(闕山)으로 불린 것은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즉 아사달산(阿斯達山)이 있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본래 고구려 때는 궐구현(闕口縣)이었는데, 궐구란 이름은 단군신앙과 관련하여, 천제(天帝)가 하늘로 올라갔던 대궐의 입구가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또 문화현의 구월산(九月山) 지맥인 남쪽의 아사달봉(阿斯達峰)에는 단군이 신으로 승천했다는 단군대(檀君臺)가 있어서, 신라 때에는 궐산(闕山)이라 불려졌다.
한말로 말하면 궐산(闕山)이란 단군이 거주하던 대궐(大闕)이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곧 ‘대궐 산’이란 뜻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이름인 ‘궐산’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대궐의 ‘궐(闕)’이란 의미를 잃어버리고, ‘궐’을 그 비슷한 소리인 ‘구월’로 발음한 것이다. 즉 ‘(대)궐’ 대신에 그 음이 유사한 ‘구월(九月)’이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 것이다. 구월산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궁홀산(弓忽山)도 마찬가지다. ‘궁홀산’을 빨리 발음하면 ‘구올산’이 되고, 여기에 좀 더 명확한 의미를 붙이기 위하여 ‘구월산(九月山)’이란 한자 이름을 지어내 붙였다.
그러면 금미달(今彌達)은 어디서 연유한 이름일까?
금미달(今彌達) 역시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이다. 금미달(今彌達)의 ‘미(彌)’ 자는 바로 앞의 글자 ‘금(今)’ 자의 끝소리가 ‘ㅁ’으로 끝난다는 것을 ‘미(彌)’의 첫소리인 ‘ㅁ’을 취해 쓴 글자다. 이와 같은 향찰 표기를 말음첨기(末音添記)라 한다. 신라 향가 모죽지랑가에 보이는 ‘去隱春’이 ‘간봄’을 나타낸 것도 그러한 예다. ‘은(隱)’ 자는 ‘간[去]’의 끝소리가 ‘ㄴ’으로 끝난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은(隱)’ 자의 끝소리 ‘ㄴ’을 취해 쓴 글자다.
그러면 금미(今彌) 즉 ‘금’은 무슨 뜻인가? ‘금’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검’과 같은 것으로 ‘신’이란 뜻이다. 신의 뜻인 ‘ᄀᆞᆷ’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ᄀᆞᆷ’은 ‘검, 금, 곰, 고마, 즘’ 등으로 분화되었다. ‘달’은 산의 뜻이다.
그러므로 금미달(今彌達)은 ‘금산’ 즉 ‘신의 산’이란 뜻이다. 곧 환웅천왕, 단군 같은 신적인 존재가 사는 산이라는 의미다. 즉 아사달(阿斯達)은 신이 사는 산이라는 뜻이다.
아사달산은 원래 ‘작은 산’, ‘첫째가는 산’이었는데, 시대를 내려오면서 그러한 원래의 뜻은 잃어버리고, ‘구월(九月)의 산’이 되어버렸다. 우리말로 된 앛달산이란 이름 또한 잃어버리고, 엉뚱하게도 한자로 된 구월산으로 변신한 것이다.
공동경비구역이 있는 판문점(板門店)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였다. 원래 이곳에 ‘널빤지[板]로 된 문(門)을 단 점방[店]’이 있던 곳이라 하여 판문점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말 널문리를 한자로 바꾼 후에 갖다 붙인 이야기다. 우리 땅이름 연구자인 배우리는 ‘널문’이 원래 ‘널물’인데 이는 ‘너른 물’의 뜻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회담장을 만들면서 우리는 우리 고유 지명인 ‘널문리’로 하자고 하였으나, 회담에 참여한 중국 때문에 이를 한자어로 바꿔 판문점(板門店)으로 적었다 한다. 민족의 비운 때문에 우리말 지명 하나를 잃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고유어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우리말이 지닌 귀중한 참의미를 잃어버렸다. 알맹이는 빠뜨리고 엉뚱한 껍데기만 갖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독도는 동해 바다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홀로[獨] 있는 섬[島]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독도는 성종 때는 삼봉도(三峰島), 정조 때는 가지도(可支島)로 불리다가, 19세기 말 이후 돌섬, 독섬, 석도(石島), 독도(獨島)로 불려졌다. 독도의 ‘독’은 ‘돌[石]’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독’은 ‘돌’의 옛말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지금도 돌을 독이라고 쓰는 이가 많다.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돌을 ‘독’으로 쓰고 있다. ‘독’이 ‘돌’의 뜻으로 붙은 지명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독도(獨島)는 우리말 독섬(돌섬)을 한자로 음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독도는 외로이 홀로 있는 섬이 아니라, ‘돌로 된 섬’이란 뜻이다. 지금도 울릉도 사람들은 독섬으로 부르고 있는 이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자말인 독도(獨島)로 적고 있어서 본래의 바른 의미를 잃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독도가 우리 땅임은 그 이름에서도 확연히 증명된다. 실제 독도는 말 그대로 돌로 된 섬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 섬을 다께시마(竹島)라 한다. 대나무 섬이란 뜻이다. 그런데 독도에서 대나무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다. 이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허황되게 가짜이름을 붙이고, 음흉한 거짓 주장을 늘어놓고 있는지를 알고도 남는다.
달구벌은 대구의 옛 이름임은 모두가 아는 바다. 달구벌은 문헌에 달벌(達伐), 말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등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달구벌의 말뜻을 바르게 아는 사람은 좀 드물다.
말 뿌리인 ‘달(達)’을 들, 원(圓), 주(周) 등 곧 넓은 공간의 뜻으로 풀이하는 이가 많아서 대개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달구벌은 ‘달’과 ‘벌’이 말 뿌리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벌’의 뜻부터 살펴보자. ‘伐, 火’는 다 같이 ‘벌’을 표기한 것이다. ‘伐(벌)’은 음을 빌린 것이고 ‘火(화)’는 뜻을 빌려 적은 것이다. ‘불’의 옛말이 ‘블’이었기 때문이다. 이 ‘벌’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벌판의 ‘벌[原]’이다. ‘벌이 넓다’ 할 때의 그 벌이다. 신라 서울 ‘서라벌’이나 ‘서벌’의 ‘벌’도 같은 뜻이다.
그럼 ‘달’은 무슨 뜻일까? 종래의 주장처럼 원(圓), 주(周) 등 곧 넓은 공간의 뜻일까? 이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달’뒤에 이어지는 ‘구’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달’은 ‘닭[鷄]’의 뜻이다. 닭을 경상도에서는 아직도 ‘달’이라고 한다. 닭을 단독으로 발음할 때는 그 끝소리 ‘ㄱ’을 묵음화하는 것이다. 닭을 뜻하는 일본어 ‘도리(とり)도 신라 말 ‘달’이 건너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구(句)’에 대해 살펴본다. ‘구’는 닭의 끝소리 ‘ㄱ’에 관형격 조사 ‘우’가 결합된 말이다. ‘우’는 표준어의 관형격 조사 ‘-의’에 해당하는 경상도 말의 조사다. 경상도 말에서 ‘닭’이란 말이 단독으로 쓰일 때는 ‘달’이라 하지만, 뒤에 명사가 이어질 때는 관형격 조사 ‘우’를 붙여 표현하는데, 이때 묵음화되었던 ‘ㄱ’이 나타난다. 즉 ‘닭의 똥’, ‘닭의 통’, ‘닭의 대가리’를 가리킬 때는 ‘달구똥’, ‘달구통’, ‘달구 대가리’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다. ‘ㄱ’과 ‘우’가 합해져 ‘구’가 되는 것이다. 경상도 말에서 ‘남의 집’을 ‘남우집’이라 하는 것도 그와 같다. 또 대구 지방에서는 맨드라미를 ‘달구비실’이라 하는데 그 꽃 모양이 ‘닭의 볏’과 비슷한 데서 온 이름이다. 그러니 ‘달구’는 ‘닭의’란 뜻이다.
달구벌의 ‘구’도 바로 이러한 ‘구’다. 그리고 조사 ‘우’를 생략하고 그냥 말할 때는 ‘달벌’이라 하는 것이다. 줄여서 달벌(達伐), 달불(達弗)이라 기록한 것은 그것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달구벌은 ‘닭의 벌’이란 뜻이다. 대구가 위치한 벌[原]에 ‘닭[鷄]’을 붙여 이름 지은 것이다.
그러니 달구벌의 달(達)은 들, 원(圓), 주(周) 등 곧 넓은 공간의 뜻이라고 하는 주장은 달구벌의 참뜻과는 어긋난 것이다.
지금 속칭이라 불리는 우리말 고유 지명은 한자 이름으로 된 행정명에 의해 점점 그 참모습을 잃고 있다. 또 오랜 역사 속에서 아무렇게나 한자화한 까닭으로, 본래 가졌던 땅이름의 뜻이 왜곡된 것이 수없이 많다. 우리말 땅이름의 뿌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말 땅이름은 국어학의 소중한 대상을 넘어 귀중한 우리 문화자산이다. 그 동안 이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같고 조사, 수집한 학자나 기관이 있긴 하나, 그 넓이나 깊이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방방곡곡에 묻혀 잠자는 우리말 땅이름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루라도 빨리 국가가 나서서 거국적인 조사와 연구를 벌여 그것을 기록하고, 그에 곁들인 뜻을 바로잡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말로 된 이 속칭을 앞으로 되살려 썼으면 좋겠다. 읍과 면을 통합하여 시로 통합한 어느 곳에 가보니, 마을 이름이 한자어로 아무데1리, 아무데2리, 아무데3리 식으로 같은 이름을 번호 매기듯이 단순 나열한 곳이 있었다. 너무 메마른 이름이다. 아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안이한 생각으로 붙인 이름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이곳에도 각 마을마다 전해오는 속칭이 있었다. 우리말 이름으로 된 그 속칭을 살려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