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 마티스의 작품세계 Ⅲ
[1906~1914]
- Henri Matisse
야수파 표현주의 화가 Fauvism,expressionism:1869.12.31~1954.11.31]
마티스(Matisse, Henri: 1869~1954) 에 대하여.......
마티스는 오랜 예술 활동을 통해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등 반드시 그 순서대로는 아니더라도 19세기의 갖가지 미술 운동에서 영향을 섭취하여 자기 예술을 살찌우고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전체적으로 보아 마티스의 양식은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20세기의 가장 창의적인 거장의 한 사람으로 변신했고, 오늘날 젊은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20세기 전반의 몇 안되는 화가이기도 하다.
마티스의 예술은 분명히 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이러한 지역적인 양식을 철저히 뛰어넘고 있었다. 뒷날 이들 작품은 20세기의 국제 미술 문화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파리의 다른 몇몇 거장들에 못지 않은 지위를 굳혔다.
미술사에 있어서 마티스의 명목상의지위는 야수파의 선도자였다. 이는 피카소가, 그리고 어느 모로는 브라크가 입체파의 선도자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기지다. 그러나 야수파는 연약하고도 단명한 운동이었고, 화파를 형성한 후에도 공식화된 강령을 갖춘 적이 없었다.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피카소의 영원한 라이발 앙리 마티스
색채 에너지의 발견
회화의 제왕인 피카소가 일생의 라이벌로 여긴 화가가 있다. 미술계를 석권한 피카소도 그의 탁월한 미술적 재능에 고개를 조아렸다. 두 화가는 평생토록 질투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천재성의 우열을 가르는 세기의 대결을 벌였다.
영원한 맞수인 두 화가의 치열한 승부욕으로 인해 현대 미술은 찬란하게 꽃피웠다. 그렇다면 피카소의 숙명적인 맞수는 누구일까? 바로 색채의 대가인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다. 피카소가 원근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회화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마티스도 질세라 색채의 왕국을 설립했다.
그런데 마티스가 건설한 색채의 나라가 미술계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당시 대다수의 화가들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데생, 즉 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데생은 이성, 색채는 감정에 비유하면서 데생은 우대하고 색채는 홀대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색채를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면서 데생 대신 색채로 사물을 표현했다. 나무는 빨간색, 사람의 피부는 파란색, 하늘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대상의 원래 색깔과는 전혀 다른 색채, 그것도 강렬하게 칠한 바람에 마티스는 '야수파 화가'라는 희한한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야수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원색을 사용해서 그림에 표현했다는 뜻이다. 그럼 마티스의 대표작을 감상하면서 그가 색채의 왕국을 건설한 동기를 추적해보자.
1905년 마티스는 이 초상화를 파리 살롱 도톤 전람회에 출품했다. 초상화의 모델은 마티스의 부인이다. 그녀는 크고 화려한 모자를 쓰고, 주황색 벨트가 달린 사치스런 드레스를 입었으며, 한 손에는 부채를 든 채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인물의 표현 방식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파격적이다.
커다란 모자는 물감을 칠했다기보다 물감을 덕지덕지 붙인 꼴이고, 얼굴도 살색 대신 녹색, 연보라색, 파란색을 칠했으며, 목에는 빨강과 주황을 마치 낙서하듯 색칠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머리카락도 한쪽은 빨강, 다른 한쪽은 녹색이다. 야한 원색을 화면에 거칠게 문질러서 지저분해진 초상화는 여인을 우아하고 감미롭게 묘사하던 다른 초상화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마티스는 인물을 닮게 그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가. 화가의 회화적 기교나 재능의 잣대인 데생이나 명암까지도 무시했다. 마치 난폭한 무법자처럼 원색의 색채를 무기 삼아 화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회화의 전통을 파괴한 마티스의 초상화는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평론가들은 입체감, 공간적 깊이, 정교한 붓질 등 전통 미술이 추구한 미적 가치를 짓밟은 마티스의 야만적인 행위에 경악했다. 마티스는 대상을 충실하게 묘사해야 할 예술가의 본분을 저버리고 화가에게 금기인 원색을 버젓이 사용했다.
또한 해부학적인 지식도 저버렸다. 추함이 아름다움을 이겼다. 조화와 균형, 비례를 존중하던 미술의 고귀한 전통은 야만인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관람객들은 미술의 질서를 파괴한 화가의 야수 같은 짓에 분개했다. 조잡하고, 역겨운, 최악의 그림이라면서 마티스에게 야유를 퍼붓고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미술계를 장악한 보수적인 화가들도 마티스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기대에 부풀어 전시장을 찾았던 마티스는 자신을 겨냥한 인신공격성 비난이 쏟아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두 번 다시 전시장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아내에게도 전람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티스는 왜 비난을 자초한 것일까? 색채가 형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했던 마티스는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는 색채라고 믿었다. 그는 감정의 언어인 색채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최초의 화가가 되고 싶었다. 마티스는 그런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감정이 없는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
모로코의 전통 의상을 입은 채 조용히 앉아있는 여인을 보라.
색채는 감정이고, 감각이며, 에너지고, 생명이라는 마티스의 주장을 생생하게 증명하지 않는가. 이 그림에서도 드러나듯 마티스는 전통 미술이 중시하는 주제와 형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하면 관람객의 상상력을 짓누르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정한 화가에게 한 송이의 장미를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장미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지금껏 그렸던 모든 장미를 잊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티스에게 색채는 주제이고 형태이며 명암이었기에 그는 평생에 걸쳐서 열정적으로 색채의 가치를 증명하는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마티스는 색채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강력한 색채의 효과를 탐구하라, 그림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특정한 파란색은 당신의 영혼을 파고들며, 특정한 빨간색은 당신의 혈압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색채가 지닌 미술 치료의 힘을 확신한 나머지 병석에 누운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을 실내에 걸어둘 것을 권했다.
마티스는 미술의 전통에 도전해서 색채의 가치를 인식시키고 색채를 해방시켰다. 색채의 혁명가 마티스 덕분에 화가들은 자유롭게 색채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게 되었다
Collioure Landscape, 1906, Oil on canvas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USA
Dishes and Fruit, 1906, Oil on canvas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Marguerite, 1906, Oil on canvas, 32 x 24 cm, Marion Smooke Collection
Nude in a Wood, 1906, Oil on panel , 40.6 x 32.3 cm
Brooklyn Museum, Brooklyn, New York, USA
Self-Portrait in a Striped T-Shirt, 1906, 55 x 46 cm
Royal Museum of Fine Arts, Copenhagen
Still Life with a Red Rug, 1906, Oil on canvas , 89 x 116.5 cm
Musée des Beaux-Arts, Grenoble, France
Still Life with a Plaster Figure, 1906 , oil on canvas , 54 cm X 45.1 cm
Yale University Art Gallery (United States - New Haven, Connecticut)
Still LIfe with a Geranium, 1906, oil on canvas , 97.9 cm X 80.2 cm
Art Institute of Chicago (United States - Chicago)
Still Life with Vegetables, 1905–6, Oil on canvas, 38.4 cm x 46 cm
Jacques and Natasha Gelman Collection,
Still Life with Blue Tablecloth, 1906, Oil on canvas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Gypsy , 1905-1906, oil on canvas , 55 cm X 46 cm ,
Musée de l'Annonciade (France - Saint-Tropez
The Joy of Life, Le bonheur de vivre, 1905-1906, Oil on canvas , 175 x 241 cm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USA
이 작품은 마티스의 야수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고갱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심지어 이 그림의 제목도 고갱이 타히티에서 모색했던 자연 상태의 인간성에 대한 환상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티스가 묘사하고 있는 인간은 종교적이거나, 야만인은 아니다.
이 그림은 고전적 의미에서 볼 때 티치아노의 '바커스 축제'처럼 한의 세속적인 장면에 다름 아닌 것이다.심지어 인물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조차도 고전적인 이미지를 풍기며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 그림이 혁명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단순함과 '미완성의 재주' 때문이다.마티스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함축적인 방법으로 형태를 설명하고 있으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입체적인 형태와 공간적인 깊이의 본질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다.
동양의 화가들이 무릉도원을 꿈꾸었다면 서양의 화가들은 이상향을 상상하여 화폭에 담았다. 대체로 서양 그림의 이상향은 '아르카디아'(Arcadia) 또는 '황금시대'라는 주제 아래 편안하고 목가적이며 시적인 풍경 속에 한가롭게 노니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대미술에서도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화가들이 많았지만 그중에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앙리 마티스의 '생의 기쁨'(사진·1906년)이다. '생의 기쁨'은 조화로운 색채와 나른하고 교태로운 선이 어우러진 나무와 수풀에 둘러싸인 비원(秘苑)에 한가롭게 누워 있거나 춤을 추거나, 플루트를 불거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전체 화면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관능적이다. 이 그림은 마티스가 청년기의 자유분방한 양식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한 색채와 구불거리는 선이 특징인 독자적인 양식을 정립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생의 기쁨'을 산 사람은 항균제 아지롤을 개발하여 큰돈을 벌었던 미국의 의사 알버트 반즈였다. 1922년에 그는 반즈 재단을 창립했고 약 2500점이 넘는 작품을 구입하였는데 그 중 59점이 마티스의 작품이었다.
반즈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전시 작품들을 생전에 전시되었던 상태 그대로 보존할 것과 미술관은 일주일에 두 번만 열고, 미리 예약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며, 다른 전시를 위해 대여하거나 순회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출판할 경우에는 흑백도판으로만 가능하다는 약정서를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이유에서 '생의 기쁨'의 색채는 늘 상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재단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생의 기쁨'을 비롯한 그의 소장품들이 1993년에서 1995년 사이에 여러 도시를 순회하고 컬러 도판으로 된 도록도 간행하였다.
도쿄에서도 전시되었던 이 작품을 관람했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정도로 황홀한 것이었다. 펜실베이니아의 메리온에 있는 반즈 재단은 앞으로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 옮길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 김영나 서울대교수·서양미술사/조선일보/2010.08.11
거기서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을 끌게되어 그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자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6년에 제작된 [삶의 기쁨]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야수주의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으며, 그의 기나긴 화력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단조로운 색면, 심한 굴곡을 보이는 윤곽선, 그리고 원시적인 형태는 분명히 고갱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그 주제까지도 고갱이 타히티섬에서 추구한<자연 상태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마티스의 그림은 <고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인체에 대한 깊은 지식이 깔려 있음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아카데믹한 전통속에서 화가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결정적으로 혁명적인요소가 들어있으며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모로가 " 그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 라고 예언한 것처럼 훗날 '생략의 천재' 라고 일컬어지는 마티스의 철저한 단순화 , 즉 불필요한 것은 일체 생략하든가 아니면 암시적으로 표현하면서 화면에는 조소적 형태와 공간의 깊이의 본질적 요소가 보유 되어 있었다.
"회화란 평면 위에 선과 색채를 리드미컬하게 배치하는 것이다." 라고 마티스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자연의 기본적인 특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 특성을 평면적인 장식으로 환원함이 없이, 자연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까지 단순화할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 내가 탐구하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표현이다. 그러나 표현은 인간의 얼굴에 반영된 정열로써 구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화면의 회화적 질서 그 전체가 표현이다. 인물이라던가 대상의 위치, 그것들을 둘러싼 여백의 공간, 비례,이들 모두가 하나의 역활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채와 거친 붓놀림 등은 그의 작품 세계가 기본적으로 사물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비설명적이면서 주관적인 강렬한 색채(튜브에서 바로 짜낸 강렬한 원색 ), 붓자국에 심취한것은 인상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며 이는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수 있다.
The Lying Nude, 1906,
The Reader, Marguerite Matisse, 1906, Oil on canvas , 65 x 81 cm
Musée des Beaux-Arts, Grenoble, France
Branch of Flowers, 1906, oil on canvas , 40 cm X 31.8 cm , Private collection
The Red onions, 1906, 46 x 55 cm
Statens Museum for Kunst, Copenhagen, Denmark
Sailboats 1906.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he Young Sailor I, 1906, Oil on canvas, 100 x 82 cm
Collection of Mrs Sign Welhaven, Oslo, Norway
The Young Sailor II, 1906, Oil on canvas , 100 x 81 cm, Private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