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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高野山고야산 곤고산마이인金剛三昧院 다보탑
일본 이시야마데라石山寺 다보탑
서연샘이 교토 여행 중에 촬영한 미야자와시(宮澤市) 치온지(지은사智恩寺) 다보탑
서연샘이 촬영한 지은사 다보탑 안내문
"상층은 원형으로 카메바라(龜腹; 생석회를 이용하여 거북이 배 모양으로 만든 상층 탑신의 받침.)를 붙이고, 보형(寶形; 피라밋꼴-사각뿔의 지붕)의 지붕을 이고, 상륜(相輪)을 붙였으며, 하층은 둘레에 사각형의 상계(裳階 もこし; 건물 둘레에 친 차양 모양의 처마, 부연.)를 붙인 형식의 탑을 다보탑(多寶塔)이라고 한다.(上重は圓形で龜腹を付け寶形の屋根を戴せて相輪を付し,下重は周圍に方形の裳階付し形式の塔を多寶塔という.)"
*宝形造(ほうぎょうづくり)は、建築物の屋根形式のひとつで、正方形の平面で寄棟を造ろうとした場合には、大棟ができず、4枚の屋根がすべて三角形になる。このような造りを特に方形造、宝形造(ほうぎょうづくり)という。これが、六角形であれば「六注」、八角形であれば「八注」という[1]
보형조(寶形造; 보우교우쯔쿠리)는 건축물의 지붕 형식 중 하나로, 정사각형의 평면(피라밋꼴-사각뿔)으로 기동寄棟(평면이 직사각형으로 용마루가 있다. 우진각 지붕)을 만들고자 할 경우에는 용마루가 없고 4개의 지붕이 모두 삼각형으로 된다. 이러한 구조를 특히 방형조(方形造), 보형조(寶形造)라고 한다. 이것이 육각형의 평면이면 '六注', 팔각형의 평면이면 '八注'(예, 호류사 夢殿의 지붕)라 한다.
*寄棟造(よせむねづくり)は、建築物の屋根形式のひとつで、4方向に傾斜する屋根面をもつものをいう[1]。広義では同様の屋根をもつ建物のことを指す。屋根の形式を指す場合には、単に寄棟ということも多い。四阿(あずまや、しあ)、四注(しちゅう)ともいう。日本では、切妻造に次いで多く用いられている形式である。
기동조(寄棟造)는 건축물의 지붕 형식 중 하나로, 4방향으로 경사진 지붕면을 가진 것(평면은 직사강형이고 용마루가 있다)을 말한다. 광의로는 같은 모양의 지붕을 가진 건물을 말한다. 지붕의 형식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단순히 기동(寄棟)이라 하는 경우도 많다. 시아(四阿), 시아(四注), 시슈(しちゅう)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切妻造(맞배지붕)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형식이다.
法輪柱, 장엄을 한 스투파는 무불상 시대의 붓다 상징물, 스투파 문 좌우의 2사자, 사방 4사자가 보인다.
장엄된 스투파는 불국사 다보탑 등의 장엄된 복발을 연상시킨다.
전체 구도 화면이 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의 목조 7, 9층 탑, 사자 등이 있는 부조를 연상케 한다.
불국지역 역사문화 편찬위원회(편집국장 이형우), <<불국지역 향토사 사진집>>
2사자가 보인다
불국지역 역사문화 편찬위원회(편집국장 이형우), <<불국지역 향토사 사진집>>
모서리의 사자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불국사 다보탑의 4사자상 배치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
<<조선 탑파의 연구(하)>>(열화당, 2010)의 도판
컴퓨터 그래픽으로 기단의 난간과 풍탁을 복원하였다. 4사자도 복원하면 좋겠다.
해남 대흥사
서연 김연숙 선생님이 일본 교토 여행 중에 촬영한 지은사 다보탑을 보니 직관적으로 불국사 다보탑과 하층 방형, 상층 원형이라는 구조가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촬영한 지은사 안내문을 읽으니 일본 문화재 용어로서 다보탑의 모양을 정의하고 있었다. 일본 문화재 용어이지만, 다보탑 양식의 정의를 서연샘이 촬영한 안내문을 보고 처음 알았다.
불국사 다보탑을 어릴 적 부터 십원 동전을 통해 알았다. 경주 수학여행(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 우리반 담임이신 윤태규선생님 따라 불국사에 왔다. 그 때 내 키가 대웅전 토대보다 낮다는 것을 재보고 알았다.) 가서 처음 다보탑을 보았다. 한국인은 불국사 다보탑을 모두 알고 있지만, 막상 불국사 다보탑의 미술사적인 양식이나 불교 사상적인 해석에 대한 설명은 나도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법화경 제11 견보탑품이 다보탑의 출전이라는 것은 언젠가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서연샘이 촬영한 지은사 다보탑 안내문을 읽고서, 야후 재팬에서 다보탑을 검색하니 위키백과에 다보탑의 기원, 형식 등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일본의 다보탑 사진들이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진들 중에 불국사 다보탑도 들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다보탑이 일본 고유의 탑 형식으로 보고, 그 기원을 당나라에 유학하고 일본에 밀교를 전파한 구카이(空海)가 일본 밀교의 본산인 고야산에 세우려고 계획하였던 <비로자나법계체성탑>으로 보고, 대부분의 다보탑은 밀교인 진언종 사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인 나로서는 일본에 현전하는 다보탑들보다 불국사 다보탑의 조성 시기가 앞서고, 통일신라 불교 문화가 일본에 전파된 점을 감안하면 불국사 다보탑이 일본 다보탑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였다. 다보탑의 출전이 법화경이라고 하지만, 법화경에는 불국사 다보탑의 모양에 대한 기술은 없다.
우현 고유섭 선생이 1936-1943년에 한국어와 일본어로 발표한 <<조선 탑파의 연구(상), (하)>>(열화당 2010년 복간본)(<제1부 조선탑파의 연구1, 4.석조탑파> <제1부 조선 탑파의 연구1, 각론 31. 경주 토함산 불국사 다보탑>)에 불국사 다보탑과 일본 다보탑의 조성 근거를 <<마하승기율>> '조탑법(造塔法 탑을 조성하는 법. 아래 인용한 구절)'의 구절에서 찾아내었다. 마하승기율의 이 조탑법을 불국사 다보탑이라는 특수한 형식에 적용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조형을 해석하였다고 자부했다. 일본 학자들이 일본 다보탑의 기원을 산치대탑 같은 인도의 복발형탑(스투파)에서 찾는 것은 다보탑뿐만 아니라 인도 밖의 모든 탑의 기원이 인도의 복발형탑이라며, 그것은 일본 다보탑의 기원이 될 수 없다며 고유섭은 비판했다.
"作塔法 下基四方 周匝欄楯 圓起二重 方牙四出 上盤蓋 施長表相輪"
탑을 세우는 법은 기단의 사방에 난간을 설치하고 원형으로 이층(二層)을 쌓되 사면에 각이 나오도록 한다. 위에는 반개(盤蓋-쟁반처럼 생긴 덮개)를 얹은 다음 길게 상륜(相輪)을 세운다.
계림역사기행의 6월 답사코스에 화엄사4사자3층석탑이 있었고, 그 모방작인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이 7월에 있으며, 8월 춘천 답사 때도 4사자석탑이 코스에 들어 있다. 그래서, 서연샘의 사진을 보고 읽었던 고유섭 선생의 불국사 다보탑에 관한 2편의 글을 다보탑 사진과 대조해가며 난삽한 문장을 답사날인 어제 새벽에 2번째로 찬찬히 정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선 2가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 계림 선생님이 이희봉 중앙대 건축과 교수의 신문 연재를 스크랩해서 만든 '신라문화총서3-인도 불교사원 순례'를 읽으며 일본 학자들이 '상륜부(相輪部 相의 훈인 서로/ 재상/모양/살피다 중 상륜부의 상은 훈이 '모양'. 상륜은 '바퀴 모양', 상륜부는 바퀴모양 부위)'라고 작명한 것이라고 한 것( "백 년 전 식민지 시대 근대 학문을 연 일본인들이 작명한 명칭이고 지금도 전문가 학자들이 멋모르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이 근거없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이 작명한 것이 아니라 대장경의 3장 중 율장에 들어있는 마하승기율의 조탑법(造塔法)에서 취하여 '상륜(상륜부)'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물론 나도 이희봉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퀴가 아니라 양산(산개傘蓋)이고, 복발이 아니라 이희봉 교수가 제안한 대로 불란(佛卵), 상륜부가 아니라 중국처럼 '탑정(頂)부'라는 용어에 논리적으로 수긍한다. (이희봉은 탑두(頭)부, 탑상(上)부라고 하자고 제안했으나 나는 이 두 용어는 탑정부에 비하여 적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 출전에서 우리는 탑 층의 단위가 '층(層-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 조성비문에도 '九層石塔'이라 했다.)'이지만, 일본은 '중(重)' 이라고 하는 데 이것도 위의 마하승기율 조탑법 인용 구절처럼 불전(佛典)에 있는 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법화경 권4 견보탑품 다보 석가 2불 幷坐像
張작(火+卓), <<雲岡>>(江蘇美術出版社 2015)
다보탑
다보탑
다보탑
고유섭은 불국사 다보탑의 출전인 법화경을 언급하며, 이불병좌상, 불국사 다보탑의 출전이 제11 견보탑품이고, 제23 약왕보살본사품의 약왕보살(일체중생희견보살) 소비燒臂 공양供養탑(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 조성비문에 '永充供養'이라는 말이 나온다.) 설화를 근거로 화엄사 4사자3층석탑,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 월정사 8각9층석탑, 신복사지석탑 등이, 이불병좌상(다보와 석가 두 부처가 칠보탑의 사자좌에 나란히 앉음)이 들은 보탑(통도사 영산전 벽화, 중국 룽먼, 윈강, 다이통, 둔황의 조각)과 더불어 다보탑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서연샘이 보신 일본 지은사의 목탑,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4사자3층 석탑과 그 모방인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 월정사 8각9층석탑, 강릉 신복사지 3층석탑, 통도사 영산전 벽화의 이불병좌상이 들은 보탑이 모두 다보탑이라는 것이다.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과 불국사 다보탑, 의성 관덕동 4사자3층 석탑은 4방의 사자상이 있는 것이 공통점인 다보탑이고, 월정사 8각 9층 석탑, 신복사지 3층 석탑, 화엄사4사자 3층 석탑,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의 공통점은 약왕보살의 전생인 일체중생희견보살이 팔을 태워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법화경을 설법하는 자리에 나타나는 다보여래의 무량한 분신 중의 한 부처)에게 공양 올리는 장면을 표현한 다보탑이다. 탑 앞의 석상이나, 석등 밑의 석상은 희견보살(약왕보살의 전생)인 것이다.
화엄사 4사자3층석탑이나 석등 밑의 희견보살은 몸과 팔에 향과 향유를 바르고 불을 붙여 법화경을 찬탄하는 다보여래의 분신인 정명덕불의 은혜에 공양을 올리고, 소신 공양에서 나오는 빛이 우주법계에 퍼져서 보살들을 일체현제신삼매(一切現諸神三昧)에 들게 한다.
법화경 제11 견보탑품뿐만 아니라, 제23 약왕보살본사품(약왕보살의 전생담) 사상에 근거하는 탑이 다보탑이다. 제23 약왕보살본사품에는 법화경을 '경전의 왕'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테라와다불교(소위 소승불교, 성문聲問-아라한), 대승불교(보살), 스스로 연기진리를 깨친 연각(獨覺)의 대립을 통합하여 하나의 불교로 돌아가게 하는 불교 경전이 법화경이다. 유마경은 특히 논쟁적인 불교 역사에서 나온 경전이다. 법화경의 설법 무대가 영축산이기 때문에 법화경 신앙과 수행의 공간을 표현한 전각이 영산전이고, 대웅전 후불도가 영산회상도인 것도 '경전의 왕'인 법화경 신앙과 수행과 관련 있다.
이른바 안상의 이 무늬는 미륵대원터의 사각 석등에도 나타난다.
연꽃(이 탑의 조성비문에 '花藏'(연화장), '正覺'(무상정등정각-깨달음)이란 말이 나온다.) 아래 두건을 쓰고 지권인을 하고 결가부좌한 다보여래의 화신불인 일월정명덕불
"아미타불께서 많은 큰 보살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계시는 극락세계에 가서
연꽃 가운데의 보배 자리 위에 태어날 것이니라."
-법화경 제23 약왕보살본사품
묘법 연화 경(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 Lotus Sutra)이라는 경전 이름에 '白蓮'이 들었다.
4마리 사자는 사르나트 녹야원에 세운 아소까황제 석주의 머리에 있는 4사자가 생각난다.
화엄사4사자3층석탑의 모방인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 앞에는 약왕보살상이 현재 없다. 어제 답사하며 보니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유섭의 <<조선탑파의 연구1(上)>> 146쪽에 실린 화엄사 4사자3층석탑 사진과 147쪽의 제천 사자빈신사지 석탑 사진(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사진으로 추정됨.)을 비교하면 147쪽 사진에 약왕보살의 석조연화좌대로 추측되는 석물이 뒤집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DB에는 사자빈신사지석탑에 새겨진 조성기문의 歒(선웃음칠 적)이 敵(원수 적)으로 , 即(곧 즉)이 旣(이미 기)로 잘못 판독되어 있고, 그에 따라 번역도 잘못됐다. 歒(선웃음칠 적)은 문맥(永消怨歒-길이 원망과 선웃음(번뇌, 악업)을 소멸한다.)으로 보아 敵(원수 적)으로 짐작된다며, 1019년 귀주대첩 직후인 1022년에 탑을 조성한 점으로 미루어 원적(怨歒)을 원망하는 적(敵, 거란족)으로 해석하였다. 원문의 法輪常'傳'(법륜을 늘 전한다.)은 法輪常'轉'(법륜을 늘 굴린다.)의 오자로 보인다. 사자(師子)빈신사의 '師'는 '獅'의 오자가 아니다. 스승 사師는 사자 사獅와 통용된다. 한자는 표의문자이지만 같은 음의 글자는 뜻도 통하는 표음문자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문자'는 어차피 '말'을 표기하는 수단이라는 숙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역 불전에는 거의 '師子'라고 했다.
인도 신화에서 신들이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가 바퀴이다. 이 무기는 던지면 바퀴처럼 회전하여 적을 쳐부순다. 아소카왕(황제)처럼 강력한 정치와 군사력으로 적을 쳐부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한다. 전륜성왕이 무기인 바퀴를 회전시켜서 세상을 평정하듯이, 부처님은 진리의 바퀴를 회전시켜서 세상의 잘못된 철학, 가르침이나 인간 내면의 번뇌(어리석음, 어리석음에서 비롯하는 탐욕, 성냄, 교만, 질투 등의 부정적인 마음)를 격파하고 인간과 세상의 고통을 구원한다.
고유섭은 불국사 다보탑이 석가탑의 동쪽에 있는 이유를 법화경의 구절인 '東方 無量千萬億阿僧祇世界 國名寶淨 彼中有佛 號曰 多寶 동방으로 한량없는 천만억 아승기 세계를 지나서 보정이란 나라가 있었으며 그 나라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그 이름이 다보였느니라." 에서 찾았다.
고유섭은 글(조선탑파의 연구 각론1)의 끝에서 불국사를 세운 재상 김대성은 단순한 재상이 아니고 법화경의 깊은 뜻을 통찰한 사람이고, 오묘한 경지의 장인(妙工)이 별도로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의 <불국사 다보탑의 비례구성에 대하여>라는 글을 소개하며, 탑이나 가람 구성의 수학적 엄정률을 밝힌 연구는 탑이나 가람의 고전미를 느끼게하는 이유를 밝힌 재미있는 연구이나 그러한 분수율을 사용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다고 하며 미래의 연구과제라고 하였다. 고유섭은 법화경 사상과 연관지어 불국사 다보탑에 대한 불교 사상적 해석(空과 有의 오묘한 조합/평면의 모양은 圓(화엄교학)과 頓(선종)을 함께 갖춤이고, 입체의 모양은 법화경의 성문, 연각, 보살이 하나의 불교로 돌아감(會三歸一))도 하고 있다.
불국사 다보탑은 물론이고 서연샘을 통해 알게 된 일본 다보탑의 기원과 조탑의 출전과 사상적 해석까지도 우현 고유섭 선생의 연구로 알게 되었다. <조선 탑파의 연구>가 발표된 지 80여 년이 지나서야 나는 불국사 다보탑의 조형 근거와 그 불교 사상적 해석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 10원 동전의 문양을 보고 다보탑을 알았고, 국민학교 6학년 때 불국사에 수학여행와서 다보탑을 처음 보았다. 역사교사로 36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왔고, 문화유산답사에 참가도 하였지만 불국사 다보탑 조형의 출전이나 그 불교 사상적 해석은 알지 못했다.
우현 선생의 학문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우현 선생은 마흔의 연세에, 너무 아까운 나이에 돌아가셨지만(1944년),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윤경렬 등이 우현 선생의 제자들이다.
우현 선생의 연구가 나온 지 한 세기가 지나가는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이고, 유홍준 교수의 밀리언셀러가 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경주 불국사(상), (하)>에서조차 불국사 다보탑과 일본 다보탑 조형의 출전과 불국사 다보탑에 대한 불교 사상적 해석을 왜 소개하지 않은 것일까? 개성박물관장이던 우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윤경렬 선생은 경주에 왔고, 경주박물관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겨레의 땅 부처님 땅-경주 남산>>을 펴내시고, 경주에서 돌아가신 고청 윤경렬 선생은 스승 우현 선생의 불국사 다보탑에 대한 연구를 사람들에게 말했을까?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래 전에 전국교사불자연합회 불국사 수련회 때 교무국장 스님이 불국사를 안내하며 교사들에게 재미삼아, 다보탑에 '매란국죽' 사군자가 있으니 찾아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60년 동안 살아오며 아무도 7천만 우리 겨레는 누구나 아는 불국사 다보탑, 그 조형의 출전이나 불교 사상적인 해석과 의미를 밝혀놓은 우현 선생의 연구 성과를 말해주지 않았다. 슬프지 아니한가!
포항에서 불국사까지는 정말 가까운 거리이고, 불국사 입장료도 없는데, 국민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 와서 처음 보았던 그 불국사 다보탑을 다시 읽기 위하여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사람들과 함께 화엄불국사에 가보고 싶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고 다보여래가 나타나 법화경 설법을 듣는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참석하고 싶다.
사르나트의 새로 지은 물간다 쿠티 비하르(신녹야정사)
지붕의 뒤쪽 첨탑은 마하보디대탑을, 앞의 좌우 두 첨탑과 현관의 첨탑은 불국사 다보탑을 모티브로 설계한 것으로 여겨진다.
첨탑을 불국사 다보탑을 모티브로 1932년경에 일본인이 설계한 신 녹야정사(물간다 쿠티 비하르)
신 녹야정사의 불단
2002년 1월 10일 순례했을 때 다메크(진리를 보는) 스투파(탑)는 수리 중이었다.
황금 첨탑의 사원은 자이나교 사원.
자이나교 교조 마하비라(大雄)의 활동 지역은 붓다의 활동 지역과 겹치는 곳이 많다.
수리 뒤에 다메크 스투파를 돌며 예배하고 있는 정토회 법륜스님과 순례단
엣 물간다쿠티에 봉안했던 전법륜수인의 불상(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2002년 1월 정토회, 제이티에스(Join Together Society)의 지도법사 법륜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제이티에스 제13차 인도성지순례를 하였다.
붓다의 8대 성지를 순례하기 전에 교무실에서 두 달 동안 나카무라 하지메 등이 짓고 김지견이 옮긴 방대한 분량의 <<불타의 세계>>를 밑줄치며 읽었다.
붓다의 첫 설법 성지인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서 옛 물간다 쿠티 비하르(鹿野精舍)에 모셨던 저 유명한 전법륜 수인의 불상과 아소카황제가 세운 석주의 4사자 주두(柱頭, capital)를 보았다.
이곳에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주조한 일본종이 현관에 걸린, 일본인 건축가가 디자인한 새 물간다 쿠티 비하르 지붕의 뒤쪽 큰 첨탑이 붓다 정각 성지인 붓다가야의 마하보디대탑을 축소한 것이고, 앞쪽의 작은 첨탑 3개(현관에 1개, 지붕 앞쪽의 좌우에 각기 1개씩 있음)가 우리 불국사 다보탑이 조형의 모티프가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법륜스님께도 현장에서 알려드렸다.
새 물간디 쿠티에는 박물관에서 본 초전법륜 수인의 불상을 모셔놓았고, 대각회(Maha Bodhi Society)를 조직하고 인도의 불적을 보호하고 불교 중흥에 힘썼으며 일제강점기에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우리나라도 방문했던 스리랑카의 담마팔라 스님의 사리도 부처님 사리와 함께 봉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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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조선탑파의 연구1, 4.석조탑파>
고유섭, <<조선 탑파의 연구(상)>>(2010,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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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조선탑파의 연구1, 4.석조탑파> <제1부 조선 탑파의 연구1, 각론 31. 경주 토함산 불국사 다보탑>
5째 줄 방원투鬪합은 방원투投합이 맞다.
4째 줄의 同方은 東方의 오자이다.
고유섭, <<조선탑파의 연구 (하)>>(2010, 열화당)
첫댓글 우와 틀린 글자 까지 확인하면서 공부하시는 열정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탑의 상륜부가 잘 남아 있는 제천 신륵사에서 계림선생님이 나무 그늘에서 답사팀에게 탑에 대해 1시간 넘게 열강하며, 상륜부(바퀴 모양 부위)라는 말은 일본 학자들이 잘못 만든 용어라는 이희봉 교수의 주장을 소개했다. 15개월 만에 참가한 이번 답사에서 계림 선생님의 안내, 강의에 대하여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일절 코멘트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상륜부라는 말이 일본학자들이 잘못 지은 것이 아니라 3장 중 율장인 <<마하승기율>> 조탑법에 나오는 말을 일본학자들이 미술사 용어로 쓴 것이라는 것을 답사 앞두고 읽은 고유섭 선생의 글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말씀 드리지 않았다. 참배도 하고, 벽화도 보러 먼저 극락전에 갔다. 임란 뒤에 노예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쇄환하는 장면을 담은 벽화가 왜 신륵사 극락전 외벽에 있는지 궁금하여 극락전과 탑의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사명대사가 이 절에 머물며 사찰을 중수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탑의 안내문을 읽고 있는 나에게 교사불자회의 오랜 법우님이 상륜부라는 말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이 만든 말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말은 일본인이 만든 말이 아니고, 율장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앙대 건축학과 어느 교수님이 그렇게 말하고, 상륜부라는 용어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곁에 계시는 계림선생님께 일본인이 상륜부라는 말을 만든 것이 아니고 율장에 나오는 말이라고 귀뜸해 드렸다. 계림샘이 더운 날씨에 답사팀에게 열강을 한 뒤라서 내 말씀을 듣지 않고 앞서 가버렸다. 그래서 버스에 올라 앞자리의 계림샘에게 복사해 가져온 자료를 보여드리며 다시 말씀드렸다. 그러자 계림샘이 한역 율장의 '상륜'이라는 말은 이희봉의 현장 답사를 통한 지적처럼, 그것은 산스크리트어 불전을 한문으로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하며, 말씀에 노기가 섞이는 '격노'를 했다. 계림샘은 전생에 용산에 사셨던 것 같다. ^^ 그래서 재차 말씀을 드렸지만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지라 '격노'를 하셨다. 그래서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고 나는 사람들에게 민망해졌다.
'격노'에 '입틀막' 당한 나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밖에 없었다. 계림샘과의 5년 동안 쌓아온 신의가 잠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열기가 가라앉은 계림샘이 어색한 상황을 사람들에게 풀어내었고, 나는 계림샘에게 마이크를 넘겨 받아 어색해진 상황을 설명하였다. 상륜이라는 말이 마하승기율에 나오는 것을 알게 된 연유와 관련하여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 불국사 다보탑, 고유섭, 일본 다보탑, 서연샘 촬영의 교토 지은사 다보탑 등을 연결해 답사 소감으로 길게 말씀드렸다. 모두가 두 사람의 열정과 더위 때문이었다! Cool down! Calm down! ^^
역시 월성의 글이네요
천천히 다시 한번 정독을 해봐야겠습니다.
<마하승기율> 처음 접해본다. 함 알아봐야겠다
좋은글 많은 자료 감사합니다()()()
법연샘, 마하승기율의 조탑법 구절 찾았어요! ^^
계림샘과 내가 카페 댓글에서 토론한 주제가 2개이다. 1.인도에서 13세기에 불교가 왜 멸망했는가? 2. 붓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음식이 무엇인가? 이 두 질문은 2002년 법륜스님 지도로 인도성지순례를 할 때 나왔다. 1번 질문을 내가 했다. 법륜스님은 안으로 불교가 인도 문화의 주류인 힌두교에 흡수 당한 것이고, 밖으로는 이슬람교 정권의 탄압과 승려 살륙이 원인이라고 답해주셨다. 인도불교사의 주요 주제인 이 문제에 대해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많다. 일본학자가 이슬람교 쪽의 사료를 분석해 인도 불교 멸망 원인을 말한 책을 몇 년 전에 읽었다. 그래서 계림샘이 다른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시는 것에 대해 내가 들어서 아는 견해를 댓글로 달았다. 공부하는 카페에서 중요한 주제를 두고 각자 자신의 견문을 예의와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처세에 현명하지는 못할지 모르나, 이런 것을 고집세다거나 편협하다고 해서는 안된다.
2번째 의문은 붓다에게 최후의 공양을 올린 춘다가 살던 마을에 가서 법륜스님이 춘다가 올린 음식이 1. 돼지고기 2. 야생 독버섯이라는 의견으로 갈리는데, 법륜 스님은 우리말에 '야생 감자'를 '돼지 감자'이라고 하듯이, 춘다마을 사람들의 말과 음식을 조사하여 '야생 토란'일 것이라며 흥미로운 추론을 하셨다. 인도 북쪽으로는 고전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불전이 기록되었고, 중국에서 산스크리트어와 한문에 능통한 인도나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한문으로 번역했다. 남쪽에서는 부처님이 쓴 언어(아르디 마가다-빨리어)로 전승되다가 스리랑카에서 문자로 기록되었다. 남전대장경인 빨리어 대장경과 북전 대장경인 한문 대장경에서 전승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음식을 서로 다르게 기록했다. 한문 열반경에는 전단나무 버섯이라고 했고, 빨리어 열반경 (각묵스님 번역은 돼지고기라고 했음.)에는 빨리어 원어(수카라 맛다바)를 그대로 썼고, 경전 <우다나>에는 주석을 달아 멧돼지고기, 멧돼지가 즐기는 버섯, 멧돼지가 밟고 지난 곳에 나는 버섯, 약초의 일종이라 했다. 유럽 학자들은 버섯, 돼지고기로 의견이 나눠졌다(와타나베 쇼코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계림샘은 불자들이 육식을 금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돼지 고기가 아니라 독버섯을 드시고 죽게 되었다고 의도적으로 번역을 고쳤다고 하는 취지의 견해를 소개했다. 나는 육식을 금하는 문화는 동아시아 한문 불교 문화이고, 지금도 미얀마에서는 업이 발생하지 않는 고기는 먹지만 부처님이 공양받은 음식인 고기를 드신 것이 기피 사항이 아니고, 중국 불교의 육식 금지 규정 때문에 돼지 고기를 독버섯으로 의도적으로 다르게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달았다. 상한 돼지고기를 먹고 식중독 걸렸는데 하룻만에 사람이 피똥을 싸고 그렇게 죽지는 않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나오지만, 야생 독버섯을 먹으면 하루만에도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한문 열반경의 기록대로 '전단나무 버섯'이 맞을 것이라는 추론을 댓글로 달았다. 붓다가 사망한 음식의 이름을 '전단나무 버섯'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음도 한문 열반경을 신뢰하게 한다.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서로 자신이 알고 있는 학자들의 견해나 자신의 추론을 예의와 근거를 가지고 주고 받으며 진실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자신의 견해와 지식을 고집하는 편협하고 독단적인 행위라고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