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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비가 안 오더니 이제는 주중 한두 번 꼭 들러 가네요. 그래서인지 기온도 오르락내리락 갈피를 못 잡습니다. 요즘 이런 때 가장 염려되는 것이 바로 감기입니다. 예전에는 흔한 병이려니 생각했지만 이제는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이 나이에는 더더욱 걸려서는 안 됩니다. 아프고 자시고 하는 것보다 괜스레 오해받을까 그게 두렵습니다. 안 나가는 거죠. 몇 달 훈련이 잘 되어 있으니 ‘집콕’은 거저먹기입니다. 그러잖아도 시간은 잘 갑니다. 황혼에 들면 속도가 빨라진다잖아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내비둬도 제멋대로 잘 갑니다. 자율신경계만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코로나19, 참 질기다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여러 가지로 먼저 실습을 하는 듯합니다. 과연 질병관리 선도국이 되려는가 봅니다. 이제는 이태원과 홍대로 넘어가서 젊은이들 중심으로 확산되는 듯한데 마치 숨바꼭질 하는 듯 숨어 다닙니다. 여러 가지로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의료진이 계속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잘 이겨내고 어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빕니다. 모두의 바람이지요. 3개월의 수고가 공수표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콕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아니 얼마나 살겠다고 집에서만 죽쳐야 합니까?
그나마 가까운 영화관이라도 다녀올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그런데 정말 너무 한산합니다. 미안할 정도로. 때로 혼자 관람하고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 큰 공간에서. 세상에!! 암튼 모두 건강하게 맘대로 돌아다닐 때를 그립니다. 건강하세요. ^&^
2020년 5월 16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05-10주일설교(하나님의 목표)
<저 산 너머>
사람은 말이지, 3 가지 자기를 가지고 있단다.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있고, 남들이 알아주는 자기가 있고,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자기가 있지, 천주(天主,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는 아마도 자기가 모르는 자기일 게야. 글쎄 말입니다. 아직 초등학교 3, 4학년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이가 이 말을 알아들을까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이가 들으라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독자나 관객을 향해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수환’이는 알아들은 듯 묵묵히 고해성사실을 나옵니다. 아마도 오래 생각하겠지요. 그러잖아도 가장 궁금해 하던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형은 확실하게 ‘예’라고 대답했지만 자기는 여전히 인삼 장사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엄마의 바람을 아이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너희들도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형 ‘동한’이는 얼마간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합니다. ‘어무이 뜻에 따르겠심더.’ 엄마의 입에 실 같은 미소가 번집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수한이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수한이는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 그러면 뭐 하고 싶은데?’ 어무이, 전 인삼 장수가 될랍니다. 인삼 장수?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앓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의원이 그랬지요. 인삼을 한 달 정도 잘 다려 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그러나 가난한 형편에 그것은 그림의 떡만도 못한 이야기입니다.
엄마가 어느 날 장사를 하고 돌아오며 성당에 들렀습니다. 마침 사제서품식이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 자리에 서면 얼마나 좋을까. 대대로 신앙 좋은 가문입니다. 그 신앙 때문에 나라로부터 배척을 받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가 임신 중이었기에 살아남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쩌면 그런 악조건 하에서 세상에 태어나 병을 달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신앙 하나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대신 엄마가 가족의 생활을 맡게 되었지요.
‘뿌리 깊은 나무’로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삶이 힘드니 더욱 천주를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수환이는 그런 신앙의 환경 속에서 자랍니다. 아이대로의 습성이 나타나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신앙과 연결이 되곤 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천주를 어떻게 믿는 거지? 누구나 가져보는 질문입니다. 사실 보이면 믿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보고 확인하였으니 그냥 그 사실을 인정하면 그 뿐입니다. 구태여 믿음이 필요 없는 일이지요. 보이지 않으니 믿음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기 믿음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설명합니까? 괜히 허튼 소리라고 타박이나 받기 십상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도 어쩌면 특별한 일입니다. 가지고 싶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내가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래서 믿음 자체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엡 2 : 8)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데 어쩌란 말이냐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걸 어쩌겠습니까? 두들겨 패서 믿게 하겠습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믿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선택은 오로지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것도 자신의 분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환이는 그 복을 가진 셈이지요.
어느 날 동네에 상여가 나가는 것을 봅니다. 수환이는 병든 아빠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상여 나가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지요. 그 때 아빠가 말해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저 세상으로 가는 거다.’ 신앙인으로써 생각해봅니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 가고 하나님을 그것을 바꾸어 살리려고 오신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우리는 죽으려 하고 하나님은 살리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얼마나 상반된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게 사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사실 죽지 않고 살려고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꾸 죽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속상하시겠습니다.
잘 아는 대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말대로 수환이 마음 밭에 천주께서는 아주 특별한 씨앗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부모님 특히 엄마의 신앙과 삶이 보여준 영향이 컸구나 싶습니다. 그 마음 밭의 씨앗이 싹이 트게 하려 늘 저 산 너머를 동경합니다. 영화 ‘저 산 너머’를 보았습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우리 농촌 풍경은 보너스입니다.
<집 이야기>
집, 떠나갈 준비를 하는 곳인가요, 머물기 위하여 있는 곳인가요? 세상은 대부분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집 역시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통상 매일 아침 떠났다가 저녁에 머물기 위해 돌아오는 곳이 집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머무는 곳이면서 또한 떠날 곳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대부분은 오래 머물 곳으로 찾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 또는 2년, 아니면 더 오래, 그리고 평생을 머물 곳을 찾습니다. 하기는 요즘 평생 살 집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옛날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종종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집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없으면 얼마 안 되어 폐가로 변합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가 산다면 집이라 하지 않습니다. 집이라 해도 그 앞에 그 존재의 이름이 따라붙어야 합니다. 개 집, 고양이 집, 두꺼비 집 등등. 그렇지 않으면 그 나름대로의 다른 이름이 있게 마련입니다. 외양간, 마구간, 제비 둥지, 다람쥐 굴 등등.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면 사람을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좀 안 된 표현이지만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안식처가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대처할 곳을 나름 찾아서 머물기는 합니다. 그러나 안정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그 집이 사람을 차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집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따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수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말이지만 값으로 따지기도 합니다. 이 못된 짓이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생긴 적이 있습니다. 자기 집도 아니면서(부모의 집이지요) 자기들끼리 편을 나눕니다. 누가 가르쳤을까요? 아무튼 집이 계급을 나누는 수단이 되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야 우리나라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쪽방촌, 고시촌, 달동네 등등,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집단을 나타내려 합니다. 물론 일부러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구분해두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살아있는 존재는 먹어야 하듯 쉬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쉴만한 처소가 필요합니다. 눈비나 바람도 막아주어야 하고 다른 여러 가지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처소이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요. 일하고 쉬고 하는 일상을 지켜나가려면 집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한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다 압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 집 마련을 인생의 꿈으로 가지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근래 이 꿈이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기에 젊은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N포 세대’라는 특징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연애, 결혼 포기하듯 집도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맘에 드는 집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분간 아빠가 거하는 집에 머물기로 합니다. 시내에서는 좀 떨어져 있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출퇴근하는 긴 시간을 견뎌야 하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들어갑니다. 오래되고 낡은 집입니다. 그야말로 사람 때와 시간이 묻어진 집이지요. 한 때는 한 가족이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빠 홀로 남아 어둠침침한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다 자란 딸이 찾아옵니다. 그러잖아도 말이 별로 없었을 아빠, 가족 모두가 떠나고 나서는 밖에서는 몰라도 집에서는 거의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말을 나눌 대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상대가 생겼습니다. 가족이라도 붙어버린 입을 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시간차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지요.
딸과 아빠는 가깝지만 시간차는 좁히기 어렵습니다. 밝은 공간에서 살던 딸과 어둠침침한 낡은 집에서 사는 아빠의 구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공간에서 시작하여 세상과 연결하는 핸드폰도 다릅니다. 시간의 흐름으로 만들어진 의식과 생각은 더욱 다릅니다. 그래도 그 집을 들어가려면 열쇠가 필요합니다. 이제는 디지털 도어 록이 사용되고 있지만 옛날 집을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여느 집보다 열기 힘든 문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 문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어도 시간차가 만들어놓은 벽을 넘어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문이 하나 있으니 다행이랄까요? 옛날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풍광이 있습니다. 잔잔한 음악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에 다소 맞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이야기는 참으로 천천히 흘러갑니다. 물론 그에 상관없이 시간은 흐릅니다. 삶은 지나왔지만 사람들 마음에 새겨진 시간은 어디엔가 새겨져 있게 마련입니다. 돌멩이처럼 굳은 마음일지라도 함께 하는 시간들은 그 속을 천천히 벗겨냅니다. 그렇게 남은 사람의 마음에도 다시 그림처럼 남게 됩니다. 영화 ‘집 이야기’(I Am Home)를 보았습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4 : 19 2020년 05월 10일
설교 : 하나님의 목표 김종우 목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죄로 물들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많은 죄악 중에서 불평등, 특히 남녀 간의 불평등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조차 아직도 불평등의 잔재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나아진 것 같아도 우리들의 생각과 의식 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기에 이런 부분들이 고쳐지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야 할 듯합니다. 어쩌면 반만년의 긴 역사 속에서 뿌리를 박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세대를 바꾸어가며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많이 깨어났다고 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이슬람 사회 속에서는 여성이 얼마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는지 화면이나 지상을 통하여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는 여성의 할례 문제와 이슬람 국가 사회에서 벌어지는 ‘명예 살인’ 등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오래 전에 ‘사막의 꽃’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세계적인 슈퍼 모델이 된 여성이지만 책은 바로 그 여성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갓 소녀의 티를 벗어날 무렵 강제로 할례를 당합니다. 여자도 할례를 하나? 싶었는데 그들 세계의 성인식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여성으로서 누릴 기쁨을 처음부터 차단시키는 작업입니다. 더구나 아무런 의료적인 장치도 없이 행하는 야만적인 행위입니다.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는 소녀들도 많답니다. 수십 년 전의 일이니까 혹 지금도 그런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간신히 살아남는다 해도 그 고통을 평생 짊어지고 사는 것이지요. 섹스로 말미암는 쾌락은 남성만이 누리는 특권인 셈입니다. 다음으로 ‘명예 살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터넷을 통하여 얻은 것을 그대로 인용해봅니다.
인권 감시 민간단체인 ‘휴먼 라이츠 왓치’(Human Rights Watch)는 ‘명예 살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명예 살인이란 남성 가족 구성원이 여성을 상대로 행하는 폭력으로서, 종종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주로 여성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간주될 때 명예살인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여성이 부모가 결정한 중매혼을 거부하거나,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거나, 이혼을 요구하거나, 간통을 할 때, 명예 살인의 표적이 된다. 여성이 가족에게 불명예를 안겼다는 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일이 자행되는 것이다.”
명예 살인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에서는 대부분 여성에 대한 살해는 가족 내부의 문제로 간주된다. 이와 관련하여 레바논 출신의 여성 인류학자 S. 하마디는 “여성은 기본적으로 가족의 남성 구성원에게 종속되며, 여성의 과오는 집안의 아버지, 남자 형제, 남편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생각은 아랍인 사이에 대단히 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외부인 혹은 법원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살해자를 처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가족 내부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데다가 정부의 무관심이 겹쳐지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알기 힘들다. 그러나 최근 유엔인구활동기금(UNPFA)은 매년 전 세계에서 무려 5,000명에 달하는 여성이 명예 살인에 의해 희생되고 있다고 밝혀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이제 알겠지요?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성폭력의 희생자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잖아도 고통스러운 희생자인데 거기에 더하여 죽어야 한다니,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 얼마나 혹독한 불평등입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그런 사회만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 모두가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아주 오래 전에 우리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창 6 : 5 - 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죄악을 없이하고자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셨지요.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압니까? 오로지 구원 받았으니 할렐루야 하며 천국에나 가면 끝나는 일입니까?
지금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구원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겠지요. 이미 받았으니까. 하나님도 그러자고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구원해주신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아야 하겠지요.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갈 4 :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말씀을 상고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을 점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은 아니지요. 분명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때문에 성경마다 저자가 다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고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하였습니다. 지금 읽은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쓴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입니다. 즉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대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속에서 ‘나’라고 하면 우선은 그 저자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고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나 순차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그러면 사도 바울의 자녀들입니까? 물론 디모데처럼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자녀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 예수님의 자녀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말씀합니다.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답니다. 그러면 이미 한번 해산하는 수고를 했다는 의미지요. 즉 이미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태어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미 그리스도인인데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좋은 예가 됩니다. 요 3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지금 이방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요 그 가운데서도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입니다. 그에게 거듭나라고 하시니 니고데모가 깜짝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3 :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는 전에 이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신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라 하는 의미입니다. 아니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까? 율법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율법은 사람의 계명과 장로의 유전이라는 것이지요. 낡은 부대이며 묵은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새 부대로 바꾸어야 하고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거듭나라고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미 태어난 사람이지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 목표가 새로워졌으니까요. 세상에서의 목표는 구원이지만 구원 받은 후의 목표는 달라져야 마땅한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을 향하신 목표입니다. 그것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입니다. 즉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바로 그것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지요. 누가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어야지요.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시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어 이 세상을 하나님 원하시고 바라시는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왜 안 됩니까? 왜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범죄하고 타락합니까? 요즘의 세상에서 기독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부끄럽고 하나님께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죽하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하합니까?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신답니다. 다시 창조의 역사를 펼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저 옛날 천지창조 하신 후 안식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요 5 :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십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시 51 :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시기를 기도합니까? 정한 마음을 창조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겔 11 : 19 - 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36 : 26 - 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같은 말씀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도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더 잘 아시겠지요. 옛날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그래서 실패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구약 이사야를 인용하며 말씀하셨지요. 마 15 : 7 - 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그것으로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가 주여, 주여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믿고 있기에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입술의 고백일 뿐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찍이 약속하셨습니다. 렘 24 :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가 원하고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영생도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새 영을 두고 새 마음을 주심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은 새롭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툼도 없을 것이고 속이는 일도 없으며 불평등도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그러면 다시 새롭게 하실 때 무엇으로 하실까요? 역시 말씀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십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잘못 듣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듣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딤후 4 : 3 - 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답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 입에 맞는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런 말만 해주는 스승을 쫓아다닙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에 빠집니다. 모두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자기 좋아하는 말만 들으려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그러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누구처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자기들만이 확실한 하나님 백성이랍니다.
하나님의 목표, 우리가 찾아서 이루어야 할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 알거니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말씀으로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로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말들이 차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차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가져야 합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무엇입니까? 묵은 포도주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계명과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있는 목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진리가 아니라 비진리요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엉뚱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아니면 겁을 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좀 속된 표현을 한다면 우리 믿음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질타하신 것 중 하나가 때에 관한 것입니다.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시대를 분변하라는 것입니다. 왜 시대를 분변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 시대에 맞는 신앙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시대를 따라 주시는 언약 곧 말씀이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듣고 따라가야 할 말씀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믿음 곧 그 언약은 잘 아는 대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말씀하신 것은 방주를 만들어 방주에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아에게는 선악과에 대한 말씀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말씀입니다. 모세에게는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방주 만들라는 명령이 유효기간 지난 말씀이지요. 그러면 예수님 때는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덧붙여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눅 16 :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아예 들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듣기는 고사하고 어떻게든 훼방하고 비난하고 핍박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일 생각까지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네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효기간이 지난 말씀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기적은 누구도 합니까? 예, 마귀도 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언약을 하고 그 언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단은 아예 약속이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할 줄을 모릅니다. 약속할 일이나 있습니까? 하나님은 마귀가 아담으로부터 속여 빼앗은 하나님 나라를 도로 찾으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이 땅 위에 당신의 사자를 택하시고 교회를 세워서 생육 번성 충만하게 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시려 합니다. 문제는 이 택함 받은 사자가 여태 제 구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 이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지막 때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자들이 오히려 발로 차버립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런 천인공노할 백성들을 버리고 하나님 백성을 다시 창조하십니다. 요 1 : 11 - 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유대인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하나님 백성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게 2천 년의 세월이 흘러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가지고 신앙해 왔습니다. 눅 22 :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1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 말씀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마 26 :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새것은 새 포도주입니다. 잘 아는 대로 포도주는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면 아버지 나라가 임할 때 즉 주 재림 때 새로운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제 정리합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 요구하시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 우리 또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기도하면서 모두가 그 나라로 가기를 기다립니다. 말이 됩니까? 계 21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나님은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자꾸 가야한다고 우깁니까?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알고 신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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