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청 미술평론 : 왕휘 王翬의 그림, 친구들의 울타리 姜润青:王翚的画学朋友圈
2021년 06월 09일 14:48 시나컬렉션 소스:이페어케이
청초에 강소성 태창에서 생겨났다청초사왕으로 추앙받는 정통 화파.1671년부터 169년까지1년의 20년 동안, 건장하다.연기의 왕꿩이 빈번히 난다자, 자취는 태창에 다 있다.남경·소주·상주, 우시, 이흥, 진강양저우 등지와 동시에화단의 익우들과의 호흡이 강화되고, 그 사이 친구들도 많이 알게 됐고, 창작도 모사출신에서 성숙해지고 있다.
누동이왕과의 스승과 제자간의 우정
왕꿩과 왕감.왕감(1598-1677), 조자는 현조(玄照), 강희 원년(1662) 이후 피성조 현엽은 말을 아끼고, 자원은 고쳤다.사진, 일명 향암주, 태창고 사람은 명대의 거물이다왕세정의 증손자는 염주태를 지냈다'수'는 '왕렴주'"왕감은 문인 세가 출신으로 동기창에서 그림을 배웠다.왕시민과 왕감은 둘 다 청명한 유민화가로 명나라가 죽은 후 두 왕은 보신보은, 퇴은림하, 청나라 부활을 거스르는 지사, 신주를 섬기는 이신(二臣)이 되지 않고 그림에 몰두했다.
왕꿩과 왕감의 만남은《국조화징록》기:
태창왕 염주유우산, 꿩화선천이 알고 있는 염주, 염주가 크게 놀라는 즉 소견이다.날아서 제자로 예견하고 참가하다말하기를, 익이히 여기고, 가라사대자학은 옛사람을 만든다"고 말했다.
청(淸) 순치(順治) 8년(1651)열아홉 살의 왕성은 그의 예술 인생에서 큰 전기를 맞았다.창) 왕감래상숙우산. 학구심절의 왕비남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창작한 것을 만들다화선은 왕감에게 드리고, 왕감은 왕감에게 드린다.보고 크게 의아해하여 결국곧 왕꿩을 만나야 한다.그는 "당신의 재능은 옛사람과 견줄 만하다"며 더욱 기뻐했다.왕꿩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왕감의 제자가 되었다.
왕감과 왕꿩은 안면이 있는 후에 둘째가 된다.연(1652)에 왕은 "책을 주고 불러모으라"며 왕비를 태창으로 불러 모이게 하였다.가을 옷소매가 봄날이다음력 10월)이면때론 바람도 생각지 않고,짐작컨대 오형은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애연가(왕시민), 메이웡(오위업)구갈만나려면 구걸즉시 오라, 옛사람들의 진품을 살펴봐도 시원하다"고 말했다.왕시민, 오위업, 왕감 모두 현명함을 구하고 왕비와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을 알 수 있다.
왕꿩과 왕시민.왕시민(王時敏, 1592-1680), 자는 순지(孫之), 호는 연객(煙客), 니시다(西田) 주인 등 태창인태상사 소경(少敬)에 이르러사람들이 왕봉상이라고 한다.왕시민, 우웨이예왕꿩 세 사람은 1652에 있다.어린 봄은 10월에 만난다.만나요, 바로 이번 만남입니다.왕감은 왕씨를 왕시민에게 추천했다.
기왕이면 염주가 먼 벼슬을 할 텐데, 염주는 비봉이다.이 학업을 끝내지 말고, 즉시 임금님을 알현하소서.늘 학문을 공손히 여쭙고, "이 담배 피우는 손님 선생님"이라고 말했다예, 담배 피우신 분입니까?"
(청)장경, 유원 작사《국조화징록》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을 때, 왕꿩은 20세였다.왕시민은 이미 환갑이 되었는데, 왕감은 왕꿩의 천자로는 왕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민이 이런 대가 친히 전한다재능을 가르쳐서 그의 예술을 성취할 수 있다.. 왕시민 보면 왕꿩당신은 할 수 있어요라고 감탄했다.우리 선생님이 되었는데 왜또 나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그리고 나서 왕시민의 사랑은 목마르다왕꿩의 몸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왕시민과 부조 3대의 고관으로 가장은 매우 부유하다다음에는 왕이 둘, 셋을 날다.열 살의 10년 동안은 왕시였다.민은 왕이 그의 서쪽으로 날도록 초청했다.논밭의 별장과 같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여정을 다 보내다.그 때가 되면, 입왕할 때 민가가 된다.수개월이 지난 후, 왕이 날다그의 집은 모사가 모두 끝났다.애연가들은 또 왕꿩을 곁에 두고 그와 함께 강을 누비며 각지의 명사들을 사귀었는데, 예를 들면 수집가 당우소(唐宇昭), 숭정(崇貞) 16년 장원 양정감(楊政監), 화가 운수평(寿壽平) 등이었다.왕시민(王時敏)은 고우(故友) 동기창(東其昌)에게 왕꿩의 재능을 볼 겨를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석곡이 이 정도이니 스승이 제자에게 현명할 필요 없이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왕연객 《서려화발》 전문글의 8할은 모두 왕꿩의 그림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원인의 필묵으로 송인구 운을 빕니다.골짜기, 저택은 당대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바로 대성" "성명을 떨치다갑자기 나라 안에 들어가니, 멀고 가까운 개지가 되었다.구하려는 자는 집 밖에 가득 차서 하려고 한다철문은 오래됐다"고 말했다.
[清] 王翚、恽寿平 槐隐图册 纸本水墨 22cm×28.3cm 故宫博物院藏
[청] 왕꿩, 운수평 괴은도책 지본 수묵 22cm×28.3cm 고궁박물관 소장
여러 명의 공경들과 친분이 있다.
왕꿩과 탕위샤오.당우소(1602-1672), 자는 공명, 운객, 호는 반원, 비릉(상주)사람. 명나라 항왜영웅이다당순이의 조카, 타공서.그림 잘 그린다, 가부 소장집안에 동원·범관이 있다오진, 예찬, 왕몽 등여러 명가의 작품은 모두 적합하다당시 강남의 유명한 수집가였다.당우소가 왕꿩과 알게 된 것은 순치 13년(1656), 24세의 왕꿩이 왕시민을 따라 비릉을 초유하면서 수개월 동안 당씨 반원에 머물렀는데, 이 중 당송원명 비본익광(唐宋元明秘本益廣)이 왕꿩의 화예정진에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강희 원년(1662)에 이르러 왕석골은 다시 당씨 사병당에 머물렀고, 당씨와 필묵지계를 만들어 가장(家藏)의 명적을 모사하여 보존용으로 사용하였다.이 기회를 빌려 왕꿩은 처음으로 황공망을 모사했다.부춘산거도' 권.
왕꿩과 운수는 공평하다.운수평(1633-1690), 초명격(初名格), 자는 수평(壽平), 후이자행(後以字行), 호는 남전(南田) 등남전은 서향문에서 태어났다.제, 순치 13년(1년)656), 왕이 날다왕시민 처음에 비릉을 유람했는데, 재당우소의 반원서재여23세의 운수 평형우연히 의기투합한 동갑내기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장경의 『국조화징록』은 남전이 왕꿩의 산수화의 재주를 보고 왕꿩의 뒤를 이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화훼로 향했다고 기록하지만, 현존하는 운남전의 작품으로 볼 때 운수평이 석곡을 만나 산수화를 그리지 않고 화훼로 옮긴 것은 40대 이후의 일이다.
두 사람은 일생의 한묵지를 정하였다교(交)는 서로 작품으로 상열하며, 왕석곡의 그림은 운수평의 글씨를 붙여 금상이라 할 수 있다.꽃, 이미구. 두 사람한평생 모이고 적게는 많이 떨어져 있다.1656년, 그들은만난 지 6년 후, 왕은꿩이 다시 사병당에 있으니, 당나라가 된다.우소림은 집안에 있는 것 같고, 여기 있다.그동안 운수왕 두 사람은 자주 함께 마시며 "수십 주야간, 필묵을 논하며, 옷을 풀고, 취무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두 사람은 서로의 화예를 흠모하여 늘 함께 작업하였는데, 강희 6년(1667)에 운(二)·왕(王) 두 사람이 협력하여 당우소가 그린 《괴은도( ,隱圖)》책(책)에 담장 옆의 고괴규지를 그렸다.회화나무는 고관상위를 대표하여 회화 앞에 은거하였는데, 세상을 피하여 정신적 출진을 추구하는 공통된 마음을 나타내었다.
왕날과 밧줄로 다시 빛을 내다.1671년, 왕 이시야는 40세에 48세의 대좌중광을 만났는데, 그도 왕이었다.꿩 예술계의 한 사람자신을 안다. 대자리를 잡고 다시 빛을 본다(16).23-1692)글자는 신에 있고, 호는 강 위 밖이다.역사, 구용(지금의 술탄)도) 사람은 벼슬을 그만두고 은둔한다.말년에 시문과 산수를 마음껏 교정하다.학자 조국영(趙國英)의 고(考)에 따르면 "전세의 서화와 저서에 따르면 경술년(1670) 석곡은 서른아홉 살 무렵부터 운남전(雲南田)과 대좌( 的重光)의 발문을 왕석골 회화에 자주 볼 수 있었다.왕화, 대좌운하라는 제목도 이 단계가 석곡회화에 나타나는 새로운 특징이 되고 있다.
강희 11년(1672)8월, 양조로의 근원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왕꿩은 밧줄과 시게미쓰와 함께 양조로의 초청에 응하였다.그 비릉 근원에 묵었다.운수평·양진·손복시(남전 사촌형)함께 와서 연회하는 사람이 시를 읊다논화·대음 문제서, 연잠자리 밤말 40여일
시월 17일, 왕이 날다.운수평, 대좌중광( 重光重光) 범주형계, 왕꿩이 흥에 겨워 《암서고사도》 축을 만들었다.궁박물관 소장), 병설세 사람이 시를 쓰다. 그림 속에 깊이가 있다.산은 유거하고, 인물은 계곡을 마주하고 있다.조용히 생각하고, 선산중을 그렸다.인물의 마음은 그윽하고 담담한 맛이 있다.
왕꿩과 사찰.지사표(1655~1698), 자는 이첨(二瞻), 호는 매곡(梅谷), 매곡산인(梅谷散人), 신안(新安)휘식현) 사람. 후류우.양주·진강·남경 등지, 홍인 등과 함께'신안사대가(新安四大家)'로 불린다.
계공은 일찍이 《기사·왕 합작》에 있었다이폭'에서 두 폭의 대좌 중광은 조사표의 산수화를 왕석곡 처양석곡에 가져왔다고 언급하였다좀 더 염색하고 윤색한 것을 첨가하다품, 그중 한 점은 현재 소장하고 있다고궁박물관의 《명》산방승도'의 축. 두 사람의 친목은 단지 구현이 아니다작품상 강희 20세년에서 28년(1680~1689)까지 왕꿩, 운수평, 대시중광, 조사표는 항상 함께 다녔고, 양주, 윤주, 무진, 남경 등을 여행하며 자연의 미화를 취하여 천상의 소리를 만들었다.
젊은 시절 탁선하여 왕감을 사귀었다왕감의 부름에 응해 태창에 모이면 왕시민, 오위업을 만나고, 다시 중원에서 객사를 지낼 수 있다당우소·운수와 평정하다지후는 40세 생신연회에서 밧줄을 만나면 다시 빛을 보게 되고,왕꿩이 줄곧 걸어오는 격으로 그린다.학문과 교유 모두 문인을 떠날 수 없다이 플랫폼을 아집하면 그래도주량공(周亮工)의 초청으로 1669년 금릉(金陵)에 모여 공현(公賢)·진탁(陳 金)·번기(번기) 등 금릉(金陵)과 각 파의 화가들을 만났고, 1684년 여릉 관리 문인 오정치처(吳正治處)에 가서 우인(友人)의 필묵(筆墨)에 응해 건륭황제(建隆帝)가 국조(國朝)의 제1권, 왕전(王田)의 제1권, 고운첩산중(高雲 有山中)의 산중도(山中)를 그린 《중(성사는 운남전에 기록되어 《어향》에 있다관집'에는 후대에 화단의 미담 한 구절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