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72
12월12일 [대림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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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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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vkjrIf3zJQ
(조용철 바오로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123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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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언젠가 회의차 지방에 내려갔다가 밤늦은 시각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 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역 주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노숙인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 신자들의 무료급식 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 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 동안 바짝 다가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불란함이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배식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 아마도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과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어 보기가 좋았습니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습니다. 첫 번째 줄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쇠고기국밥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 그릇 받아먹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그럴 듯했습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겠지요.
그리고 두번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노숙인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을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번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커피를 타드리고 있었습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하고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 모습이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 못해 제게 한 소리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백날 거기 서 있어 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 서세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는 진정 감동 깊은 축제 한마당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미사였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던 백성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지니셨던 측은지심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지녀야 할 주일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끼 제공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바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행위이자 구원을 직접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무료급식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을 더 양산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가난의 악순환을 벗어나 보려고 얼마나 발버둥쳐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들일지 모릅니다.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노숙인들을 위한 더욱 근본적 해결책이 강구되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노숙인들, 또 후보 노숙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우리 손을 통해서 작동되길 바랍니다.
자선행위, 몸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시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시작하면 그 '맛'이 대단합니다. 내 호주머니에서 뭔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은 잠시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느새 빠져나간 그 이상의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자선은 우리에게 뿌듯한 마음, 넉넉한 가슴을 축복의 선물로 베풀어주십니다.
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자선은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도구입니다.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무거운 등짐 하나를 내려놓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자선과 더불어 우리는 오랜 상처와 아픈 기억들이 조금씩 치유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누려고 해도 나눌 거리가 있어야 나누지?’ 라는 분들, 조금만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건네는 작은 미소 한번 역시 큰 자선입니다. 실의에 빠져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힘내라'는 표시로 어깨 한번 두드려줄 때, 우리는 큰 자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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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oZCNoCLE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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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청하세요>
오늘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을 나누어주고, 음식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한을 메시아로 아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소위 ‘사랑실천’을 말씀하시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실천법은 세례자 요한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새로 태어나게’,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요한은 예수님과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CCC, 460)라는 말씀을 인용해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법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실천법을 알려주는 수준은 세례자 요한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사랑실천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오십니다. 그 능력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믿느냐에 따라 나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허준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감기를 빨리 낫는 비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허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물어도 될 것을 예수님께 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높은 것을 주러 오셨습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013) 의 내용입니다. 최보나는 광고회사에서 5년째 조감독 일을 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녀를 여자로 봐주기는커녕 무시하고 구박하고 이용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런 대우가 어쩌면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 촬영지에서 이승재를 만납니다. 이승재는 신인 시절 최보나가 감독인 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를 한적이 있는데, 잘나가는 지금은 온갖 허세와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보나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자신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보나는 해변에 외로이 혼자 남아있다 모래사장 위에서 깜박 잠이 듭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다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추워서 일어난 보나는 주변을 돌아보던 중 잡화 물건이 가득 실린 트럭을 발견합니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 트럭으로 향했는데 그 트럭에서는 누구든 따라 하기만 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수많은 비디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나는 ‘남자사용설명서 비디오’ 꾸러미를 삽니다.
비디오를 보다 잠든 내용을 다음 날 아침부터 우연히 써먹으니 이상하게 정말 먹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까칠하게만 살아왔는데, 필요에 따라 사과하고 웃어주고 거리를 좁히는 등의 절차를 따라 하면서 여러 위기를 모면합니다. 점점 회사와 남자와 세상의 인정을 받아갑니다. 이렇게 남자사용설명서를 완벽하게 익혀가면서 그는 승재의 사랑도 얻습니다.
그러다 이승재는 보나의 집에서 그녀가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자신에게 그대로 따라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용당한 느낌에 그녀를 떠납니다. 그녀는 승재에게 진심을 말해보려 했지만 실제로 비디오의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기에 승재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디오의 마지막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라.” 자신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고쳐주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실천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가다 보면 자신에게 합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소중함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전에 오랜 시간을 걸쳐 행동 실천법이 나왔던 것일까요? 이는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을 본 보나는 마음을 다잡고 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존감으로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일도 승승장구합니다. 이렇게 되자 승재는 그녀의 당찬 모습에 다시 끌립니다. 보나가 승재를 향해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승재는 보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인기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만인 앞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아닌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입니다.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디오에 비유하기는 차마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세례자 요한이 행동을 지정해주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자존감을 주는 방법 면에서는 보나가 배운 비디오와 같은 역할과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붓감을 고를 때 자신과 낙타에게 물을 길어주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에 익숙한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사랑의 실천이 비록 인간적이기는 하나 그것 자체로 그 여인이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존감도 지니고 있음을 안 것입니다.
종은 여인을 이사악에게 보내고 이사악은 그녀와 하나가 됩니다. 이사악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교회를 상징하는 레베카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임을 알아 그 실천에 노력하는 이미 세례자 요한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지정해주는 사랑의 실천만을 가지고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사랑 자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인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는 이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늑대에게 키워지면 늑대라고 믿고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아닌 늑대의 본성이 나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사랑이 나오게 하려면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믿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한 몸이 될 수 있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사랑의 실천만 묻는 것은 오히려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여전히 요한을 메시아로 여긴 사람들처럼 메시아를 요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기껏 예수님께 와서 새로 태어날 생각은 안 하고 사랑의 실천방법만을 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당신 신발 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수준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할 수 있어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 스승님 능력의 두 배를 청합니다. 제자가 어떻게 스승의 두 배를 청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엘리야는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믿어주는 엘리사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두 배의 영을 주님께 청하여 제자에게 줍니다.
우리도 주님께 청할 때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바로 당신과 하나가 되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청해야 그분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당신께서 하신 일의 두 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청해도 다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공경하는 길은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해 달라는 그 믿음입니다. 나의 자존감을 주는 정체성을 확고히 믿게 할 믿음을 청하는 것이 주님께 가장 합당하고 기쁘게 받아주실 청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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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므로 ‘기쁨의 주일’, 혹은 ‘장미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또한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항구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요한 세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즉 오시는 분은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16절)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손에 키를 드시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4-7: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 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6절)아뢸 때,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7절)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 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의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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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루카 3,10-14)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구체적으로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답변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또는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라.”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일차적으로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입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고 살던 대로 사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은, “회개한다면 사랑을 실천하여라.”, 또는 “사랑 실천으로 회개를 완성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랑 실천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하는 권고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하는 훈계입니다. 회개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라는 말은, “세금을 거둘 때 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만 하여라.”라는 뜻인데, “권력으로 도둑질하지 마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도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라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을 권력으로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권력으로 강도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도 역시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이 말은, 그가 참으로 진실하게 회개했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회개는 변화입니다. ‘새로운 삶’은 회개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해서 깨끗해졌다면 그 ‘깨끗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도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새롭게 되었으면서도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이미 은총을 받은 상태에서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됩니다.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면서 지은 죄가 더 큰 죄입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루카 3,15-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라는 말은, “내가 주는 세례는 회개의 표시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말은, “메시아의 세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사람들을 구원하는 세례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차원이 다릅니다.)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라는 말은, 알곡 입장에서는 ‘기쁜 소식’이 되고, 쭉정이 입장에서는 ‘무서운 경고’가 됩니다.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알곡이고, 아무 변화 없이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기쁜 소식’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기를 원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또 그 기쁨을 얻어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은, 목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었지만(루카 2,8-20), 당시에 왕이었던 헤로데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마태 2,1-18) 목자들은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뵈려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가 직접 가려고 하지 않고, 처음에는 동방박사들만 보냈고, 그 다음에는 군인들만 보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직접 갈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은 그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왕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이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기쁨이 커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수록’ 우리의 기쁨이 커진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무조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쭉정이 같은 사람들은, 즉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가까이 오실수록 두려움만 커집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인데, 사람들 쪽에서 그 기쁨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두려움만 키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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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저는 손님에게 집을 내어 주고, 옆에 있는 성당의 사제관에서 며칠 지냈습니다. 지난여름에도 한국에서 신부님이 오셨고, 그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손님은 뉴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선물로 책 한권을 주고 갔습니다. 책의 제목은 ‘세분의 어머니’입니다. 저는 방을 내 주었지만, 손님은 제게 마음의 양식을 주었습니다. 오늘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술품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예술품의 가치를 이야기해 주었고, 아들은 예술품을 통해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아들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군에서 아들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군에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아드님은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서 전사하였습니다.’ 아들 덕분에 목숨을 건진 병사는 아들의 얼굴을 그려서 아버지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예술 적인 가치는 없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그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술품을 경매에 내 놓았습니다. 상당한 가치가 있는 예술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경매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그린 초상화를 가장 먼저 경매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추어가 그린 것이고, 예술적인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초상화를 사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9달러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지 않았기 때문에 초상화는 9달러에 팔렸습니다. 이제 남은 예술품을 경매에 올릴 줄 알았는데 그날 경매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유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경매의 물건들은 아들의 초상화를 산 사람에게 모두 주시오.’ 가난했지만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은 단돈 9달러로 많은 예술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술품을 경제적인 가치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경매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으로 우리는 천국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더 두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맹자는 우리 사람들에게는 4가지의 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진 고유한 품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주역은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행을 행하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찾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에서는 우리가 자선을 베푸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품성이며, 그런 자선은 결국 우리를 이롭게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직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을 못 본척하고 스쳐지나간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빈자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 일에 쏟아 넣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주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러한 증여에 쏟아 넣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해를 정리하는 12월 달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나의 사랑과 나의 마음을 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기보다는 소유하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항상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그 말을 할 때,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이 호텔도 아니고 어디 휴양지도 아닌데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은 점점 커져야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철저한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반드시 많이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은 작다고 하여 미루지 말고, 악한 일이 비록 작다고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선현의 말씀이 귀를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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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쁨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한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는 끝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6항)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 밤,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기쁨을 전합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어 오십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쁨의 이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기’(필리 4,5 참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실수록, 우리는 더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실수록, 우리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내주십니다. 당신을 벗어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당신의 사랑과 현존으로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생기고,
그 확신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쁨은,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합니다. 곧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이에게 다가가 그를 기쁘게 해 줍니다. 자신을 내주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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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께서 내 안에 이미 오셨는데 왜 나는 기쁘지 않은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참된 메시아 예수님을 향하여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춥니다. 겸손과 비움은 참된 영적 기쁨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둘 때 우리는 그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적 기쁨과 평화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대림 3주, 기쁨의 주일인 오늘 진정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을 쫓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대림절은 감사와 기쁨, 그리고 나눔을 통해 이미 오신 주님을 만나는 시기입니다. 대림3주 세번째 분홍색 초가 밝혀졌습니다. 기쁨 주일인 오늘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오시는 주님께 참된 기쁨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그분 곁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그분 곁에 머물며 기도하는 대림시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보다는 삶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나누며 그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 역시 이 대림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며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어 주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약의 기쁨은 구약에서 나오는 하느님 체험에 대한 기쁨과 구원에 대한 기쁨을 넘어서는 세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모든 기쁨의 원천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분 나라에서 샘솟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고난을 통해 얻는 기쁨입니다. 산고의 고통 가운데 아기가 태어나듯이,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에서 부활의 희망을 보게 되듯이, 우리는 일상의 고통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미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리라는 희망에서 오는 초월적인 기쁨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샘솟는 이 기쁨, 고통을 넘어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이 기쁨은 세상의 만족이나 즐거움과 비교될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참된 영적 기쁨보다는 세상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에 빠지기도 하고, 현실의 위안만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 기쁨이 없는 쾌락의 끝은 허무임을 깨닫게 됩니다. 쾌락은 순간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결국 모두를 자멸시키고 맙니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 사이에 쾌락은 있었지만 기쁨은 없었다.
쾌락은 자꾸 탐하면 물리게 되어 있다.
우린 다같이 지쳐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결핍된 건 기쁨이었다.
피고 지는 꽃처럼,
퍼내고 나면 다시 솟는 샘물처럼,
새로 태어나는 기쁨이 우리 사이엔 없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우리를 고갈시키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를 충만하게 합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불안을 남기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기쁨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우리 맘에 평화를 줍니다.
지금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별하고 견디어 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인내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비워야 하는 지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군중과 세리, 군인에게 각자에 맞는 방법으로 참된 기쁨을 위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누어야 할 것, 만족해야 할 것들을 찾아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쾌락을 찾고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무엇인지 찾아 보아야 합니다. 육체적 쾌락, 심리적 쾌락, 영적인 쾌락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참된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이런 유혹들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런 유혹으로부터 지켜 줄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이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의 정화가 필요한가 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요 우리의 참된 기쁨의 원천이심을 겸손되이 고백하고 우리의 전인적인 변화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성령께 맡겨 드리고, 우리의 악습을 불로 정화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세례는 물의 세례이지만, 오시는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먼저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의 은총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 되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다음에 세례자 요한이 언급한 세례가 무엇이었습니까? “불의 세례!” 불의 세례는 마지막 날 받게 될 심판을 상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영적인 의미에서 성령의 세례는 우리를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세례입니다. 불의 세례는 우리의 외적이고 거짓된 자아를 모두 태워버려 온전한 영적 재탄생을 하게 하는 세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현실에 안주하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감옥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령의 불이 내릴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이가 됩니다. 주님의 밝은 빛이 불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뜨겁게 할 때, “내 안에 있는 나”는 온전히 사라지고 “주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발가 벗겨진 나,” 이것이 바로 “나의 영적인 재탄생”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발가벗고 우리 곁에 오셨듯이, 우리 역시 나에게서 죽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때, 아기처럼 순수한 영적의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진정 영적인 새로운 탄생을 맞이할 때 우리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내적 기쁨이 샘 솟게 됩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기쁨의 참된 원천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기쁨이십니다. 그분께 가까이 가면 갈 수록 우리의 기쁨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결국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기쁨의 삶이 바로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여러분들 모두에게 숙제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성탄을 보다 기쁘게 맞기 위해 성탄 전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씩 했으면 합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가 혹은 그녀가 참으로 기뻐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이신 하느님, 이 대림 시기에 있는 그대로의 저희 자신을 받아들이고 겸손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당신의 그 무한한 겸손을 본받게 하소서. 주님, 저희에게 당신의 뜨거운 사랑의 불을 놓아주시어 날마다 당신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 기쁨과 감사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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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익호 욥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욕심과 실수>
얼마 전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세상이 더 좋고 빠르게 발전하는 만큼 욕심은 더 커지고, 후회할 줄 알면서도 반복해서 더 큰 만족을 갈망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구원을 열망하던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요한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라.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려라. 지금에 만족해라.” 나의 것을 다른 이들과 기꺼이 나눌 줄 알며, 욕심 없이 만족할 수 있을 때 구원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의 이 말씀은 알아듣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 속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세상은 어느 정도 욕심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을 챙기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이 가진 것마저 포기해버리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아주 큰 실수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루카 5,11) 구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럼 도대체 ‘욕심을 버리려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쩌면 인간에게 욕심은 자연스러운 본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보다 더 가지고 싶은 유혹은 끝이 없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실수들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욕심의 방향을 세상과는 조금 다른 쪽으로 돌려보면 어떨까요? 그리스도를 위해 나의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욕심, 지금의 나와 내 이웃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심, 그리스도를 닮은 이웃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 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어리석은 실수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 있는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욕심은 나의 이웃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수는 주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세상과 멀어질 수 있는 실수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욕심은 끝이 없고, ‘그리스도를 위한’ 실수를 반복하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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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시영 베드로 신부님]
<주고 감사하기(Give and Thank you)>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들, 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 주일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배고픔에 시달리고, 집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병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고 천대받는 이들의 벗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그리스도의 사랑 실천 운동을 대중화해서 실천한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천교구에서 했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이었습니다. 참 좋은 운동이었고 의미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사회 일각에서도 낮은 수준에 머문 나눔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1%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언사이트’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서 유언을 해 놓으면 그대로 해줍니다. 법적 효력도 물론 있습니다. 가령 재산의 50%는 학교에 장학금으로 주고 50%는 무료급식소에 주라고 유언을 해 놓으면 그대로 해 준다는 겁니다.
이런 물질적인 나눔과 아울러서 시간 나누기, 노동 나누기와 같은 ‘품앗이 운동’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학원 강사인 젊은 엄마의 어린아이들을 이웃집 아주머니가 봐주면 자신은 이웃집 아주머니의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겁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옆집 아주머니가 김장을 해 주면 그 할머니는 아주머니 집에 가서 집안 청소를 해 주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방식에서 주고받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바로 품앗이 운동입니다. 나눔의 대안적인 방식으로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 할 겁니다.
품앗이 나눔의 방식처럼 나눔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참 할 수 있는 것이어야 좋은 겁니다. 이런 운동이 확산이 되면 나눔이라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고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바꾸어 주는 계기도 됩니다. 또한 나눔의 문화가 빈약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한 단계로 끌어 올릴 수 있게 됩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며 무저항주의자이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을 지닌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일에 아무 관심도 없이 오로지 피안의 세계에 잠겨 악기나 연주하면서 지내는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
지금 굶어 죽어가는 이웃이 옆에 있는데, 지금 추위에 떨고 얼어 죽어 가는 이웃이 옆에 있는데, 아파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기도만 하면서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겁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십시오.’ 이렇게 말만 하는 종교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굶어 죽어가는 이웃이 있으면 밥을 주고,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에게 연탄 한 장이라도 사 주고,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는 함께 고통에 동참해 주어야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교우 여러분들 중에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성녀 마더 데레사가 우리에게 남긴 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내어줄 것을 얼마만큼 갖고 있느냐보다는 우리가 얼마만큼 자신을 비우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비워야만 가득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나눔을 실천할 때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나눔의 영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주고나서 잊어 버리는 겁니다.(Give and forget) 더 나아가서 ‘주고 감사하기’(Give and Thank you)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내가 나눠 주었는데 상대방이 받아줘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나눔은 복음적인 나눔이 됩니다.
자선 주일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 보고 늘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비우고 뭔가를 이웃에게 나눌 때 그리고 ‘주고 감사하기’(Give and Thank you)를 할 때그곳이 바로 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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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윤근 베드로 신부님]
<베풂과 기쁨>
오늘 전례의 주제는 ‘기쁨’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기뻐하며 구원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기뻐한다. 대림절은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큰 기쁨의 시기이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의 표시로 가진 것을 서로 나누라고 요한이 외치고 있다. 회개하면 기뻐지고 기뻐지면 서로 나누게 된다.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만일 누구도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오늘은 특히 자선주일이다. 기쁜 날이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교회가 정한 날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자선을 받는 날이다. 우리가 자선을 베푼다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그것을 되돌려 받게 된다. 그래서 자선은 여러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주는 사람도 풍요롭고 받는 사람도 풍요롭게 된다. 주님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슬퍼하는 사람들 곁에서 일생 머물러 계셨다. 그분의 이웃은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우리도 잘나고, 똑똑하고, 있는 사람들만 사귀면 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적어도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오신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붙잡을 것이라고는 오직 주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천국을 차지하고 예수님을 차지한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땅에 쌓으면 좀 먹거나 녹슬어서 못쓰게 되며 또 도둑이 훔쳐간다고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인가? 그것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나누고 베푸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 내 것이 된다. 땅에 쌓은 것은 아무리 쌓아도 영원히 내 것이 되지 못한다. 하늘에 쌓는 것만이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따라서 기쁘기 때문에 나누고 또한 1년 동안 잘못 산 것이 많기 때문에 회개의 표시로 나누도록 하자. 그리고 나눌 때 자기 것으로 채워지는 풍요로움을 얻게 되며 또한 바로 그 나눔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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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 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스바 3,15.17)
이처럼, 그가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의 삶 안에, 그들의 현장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립비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곧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유배 중에 있으면서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생활과 하느님 말씀묵상과 성사거행과 공동체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가 일수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로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저희의 거부로 상처 입습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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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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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오늘 복음(루카3,10-18)은 주님의 오심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7-8)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을 듣고 군중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3,11)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아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너와 함께 나누는 주일입니다. 나눔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일입니다.
'자선의 원조'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대림시기에 우리는 판공성사를 봅니다. 판공성사는 주님의 큰 축일을 앞두고 나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 어떤 죄를 고백하셨습니까? '주일미사 빠졌다고?' 아니면 '기도를 게을리 했다고?' 그것보다 더 큰 죄가 바로 믿음이 약한 죄이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 아닐까요?
사랑 실천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선'입니다. 오늘도 기쁘게 나의 것을 내어 놓읍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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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루카 3,10-18(세례자 요한의 설교)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나>
나는
나이고 싶다
나는
나이어야 한다
내가
나일 때에만
나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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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공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들으면 “운이 좋았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그런 상황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만의 힘으로는 성공의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을 바꿔준 상황과 은인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자기 모습에서 그런 상황과 은인을 부른 것입니다.
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곁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자기 잘난 척만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잘난 체만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은인이 다가가려고 하고, 또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찾아갈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운이 없어요.”
긍정적인 사람, 겸손한 사람, 경청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곁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빨리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는 먼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들과 군인들은 자기들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수도 생활이나 영웅적인 생활을 강요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옳은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나누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세리 역시 정당한 세금만 받는 생활개선을 하라고 합니다. 군사도 왔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에게 온 군사는 이방인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 역시 회개해서 생활개선만 하면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회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 사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의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을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교만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당장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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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 전하기>
두 가족이 낚시를 갔습니다. 각 가정의 아버지 모두 낚시를 좋아하지만, 자녀들은 모두 처음 낚시를 하는 것이었지요. 첫째 가족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을 앉혀 놓고 기초를 제대로 알아야 낚시를 잘 할 수 있다면서 낚시 수업을 합니다. 낚시대 잡는 법, 미끼 끼는 법, 잡은 물고기를 건지는 법 등을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가족의 아버지는 이론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낚시의 설렘, 짜릿한 손맛, 물고기를 건지는 순간의 희열 그리고 직접 잡은 물고기를 회 떠서 먹는 맛까지 실감 나게 말했습니다.
어느 가족의 자녀가 더 낚시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이론보다 실전의 감정을 느꼈던 두 번째 가족이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론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맛을 들였을 때가 먼저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못 해서 이론적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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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대림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날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저녁미사를 시작하려는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미사가 시작되니 기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부부가 4살배기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돈다는 것이었습니다. 4살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쥐어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먹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여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 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잠언 11,25) 받기 위해 준다면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 하고 미사 봉헌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이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벌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신명기 30,11-13)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4) 그런데 마음과 몸이 따로 이고,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앞이 훤하잖아요? 흰머리라도 좋다 빠지지만 말아다오! 어느 분이 머리 염색약을 슬며시 가져 다 놓으셨는데 발라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더 빠지잖아요. 지금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어찌 되었든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21절 이하에 보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지요. 왜 고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가르쳐 주었는데 왜 그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는데, 행복해 진데 왜 그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 사람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무엇이 묻은 것을 확인하고도 그냥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바보입니다. ‘가진 것을 ,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듣고도 왜 그냥 넘어갑니까?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 4,6-7)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찰떡궁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너무 예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옳아! 그러니까 우리는 찰떡 궁합이야!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용하게도 알아맞히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과 찰떡궁합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매번 지적하고 명하지 않아도 그분 뜻을 먼저 알아듣고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들며 무엇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깨우치길 바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임금에게 직언을 했습니다.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다니4,24).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자기 영광을 떨치려고 하다가 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제 정신을 차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진실하고 그 길은 다 공정하니 그분께서는 교만 속에 걷는 자들을 낮추실 수 있는 분이다”(다니4,34).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죄를 벗고 가난한 이를 도우면 허물을 벗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 됩니다. ‘인정이 많고 동정 어려 남에게 꾸어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시편 37,25-26)
그러므로 “너희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15,10)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암브로오시오 성인은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도 “자선을 하면 영벌을 면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적은 것에도 만족하시니 많고 적음을 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선을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내 자신의 영생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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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놀부 집에 스님께서 시주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코웃음을 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었습니다. 네가 나를 외면 해도 나는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하고 “가나봐라 가나봐라 가나봐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놀부가 질세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하였답니다.
지나가던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잘해봐라 잘해봐라 잘해봐라”했습니다. 마침 고승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하였답니다.
“자비는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부터 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릴 뿐이다. 자비는 두 번 축복을 내린다.
한 번은 자비를 주는 사람에게 또 한 번은 자비를 받는 사람에게 그러나 자비가 정의의 이름으로 둔갑될 때,
세상의 권능이 하느님의 권능처럼 착갈될 때가 있다.
비록 당신이 정의를 갈망할지라도,정의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는 아무도 구원을 볼 수 없음을 늘 기억하라. 우리는 자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비를 가르치기 위해 자비로운 행동을 보여 줘야만 한다."
- 셰엑스피어 -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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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 제3주, 주님의 가르침>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사랑과 겸손-
오늘은 희망과 기쁨의 절정과도 같은 대림 3주 “기뻐하라”, 장미주일이자 자선주일입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 셋이 우리들에게 희망과 기쁨의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마침 교황님의 성탄 구유와 성탄 츄리에 대한 강론 말씀이 은혜로워 그 일부를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구유는 구원에의 보편적 부르심이다. 성탄츄리는 재탄생을 뜻한다. 구유와 성탄츄리의 상징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평화와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데 있다. 나무와 구유는 전형적 성탄분위기인 따뜻함, 나눔, 가족적 친밀함으로 인도한다.
거짓되고 상업적인 성탄을 체험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 모두 하느님의 연민, 부드러운 친밀함에, 또 예술, 음악, 노래, 전통들이 우리 마음에 가져오는 성탄 분위기에 에워 싸이도록 하자.
성탄은 신뢰와 희망의 축제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신뢰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결코 지칠줄 모르는 그분은 희망의 근거가 되는 분이시다. 그분은 높이 계셔서 지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고자 작고 가난한 분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닮고 섬기기위해 더 낮아지자. 성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오셨고, 우리에게 우리 형제자매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변두리에 버려진 가장 가난한 이들, 가장 약한 이들을 돌보아 주라고 요청하신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오늘 주님은 참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십니다. 대림 제3주에 앞서 우선 참 보람 가득 했던 어제의 행복했던 개인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 계획대로가 아닌 하느님 계획대로였습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계획에 감동했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습니다. 지체할 수 없다는 예감에 오늘 토요일 오전 시간을 미리 약속드렸고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신심 깊은 루시아 80세 사촌 누님을 미사와 병자성사를 드리러 아침 일찍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급히 불야불야 챙겨 아침 미사후 한 자매의 차량 봉사 도움을 받아 무거운 짐을 들고 화랑대역에 도착했는데 병자성유를 빠트린 것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다시 반대편 출구를 나오니 마침 고맙게도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 즉시 수도원 제의방 앞까지 간후 병자성유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그 택시를 타고 서대문구 아현동 누님 댁까지 직행했습니다. 평생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인데 택시비 3만원 정도는 문제가 아녔습니다.
병자성유를 잊었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택시로 목적지까지 직행하니 토요일 아침이라 차도 막히지 않아 오전 8:30분 일찍 도착하여 고백성사, 성체성사중 병자성사를 모두 드리고 충분히 누님과 착한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약간의 요기를 나누니 11시였습니다.
얼굴도 마음을 매형을 닮아 착하고 성실하고 지혜로운 아들들이 누님에게는 남편인 매형을 보듯 큰 위로와 기쁨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남겨 주었듯이 하느님이, 남편인 매형이 누님께 남겨 주신 참 좋은 선물의 아들들임을 깨달았습니다.
마침 중간에 점심 약속이 예상되어 전화하니 도저히 바빠 힘들다는 지인의 연락에 조카차로 수도원에 직행하려 나왔을 때 누님의 서운해 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나를 바래다 주는 조카 차로 수도원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하니 너무 반갑고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점심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음이 정말 잘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고향집 같은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그리워함은 기본적 정서입니다. 성지순례하는 마음으로 아들 차에 동승한 누님은 아이처럼 기뻐하였고 수도원 제 집무실에서 따뜻한 분위기에서 인삼차도 들고 함께 주님의 십자가 고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누님과 조카는 잠시 성전에 들려 주님께 인사하고 떠났고 나는 9시경 기도후 네분 자매들의 면담성사를 드리니 하루가 다 갔습니다만 정말 마음 뿌듯한 행복감에 하느님께 참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계획해도 이런 완벽한 일정은 불가능합니다. 전혀 생각지 않게 하느님 시간표에 따라 오전 1시 기상하여 강론쓰기로 시작한 하루 일과가 참 순조롭게 완료됐고 하느님께 많이 감사했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서 대림 제3주일 좋은 깨우침을 주셔서 오늘도 한밤중에 일어나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가톨릭 신문, 말씀 묵상란 “기쁨의 훈련”이란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얼마전 썼던 희망의 훈련이란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예일대 신학부의 “기쁨의 신학과 좋은 삶”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미로슬바브 볼프 교수의 말입니다. 기쁨은 미덕일뿐 아니라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훈련하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살아있는 그날까지 기쁨의 훈련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또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요 영약靈藥입니다. 하느님 주신 최고의 영약이 기쁨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훈련에 이어 기쁨의 선물, 기쁨의 발견, 기쁨의 선택, 기쁨의 영약인 것입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대림 제3주일 우리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기뻐할 것을 권합니다.
“환성을 올려라,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신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대림 축제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뻐하듯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희망과 기쁨이 됩니다. 대림의 기쁨의 여정은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를 뵈올 기쁨에 날로 기쁨도 더해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방문했을 때 말기암 투병중인 평화로 가득한 사촌 누님의 표정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날로 주님과 가까이 가는 대림의 여정이니 기뻐하라고 간곡히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기쁨과 희망만이 아닙니다. 평화도 감사도 사랑도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영약입니다. 그러니 기쁨과 희망에 이어 평화, 감사, 사랑도 만병통치약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고맙고 고무적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감사’와 ‘평화’가 키워드, 열쇠말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훈련, 감사의 선물, 감사의 발견, 감사의 선택, 감사의 영약입니다. 평화의 훈련, 평화의 선물, 평화의 발견, 평화의 선택, 평화의 영약입니다. 그러니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이 모두가 회개의 열매, 사랑의 열매입니다. 역시 사랑의 훈련, 사랑의 선물, 사랑의 발견, 사랑의 선택, 사랑의 영약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동사입니다. 요한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회개한후 세례를 청하는 이들에 대한 답이 바로 그러합니다. 비상한 사랑 실천이 아니라 본분에 충실한 평범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자선주일에 주는 참 좋은 지침입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라고 각자의 눈높이에 맞는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사람마다 그에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는 분별력의 대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분별의 지혜와 겸손의 덕은 함께 갑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대가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분별의 지혜와 겸손의 미덕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 생명의 성령, 주님 사랑의 불로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하나 더붙여 겸손의 훈련, 겸손의 선물, 겸손의 발견, 겸손의 선택, 겸손의 영약임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가 바로 이런 희망과 기쁨, 평화와 감사, 사랑과 겸손의 영적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희망과 기쁨, 평화와 감사, 사랑과 겸손의 영약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평생 한결같이 이들의 훈련병이, 수행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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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RwCavTtt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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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해야 합니까?"(루카 3, 10)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길을 낸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커지시는
길을 낸다.
광야의 외침은
죄를 씻어주는
세례의
길이 된다.
길을 가르쳐 준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길은 소식인데
소식을 끝내
듣지 않는
완고한
우리들이다.
듣지 않으면
영혼 없는
시간만이
밀려오고
밀려갈 뿐이다.
이 대림시기는
길을 보수하듯
경청을 보수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방향을
보수(補修)하는
것이 기다림의
핵심이다.
들으려는
사랑이 끝내
길을 낸다.
복음은
경청의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보수 공사가
필요한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의 모든
기쁜 소식은
끝까지 듣는
경청을 통하여
전달된다.
경청(傾聽)이
대림이고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
성탄은
제대로 듣는
들음에서
시작한다.
자선(慈善) 또한
소식을 듣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도움이다.
도움도 듣지
않으면
독(毒)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경청이며
자선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다림의 실천은
다름 아닌
경청이다.
듣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경청하는
사랑의 길이다.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묻는
경청의 주일이다.
고집 센
자아가
작아져야
들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듣는 때가
사랑할 때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은
기다리고
들을 수 있는
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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