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선문은 파리 시내 서북부인 샤를드골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일직선으로 2킬로미터쯤 뻗은 대로의 끝에 있는 샤를드골 광장은, 방사형으로 뻗은 열두 개의 도로가 별 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에투알(별) 광장이라고도 불린다.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개선문은 근현대사의 영욕이 서린 역사의 현장으로, 그 바로 아래에 설치된 무명용사의 묘에서는 연중 내내 불길이 타오른다. 영웅들의 업적을 아로새긴 개선문과 무명용사의 묘. 이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균형 감각은 그 사회의 문화적 저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강자와 승자 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웅변이다. 1806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개선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착공한 개선문은 그가 죽은 후인 1836년에 완공되었고, 나폴레옹은 1840년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해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개선문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이후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이 개선문을 통과하였고,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드골이 다시 이 문을 지나 파리로 입성하였던 것이다.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2차 대전 직전의 암울한 상황을 레마르크는 이렇게 묘사한다. "거인처럼 치솟은 개선문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며, 위로는 우울증에 빠진 하늘을 떠받들고, 밑으로는 무명용사의 묘에서 창백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지켜 주는 듯하다. 무명용사의 묘는 황량함 속에서 인류 최후의 묘지처럼 보였다." 2차 대전 발발 무렵의 파리 시내 풍경은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하며, 특히 여권과 증명서 없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유럽의 피난민들은 그 어떤 희망도 위안도 없이 내던져진 상태이다.
레마르크(1898~1970)의 소설 《개선문》(1946)은 파리 개선문 근처 몽마르트의 싸구려 호텔에서 살아가는 망명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파리의 망명객들은 승자가 되면 짐을 꾸려 돌아가고, 패자가 되면 다시 돌아온다. 호텔 방에 걸린 액자 속의 인물들도 그때 마다 교체된다. 파시스트와 공화주의자는 번갈아 가며 호텔로 돌아온다. 우리의 주인공 독일인 라비크는 베를린 종합병원에서 외과의로 활동하던 중 게슈타포에 쫓기는 두 친구를 숨겨 주었다가 체포된다. 라비크의 애인인 시빌은 하케의 고문으로 죽는다. 라비크는 강제수용소의 병원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망명하고, 불법체류를 하며 대리 수술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신분이 드러나면 추방되었고, 기회를 보아 다시 밀입국하기를 반복한다. '라비크'는 그의 세 번째 이름이다. 그에겐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목적도 미련도 없이 쫓기는 삶이지만 마음만은 넉넉하다.
라비크와 삼류 배우인 조앙 마두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알마 교는 개선문에서 가장 가까운 센 강의 다리이다. 라비크와 조앙이 이 다리에서 처음 만나 마르소 거리를 따라 개선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파리의 모든 것에 낯설 수밖에 없는 라비크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얽메이지 않는 순진무구한 조앙 마두에게 친숙함을 느낀다. 조앙은 술을 마실 때면 술이 전부, 사랑할 때면 사랑이 전부, 절망할 때는 절망이 전부, 그리고 잊을 때면 모든 걸 잊는 그런 여자이다. 사랑에 눈을 뜬 라비크에겐 무언가 달라지고 갑자기 두 눈이 생긴다. 여자의 얼굴이 새로 보인다. 머릿속의 부드러운 불길이 여자를 비춘다. 사랑은 느낌이면서 또한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허무의 안개 속에서 환한 햇살이 쏟아진다. 사랑의 축제를 위한 용기도 따라온다. 자신을 심하게 부려먹는 악덕 의사 뒤랑에게 평소보다 많은 돈을 달라고 요구하여 관철시키고 휴양지로 같이 떠나기도 한다. 불안의 시대에 사랑의 도피와 일탈은 사치가 아니고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이다. 라비크에게 마음을 연 조앙도 이렇게 고백한다. "하루 종일, 사방에서 샘이 솟는 듯 무언가가 콸콸 흘러내렸어요...... . 저한테서 파란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 같았어요." 조앙은 라비크가 망명자인 줄도 모른 채 소박한 소시민의 생활을 원한다. 조앙과 라비크는 서로를 이해하였을까? 조앙은 이렇게 말한다. "건배! 하지만 당신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네요." 라비크가 대답한다. "대체 누가 이해를 하고 싶겠어? 바로 거기서 세상 모든 오해가 생겨나는데."
2. 라비크의 불안한 파리 생활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존재는 그의 친구인 모로소프이다. 그는 십오 년째 파리에 살고 있고, 1차 대전 때의 러시아 피난민으로, 자신이 황제근위대에 근무했다거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는 등의 위선을 부리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지만, 세상물정에는 밝다. 모로소프는 라비크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조앙 마두와의 사랑에 대해서도 라비크에게 조언한다. "할 수 있는 한 우린 남에게 친절해야 해. 우리도 나중에 살아가면서 범죄라는 걸 저지르게 마련이니까 말이야."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고, 우리 모두는 서로를 잡아먹고 있기에 이따금씩 번쩍이는 선의의 불꽃을 내다버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외과의사인 라비크의 눈에 조앙은 낯선 생명체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따뜻함 외에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마음 속에 따뜻함이 없다면 그게 인간이겠는가?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게 전부이고, 기적이면서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자명한 것이다. 라비크는 처음에는 사랑의 감정을 순간의 도취, 빛을 발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이 숨바꼭질하고 있는 눈부신 구름들 사이로 갑자기 초록과 갈색으로 빛나는 대지를 내려다본 비행사처럼 그는 그 이상의 것을 본다. 황홀 속에서 헌신을, 도취 속에서 감정을, 요란한 말 속에서 소박한 신뢰를 본다. 그는 불신과 의문과 몰이해를 예상했으며, 이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은 언제나 작은 것들이며, 결코 커다란 것들이 아니다. 커다란 것들은 연극적인 몸짓과 거짓에 대한 유혹과 너무도 가까운 법이다. 반면에 연인들이 재잘대는 것은 헌신과 감정과 신뢰의 징표이다.
리비크와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외제니는 조앙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외제니는 자동인형과 같은 존재이며 영원히 살아남는 인간들의 한 부류이다. 외제니 쪽에서도 라비크를 경멸하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라비크가 아무것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신성한 것이 깡그리 없어지고 나면 모든 게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시 신성해지며, 소위 말하는 신앙은 곧잘 광신이 된다는 것을 외제니는 꿈에서도 알지 못한다. 창녀를 경멸하는 외제니를 보고, 라비크는 반박한다. "진짜 매춘부란 남자와 자는 대가로 하루하루 힘들게 연명하는 여자들보다는, 남자와 자 본 적도 없는 여자들 중에 더 많은 법이오. 결혼한 여자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만. 게다가 그 여자는 떠들어 대지도 않았소. 어쨋거나 당신은그 애의 하루를 망쳐 버렸단 말이요." 라비크는 외제니를 걸어 다니는 도덕 교과서 같은 년, 구역질 나는 열녀 타령이라며 일소에 부친다. 라비크를 고문했던 게슈타포인 하케, 라비크의 약점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의사인 뒤랑도 외제니와 같은 계열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나약한 존재이기에, 그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그 어떤 명분에 매달린다. 그들은 언젠가는 죽고 마는 인간의 삶을 직시할 수 없어 내세와 천국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진실을 회피하고, 그러한 관념에 자신을 묶어 둠으로써 노예의 삶을 산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한다. 그 폭력이 타인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상을 망가뜨리고 만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3. 라비크의 망명 생활에 푸근한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은 또한 소시민과의 다정한 대화 장면들이다. 조앙 마두와의 사랑, 모로소프와의 사랑, 하케에 대한 복수라는 본 줄거리가 진행되는 가운데 곳곳에서 펼쳐지는 작은 에피소드들은 이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본 줄거리는 엄숙하고 무겁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보다 밝고 경쾌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 살아남기 위해 보험회사를 상대로 온갖 잔꾀를 생각해 내는 소년과 더불어 기쁨과 안타까움을 함께 나누는 장면, 성병에 걸린 유곽 아가씨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억울하게 지불한 돈을 산파에게서 찾아 주기까지 하는 의협심, 아침에 침대를 정리하는 아이하고 농담을 나누며 지폐를 건네는 장면, 환자가 떠나면서 주고 간 선물을 보고 좋아하는 간호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 고향으로 돌아가 카페를 차리고 결혼을 하겠다는 소박한 꿈에 젖어 있는 술집 마담과의 우정.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운 가운데서 주고받는 섬세한 인간적 배려. 배경은 어두우나 그 장면을 채우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따뜻한 기운을 발산한다. 무명용사가 따로 있는가. 여기에 등장하는 착한 인물들이 다 무명용사들 아닌가?
라비크의 친구인 모로소프는 라비크에 비해서 낙천적이다. 카페에 느긋하게 앉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거리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저녁을 찬양하고 절망이란 놈의 낯짝에 침이나 뱉으라고 일갈한다. 모로소프는 정치 과잉의 현상을 시대의 징후로 경멸한다. 우리는 사랑의 영역에서는 큰 소리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너무도 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모로소프가 보기에 이 시대는 '화폐 위조범의 시대'이다. 그들은 무기 공장을 세우면서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구실을 대며, 강제 수용소를 만드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의는 모든 당파적인 발광을 덮어 주는 가면이 되었고, 정치 깡패들은 구세주가 되었으며, 자유는 모든 권력 욕구를 변호하는 큰소리가 되고 말았다. 위조지폐! 정신의 위조지폐!이다. 사기선전이고 조잡한 마키아벨리즘이며, 암흑 세계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관념주의이다.
4. 카페 푸케는 1901년 루이 푸케가 개점한 후 샹젤리제 거리의 명물이 되었고, 2차 대전 후엔 《개선문》덕택에 더 유명해졌다. 라비크가 게슈타포인 하케를 발견하는 것은 이 카페에서다. 소설의 대미에서 라비크는 친구인 모로소프에게 전쟁이 끝나면 이 카페에서 다시 만나자고 한다. 그러자 모로소프는 카페의 어떤 쪽, 그러니까 샹젤리제 거리 쪽인지 조르주5세 거리 쪽인지 되묻는다. 다정한 친구를 가졌던 사람은 잘 안다. 만에 하나 우연 때문에 만나지 못할까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헤어짐은 눈물겹다.
레마르크는 푸케에 올 때면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샹젤리제 거리와 조르주5세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 쪽 테라스, 개선문이 바로 내다보이는 자리가 그의 지정석이다. 그러나 《개선문》의 두 친구, 라비크의 표현대로 하자면 영웅인 척 하는 두 바보, 라비크와 모로소프는 전쟁 후 다시는 카페를 찾지 못한다. 문학과 현실은 이처럼 아득한 깊이에서 서로 만나고 서로 빗겨 간다. 레마르크는 갔지만, 《개선문》은 남았고, 라비크와 조앙 마두의 사랑, 라비크와 모로소프의 우정은 따뜻한 불씨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개선문》은 사랑과 우정과 친절이야말로 인간성의 꺼질 수 없는 불길임을 증언하는 작품이다.
출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개선문》,장희창, (민음사)
첫댓글 해설문을 읽으면 작품을 읽은 만큼이나 마음에 와 닿습니다. 박정숙 선생님, 요즘 좋은 글을 많이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회원님이 귀감입니다. 우리도 배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