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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우리를 흔드는가?
요한복음 3장1절-11절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습니다. 그 이유는 거의 어제 새벽에, 그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바로 위층에 갑자기 건물 무너지는 소리처럼 사람들이 ‘우아’하는 거예요. 야, 무슨 일이 났나보다! 벌떡 일어나서 자고 있는 우리 집사람을 깨웠어요. “위층에 아무래도 강도가 들어온 것 같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어제 무슨 축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골 들어가는 그런 소리 아니에요?”라고 하는 거에요.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그 후로도 새벽 6시까지 사람들의 환호성은 계속됐습니다. 제가 밴쿠버에서 목회할 때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린 적이 있어요. 밴쿠버에서 열린 게 아니라 그 중계 시간이 대한민국이 출전하는데 딱 예배 시간과 똑같이 일치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성도님들이 평소보다 3분의 1정도 밖에 안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파악하기를 “축구가 예수보다 강하구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축구라 그러면 정말 무슨 돌풍 일듯이 사람들이 그냥 정신을 못 차리고 흥분을 하고 그러더라구요. 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뭐 사람들이 다 그렇게 어느 면에 대해서 열성을 가지고 그러지요. 오늘 좀 그런 것과 똑같으면서 좀 다른 사건을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절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 강림절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승천한 이후에 항상 예수님이 옆에 계셨는데 보이지 않으시니 많이 불안해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하고 그러다가 안 되겠다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백 이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함께 정말 최선을 다해서 기도를 했어요. 막 소리 지르며 기도하다가 바로 갑자기 성령이 임재 하면서 폭발하는데요. 폭탄이 떨어지듯 성령이 임재했습니다. 바람처럼 불처럼, 사람들이 보니까 막 미친 거 같아요.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사람들 같더라.” 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을 다 흔들어 놨어요. 그냥 근본부터 다 흔들어 버렸어요. 기초도 흔들어 버리고, 근본이 흔들리면서 다 변화를 받게 되는 그것이 바로 성령 강림 절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는 이 성령강림 사건이 오늘날 계속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사건이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 성령님이 여러분을 흔드십니다. 성령님은 개인도 흔들고, 공동체도 흔들고, 가정도 흔드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흔드심에 의해 여러분이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 잘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이 본문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오늘 말씀의 2절에 보면 예수님께 와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안에 역사 한다는 것을 전합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쉽지 않죠. 그런데 이 니고데모는 결정적으로 거듭나지를 못했어요. 이런 스타일의 믿음 생활을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이지만 기독교적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우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교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됩니다. 니고데모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은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죠.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천국이죠.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묻는 겁니다. 관심이 있는 거죠. 그런데 니고데모는 성령으로 거듭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이해를 못해요. 이해를 못했다는 것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거죠. 그래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되느냐 그렇게 유치하게 질문을 다시 합니다. 그런 걸로 봐서는 영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한거죠. 그러니까 교회는 영의 비밀을 선포하고 다루는 곳인데 교회 와서 자꾸 육적으로 생각을 하고 육적으로 판단을 하면 니고데모와 같은 종교적인 인간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두 번 태어나야 됩니다. 기독교인은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기독교인을 정의하기를 두 번 태어난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번은 자연적으로 태어나고 그 다음에는 성령으로 태어나야 됩니다. 만일 오늘 예배드리시는 분들 중에 아직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하니 지금 성령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계시는 거예요.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데 네가 성령을 모르니까 성령의 속성에 대해서 너에게 얘기해 주겠다. 그러시면서 얘기하신 말씀이 3장 8절에 성령의 속성을 한 절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가 나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하더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아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그러한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럼 이것은 성령의 뭐를 얘기하는 걸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을 여러분에게 4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성령의 바람은 자유롭게 분다’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의 자유를 얘기하는 거예요. 성령은 인간에게 구속받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가서 역사하는 대로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 역사 하고 싶다. 그러면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한빛교회에 역사 하고 싶다 그러면 성령은 그렇게 하십니다. 자유가 계시다는 말이에요. 바람처럼 자유롭게 성령은 역사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뭘 하느냐? 성령은 바람을 일으켜요. 남자가 바람을 핀다고 할 때 그 바람을 일으키는 게 아니고 우리 용어의 보면 뭐가 있습니까? 뭐 춤 바람도 있고 부동산 투기 바람도 있고 그렇죠. 여러 가지 바람이 있잖아요? 치맛바람도 있고… 한번 그 바람이 불면 전부 사람들이 그 바람을 타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흐름을 탈 수 있도록 역사 하는 거죠. 그렇게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 성령을 여러분은 붙잡을 수 없어요. 성령이 자유롭게 여러분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멀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좀 다르게 제가 설명을 하면 여러분, ‘맹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물론 맹자가 사람 이름이지만 책 제목이 맹자가 있어요. 거기에서 공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순천자존’, ‘역천자망’ 중국말로 하면 ‘쑨티엔저춘’, ‘니티엔저망’ 중국말 좀 다르죠. 이 말씀은 공자님 말씀에 하늘을 따르면 성공하고 복받을 것이고 하늘을 거스리면 망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순천의 천’은 하늘천이에요. ‘순’은 순종한다 즉 하늘에 순종하면 ‘존’, 존재하게 된다. ‘역천자망’에서 ‘역’은 거스를 역자입니다. 즉 하늘을 거스르면 그 인생은 ‘망’, 망하게 될 것이다. 공자 말씀인데 우리 기독교가 얘기하는 것도 하늘입니다. 우리는 땅 보다도 하늘을 얘기합니다. 하늘을 하나님 하늘, 하늘나라로 해석합니다.
세상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이 하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런 흐름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계절의 흐름이 있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 이것이 자연의 흐름이면서도 하늘의 흐름입니다. 보이지 않는 흐름을 사람은 잘 인식을 못합니다. 인식을 잘 못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성령의 흐름을 잘 따르면 성령 충만한 복을 받게 되고, 성령의 흐름을 거스르게 되면 망할 일을 당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바람이 여러분에게 불 때에 느껴지면 성령의 바람에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이렇게 흐르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죠 잡을 수 있을까요? 못 잡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은 소리를 들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하철 역마다 시가 적혀 있는 것 아시죠. 저는 그 시를 하나하나 읽습니다. 혹시라도 그 시중에 말씀에 인용할 수 있는 시가 있을까 해서 입니다. 그 시중에 홍사성이라는 분이 쓴 시가 있는데 제목이 마음의 소리입니다. 하늘의 소리는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알 수 있고 바람의 소리는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로 알 수 있고, 마음의 소리는 눈을 감으면 알 수 있다. 눈을 한번 감아보세요.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들어보세요.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바람은 소리를 듣고 안다는 것은 지나간 결과를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아시죠.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이 지나가면 성령이 터치하시고 지나가시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한 마음으로 품게 됩니다. 결과를 보고 성령이 사람 가운데 지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지나가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각, 습관, 인격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지나가셔야 개인, 가정, 교회가 변화됩니다.
세 번째는 성령이 어디서 오는지 모릅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우리가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사람은 우리 인생 자체가 신비하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어디서 오는 지 신비 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기도하시는 권사님이 계시는데 함께 가서 기도받자고요. 처음으로 권사님께 기도를 받으러 갔습니다. 저에게 소원을 물어보시는 겁니다. 저는 목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때 권사님이 저에게 교회를 치리하는 목사가 아니라 선지 동산에서 가르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목사가 안 되는구나 하고 실망이 됐습니다. 그 후 2년 뒤 7명의 친구들과 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갔는데 너희를 보면 너무 기특하구나 하시면서 원장님께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교회를 크게 할 것이며 말씀을 전하면 모든 사람들이 변화되고,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때부터 혼란스럽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기도해주신 두 분의 말씀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기도를 해주시지 않으셨는데 그 친구가 쫓아가서 저는 왜 기도를 해주지 않으시냐 물으니 이후에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친구는 신학교를 들어갔었지만, 그 후에 기독교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예언을 받는 것이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에언받는 행위를 멀리하고 금지 시켰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전반부 10년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후반부 17년은 교회 목회를 했습니다. 제 인생이 그랬습니다. 앞에서 기도해주신 분들의 기도처럼 산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신비적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가항력적, 초월적인 은혜가 있고, 성령께서 원하시는대로 빚어내시는 역사가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산에 가서 동굴에서 저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세 명이 방언을 받고 두 명이 방언을 못 받았습니다. 두 명은 방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했습니다. 우리가 왜 두 명의 학생에게 방언을 주시지 않았는지 누가 알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성령이 어디로 가시는 지 우리는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이 가시는 방향을 알 수 없지만, 성령이 가시는 방향의 길목에 서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변화를 받게 되고,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령 강림절에 성령님께서 여러분 개인에게, 가정에 함께하셔서 변화 받는 진정한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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