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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7월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청주] 님이 나를 부르시니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호세 10,1-3.7-8.12
† 복음 마태 10,1-7
★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풍요 속에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고 우상
숭배에 빠졌다고 질타하며 그 죗값을 치를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마리아는
망할 것이며, 사람들은 고통에 울부짖을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며 당신의 권한을 주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의 복음은 매우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에게 사람들을 치유하는 권한을 주시며 파견하십니다. 복음은 사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전해 줍니다. 이 짧은 복음에 오래 머물면서 사람이 지니는
품위와 가치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권한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바랄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도록 당신의 사명을 맡긴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려 주는 것은 이러한 사명이 각 사람의 고유함에
위탁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인 ‘나’를 바라보시며 초대하시고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사도들의 이름 말고는 그들에 관한 다른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개인의 적합성이나 대단한 재능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주님께서는 각 개인의 고유함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하도록 각별히
부르시지만, 그 이유가 그 사람의 뛰어남과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대단한 일이,
사실은 주님께서 하실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스스로를
주님의 도구로 기꺼이 내어놓는 마음입니다.
언젠가 800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합창단인 독일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소년 합창단’에 대한 기록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가 30년 가까이 지휘자로 활동한
합창단으로, 그의 음악에 대한 뛰어난 공연으로 유명합니다. 이 합창단의
현 지휘자가 어느 공연의 예행연습에서 단원들에게 하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지만 위대한 작품에
참여함으로써 특별해진단다.” 단원인 소년들은 열 살에서 열여덟 살의
나이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각자의 부족함을 낱낱이 알고
계심에도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의 일을 하도록 사명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기꺼이 응답해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님이 나를 부르시니|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연중 제14주간 수요일(마태10,1-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마태 10,1-7
님이 나를 부르시니
노래로 시작합니다. ‘님의 뜻이’ -임석수-
1. 님이 저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나를 부르시니 기뻐 따르오리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저를 보내시는 뜻이 이루어지소서.
님이 저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저를 부르시니 기쁘게 따르오리다.
2. 주님 저를 보내소서. 저를 보내 주옵소서.
주님 제게 말씀하소서. 말씀 전하오리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저를 보내시는 뜻이 이루어지소서.
주님 저를 보내소서. 저를 보내 주옵소서.
주님 제게 말씀하소서. 그 말씀 전하오리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어부, 세리, 혁명당원, 훗날 배반자가 된 유다,
베드로 등등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 까요? 아마도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 소용없고 비판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어달라고 했어도 아마 거절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약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뽑힌
사람들 중에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난 사람은 뽑힐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잘난 사람은 아마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기보다 비판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내세울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뽑으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주님의
자비 덕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잘 난 것도 없고 신학교를
마칠 때도 턱걸이해서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허덕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부족하기 때문에 더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저도 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저를 불러주셨고
선택해 주셨다는 확신 속에 삽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불러주시고
선택해 주셔서 지금 여기에 계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여러분을 도구삼아 기쁜소식을 전하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지금의
처지와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우뚝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기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우리도 아직 미숙하고 부족한 신앙으로 쉽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2014년 가해 7월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마태 10,1-7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바일 게임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게임의 수준이 낮은 것에서부터 점점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게임의 첫 시작이 너무나
어려워서 5초도 되지 않아서 끝나고 만다면, 사람들은 아마 쉽게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주 쉽다가 자기 게임 능력에 따라서 조금씩
난이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지요.
이는 게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어려운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아주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처음 배울 때도 그렇지요. 수영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데, 상급반을 보내서 쉬지 말고 25미터 레인을 20바퀴씩
돌고 오라고 하면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믿겠다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그 시작부터 주님이 확실히
느껴지던가요? 교리공부부터 착실히 시작하면서 주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교리공부, 성경공부, 그밖에 각종 교육을 통해 주님을 잘 아는
신앙인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줄 수 있는 힘을
주시지요. 그런데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다른 민족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또한 당신도 가셨던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무지한 이민족들의
행실과 생활방식들로부터 아직은 미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선은 전교하기 쉬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에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뒤에야 제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이제는 어떠한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확실하게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아직 미숙하고 부족한 신앙으로 쉽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굳은 믿음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내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주님의 큰 사랑에 비해 아직도 부족하기만
한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려운 상황은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조엘 오스틴).
‘당신에게 오늘 기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에게 오늘 기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이 문구가 계속 생각납니다.
눈에 띄는 곳에 적혀 있는 글이 아닌, 냄새 나는 화장실에 붙어 있는
문구인데도 제 머릿속에서는 이 문구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합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장소에 쓰여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장소, 어느
때에 상관없이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살아 있는 글이
되기도 하고, 또 죽어 있는 글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거룩한 말씀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 말씀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화장실에 쓰여 있는 글보다도 더 가볍게 또 아무것도 아닌
말씀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이야 말로
살아 있는 말씀이며, 힘 있는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7월9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 10,1-7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에는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영성신심분과,
재정분과, 홍보분과, 문화 예술 분과, 대외협력분과, 의무분과, 의전분과,
행사분과, 봉사자분과’ 등입니다. 대략 봉사자들은 5,000명 정도 됩니다.
정부에서도 교황방한 지원단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주관 방송사는 KBS와
PBC입니다. 봉사자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교황님의 한국방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봉사자들이 계시지 않으면 교황님의 방한 준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8월 16일에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전국의 많은 본당에서 교우 분들이 오실 것입니다.
날씨도 더울 것입니다. 화장실에 가려해도 불편할 것입니다. 안전을 위해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교회는 200,000명의 신자들이 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신자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시복식’을
보기 위해서 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상징인
광화문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질 것입니다.
날씨가 더우니 ‘노약자’들은 본당에서 방송으로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본당에서도 함께 볼 수 있도록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날씨가 더울 것이니, 굳이 광화문으로 가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시복식’에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1984년 시성식과 1989년 성체대회에도 분명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함께 모여서
하느님을 찬미하면 포졸들에게 잡혀서 옥에 갇힐 수 있지만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왔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 가요? 그분들이 뿌리 신앙의 씨앗이, 그분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이렇게 찬란하게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우리의 봉사는 밭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희망을 심으면 희망이 열매 맺습니다. 봉사를 심으면 밭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변화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 예수님께로부터 그와 같은 권한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창세기는 12가지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시작. <창세기1:1~30>, 인류의 시작. <창세기1:26.2:7>,
죄의 시작. <창세기3:1~7>, 죽음의 시작. <창세기2:17. 3:19>,
구원 약속의 시작. <창세기3:15>, 가정의 시작. <창세기4:1~15>,
제사의 시작. <창세기 4:3~5>, 살인의 시작. <창세기4:8~9>,
도시문명의 시작. <창세기4:16~24>, 국가 형성의 시작. <창세기10:1~9>,
언어 분산의 시작. <창세기 11:1~9>,
선민 역사의 시작. <창세기12:1~50:26>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고, 12명의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복음에서 나온
12명의 제자와 같은 사도직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성소국장 신부 -
◈ [수도회] 보람있고 품위있는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7월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호세10,1-3.7-8.12 마태10,1-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 10,1-7
보람있고 품위있는 삶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보람있고 품위있는 삶'입니다.
예전 '보람' '우람' '아람' 세 아들을 둔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이름들이
호감이 가는 특이한 우리말이기에 수십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따뜻한 마음을 잃는다면 무엇보다는 그 자신이 인생이 외롭고
비참하게 된다.-칼 힐티'
인터넷에서 읽은 짧은 잠언에 공감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이가 내적부요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남양성모성지, 요당리 성지 순례가 참 은혜로웠습니다.
성지순례 중 사본 신문(중앙7.8일32면)에서
'내 작은 비애-박라연-'읽은 시가 좋았습니다.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오래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 오이나
호박은 새콤달콤/제몸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
백합은 제 입김과 제 눈매가/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 까지만 산다는 것
그것을 알고부터 나는/하필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이 몸을 지배할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단명한 친구는/아침이슬이라도 되는데’
보람있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갖게 하는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아름답게 잘 살다가 아름답게 잘 죽는 것만큰 큰 축복도, 은혜도
없습니다.
남양성모성지, 요당리 성지에 있는 아기 예수님이 성모님의 치맛 자락을
잡고 있는 성모자상이 볼수록 호감이 갑니다. 이 성모자 상이 있는 작은
상본 뒷면에 기도 시도 좋았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즐겨 바쳤던 '급행기도'로 불리는 '성 베르나르도'가
가르쳐 준 기도입니다.
-생각하소서/지극히 인자하신 동정 마리아님,
생각하소서!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도움을 애원하고 전구를 청하고도
버림받았다 함을 일찍이 듣지 못했나이다.
저희도 굳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어머니 앞에서 죄인으로 눈물을 흘리오니,
동정녀 중의 동정녀이신 천주의 성모님,
저희 기도를 못 들은 체 마옵시고,
인자로이 들어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 뒷면의 성모자상을 찾아뵙고는 즉시 저도 성모님의 치맛자락을
안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흡사 제 모습이 아기 예수님의 형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했고, 어느 분은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제 모습이
흡사 성 요셉과 같다 하여 많이 행복했고 유쾌했던 성지순례의
날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아들답게, 예수님의 친구요 형제답게 살아야겠다는 자각도 새로이
했습니다. 이렇게 '답게'살 때 마음 따뜻하고 정체성 또렷하며 소속감,
자존감, 존재감 높은 보람있고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가 그러합니다.
새삼 제자직과 사도직은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철저히 소속되어 주님과 일치를 이룰 때는 제자요,
파견되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살 때는 사도입니다.
이렇게 제자직과 사도직에 충실할 때 보람있고 품위있는 삶입니다.
아름답게 잘 살다가 아름답게 잘 죽을 수 있는 은총의 선물도 주님은 분명
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똑같은 주님께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안에 숨어있는 어둠의 영들을 일소하시고
우리의 병과 허약함을 치유하시어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여 소속감, 자존감, 존재감 뚜렷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1독서 말미의 말씀은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 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주님을 찾아 묵혀둔 마음을 땅을 갈아엎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마음 밭에 정의를 비처럼 내리십니다. 하여 오늘 하루도 신의를
거두어 들이는 보람있고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 얼굴을 찾아라.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시편105,4ㄴ.시편34,6참조).
아멘.
- 이 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족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족이란 많은 것을 품어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족입니다.'
2014년 가해 7월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태오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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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제자들의 그 구성이 한마디로 십인십색(十人十色)입니다. 친 형제 관계를
가진 이들도 있고, 어부도 있고, 친구의 소개로 예수님을 알게 된 이도
있습니다. 순수하고 우직한 이도 있고, 계산이 빠른 이도 있고, 거짓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예수님께 직접 들은 이도 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습니다. 말이 앞서는
사람도 있고, 입이 무거운 이도 있고 의심이 많은 이도 있습니다. 같은
민족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고 그 수수료로 부를 축적하던
세금징수원도 있고,
무장 투쟁을 마다 하지 않았던 독립군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심점이라면 단지 예수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이 다양한 이들을 당신 제자들로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서로 다름은 적지 않은 갈등도 있었음을 성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를 제외한 모두는 사도들의 대열에 들어섰고
그 이름값을 다 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차이를 가진 이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이르며 서로를 형제 자매라 표현합니다.
사제들간의 성격도 수도자들간의 성격도 신자들간의 성격도 그리 다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당연히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심점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언젠가 소개해드린바 있지만, 내 본당은 적을 때는 28개국의 사람들이 많을
때는 삼십여 개국의 신자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화와 언어,
심지어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제력에 의해서도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신앙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어우러져 형제이자
가족처럼 지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고, 그 활동으로 인해 교회공동체의
모습은 유지되고 발전되어 갑니다.
다르다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죄일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르다는 것은 서로에게 불편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다르다는 것은 풍요로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유다처럼 반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의지하고 함께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 역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의 가족으로 살아갑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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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빙자
2014년 가해 7월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 10,1-7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빙자
오류에 길들여진 사람은 겁주거나 위장하기 위해 큰 소리 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오류가 공개되고 밝혀지면 완전 쪼그라든 자세가 나옵니다.
당당한 사람은 언제나 진리를 따라 살기에 거리낌 없고 기품이 당당하지요.
그렇게 진리 편에 선 사람은 정면도전을 겁내지 않고 죽음도 불사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스라엘 국민들의 지도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겁니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빙자하며 백성을 괴롭혔거든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오 10,6~7)”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내 코가 석자인데[단상]
2014년 가해 7월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 호세아 예언서 10,1-3.7-8.12
복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 10,1-7
연중 제14주간 수요일(2014년 7월 9일) 내 코가 석 자인데
예수님은 열두 사람을 가까이 불러 당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열둘’이란
숫자는 옛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열두 사도를 기초로 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의 손발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셨습니다. 열두 사도가
바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도 주님의 손발인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교회 자체가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과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손발로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손발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발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손발이 되어달라고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그런데 혹시 주님의
손발을 우리 자신의 위안과 안락만을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가라”고 우리한테 명하시지만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을 돌아볼
여유도 없다”라는 이유로 우리 자신의 안위와 발전만을 위해 진력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영적 만족감이나 물질적 축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따기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 자신과 가족과 친구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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