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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강론
바람 위를 걷는 존재, 빛바랜 액자 속 시간의 계단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수필은 단순한 이야기나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경험과 사유, 감각이 서로 얽히며 만들어내는 개별적 사건event의 장을 포착하는 장르이다.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에서 사건은 단순한 일회적 사실이 아니라, 의미와 경험이 교차하며 끊임없이 변주되는 흐름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다룬 수필들은 일상적 소재, 액자, 계단, 걷기, 기업인 신격호를 통해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순간을 작가의 사유와 성찰 속에서 다층적 사건으로 변환시킨다. 각 수필은 단순히 경험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사건이 글 속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고 의미를 생성하며 독자에게 새로운 사고와 감각을 촉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황인강의 수필들은 성찰적, 고백적, 자조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내면적 사유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때로는 자기 부족함을 인정하고, 때로는 삶의 과정에서 마주친 한계와 좌절을 자조적 어조로 기록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 속에서도 작가의 인품과 강인한 정신력이 일관되게 드러난다. 계단 오르기, 북한산 30km 완주, 글쓰기 20년 지속과 같은 사례는 단순한 신체적·정신적 수행을 넘어, 자기 자신을 연마하고 삶을 성실하게 구축하려는 지속적 자기 단련과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수필의 고백적 서술은 단순한 개인 경험의 나열을 넘어, 작가의 내면적 힘과 삶에 대한 성실성을 드러내는 사건적 기록으로 읽힌다.
들뢰즈 <사건의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필은 단순한 경험의 재현이 아니다. 삶의 한 순간이 언어를 만나 새로운 의미로 변환되는 생성의 장이다. 우리가 “느낀 대로 쓴다”고 말할 때의 그 ‘느낌’은 이미 언어적 구조 속에서 재조직된 사건이다. 수필은 ‘사실’이 아니라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글이다. “글을 쓰는 일은 나 자신과 세상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수필은 단순한 경험 기록이 아니라 삶과 사유, 세계를 잇는 섬세한 통로가 된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자신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며, 수필 속 작가의 성찰과 고백, 때로는 자조적 마음가짐은 이러한 자기 이해의 길을 보여준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 한 것처럼, 이 수필집의 글들은 일상의 풍경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포착하며, 안톤 체호프가 말했듯 ‘인생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강인한 정신력과 인품을 함께 드러낸다. 황인강의 수필들의 다양한 소재들은 모두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작가의 성찰과 독자의 해석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즉, 수필은 사건을 단일 사실로 고착시키지 않고, 경험과 성찰, 시간적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배치함으로써 독자가 삶의 본질과 자기 성찰의 깊이를 느끼도록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필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작가의 인품과 강인한 정신력이 체현된 사건적 존재론의 현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Ⅱ.
이 서평에서 다루어진 수필들은 단순한 경험의 기록을 넘어 존재와 사건의 층위를 드러내며, 글쓴이의 인품과 강인한 정신력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글쓴이는 성찰적이고 고백적이며, 때로는 자조적 시선을 곁들여 일상의 순간들을 깊이 있게 탐색한다. 이러한 태도는 들뢰즈적 사건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단일한 사건이 아닌 끊임없이 연결되고 변주되는 삶의 흐름을 포착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수필은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통해 개인과 세계가 교차하는 사건을 창출하고, 독자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만든다. 이 수필집은 평범한 일상을 사건화하며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문학적 실험의 장이다. 황인강은 사소한 경험과 감각의 층위를 정밀하게 포착하여, 그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흐르고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각각의 수필 속 경험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존재의 연속성과 내면의 강인함을 확인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독자는 글쓴이의 인품과 절제된 성실성,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마주하며, 개인적 삶의 사건이 보편적 의미로 확장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빛바랜 액자’에서는 오래된 사물 속에 스며든 기억과 지혜가 삶의 사건으로 응축되며, 개인과 세계가 만나는 순간을 드러낸다. ‘100층 계단을 그려보다’는 단순한 계단 오르기를 내면의 끈기와 자기단련이라는 사건으로 변형시키며, 육체적 체험이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 방식을 보여준다. ‘거기 가봤나’에서는 기업가적 고투와 성취가 하나의 사건으로 재구성되어, 인간 의지와 역사적 맥락이 교차하는 장면을 형성한다. ‘바람 누리길을 걷다’에서는 걷기라는 반복적 행위가 사건의 연속으로 확장되어, 한계와 도전 정신, 인간 경험의 깊이를 동시에 드러낸다. 글쓴이의 서술은 고백적이면서 성찰적이고, 자조적 유머와 따뜻한 시선을 곁들여 독자의 공감과 사유를 촉진한다. 일상과 사유, 행동과 감정이 서로 얽히며 사건으로 응축되는 구조는 들뢰즈적 사건 존재론의 관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황인강의 수필은 이렇게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성찰과 깨달음을 도출하며, 존재와 사건의 밀도를 탐색하게 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결국 독자는 이 글들을 통해 삶의 순간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사건 속에 숨어 있는 존재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쌀장사로 시작해서 대기업을 일궈낸 ‘정주영 회장’, 철두철미한 기업경영으로 유명한 삼성의 ‘이병철 회장’도 일 자체를 즐겨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성공의 뒤안길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오로지 24시간을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자체를 즐겼던 것으로 성공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취와 좌절도 반복되었으리라. 요즘 나는 공자님의 말씀을 음미하며 건강지키기와 책읽기에 흡뻑 빠져 즐기며 살고 있다. 좋아함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호지자불여낙지자 好之者不如樂之者 라고 하지 않았는가. 논어 옹아 편에 나오는 ‘낙지자樂之者’는 말 그대로 즐기는 사람이다. “뿡뿡이가 좋아요, 왜요. 그냥 그냥 그냥” 이라는 어린이노래 가사도 있는 것처럼 좋아하면 즐기게 되어있다.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다> 중에서
이 수필은 삶의 단순한 경험을 사건화하여 독자에게 존재의 깊이를 전달하는 점에서 들뢰즈적 사건의 존재론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어릴 적 달리기와 운동회를 통한 신체적 경험을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사건으로 구조화하여, 개인적 기억과 감각의 층위를 풍부하게 드러낸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30리 길을 뛰어 다니며 달리기 실력을 쌓아 전국체육대회에 나가게 된 경험은, 단순한 ‘잘함’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체화된 ‘행위의 사건화’를 보여준다. 달리기와 탑 쌓기 경험, 그리고 이로인해 발생한 작은 사고와 그 이후의 변화는 사건이 가진 ‘예기치 않은 파급력’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건의 연쇄는 저자의 성장과 체험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으며, 독자로 하여금 시간과 기억의 질적 변화를 체감하게 한다. 또한 좋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즐기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성취와 좌절의 경험은 사건의 다층적 의미를 풍성하게 한다. 달리기, 등산, 역도 운동 등 반복적 행위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삶의 태도와 성격을 형성하는 양상은, 들뢰즈가 말한 ‘순수사건’과 ‘계열화된 흐름’의 개념과 맞닿는다.
저자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즐김의 실천과 그로 인한 자기 형성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는 인간 경험의 본질과 삶의 선택, 그리고 자기 존재의 지속적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삶의 사건화를 문학적 소재로 삼아 글로 풀어내는 솜씨가 뛰어나며, 읽는 내내 사건의 흐름 속에서 독자 역시 공감과 몰입을 경험한다.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태도와 건강한 삶의 가치를 글 전체에서 일관되게 드러내어, 독자에게 삶의 본질적 즐거움과 자기실현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이 수필은 단순한 경험담을 넘어 ‘즐김’과 ‘성취’라는 삶의 태도를 문학적 장치로 세련되게 표현한 점에서 빛난다. 공자의 ‘호지자불여락지자, 좋아함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중심개념으로 삼아, 저자의 경험과 세계적 사례를 연결함으로써 사유와 경험, 역사적·문화적 사건이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사라사테, 카루소, 강수진, 조앤 롤링 등 예술적 성공 사례를 통해 좋아하고 즐기는 행위가 삶과 작품의 본질적 동력임을 보여주는 방식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사건의 의미를 시간적·인과적 흐름 속에서 드러낸다.
특히 어린 시절의 체험이 성인이 되어 취미와 직업적 태도로 이어지는 과정은 사건의 ‘순수함’과 ‘연속적 변주’를 명확히 보여준다. 저자가 강조하는 ‘즐김’의 태도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정신적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삶의 원리로 자리 잡는다. 글 전체에서 발견되는 일관된 긍정적 에너지와 건강한 삶의 실천은, 독자로 하여금 삶의 즐거움과 자기 충만감을 경험하게 한다. 글쓰기에 대한 사랑과 사유, 신체적 활동에 대한 애정이 결합된 사건적 서사는, 문학적 감각과 삶의 철학을 동시에 담아내어 수필의 깊이를 배가시킨다. 또한 사건과 경험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과 취향, 선택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저자의 사유와 경험은 단순히 개인적 회고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인간 경험으로 승화된다. 특히 좋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즐기고 성취하는 과정은 삶의 의미와 자기 실현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수필의 가치와 문학적 완성도를 높인다. 글에서 드러나는 에너지와 몰입, 자기 형성의 사건적 흐름은 들뢰즈적 시각으로 볼 때 매우 성공적이며, 독자는 글을 읽는 동안 삶의 즐거움과 의미를 체감하게 된다.
<걸림돌>이란 수필은 개인의 시대적 기억을 통해 사회 변화의 흐름을 사유하고, 그 안에서 인간적 태도와 정신의 변화를 사건적으로 탐색한 작품이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가 회고하는 “국민소득 106달러 시대”의 풍경은 단순한 과거의 서술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사건’이 재현되는 장면이다. 그 시대의 노동과 근면, 새마을의 열정은 단지 사회적 사실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재론적 리듬이자 ‘시간의 질적 차이’를 형성한 사건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과거의 노동정신을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학적 반성의 계기로 끌어올린다.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노랫소리 속에는 공동체적 욕망의 진동이 있으며, 이는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진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진동은 현재로 이행하면서, ‘워라밸’이라는 신조어와 충돌하는 새로운 사건의 장을 형성한다. 저자는 이 대립을 단순한 세대 차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변화가 만들어낸 사건의 ‘균열’로 본다. 과거의 근면은 물질적 결핍 속에서 태어난 윤리였지만, 오늘의 여유는 풍요 속에서 발생한 방향 상실로 읽힌다. 수필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 독자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다시 묻는다. 그는 회고의 문장을 통해 ‘열심히 일한다’는 행위가 단지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윤리를 구성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문체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사유의 깊이가 깔려 있고, 시대의 질감을 온전히 담고 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고리타분한 소리를 해요’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그때와 지금은 비교 자체가 안 되지 않은가.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답게 모든 것이 변했다. 너무 많이 변하여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든다. 학생시절에 ‘공부 열심히 해라’ 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듣고 지내왔다. 열심히 일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하며 어른들로부터 늘 듣는 말이 열심히 일 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지금 ‘모든 것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로 바꾸어 들어도 좋을 듯싶다. 그 덕분에 오늘날 세계 경제교역 규모 10위 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 <걸림돌> 중에서
저자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정신적 기강’과 ‘공동체적 미덕’을 이야기하며, 이를 잃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걸림돌임을 지적한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볼 때, 저자가 말하는 걸림돌은 단순히 발전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흐름의 변주를 촉발시키는 ‘저항의 사건’으로도 읽힌다. 즉, 사회의 변화 속에서 기존 질서가 사라질 때, 그 결핍 자체가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낸다. 저자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명언을 언급하면서도, ‘온고지신’의 균형 위에 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과 맞닿는다. 완전한 단절이나 단일한 혁신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상호 내재적으로 변주되며 새로움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의 사유는 윤리적이면서 동시에 미학적이다. 그것은 근면과 절약, 그리고 공동체적 책임이라는 미덕을 시대정신으로 재해석하며, 인간의 삶이 어떤 ‘리듬과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하는가를 일깨운다. 저자는 지나간 시대의 가치들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정신적 자산이 오늘의 혼란을 넘어서는 길임을 암시한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수필 전체의 윤리적 결론이며,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의 문턱이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회고와 비판, 성찰과 제안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성숙한 수필로, 사회적 변화를 바라보는 지혜와 품격이 돋보인다.
<존중받는 양보>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장면, 지하철의 한 칸 속에서 벌어진 양보의 행위를 통해 인간 존재의 윤리적 빛을 환히 비춘 작품이다. 들뢰즈의 사건 존재론으로 볼 때, 이 작품의 중심에는 ‘양보’라는 미세한 행위가 하나의 순수사건으로 작동한다. 사건이란 거대한 변혁이 아니라, 일상의 표면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관계의 진동이다. 저자가 지하철의 혼잡한 풍경 속에서 ‘비어있는 노약자석’을 발견하는 순간, 그 장면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관계의 질이 바뀌는 순간으로 변한다. 젊은이가 앉지 않고 자리를 비워둔 그 장면에서 독자는 새로운 ‘존중의 질서’가 잠정적으로 구성되는 사건을 본다.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적 질서가 잠시 멈추고 다른 리듬으로 접히는 ‘차이의 생성’이다. 저자는 이를 ‘흐뭇함’, ‘자랑스러움’으로 표현하지만, 그 감정은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사건이 주체를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정동affect이다. 이 수필의 진가는 바로 그 정동의 포착에 있다. 짧은 시간, 작은 행동 속에 세계가 새로이 구성되는 경험, 이것이 바로 수필이 지향하는 존재의 미세한 지층이다. 글의 서술은 절제되어 있으나, 문장마다 인간의 품격과 시민적 양심에 대한 존중이 배어 있다. 저자는 사회의 도덕이 법보다 앞서야 함을, 작은 배려가 문명사회의 기초임을, 아무런 설교 없이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한다.
조금 가다가 3인 석인 곳에 자리 하나가 비어있는 노약자석으로 눈길이 갔다. 한 사람이라도 공간을 비우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뻑뻑한 공간이지만 망설이다가 주위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로 억지로 갔다. 큰일이나 한 듯이 편안하게 앉았다. 머리를 들고 앞을 보니 젊은이다. 사람들로 몸을 가늘 수가 없을 정도로 꽉 찼는데도 빈자리를 비워놓다니 놀라웠다. 젊은 사람인가 다시 올려다보았다. 40대는 넘어보였다. 앉을 줄 몰라서 안 앉은 것이 아닐 텐데 노약자석이기에 안 앉은 것이리라.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다, 앉았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나.
- <존중받는 양보> 중에서
위 인용문은 양보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중의 생성’을 매개하는 사건임을 더 깊이 드러낸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며, 이 수필의 ‘양보’는 바로 그런 관계의 재배치를 실현한다. 양보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교환은 ‘일석이조의 흐뭇함’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그 속에는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이 잠재한다. 저자가 강조하듯, 양보는 단순한 도덕적 명제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건의 장field’이다. 젊은 여성이 “여기 앉으세요”라며 낯선 노인에게 자리를 권하는 장면은, 일상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윤리적 관계가 생성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들뢰즈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차이의 만남’이자 ‘존재의 공명’이다. 저자는 이 장면을 통해 사회적 예절과 인간적 따뜻함이 어떻게 다시 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몸이 편안하면 휴식이지만 마음이 편안하면 행복”이라는 구절은, 사건이 단순히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평화로 귀결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단순한 윤리 훈계가 아니라, 사유와 감정이 하나로 만나는 체험의 언어이다. 이 수필은 일상의 평범한 장면을 통해 공동체의 미덕과 인간 존엄의 본질을 재확인하게 하는, 품격 있고 따뜻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삶의 디테일 속에서 ‘양보의 사건’을 포착해내는 감각은 뛰어나며, 문학적 섬세함과 철학적 사유가 조화된 수필의 본령을 잘 보여준다.
<인텔리 할아버지>는 한 이웃 노인을 통해 ‘호號’의 의미와 인간적 품격을 되새기는 작품이다. 필자는 젊은 시절 이웃으로 지내던 할아버지를 회상하면서, 그가 보여준 인품과 교양을 통해 한 시대의 ‘지식인상’을 떠올린다. 글은 단순한 추억담이 아니라, 이름과 인격, 그리고 삶의 품위를 사유하는 수필로 확장된다. 글의 서두에서 필자는 호는 단순한 별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품과 이상, 그리고 정신적 지향을 드러내는 상징임을 밝힌다. 이러한 도입은 곧 인텔리 할아버지의 인품을 조명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한다. 1970년대 은평구의 평범한 주거공간에서 만난 노인은, 보성전문학교 출신의 고학력자이자 교양인으로 그려진다. 그는 조용하지만 품위 있는 태도로 이웃을 대하며, 어느 날 필자 부부를 초대해 각자의 이름으로 호와 삼행시를 지어준다. ‘춘강春崗’이라는 호를 하사받는 장면은 작품의 중심 사건으로, 이때 필자는 호를 단지 이름의 장식 정도로 여겼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이후 병풍과 액자가 곰팡이로 손상되어 버려지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읽힌다. 그것은 물질의 손상이 아니라, 정신적 유산을 가볍게 여겼던 젊은 시절의 무심함을 반성하는 표지이기도 하다. 필자는 “젊은 사십대에 호를 대단히 여기지 않은 업보다”라고 고백하며, ‘이름을 부여받는 일’이 단지 부름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을 인정받는 일임을 늦게 깨닫는다.
할머니는 그런 속내를 나누는 아내와의 대화에서 많은 위로를 받으셨던 것 같다.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는 호를 짓는 기준을 《백운거사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처하는 곳이든,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이든, 또는 자기가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배경으로 호를 지으면 된다.” 라고 했다. 호는 역시 나이가 지긋할 때, 문학, 예술 등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뤘을 때 쓰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이 호를 갖고 있어도 불러주기는 좀 그렇다.
젊은 사람에게는 호 보다 애칭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직 호가 없다고 실망 할 필요는 없다. 때가 되면 자연히 심오한 뜻을 지닌 멋진 호를 지어줄 분이 나타날 것이다. 먼저 품위 있는 인격 도야에 힘쓰고, 그런 후에 호를 지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 <인텔리 할아버지> 중에서
글의 전개부에는 할머니의 사연이 곁들여져 인간관계의 온기를 더한다. 재취로 들어와 마음고생이 심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인텔리 할아버지의 인품이 단지 학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따뜻한 인간애를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웃 간의 교류가 단절된 현대 사회에서, 필자는 그 시절의 정과 예의, 그리고 인격적 교양을 그리워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필자는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말을 인용하며, 호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정리한다. “거처, 뜻, 환경을 배경으로 호를 짓는다”는 구절을 통해, 호는 단지 이름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그 사람의 정신적 좌표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호를 갖는다는 것은 인격의 완성에 도달한 이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필자는 젊은 세대에게 성급히 호를 가지려 하기보다 먼저 품격과 인품을 닦을 것을 권한다. 이 작품의 진가는 화려한 사건보다 조용한 존경과 성찰의 결에 있다. 필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한 이웃 노인이 보여준 품위 속에서 ‘인간다운 교양’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결국 「인텔리 할아버지」는 한 시대의 풍경을 넘어, 이름과 인품의 관계, 그리고 인간적 존중의 가치를 담아낸 잔잔한 회상 수필로 읽힌다.
수필〈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일상의 사소한 경험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리듬을 발견해내는 작품으로,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존재론’을 가장 생활적인 방식으로 증명해낸 글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단순한 사실의 발생이 아니라, 몸과 세계가 맞닿는 접면에서 생성되는 ‘의미의 움직임’이다. 이 작품에서 땀은 바로 그 ‘사건’의 형상으로 기능한다. 등산이라는 신체의 행위 속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하나의 물질적 흔적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내면이 변화하는 순간, 즉 삶이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계기로 나타난다. 필자는 산행의 묘사에서 출발하지만, 단순한 운동의 기록을 넘어 ‘자기 극복’과 ‘정신의 성장’이라는 내적 변화를 포착한다. 땀을 ‘백만 원짜리 보약’에 비유한 친구의 농담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들뢰즈적 사건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말 한마디를 통해 육체적 피로는 정신적 해방으로 전환되고, 고통의 사건은 새로운 의미의 층위로 재구성된다. 필자는 그 변화를 몸으로 겪으며, 땀을 통해 세상과 다시 관계 맺는 법을 배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결론은 교훈적이면서도, 신체적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철학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이때 산을 오르는 행위는 하나의 ‘배치가 되어, 인간과 자연, 노력과 보상, 육체와 정신이 얽혀 흐르는 관계망을 드러낸다.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표면’이란 바로 이런 순간, 땀으로 젖은 몸이 세계와 만나는 그 경계에서 빛난다.
땀방울은 진정 모두의 삶에서 귀한 보석이다. 어떤 경우든 땀을 흘려야 좋은 성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땀 흘리지 않고 얻어지는 성취가 어디에 있겠는가. 4년마다 개최되는 올림픽이 있기 전, 선수들은 선수촌에 입소하여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는다. 그들의 땀방울을 TV에서 보면서 믿음직스러움을 느끼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애잔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이 나만의 감성일까.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느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좌우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가 보다. 무언가 이루고자 한다면 값진 땀을 기꺼이 뿌려야 하리라. 성공이란 금자탑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등산에서의 땀방울에서도 배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수필이 특별히 빛나는 지점은, 그 철학적 사유가 지나치게 추상으로 흐르지 않고 언제나 생활의 감각과 인간적 정서 위에 단단히 뿌리내려 있다는 데 있다. 필자는 어린 시절의 불안과 긴장 속에서 흘리던 ‘진땀’, 직장에서의 발표 불안, 그리고 극복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자연스레 병치하며,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정신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 과정은 들뢰즈적 의미에서 ‘시간의 계열화’라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시기의 사건들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공명하며, 하나의 ‘의미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필자가 스피치 교육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을 단련해가는 모습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성공담이 아니라 ‘사건이 주체를 다시 구성하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한 작품 후반부에서 운동선수의 땀방울과 자신의 경험을 포개는 서술은, 개인적 사건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는 마라톤선수, 축구선수, 권투선수의 땀 속에서 ‘노력의 보편성’과 ‘인간의 존엄’을 본다. 이러한 사유는 현실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을 해석하는 태도로 나아간다. 문장은 담백하면서도 내적 울림이 크며, 단정한 어조 속에 체험의 진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 수필은 “노력 없는 성취는 없다”는 단순한 교훈을 넘어서, 인간의 존재가 ‘노력의 시간’을 통과하면서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땀을 미학화한 그의 문장은 단지 건강의 미덕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서의 성실함을 찬미한다.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윤리학’을 삶의 언어로 번역해낸 아름다운 기록이며, 그가 보여주는 건강한 정신과 겸허한 태도는 오늘날 잃어버린 인간 존중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문학적 미덕으로 평가할 만하다.
나에게 조상님의 문학적인 DNA가 조금은 전수된 것이 아닌가하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 분의 문장가로서의 깊이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인품과 문장과 풍류가 뛰어나신 어른이 계셨음을 모르고 다만 방촌 조상만 현창했을 뿐, 현손이신 맹현 어른에 무관심한 것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다. 역시 큰 나무 밑의 아름다운 꽃은 꽃이로되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가문들마다 자기 조상들의 뚜렷한 발자취가 있을 것이다. 그들 조상의 숨겨진 유적을 발굴하여 후손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을 기울여야 하리라.
- <문장가 황맹헌> 중에서
이 수필은 ‘가문과 문학적 전통의 계승’을 주제로, 개인적 체험 속에서 역사와 정신을 되짚는 서사적 수필이다. 서술의 흐름은 크게 (1) 청명절의 제향 여정 → (2) 조상에 대한 회고 → (3) 황맹헌의 문장과 인품 탐구 → (4) 후손으로서의 자각과 다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명과 한식이 겹친 봄날, 작가는 조상을 기리는 마음으로 경북 상주를 찾아간다. 그곳은 가문의 큰 어른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평소 아버지가 자주 다녀오시던 제향의 자리였다. 예전에는 단순한 어른들의 행사로만 여겼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제사의 의미와 전통의 깊이를 깨닫게 된다. 이어 작가는 매년 열리는 방촌 황희 정승 숭모행사와 반구정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방촌이 보여준 청렴과 애민의 정신을 후대가 본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이어서 글의 초점은 방촌의 후손이자 또 다른 위대한 선조인 황맹헌(유촌)으로 옮겨간다.
그는 문장과 서예에 능해 ‘죽지사竹枝詞’로 중국 명나라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의 시풍은 풍류와 인생의 여유를 담은 고상한 노래로, 동시대 문장가 소세양 정사룡과 견줄 만큼 뛰어났다. 작가는 이러한 유촌의 문학적 재능을 접하며, 자신에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끼고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는 “큰 나무 아래 꽃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그동안 방촌에만 집중하고 유촌을 비롯한 다른 조상들의 업적을 소홀히 한 점을 반성한다. 그러면서 가문의 역사 속에 숨은 위대한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정신과 문학적 소양을 이어가는 것이 후손의 책임임을 다짐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조상의 덕을 현창함은 단순한 제례의식이 아니라 정신적 계승의 실천’임을 깨닫는다. 이 수필은 조상의 문학적 유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적 뿌리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서정적이면서도 회고적인 어조로 서술한 글이다.
<빨간 깃발을 들고>는 일상의 한 장면 속에서 ‘삶의 품격’과 ‘시민적 덕성’을 발견한 작품으로,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을 적용해 보면, 매일 반복되는 아침의 교통봉사가 단순한 일상의 습관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의 장으로 드러난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의미가 현재 속에서 다시 생성되는 순간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빨간 깃발을 드는 행위,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몸짓, 부모의 손을 바라보는 시선 등 사소한 일상의 행위를 통해 매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아이들의 다양한 반응, 먼저 인사하는 아이, 무표정한 아이, 반듯한 자세로 걷는 아이는 그 자체로 차이들의 흐름이며, 그 차이 속에서 작가는 삶의 다양성을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즉 들뢰즈가 말한 ‘순수사건’은 바로 이 수필에서 반복되는 건널목의 장면 속에서 발생한다. 매 아침 건널목에서 깃발을 드는 순간, 세계는 다시 새로워지고, 삶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다. 글은 그 반복 속의 차이를 포착하며, 일상의 실천이 어떻게 한 인간의 존재론적 깊이를 확장하는지를 보여준다.
주민들의 사이에 소문이 펴졌는지 쑥스럽기까지 하다. 지나가는 행인도 건널목에서 교통봉사를 하는 제복 입은 분으로부터 반가운 인사를 받으니 지나면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마움의 표정을 짓는다. 기분이 좋은 표정이다. 언젠가 어느 주민이 무언가를 은근슬쩍 호주머니에 넣기에 당황했는데 조그마한 사탕 한 봉지다. 마침 아이들이 떼 지어 오기에 그 학부모와 말을 나누지 못했지만 고맙다는 마음의 표시여서 오히려 내가 감격을 한다. 따스한 이웃이 있는 우리 마을이다. 사소한 따스함에 아이들을 ’더 안전하게 건널목을 건너게 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된다.
- <빨간 깃발을 들고> 중에서
문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 수필은 진정성과 품격이 결합된 따뜻한 리얼리즘의 문체를 보여준다. 작가는 퇴직 이후의 실버세대 일자리라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도, 이를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닌 ‘삶의 미학적 실천’으로 전환시킨다. 그는 매일 아침 깃발을 들며 아이들을 보호하는 행위에서 ‘선善의 반복’을 실천하고, 이를 통해 ‘건강한 정신’과 ‘공동체적 윤리’의 가치를 구현한다. 사탕 한 봉지를 건네는 주민의 호의, 부모와 자녀가 손을 잡고 걷는 장면,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던 추억의 회상이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표면’ 위에서 반짝인다. 작가의 언어는 도덕적 교훈을 직접적으로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의 따스한 층위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즉, ‘빨간 깃발’은 단순한 교통안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윤리적 깃발이며, 매일의 행위를 통해 다시 세워지는 삶의 의미의 표상이다. 이 수필은 노년의 봉사가 어떻게 자기실현의 형식이 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증명하며, 나이듦을 ‘감퇴’가 아닌 ‘확장’으로 전환시킨다.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는 곧 ‘존재의 예의’이며, 그 예의야말로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품위의 다른 이름이라 하겠다.
<빛바랜 액자>는 물질의 낡음 속에 깃든 정신의 지속성을 사유한 작품으로,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을 통해 읽으면 더욱 깊은 의미층이 드러난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일이나 사물의 변화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작가에게 액자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인자천하무적仁者天下無敵”이라는 언표를 매개로 하여 수십 년 동안 삶과 함께 호흡해온 존재적 사건의 장이다. 액자는 벽에 걸려있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것은 시간과 기억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의식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낡아버린 액자를 마주한 순간, 작가는 단순한 물건의 퇴락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의미의 표면’을 다시 활성화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뒷면이 너덜너덜해진 액자를 보고 느낀 놀람과 애착, 그리고 ‘수선’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깨닫는 장면은 바로 그 순간 들뢰즈가 말한 ‘순수사건’이 작가의 내면에서 발생한 장면이다. 존재의 변화와 시간의 누적이 ‘하나의 사물’을 매개로 재사유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수필은 물건의 시간성과 인간의 정신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상의 형이상학을 완성한다.
그 글씨의 필적이 어떤지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른다. 하지만 그 액자의 글씨를 나는 좋아하고 그 의미도 우리에게 무언가 깊은 뜻을 전해 주고 있어 마음에 든다. 그 액자는 보는 이들의 마음에 편안함과 세상을 멀리 바라보는 지혜를 주어 같이 지내 온 지도 40여 년이 넘는다. “仁者天下無敵”은 세로로 한지에 한문으로 쓴 것으로 글씨체가 아름답고 힘이 있다. 평이한 말로 품성을 도야하는데 좋을 듯하다. 그것을 지금까지 나의 눈에서 떠나지 않고 같이 지내왔다. 늘 글자의 속뜻과 풍기는 교훈을 무심중에 나에게 심었으리라. ‘어진 자에게는 천하에 적이 없느니라’라는 말이 속마음에 자리를 잡았을 것을 생각하니 고맙기가 그지없다.
- <빛바랜 액자> 중에서
이 수필은 사소한 사물에 깃든 인문적 성찰과 도덕적 품위를 품은 모범적인 수필이다. 작가는 낡은 액자 하나를 통해 인仁의 가르침, 인간관계의 조화, 그리고 세대 간 정신의 전승이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는 액자의 훼손을 단순히 ‘낡음’으로 보지 않고, 존재가 겪는 ‘소멸과 갱신의 순환’으로 읽어낸다. 이 점에서 작품은 삶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과 윤리적 태도를 함께 품고 있다. 또한, “어진 자에게는 천하에 적이 없다”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음미하며, 작가는 그 문장을 하나의 ‘삶의 표면에 새겨진 사건적 언어’로 재해석한다. 들뢰즈가 말한 의미의 층위에서 보자면, 인仁은 단지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매번 다시 생성되는 사랑의 사건이다. 수필의 마지막에서 “어진 자는 어머니의 품 같다”는 문장은 그 철학적 사유의 결을 따뜻하게 마무리한다. 이 글은 시간에 닳아 빛이 바랜 액자 속에서 오히려 ‘불변의 정신’을 길어 올리는, 품격 있는 노년의 성찰이며, 물질과 정신, 유한과 영원의 긴장을 정갈하게 조율한 빼어난 수필이라 하겠다.
<100층 계단을 그려보다>는 일상적 신체행위를 통해 정신적 성장을 탐색하는 작품으로,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으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하게 드러난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나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의미의 순간이다. 이 글에서 계단 오르기는 단순한 건강운동이 아니라, 자기의식이 갱신되는 ‘순수사건’의 장으로 작동한다. 아파트 18층을 오르는 행위가 매일 반복되지만, 그 반복은 기계적 되풀이가 아니다. 오를 때마다 그는 자신의 신체 상태를 점검하고, 하루를 성찰하며, ‘살아 있음’의 감각을 다시 획득한다. 바로 그 순간, 들뢰즈가 말한 “의미의 표면(surface of sense)”이 작동한다. 계단의 각 층은 물리적 높이이자, 정신적 층위의 상승이다. 계단을 오르며 작가는 자신의 몸, 시간, 그리고 영혼의 리듬을 재조율한다. 특히 “조심스럽게 하나씩 하나씩 밟으며 걸어 올랐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 사건의 미학을 함축한다. 그것은 육체의 인내이자 존재의 사유이며, 반복을 통한 차이의 창조이다. 결국 이 수필은 ‘100층의 계단’을 현실적 목표로 삼지만, 그 오름은 육체의 훈련을 넘어 ‘영혼의 상승’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로 확장된다.
의사들은 무릎 관절의 연골을 아껴 써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5회까지 올랐으면 언젠가는 6회도 가능하다는 청사진을 가져본다. 층계이든 높은 산이든 장거리 둘레길 을 걸으면서 걱정이 되는 것이 무릎관절 아닌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무릎에 아무런 이상 없이 걸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는 것, 그저 조심, 조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건전한 정신 못지않게 귀한 것이 나의 영혼이다. 살아있는 영혼이 어느 날인가 하늘 문 가까이에 내 발길 닿을 수 있을까하는 신앙적인 바램이다. 영성이 성화되어져서 진정으로 나도 하늘 문에 닿을 수 있을까하는 소망어린 생각을 해본다.
- <100층 계단을 그려보다> 중에서
이 수필은 일상의 실천을 통해 존재의 깊이를 탐색한 체험적 수필이다. 작가는 단조로운 삶의 반복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율적 인간상을 보여준다. 수영장에서 걷기, 계단 오르기, 둘레길 걷기 등은 모두 신체의 훈련이지만, 그 속에는 정신의 수양이 함께 배어 있다. 그는 “건전한 정신 못지않게 귀한 것이 나의 영혼이다”라고 말하며, 신체의 건강과 영혼의 성화를 동일한 층위에서 바라본다. 들뢰즈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는 ‘몸과 정신의 비이원적 배치’이다. 계단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가 흐르는 하나의 사건적 공간이며, ‘삶의 다이어그램’이다. 계단을 오르는 매 순간, 작가는 자신을 다시 그려보고, 노년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언젠가는 6회도 가능하다는 청사진”이라는 표현은 물리적 도전의 언표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미래에 대한 신앙적 선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은 육체적 반복 속에서 정신의 변주를 만들어내는 노년의 자기서사로서, 들뢰즈의 사건 개념이 지닌 ‘차이의 미학’을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수필이라 하겠다.
<거기 가봤나>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거인의 삶을 통해 ‘성공’의 철학과 인간적 숙명에 대한 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인상적 작품이다. 작가는 신격호 회장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서술하면서도, 단순한 인물전기의 차원을 넘어, 들뢰즈적 사건의 관점에서 ‘창조적 삶의 연속성’을 탐구한다. 들뢰즈가 말한 사건은 한 개인의 일회적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의미가 생성되는 생성의 흐름이다. 신격호의 삶은 바로 그런 생성의 연속체다. 일본으로 건너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제과산업을 일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산업 기반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은 단순한 ‘성취’가 아니라 ‘의미의 발현’이었다. 그는 실패와 좌절, 부도의 위기 속에서도 매번 자신을 다시 창조했다. 그것은 들뢰즈가 말한 ‘차이의 반복’이며, 한 존재가 스스로를 새롭게 갱신하는 ‘사건의 윤리학’이다. 작가는 그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생성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그 근원에는 ‘현장을 직접 가보라’는 신격호의 좌우명—“거기 가봤나”—가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경영철학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를 체험으로 얻으려는 실존적 태도를 드러낸다. 신격호에게 ‘현장’은 현실의 표면이자, 새로운 가능성이 솟아나는 들뢰즈적 ‘사건의 장소’였다.
이를 위하여 오로지 전력투구한 그의 신념과 신앙, 성공의 모델은 모든 사람들과 미래의 젊은이 마음속에 역사적인 교훈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그분 역시 한 인간이다.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언젠가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이다. 그의 인생 마지막이 영광과 축복 속에‘나는 다 이루었다’고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국민에게 고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 때가 오기를 기대했다. 오! 자랑스러운 신격호 회장님!. 지난 세월 한때 외교 경제 경영의 중량급 인사들이 그 분의 주위에서 일을 했다. 실세 권력자, 외교관 출신의 국무총리, 경제계의 국무총리 등이다.
- <거기 가봤나> 중에서
이 작품은 사실적 서술과 서정적 애도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수필의 미학을 완성도 높게 구현한다. 작가는 거대한 인물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재현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신격호를 바라보는 정서적 온기를 잃지 않는다. “그의 인생 마지막이 영광과 축복 속에 ‘나는 다 이루었다’고…”라는 문장은 전기적 사실의 종결이자,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완결의 역설을 동시에 품는다.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거기 가봤나”라는 묘비문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가는 그것을 단순한 회장의 구호가 아닌, 삶의 태도로 재해석한다. 이는 ‘지식으로 아는 삶’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삶’을 중시한 들뢰즈의 사유와도 맞닿는다. 신격호의 생애가 보여주는 창조와 집념, 그리고 노년의 쇠락까지를 담담히 서술한 이 글은, 한 인간의 성공을 넘어 시대정신의 사건을 기록한 수필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신격호를 영웅이 아니라, 사건을 살아낸 인간,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해 늘 나아간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
차라리 작은 명패라도 붙여놓으면 어디의 다리라고 기억하며 다리에 얽힌 기억을 상상할 수 있었을 덴데 아쉽다. 지상이 아닌 큰 개천의 밑바닥에서 보는 저 멀리 웅대한 북한산을 바라보며 한동안 목적지에 다 왔다는 희망이 생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면 갈수록 더 힘들고 지친 상태여서 지근거리가 왜 그렇게도 멀 은지 고통의 연속이다. 차라리 목적지가 안보이거나 다 왔다는 소리가 없었으면 낫지 않겠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다. 몇 년 전에 출발점이 북한산성 입구였는데, 이번에는 입구를 지나 북한산 프레이카페가 최종집결지란다. 1km정도를 아픈 다리를 이끌고 더 가야 최종 도착장소가 된다. 주저앉을 만큼 지친다리를 끌고 마지막까지 참고 걸었다.
마지막의 한 보가 백보 보다 길고 무거운 걸음이 되는구나. “ 30km완주 축하드립니다. 결국 해내셨군요.”라는 대형 입간판이 웃으며 맞아주었다.
- <바람 누리길을 걷다> 중에서
<바람 누리길을 걷다>는 단순한 ‘걷기 기록’을 넘어, 인간 존재의 의지와 성찰을 담은 사건의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30km 걷기 축제 참여라는 구체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육체적 한계와 내면적 의지의 경계를 탐구한다. 들뢰즈적 사건의 존재론에서 보면, 걷기는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이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저 길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사건이다. 20km 지점에서의 통증, 발바닥의 고통, 동반자와 나누는 대화 등은 모두 사건의 ‘강도’로서 의미를 발생시키고, 단순한 걷기가 자기 존재를 재확인하고 갱신하는 의식적 행위가 된다. 작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지속적 실천’과 ‘내면 중심의 성숙’이라는 삶의 가치를 세심하게 드러낸다. 이 수필은 매우 인상적이다. 작가는 걷는 행위와 주변 풍경, 내면의 생각을 교차시켜 서정적 리듬과 사실적 묘사를 균형 있게 조화시킨다. 창릉천과 북한산, 아파트 단지 등 구체적 공간을 세밀히 배치함으로써 독자는 걷기라는 사건 속에 자신의 감각을 투영할 수 있다. 특히,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며 마지막 1km를 견디는 장면은 단순한 체력의 극복을 넘어 인내와 성찰의 미학으로 확장된다. 또한 ‘무겁지 않은 몸, 묵직한 내면’이라는 성찰은 수필 전반에 깔린 건강한 정신과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메시지와 맞닿는다. 이 글은 단순히 걷기 기록에 머물지 않고, 육체와 정신, 경험과 사유가 결합된 사건적 서사로서, 독자로 하여금 자기 삶의 층계를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나는 건강과 적극적인 하루의 시작을 열망하며 삶의 기초를 닦고 있다. 건강한 삶을 지향하되 무리로 인한 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유의를 하면서 말이다. 글을 시작한지도 20여 년이 되어간다. 아무런 소양과 소질도 없으면서 시작을 하였다. 그저 꾸준히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고 공부하고 있다. 하면할수록 너무 부족하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실망이나 체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글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다보면 어려운 때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을 잘 넘겨야한다.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 <글쓰기의 소망> 중에서
이 수필은 단순한 자기 고백이나 글쓰기 기록을 넘어, 삶의 태도와 자기 계발의 철학적 성찰을 담은 작품으로 읽힌다. 작가는 삼류와 일류의 구분이라는 개념을 출발점으로, 한신 장군과 파가니니의 사례를 통해 탁월함과 노력의 본질을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설득한다. 특히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 지속적인 자기 단련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글쓰기와 일상적 실천으로 연결하면서, 단순한 교훈을 넘어 삶과 정신의 일관성을 보여준다. 매일 아침 걷기와 수영을 반복하고, 글쓰기를 20여 년 간 지속해 온 경험은, 작가가 단순히 습관적 반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의식적 수행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은 독자에게 글쓰기와 삶의 훈련이 서로 맞닿아 있으며, 꾸준함과 의지가 어떻게 내면의 자양분이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역사적 인물, 음악가 사례를 교차하며 사실적 서사와 교훈적 서술을 조화롭게 엮는다. 글쓰기를 통한 자기 성찰과 향상이라는 주제는 독자가 자신의 삶에 곱씹어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교훈을 제공한다. 또한 “많이 읽고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선현의 가르침을 구체적 일상과 연결함으로써, 글쓰기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정신적 성숙과 인격 형성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건강한 몸과 정신, 지속적 자기 단련이라는 가치가 글 전반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작품은 단순한 자기 고백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배우고 느끼게 하는 인상적 서사로서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Ⅲ.
황인강의 작품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 속에서 들뢰즈적 사건의 존재론적 장을 구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액자 속 글씨 한 자, 계단 오르기 한 걸음, 긴 거리 걷기의 순간, 그리고 기업가의 일생과 결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작가의 사유와 경험, 성찰이 교차하며 끊임없이 변주되는 의미의 흐름 속에 놓인다. 독자는 수필을 통해 사건이 가지는 다층적 의미와 시간적 겹침, 그리고 개인적 체험이 사회적·철학적 차원에서 새롭게 읽히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사건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울림과 존재론적 의미를 포착하는 성취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수필은 성찰적·고백적·자조적 서술 속에 작가의 인품과 강인한 정신력을 일관되게 드러낸다. 계단과 둘레길, 글쓰기와 건강 관리, 글 속 성찰과 자기 단련은 모두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결코 무심하지 않은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실패와 좌절, 나약함과 고통 속에서도 작가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다지고, 경험과 사고를 쌓아 일류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지속성과 자기 수련은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을 넘어, 삶의 태도와 인간됨의 깊이를 성찰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는 <책머리에>라는 글에서 공정하고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넘치는 밝고 맑은 사회와 온전한 국가로 굳건히 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수필집을 나올 수 있도록 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다. 그는 고통을 이겨내고 극복하려는 의지로 빛나는 작가다. ‘도전’이라는 강인한 정신의 영토를 가진 작가다. 결국 이런 작가적 역량이 일상적 사건을 통해 삶과 존재, 인간 정신의 가치를 탐구하는 장이 되게 했다. 독자는 작가의 체험과 사유, 고백과 성찰을 따라가며, 사건 속에 숨겨진 의미와 시간의 흐름, 그리고 작가가 보여준 인내와 정신력을 동시에 느낀다. 이는 수필이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삶의 철학과 존재론적 통찰을 제공하는 사건적 기록임을 확인하게 한다. 헤르만 헤세는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의 혼란을 정리하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내적 여행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루이스 캐럴은 “상상력과 관찰력이 만나면, 평범한 일상이 비범한 이야기가 된다”라고 하여, 작가의 수필이 보여주는 삶의 풍경과 경험의 가치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이 수필집은 단순한 글의 모음이 아니라, 작가의 존재와 정신이 빚어낸 사건의 연속이자 독자에게 전하는 삶의 교훈이며, 글쓰기가 지닌 힘과 의미를 새삼 확인하게 하는 귀중한 경험이 된다. 황인강의 수필은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생성하고, 삶의 깊이를 비추는 거울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문학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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