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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찬양해서 들은 것처럼 지금 사는 세상은 이렇게 앞을 자랄 수 없는 폭풍으로 가득한 바다와 같은 측면이 있는데 우리에게 방향을 정확하게 아시고 바다도 잘 아시는 안내자가 확실하게 필요한 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레바논이나 아니면 이란 같은 때에 떨어진 헤어 스트라이크 하고 런던에 투 스트라이크하고 비슷한 점이 있죠. 그런 레바논에 에어스트라이크가 있다면 런던에는 튜브 스트라이크가 있다. 둘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죠. 우리가 비교할 수 없이 큰 차이가 있는데 공통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그들의 생명과 고통을 볼모로 삼아서라도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겠다고 하는 욕심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스트라이크가 있는 곳은 참으로 많습니다. 어디를 가도 공격이 있어요. 그렇다고 모든 스트라이크가 다 나쁘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생존이나 정의 실현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 하는 것이죠.
특히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들이나 이번 주에 런던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지하철 파업이 그렇다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떤 이는 전쟁을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거짓과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나 이익의 관계로만 보아야 한다고 말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일면 그런 부분도 있어요. 이해 관계, 이익 관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선이 있고 악이 있고 거짓이 있고 진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 말미에서 무고하게 고통을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쟁 싸움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 전혀 도움도 위로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은 오늘의 성경 말씀이 가르치듯이 학대를 학대라 악을 악이라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1절인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하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아주 오래전에 기록된 말씀이죠. 그렇지만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의 시대에도 맞는 부분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대는 학대죠. 압제는 죄입니다. 학대하는 자들이 있고 학대를 받는 자들이 있는 것이고, 학대하는 자들에게는 분명 힘이 있는 것이고, 학대를 받는 자들에게는 힘이 없고 또 위로자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학대라는 말 오늘 본문에도 학대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죠. 아주 중요한 말인데, 성경에서 학대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쓰이는 경우도 있어요.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가리켜 말을 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명령을 뒤따르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들이 학대를 받고 압제를 받았도다라고 말을 해요. 여기서 말하는 학대와 압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죠.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성경에서 학대는 힘을 악하게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누르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착취이고 갈치고 수탈이라 하는 것이죠.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쉽게 말해서 힘이에요.
힘 힘, 파워, 스트레스 힘인데 이거는 물리적인 힘, 정치적인 힘, 경제적인 힘, 정신적인 힘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말이에요. 선한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고, 악한 의미로도 사용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주님이 주시는 그 힘에도 사용되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게 가는 도 힘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이 되는데, 오늘의 본문은 후자의 경우이죠. 곧 힘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서 악하게 힘을 그 힘을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학대받는 자들에게는 힘이 없어요.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사람들인데 과부, 고아, 나그네들이 있죠. 그들은 가난한 자들, 공핍한 자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자녀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있는 눈물은 그들이 받는 그 학대의 정도가 얼마나 큰지를 가르켜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 때나 울지 않죠. 정말로 기쁘고 즐거울 때 그때 눈물을 흘릴 수 있고, 또한 정말로 힘들고 어려울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을 더욱 슬프게 힘들게 하는 것은 학대받는 자들에게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학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에게 학대받는 자들에게 위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각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1절의 말씀은 학대받는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여기에는 학대를 학대라 하고 그들에게 학대받는 자들에게 위로자가 없다고 하는 그 현실을 그대로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 이 3절에 기록된 말씀은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을 수가 있어요.
다시 한 번 볼까요?
한번 다시 한 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도다.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가 않죠.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을 하는 뜻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방금 앞에서는 학대를 받는 자들의 어려운 슬픈 현실에 대해서 말했는데, 2 3절 여기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아직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이 더 복되다, 그 둘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복되다 하고 있는 거죠. 이 둘을 사실 의미롭게 연결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도서 전체의 틀 안에서 보면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요. 전도서의 대부분은 전도자의 말로 돼 있어요.전도자라고 부름을 받는 이름을 받는 자의 말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12장으로 되어 있는 전도서의 저자는 그가 아니에요. 전도자의 말을 전하는 소개하는 저자가 따로가 있는 거예요. 전도사라는 책이 있으면 전도 그 책에 저자가 있고 그다음에 그 안에 담겨진 전도자의 말이 있는 거죠. 이것은 여기 지금 4장 1절부터 3절은 그 전도자의 말이에요.
이 말을 전하는 이 저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행하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도서의 구성 안에서 보면 그 말을 듣고 한번 잘 생각해 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에서의 특징 중에 하나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도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이 말대로 정말로 세상에 태어나서 해 알에서 행하는 그 모든 악을 다 보는 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났어도 그냥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복된 것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죠 악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가룟 유다를 보고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악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데, 세상에 거의 모든 사람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 우리의 부모님들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죠.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가 무슨 뜻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을까요?
이것을 곧 2절에 3절 이 말씀을 1절과 함께 읽으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대를 받고 또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 1절에서 말하는 그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고 세상을 세상의 악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좋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나쁘다. 1절에서 말하는 것은 2 3절에서 말하는 그 내용들 보다 나쁠 정도로 안 좋을 정도로 나쁘다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보면 이 본문이 가리키는 것은 2절 3절에 기록된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그러니까 믿음을 버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가치나 의미를 거부하자는 허무주의도 아니에요. 못마땅한 현실, 못마땅한 이 세상 이 세상을 그냥 비웃기만 하라는 냉소주의도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라 하는 염세주의도 아니죠. 그런 것들은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학대의 통로가 되거나 또 다른 학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학대의 주체나 통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인 경우 그렇고, 그리스도의 하나님인 경우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학대를 행하면 자기의 믿는 것과 반대로 간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실 때 학들을 분명하게 금하셨어요. 레위기 19장 13절 말씀인데 제가 읽어드리면
너는 내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학대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학대하지 말며, 풍끈의 삭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내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내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안에서 이웃을 형제를 학대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아주 큰 범죄가 되는 것이에요.
솔로몬이 그의 아들을 위해 드린 기도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72편에 보면 그가 여기서 말하는 그는 왕의 아들, 왕이 될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라, 학대하는 자를 꺾으리라 하는 것이에요. 만일 이스라엘이 이런 말씀을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 말한다면 많은 경우 그렇죠.
그러면 그들은 유대교는 그런 면에서 유대교와 이슬람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유대인들로서 구약에만 계속 머무는 것이죠. 신약으로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그 세계와 아무 관계가 없는 곳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사람의 세상,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확대라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세상 마지막 때에 있을 심판의 중요한 대상인 것이죠.
혹시 여러분이 학대를 하는 자이거나 학대를 받는 위치에 있다면 잘 기억해야 될 성경의 내용입니다. 기억함으로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도 같은 뜻을 보여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하나님의 일이 있는데 그 일들이 자신 안에서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씀을 하셔요. 그때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신다 하는 말씀도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눌린 자가 바로 오늘 전도서 본문에 의해서 말하는 학대받는 자와 같습니다.
이사야는 감옥을 말했다면 그리스도는 그와 같이 감옥에 갇힌 자들 같이 눌린 자 모두를 다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는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그 일을 정말로 이루셨습니다.
그 눌림에는 우리가 많이 잘 듣고 아는 이 우울함도 포함이 돼요. 어프레스하고 디프레스에는 둘 다 눌러 내림에 포함이 되어 혹시 여러분들이 그 학대나 압재나 우울함을 경험을 하고 있다면 오늘 전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해방시켜주신 풀어주신 그 자유를 다 얻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는 죄 없는 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학대하는 자들의 악한 정체가 드러났어요. 그리고 동시에 학대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정, 소위 빈디케이션을 분명하게 받은 것입니다. 하나 학대받는 자들이 학대를 받는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학대하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죄의 세력인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켜 보여주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학대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학대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위로가 위로가 되는 사람,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도 쉽지 않죠. 우리의 삶도 어렵죠. 그러나 우리가 가진 작은 힘을 그것은 아까 말한 것처럼 물리적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모든 힘을 가리키느라고 그랬어요. 그 힘을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할 때 이 지금의 혼란한 상황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가디언이라는 일간지가 있죠. 여기에 올라온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이번 주 중에 있었습니다. 나는 카톨릭 신자가 되거나 어떤 종교를 갖게 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집단 학살이 가져오는 절망감, 석유를 위해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전쟁들, 제프리 엡스타인과 그와 결탁한 부유하고 권력 있는 포식자들, 우리의 호기심과 끈기를 무너뜨리는 생성형 AI, 그리고 인간이 서로에게 저지를 수 있는 일들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공포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면서 나는 점점 어떤 무언가를 향해 돌아서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이런 글을 만났어요.
말의 요점은 고난 악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그렇다고 해서 허무주의나 냉소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고 악을 악으로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 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요.
이 말을 쓴 사람은 레베카 쇼라고 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린 시절에는 좀 교회를 좀 다녔을지 몰랐는데,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싫어할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악을 악이라 말하는 로마 교황을 통해서 뭔가를 느끼고 그것으로 돌아서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악을 악으로 말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가 돌아서게 되었다고 하는 돌아서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물어보았습니다. 학대를 학대라고 규정하는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도덕일까요?
인간은 이보다 더 선할 수 있다 하는 희망일까요?
세상을 이해하는 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의미로운 언어나 언어 체계일까요?
서로 돌보고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람들의 모임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어떤 그 무엇일까요?
잘 생각하면 이 모든 것들은 세상에 많이 있어요. 어디에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악으로 부르고 있는 그 세계에도 다 있는 것들입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죠. 자기가 선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이라 불리는 것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악인의 머릿속에도 선이 있고요. 사랑이 있고요. 진리가 있고 평화가 있어요. 그것들이 과연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엇이 아니라, 누구라 불리는 누구라 부를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 저와 여러분 같은 인격적인 존재라 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믿는 자로서 돌아선 것은 단순히 사랑이나 정의, 그거는 그러한 개념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 사랑과 참 정의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선 것이죠. 우리가 찬양했듯이 우리가 누구에게로 돌아가요?
주님께로 주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을 통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는 학대를 학대로 보신 분이오, 학대받는 자들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 분이오, 하신 모든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학대받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을 볼 때 그들의 위로자, 그들의 치료자 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행하신 그 길을 따라서 기쁘고 즐겁게 행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러분 모두가 그런 사람 되어 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