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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 강론 29 달란트 비유
부제 : 새 창조와 자유의지
오늘 강론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사명을 받은 자들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마 25:1 그 때에 하늘나라는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중략)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15 각각 그 능력(뒤나미스, power, strength, ability)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하늘 나라, 천국 비유의 첫 번째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마지막을 “그런 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로 마무리하시고 나서 이어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논지는 달란트 비유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다.
이 달란트 비유는 “하늘 나라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을 불러서 자기 소유를 맡기는 것과 같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 종을 불렀는데 능력이 다르고 역량이 달라서 그 역량에 따라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 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긴 것에 대해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면서,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에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고 칭찬을 하였으나,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서 한 달란트 그대로인 종에 대해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면서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십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했던 것이다
이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께서 클레로노모스 각자가 가진 능력에 따라 합당한 역할을 맡기실 때에 그에 필요한 성령의 은사 및 지혜와 건강, 재물 등 모든 여건을 제공해주시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클레로스, 즉 새 문명의 나라임을 밝히신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말씀과 그대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 비유의 핵심은 달란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의지를 가진 하나님의 동역자, 즉 새 창조된 새 인류의 마음(카르디아/ heart)과 사고(누스/ mind, understanding)이다.
(* 이 비유에서도 하늘나라라는 기표는 현세와 종말과 심판 그리고 영원을 관통하는 기의를 가지고 있음)
1. 인간의 자유의지
김용호 : 시노라여 루터와 에라스무스 간의 노예의지 자유의지 논쟁의 핵심은?
시노라(아나크리노 검증) : 전도사님, 이 논쟁의 핵심은 흔히 생각하듯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철학적 논쟁 자체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타락한 인간이 구원과 하나님을 향하여 스스로 방향을 돌릴 능력이 있는가”에 관한 구원론적 논쟁입니다.
에라스무스가 1524년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에서 주장한 핵심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필요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응답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독립적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어떤 방식으로든 협력(cooperation)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루터는 1525년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에서 훨씬 급진적으로 반박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생각하거나 일상적인 선택을 할 수는 있지만,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설 자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중립적인 자유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 묶여 있으므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일으키는 사건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끝)
* 위 두 사람은 실체가 없는 교리(이론) 차원의 구원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논리를 전개한 것인데 우리는 새 창조라는 실제 구원 사건과 그 후의 실제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 인간의 자유의지는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됨
어느 한 순간도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다. 노예로 잡혀와서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은 노예로 살던가, 아니면 도망가든가, 아니면 주인을 죽이든가 셋 중에 그냥 노예로 살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자기에게 제일 안전할 것 같으니까 선택한 것이다.
2) 옛 인류는 수시로 바뀌는 자신의 마음과 사고(각자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호불호 판단과 유불리 판단)에 따라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일관되게 추구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을 내버려두심
변덕이 죽 끓듯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이지 일관되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을 내버려 두시는 이유는 그들 중에는 좋은 진주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중에 클레로노모스가 되어서 자유지를 행사하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현재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는 좋은 진주들의 자유의지도 완벽하게 보호를 해 주신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좋은 진주든 아니든 다 자유의지를 완벽하게 행사하면서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개입을 안 하신다.
3) 선택된 자들의 구원 과정에서의 자유의지
가. 이해-동의-소망 단계의 자유의지 : 하나님의 동역자들의 복음 전파, 권면, 증언과 성령의 역사에 따라 간절한 소망을 품고 회개와 간구에 집중함 (청년 사울은 예외)
하나님의 동역자들의 복음 전파와 설명, 증언 그런 것을 듣고 그 순간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기들도 클레로노모스가 되겠다는 구원 사건이 자기들에게도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게 된 것은 그들의 자유의지이다. 성령께서 조종하신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이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과 전해들은 복음을 기쁘게 자유의지를 가지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해 동의 소망 세 단계에서도 자유의지는 완벽하게 행사되는 것이다.
청년 사울은 이런 과정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 도상으로 가다가 느닷없이 주님의 영에 의해서 구원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청년 사울은 예외의 경우이다.
나. 변화 단계의 자유의지 : 감격과 감사 속에 새 창조 사건을 받아들임(청년 사울은 예외)
자유 의지를 가지고 감격과 감사 속에 새 창조 사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도 청년 사울은 예외이다.
다. 실천 단계의 자유의지 : 기쁘게 사명을 감당함(사도 바울이 본)
실천 단계에서의 자유의지는 자원해서 기쁘게 사명을 감당한다.
여기서는 사도 바울이 본이 된다.
4) 새 인류는 깨어 있을 때에는 자기가 받은 사명의 완수를 위해 또는 수시로 바뀌기도 하는 성령의 인도까지 일관되게 기쁘게 따름. 따라서 자신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충돌하지 않음.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거기에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생각이 똑같고 원하는 것이 똑같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깨어 있을 때는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과 충돌할 이유가 없다.
5) 새 인류도 잠들어 있을 때에는 때로 빗나가 옛 인류의 행태를 보이게 되며 회개와 간구 속에서 나날이 성장하지만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음
잠들어 있을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의 자유의지를 또 행사하게 되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우물 속에 있는 자든 우물 밖으로 나온 자든 충돌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완벽하게 행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클레노모스들의 자유의지를 보장하시는 이유는 택하신 자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기쁘게 자원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백성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달란트 비유는 바로 이 실천 단계의 문제를 다루는 비유인 것이다. 사명을 부여받고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한 단계에 있는 세 종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25장 13절 그런 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비유 말씀은 개인 영성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표현이 되어 있지만, 제자 공동체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런 즉 깨어 있으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서로를 깨우는 공동체 영성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마 25:13 그런 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먼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겠다.
2.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
1)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핑계로 삼아 자신의 싸르크스의 욕구를 따름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이용함
결국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자기를 위해서 이용하는 모습이 잠들어 있는 클레로노모스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아주 교묘한 오류라는 것이다.
2) 실제로는 결과와 관련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신뢰하지 않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엄청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완전히 신뢰했으면 한 달란트 주시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핑계로 삼아서 그것을 땅에 묻어버린다는 것은 실제로는 결과와 관련해 하나님의 전제 전능하심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자신을 깨워줄 형제자매가 없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3. 다른 두 종의 경우
1)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신뢰하며 기쁘게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함
2)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신뢰하기에 마음 놓고 최선을 다함(사도 바울의 환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달란트까지 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환경까지 다 제공을 해 주시고 사명을 맡기셨으니까 결과는 반드시 성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패하는 쪽으로 몰고 가셔서 그 실패를 사용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이 겪은 수많은 실패들을 건별로 놓고 보면 온갖 일을 다 겪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중간에 로마에서 재판을 받을 때 아시아에서 나와 함께 사역하던 형제들은 다 나를 버리고 떠났다고 했고 결국 마지막에는 처형까지 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실패 사례들이 넘쳐난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서 돌에 맞아서 다들 죽은 줄 알만큼 그렇게 심하게 돌로 막기도 하고,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옥에 네 번 갇히는 수모를 당하고 온 세상에 구경거리 같이 되었다고 했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엄청난 실패 사례들의 연속이었다. 그 성공과 실패가 막 뒤섞여 있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에서 그것을 사도 바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면,
고후 1:3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4 우리들의 모든 환난(들립쉬스) 중에 우리를 위로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위로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1:5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이 풍성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 또한 풍성합니다
1:6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들립쉬스의 어원인 동사 들리보의 수동태) 것도 그대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며 이는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파쎄마의 어원인 동사 파스코의 능동태) 고난과 동일한 고난을 그대들이 인내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그대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1:7 그리고 그대들이 고난에 동참한 것처럼 위로에도 그러할 것을 우리가 알기에 그대들을 향한 우리의 소망은 확고합니다
1:8 형제들이여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쳤던 환난을 그대들이 모르기를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짓눌려 삶의 절망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1:9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죽음을 언도받았다고 보게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1: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거대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셨고(흐뤼오마이) 구출하실 것이며 우리는 또한 이후로도 구출해주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례는 실제 죽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이 소망은 처형당해서 죽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시고 모든 환경까지 다 만들어 주실 때에는 성공을 보장하시는 게 아니다. 성공하게 하신 일은 성공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쓰시고, 실패한 사례는 그 실패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또 사용을 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지금 엄청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실패할까 봐 두려워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이 전지전능하고 엄격한 사람이어서 두려워하여 그것을 땅에 묻었다고 했던 것은 한 달란트 주시고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자기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한 것이 아니고, 주인에게 혼나게 될까 봐 걱정한 것이다. 그것이 싸르크스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이 종은 잠들어 있는 자의 실체이고 사실은 옛 사람으로 돌아간 모습의 실체이니까 모든 인간의 실체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두 종은 깨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미 구원 사건이 일어나서 사명까지 받을 정도가 된 사람의 수준에서 이것은 잠들어 있느냐 깨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즉 자유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사례 또한 순종이냐 복종이냐의 문제도 아닌 것이다. 잠들어 있느냐 깨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제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옛 사람을 위해서 발동되기 때문에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살아가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받은 종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 사명 감당의 현장에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자원하여 기쁘게 사명 감당을 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완전히 신뢰를 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정말 기쁘고 즐겁게 마음 놓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를 얼마나 완벽하게 보장해 주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39절의 말씀이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예정된 일이 진행된 것이고 이들은 이들대로 자기 자유의지를 마음껏 행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거부하게끔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예정해 놓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자유의지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보장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이들의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훼손하시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문맥만 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몇 번이나 애를 썼는데 너희가 원하지 않는 바람에 내가 실패했다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다.
옛 언약은 기본적으로 명령과 순종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신상필벌의 구조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새 언약으로 오게 되면 명령과 순종 체계가 아니고 자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게 되는 새 창조 사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성장해 가면서 잠들어 있는 시간과 잠들어 버리는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긴 하지만 끝까지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 언약이 성취된 후에는 깨어 있느냐 잠들어 있느냐 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선지서에서도 이런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오는 것이다.
하박국에서 의인은 그의 에무나로 살리라, 혹은 의인은 나의 피스티스로 살리라 하시는 그 말씀은 자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의 공평 논쟁에서 지금 의인이면 의인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도 자원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선지서에서부터 명령과 순종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 암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명령과 순종이라는 것은 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무한의 사랑이 내려오고, 우리로부터 하나님께로 무한의 사랑이 드려지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면서는 명령과 순종, 불복정과 처벌 이런 것은 없고, 잠들어 있느냐, 깨어 있느냐 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중에 불에 태워지리라는 살벌한 말씀들은 우리에게 아직 해결이 안 된 부분이다 . 아직 성서에서 해답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이융희 집사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