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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3일 수요일 [(녹)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리마의 성녀 로사 동정 스켐의 지주들이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요탐은, 나무들이 가시나무를 자기들의 임금으로 세운 우화를 들려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며,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들려주신다(복음). <주님께서 여러분의 임금이신데도, “임금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소(1사무 12,12).> ▥ 판관기의 말씀입니다. 9,6-15 그 무렵 6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7 사람들이 이 소식을 요탐에게 전하자, 그는 그리짐 산 꼭대기에 가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8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9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0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2 그래서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5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나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셈법으로 시기 질투하는 일꾼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영광의 차이가 있어도,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에 나보다 더 큰 다른 사람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너그러운 하느님을 표상합니다.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후하게 하루 품삯을 주신 하느님은 옹졸한 분이 아니심을 알려 줍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일할 것이 없는 일꾼에게 일자리를 배려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의 은총을 받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남이 자신보다 더 인정받고 영광을 받을 때에 상처받고 시기심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인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잘것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 눈에는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신앙을 부모에게 물려받아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나이 들어 뒤늦게 하느님을 섬긴 사람이나 모두 은총의 자녀입니다.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느려 터져도 상관없습니다!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분들, 언제나 꽃길만 걸어온 분들, 한걸음에 두 세 계단을 거침없이 뛰어오르시던 분들이었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이제는 기력이 쇠하여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생무상(人生無常)도 느끼지만 동시에 인생의 신비도 체험합니다. 은혜로운 주님의 초대로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를 되돌아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기억해보십시오. 우리는 당시 눈도 채 못 뜬 갓 난 아기였습니다. 먹는 것, 씻는 것, 움직이는 것, 그 어떤 것이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보살핌이 없다면 단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누릴 것 안 누릴 것 다 누렸었지요. 그런데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또 다시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못 가누는 갓난아기로 되돌아갈 순간입니다. 인생이 참 불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공평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근본, 근원을 망각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철부지요 애물단지, 골칫거리요 천덕꾸러기였던 우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덕이 겸손의 덕,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그리고 ‘한결같은’ 겸손의 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늙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읽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트리는 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 12장 2~8절) 점점 눈에 띄게 쇠락하시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뵐 때 마다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저를 데리고 이리저리 다니시면서 아름다운 세상 구경을 마음껏 시켜주셨는데...그때가 참 좋았는데...이제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어디가나 부축해드리고 보살펴드려야 하는 현실이 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신발 신기도 힘든 어머님의 신발을 신겨드릴 때 마다 요한복음사가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주고서, 네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복음 22장 18절) 새삼 노약자들과 장애우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가 고마워집니다. 부모님 모시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를 때 마다 장애우들을 위한 주차 공간, 장애우들을 위한 화장실이 얼마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몇 센티미터 안 되는 작은 턱 하나가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장애우들이나 노약자들에게는 큰 산 하나 넘는 것 못지않게 큰 도전입니다. 우리에게는 단 1분이면 충분한 계단 몇 개가 그들에게는 젖 먹던 힘을 다 써야 도달할 수 있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위한 작은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약간은 이해하기 힘든 비유 말씀을 전개하고 계십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포도밭에 일하러 온 일꾼들이 여러 명인데, 일이 끝나고 품삯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주인은 새벽 6시에 온 일꾼이나, 오전 9시에 온 일꾼이나, 오후 3시, 그리고 5시에 온 일꾼에게 조차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했다는 스토리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는 이 복음이 정말 이해가 안 갔습니다. ‘이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예수님의 처사가 점점 고마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살고 있습니다. 물 찬 제비처럼 동작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굼벵이나 나무늘보처럼 느려터진 사람도 있습니다. 머리회전이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설명해도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오정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일개미나 꿀벌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채 하나 손에 들고 느릿느릿 한량처럼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완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한계와 부족함을 지니고 자신의 결핍 때문에 스스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그렇게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점점 불러오는 아랫배와 비례해서 동작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려터진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5시까지 느긋이 기다려주시는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 지각해도 상관없습니다. 게을러도 상관없습니다. 깜박하고 10시까지 잠을 자도 괜찮습니다. 늦어도 괜찮다, 늦었지만 왔으니 됐다며, 느려터진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당을 지급하시는 주님이 계셔 천만 다행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 데요.”
목자는 자기 양들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출처] 양을 아는 목자 / 예화 |작성자 천리향
양들이 목자를 알아보는 이유는, 아기가 사람을 잘 알아보는 이유와 같습니다.
전에 보조교사로 아이들 풀장 물놀이 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아기가 허리밖에 안 차는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난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일어서면 되는 데 말입니다. 그때 유치원 교사가 물로 뛰어들더니 아이를 집어 올렸습니다. 아기는 물을 먹어서인지 마구 울어댔습니다. 아기들은 자기들 허리밖에 차지 않는 물에서도 익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마 진짜 교사와 보조 교사와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위주로 생각했고, 교사는 아기들 위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를 따라오지 않습니다. 가장 완전한 관상가들은 아기들이라고 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가장 약할 때 누구를 믿어야하는지 가장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에제키엘 예언자가 활동할 때 이스라엘의 목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자기 배를 불리고 양들을 본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목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자신의 배부름을 먼저 생각하면 타인의 배고픔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 할 때부터 스위스 치즈 마니아가 되어 지금도 막대한 양을 수입하여 먹는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들은 굶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덕분에 그렇게 살이 찌는 것이란 소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정은만 배부른 게 아닙니다. 사제인 저도 몸무게가 많이 나갑니다. 굶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저를 목자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먹여야하는데 자신 먼저 먹는 목자들! 우리가 북한 주민을 보는데도 그렇게 가슴이 아픈데 하느님이라면 제 때에 음식을 받지 못하는 양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북한 사람들은 누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면서도 그 지도자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 더 가슴 아픕니다. 어쩌면 어떤 신자들이 사제들을 바라볼 때도 마음이 탐탁지 않지만 그런 모습으로 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런 목자에게 목숨을 걸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서 양떼들이 더 이상 먹이가 되지 않도록 구해내어 그들을 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저희 논문 지도 교수님은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데려와 함께 사셨습니다. 옷은 주워 입으셨고 매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때는 ‘한국 들어가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며 결심했었지만 정작 너무 풍족하게 살고 있어서 항상 죄책감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목자의 모습은 자기 배만 불리는 김정은의 모습이 아니고, 그렇게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양을 배불려서 자신은 말라 있는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목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그런 모습으로 갈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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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기도와 신비의 삶, 페루의 聖女 로사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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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 4월 20일 페루 리마의 에스파냐 가문에서 태어나
이사벨 데 플로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녀는
14살 때에 로사(Rosa)라는 이름으로 견진을 받았다.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양친의 결혼 계획을 끝내 반대하고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모델 성녀로 모시던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를 본받기 위하여
엄격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사는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었는데,
그녀가 부모를 도와야 할 입장이므로
정원의 통나무 집 속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여러 가지 신비적인 특은을 비롯하여 환시를 보았는데,
초자연적인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사제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그녀를 심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로사 주변의 모든 일들이 초자연적인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로사의 성덕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자기의 집 정원은 영성 센터로 변하였다.
건강이 나빴던 관계로
로사는 돈 곤잘로 데 마사와 그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3년 동안 리마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지내다가 운명하였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하여
1671년 4월 12일 신세계의 첫 번째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페루와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필리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자료집에서 발췌
어릴 때부터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님을 존경하여 자기 집 통나무 속에서 거처하며 엄격하게 살았던 동정녀
환시 등 신비체험 속에 은수생활을 계속하다가 31세에 주님 품에 안긴 신대륙의 첫 번째 성인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 필리핀의 수호자이신 성녀 로사 님이시여
주님과 가까우면서도 엄격하게 살았던 님을 기억하는 저희가 경건한 기도의 삶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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