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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곽요연이 신창에 갔다 온 칠 일간은 반여량과 곽소연에게도 귀
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저에게는 아무도 없어요."
"나도 그렇소."
"어떻게 견뎠죠?"
"감여가 있으니까."
"그렇군요. 저에게는 감여도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있을 게요. 찾지 못했을 뿐."
"곽가장을 공격할 때 따라갈 건가요?"
"세상에 홀홀단신인 여인이 또 있소."
"...?"
"교교."
"전에 봤죠. 기억해요."
"그녀가 곽가장에 잡혀 있소. 구출해야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반공은 반드시 죽이려고 할 거예요. 아
버... 님의 유일한 희망을 죽였으니까요."
"아직도 아버님이요?"
"친아버님을 죽였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아버님
을 사랑해요. 모든 걸 다 잊을래요."
"잘 생각했소."
"한한... 아직도 잊지 못했나요?"
"어떻게 잊겠소. 평생 못 잊겠지."
"기다려도 안 되나요?"
"노력해 봅시다."
반여량은 곽소연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녀를 받아들인
다는 것은 한한을 잊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어떻게 그녀를 잊
을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여인이지만
아내로 인정한 여인을.
곽소연이 가련하기도 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종류의 아픔을 가졌기에 드는 마음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사랑은 아니다. 측은지심(惻隱
之心)일 뿐이다. 그녀가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갖지 않았다면 관
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것을.
반여량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의 사랑을 받아들일 공간이 전혀 없
었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한한을 생각하며 참았고, 즐거운 일
이 있으면 한한을 생각하며 웃었다. 아직도 한한은 그의 마음
속에 살아 숨 쉬었다.
"푸훗! 반공은 그래서 좋아요. 반공은 제가 세상에서 만난 사
람중에 가장 정직한 사람일 거예요. 알죠, 저도 반공이 어떤
사랑을 하는지.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요."
반여량은 직선적으로 바라보는 눈길에 당황했다. 그것보다 더
욱 당황스러운 것은 그녀의 말투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우리 둘만 있으니까 편하게 말할래. 괜찮지?'
'사람 마음을 그렇게 몰라?'
'나는 올해 스물한 살, 혼인해야 할 나이야.'
'잠깐만. 잠깐만 이대로 있을게.'
"오소저, 그럼 나는 이만...'
반여량은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살포시 와서 안기는 곽소연을 차마 밀쳐 낼
수 없었다.
지금 행동은 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사랑을 갈구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아버지의 자리에
자신을 끼워 넣은 것이다. 그런 점을 잘 알기에 밀쳐내지 못했
다.
"품이 참 넓고 따스하군요."
전에도 맡은 향기. 봄풀 냄새가 맡아졌다. 곽소연은 싱그러웠
다. 티없이 깨끗하고 맑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보듬어 안은 것
처럼. 한한은 짙은 율금향을 뿜어냈다. 그녀를 안으면 소유하
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녀를 안고 있으면 천리 길을
달려온 것처럼 숨이 거칠어졌는데.
"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데... 나, 노력할 거예요."
"깊은 상처를 받게 돼."
반여량은 한한이 떠나간 다음 겪어야 했던 절망을 떠올렸다.
"상처라면 이미 받을 만큼 받았는걸요. 만신창이가 되었는
데..."
곽소연은 사랑스런 여자였다.
한한을 만나기 전에 곽소연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녀와 달콤한
사랑을 즐겼으리라. 그러나 운명은 한한을 먼저 만나게 해주었
다.
"내 곁에 있어 줘요. 그럼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곽소연은 비 맞은 참새처럼 오돌오돌 떨었다.
가는 흐느낌이 느껴졌다.
반여량은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감여에 매달렸
듯이 그녀는 자신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곽소연은 정말 노력했다.
산귀와 한가하게 바둑을 즐기던 중이었다.
반여량은 암굴에 들어온 다음부터 운공을 하지 않았다. 암굴에
형성된 기운과 그가 익힌 태극도해는 서로 성질이 맞지 않았
다. 축축한 습기와 답답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득보다 실이 많
다는 결론이었다.
산귀는 더욱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죽으러 사우맹에 들어왔다. 곽가장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이상 곽가장주가 가만 있지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죽어
야 끝나는 유희에 말려든 것이다.
죽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굳은 결심을 했던 대로 동기감응의 실체를
파악했고, 원방감여와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동기감응
과 원방감여를 접목시킨다는 생각 자체가 무리였다. 동기감응
은 동기감응대로, 원방감여는 원방감여대로 각기 독특한 틀을
형성하며 발전하면 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아니, 혼이 빠져나가
정신없이 달려들 만큼 동기감응은 뛰어났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원방감여가 동기감응만 못하지 않다는 점
이다.
직관에 의한 감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혈처를 찾아낸다. 갈마음수지혈(渴馬飮水之穴) 같은 신이 선택
한 감여가가 아니면 발견할 수 없다는 혈처도 간단히 찾아 낼
수 있다.
정말 목구멍에서 손이 기어 나올 만큼 탐나는 장점이다.
반면에 원방감여는 정확한 산법(算法)을 구사한다. 집을 짓는
다거나 가구를 배치한다는 점에서는 동기감응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장점을 발전시키면 되는 것이다.
큰 깨달음을 얻은 다음, 산귀는 원방파에서 소식을 학수고대하
고 있을 부총수 하후상에게 서신을 띄웠다. 동기감응을 원방감
여에 접목시킬 수 없다고.
두사람은 편안한 심정으로 대국(對局)했다.
대국이랄 것도 없었다. 산귀는 바둑의 달인인 반면 반여량은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가르치고 있는 중이랄까? 다른 때 같으
면 생각하지도 않을 바둑이련만 아무것에나 낙(樂)을 붙여야
하는지라 잡은 바둑판이었다.
바둑은 반여량의 완패(完敗)로 끝났고, 복기(復碁)를 하며 잘
잘못을 지적받고 있을 때, 곽소연이 검분(瞼盆:세숫대야)에 물
을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발 내밀어요."
"...?"
"발 내밀란 말이에요."
곽소연은 다짜고짜 발목을 잡아왔다.
화들짝 놀란 반여량은 황급히 발을 움츠렸다.
"무, 무엇을 하려고...?"
그녀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는 벌써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발을 씻도록 맡겨 놓을 수야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이가 한
참 지긋한 산귀까지 있는 마당에.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부담 갖지 마세요."
어찌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소, 소저... 제발!"
반여량은 얼굴이 벌개져서 말을 더듬거렸다.
곽소연은 발목을 낚아채 곱게 씻어 주기 시작했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나를 최대한 낮추고 상대를 최고로 올
려주는 행위였다.
"허허! 수담(手談)은 다음에 즐기세."
산귀도 무안한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
곽소연은 귀중한 보물이라도 어루만지듯이 투박한 발을 정성스
럽게 닦았다.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향유(香油)까지 발라
주었다.
"우리 서로 노력한다고 했잖아요. 말을 편하게 해줘요. 다가갈
공간이 있는 것처럼. 그래야 기운을 내죠."
너무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말에 반여량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냉정했다. 너무 냉정해서 자칫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제 그녀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건 것이다.
암굴에서 생활하는 중에 가장 불편한 것은 잠잘 때였다.
습기에 젖은 이불을 덮을 때면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축
축한 기운이 살갗을 적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반여량
의 침구(寢具)는 늘 보송보송했다.
곽소연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불을 햇볕에 내다 말렸다.
시비를 시킬 수도 있는 일인데 그녀는 항시 손수 했다.
"내가 전부 챙길 거예요. 내 생명이니까."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것도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물이라면 석수를 빼놓을 수 없었다.
그는 유영을 못할 처지가 되었지만 배를 타는 것은 즐겨했다.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후후후! 거기다 그물을 놓으면 어떡하나? 물을 전혀 모른다니
까.'
'저런! 수초(水草)에 걸리기 딱 알맞잖아.'
물에 관한 한 석수는 아직도 일행 중 능력이 가장 탁월했다.
쏘가리와 잉어, 붕어가 꽤나 많이 잡혔다. 사우맹 신세를 지지
않고도 점심 한 끼는 해결하리라.
"담수어(淡水魚)는 비린내가 많이 나서 말야."
석수는 연신 투덜거렸지만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날
것으로라도 먹겠다는 투였다.
배가 호반 가까이 이르렀다.
곽소연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동목이었다.
"추풍, 남녀 사이의 일이라 말하기는 뭣하지만... 길게 끌지
말게. 오공녀, 이번에 상처받으면 일어서지 못해."
그녀는 생선을 요리할 그릇을 챙겨 놓고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지피는 중이었다.
곽소연은 불편할 정도로 모든 것을 챙겨 주었다.
싫은 소리나 귀찮은 기색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런 생활에 활기를 얻은 듯 그녀의 얼굴은 늘 화색(和色)이 감
돌았다.
"죽을 수도 있어?"
"운명이잖아요."
"평생 산야(山野)로 돌아다닐 거야. 일정한 거처도 없어."
"여행은 마음껏 하겠네요."
"혹, 한한이 찾는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생각이야."
"그러세요."
그녀는 밝게 웃어 보였다.
그날부터 반여량은 굳게 닫힌 마음을 풀어 버렸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해.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
體)라고 했어. 당신이 자신을 낮추는 것은 나까지 낮춰 버리는
거야. 다음부터 내 발은 내가 씻지.'
'소연, 소연이 내 침구를 말려 주면 나는 소연이의 침구를 말
려 줘야하잖아. 우리 이런 일은 시비에게 시키고 밝은 태양이
나 봅시다.'
'밖에 나와서는 남자가 음식을 하는 거야. 소연은 그냥 앉아서
사내들이 한 음식 맛이나 평가해 줘.'
모두들 잘됐다는 말을 건네 주었다.
곽소연은 늘 밝은 웃음을 매달고 살았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
한 순간을 맛보는 여인처럼.
* * *
곽요연은 예측했던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곽무연이 사우맹 같은 동반자를 마다할 리 없었다. 그녀들은
사우맹을 비등한 위치에 두지도 않았다. 이용하고는 버리는 쓰
레기. 흑도인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라 버릴 만한 명분은 충분
했다.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문제는 이긴 다음 기득권(旣得權)을 누가 차지하느냐였다.
사우맹은 곽가장과 승부를 결했다는 점을 내세울 것이고, 신창
윤가는 강서성 최고 명문이라는 이점을 내세울 게다.
곽요연도 내세울 것이 있었다.
장주 곽모천을 왕중분이 죽여주기만 한다면.
그래도 부족하다. 사우맹과 신창윤가를 제치고 기득권을 차지
한다해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두고두고 골치를 썩일 게다.
곽요연은 곽가장과 사우맹, 신창윤가의 연합을 공멸시킬 방도
를 강구했다.
"곤지룡을 끌어들이면 간단합니다."
인대주 파로가관 담구가 말했다.
"곤지룡은 사우맹 사람인데?"
"그는 맹주에게 한 팔을 잘린 원한이 있습니다. 게다가 수혼혈
마가 죽는 바람에 의지할 기둥을 잃은 상태입니다."
"책략이 뛰어난 것 같던데 괜찮을까?"
파로가관 담구가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는 육시타성 이장무가 배신한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
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주보다는 곽요연에게 승부를 걸었다는
것. 사우맹과 신계각의 연합, 신창윤가와 광창조가의 동조. 그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충분히 자웅을 결해봤을 덴
데. 곽가장을 빠져 나가자는 말도 제일 먼저 꺼냈다.
'목숨이 살아 있어야 후일을 기약합니다.'
그는 아직까지 곽요연에게 승점(勝點)을 준 것이다. 비록 광창
조가가 멸문했지만 뜻밖에 천지유불이 서른두 명이나 되는 살
수를 동반하고 나타났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더군다나 왕중분
이 장주를 상대하기로 했으니.
"곤지룡은 총명하고 근면합니다."
한마디로 가슴 속 말을 전달했다.
그는 사람을 쓸 때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했다.
총명과 무지, 근면과 나태.
총명하고 근면한 자는 인재(人才)로서 최상의 요건이었다. 담
구는 이런 자를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비유했다. 지략은 뛰어
나나 통솔력이 빈약한 자. 책사(策士)로는 적합하지만 그 이상
으로 발전할 수 없는 자. 담구는 자신 또한 이 부류라고 말했
다.
총명하고 나태한 자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자
는 언제 돌발적인 행동을 벌일지 판단할 수 없는 부류였다. 정
세를 판단하는 안목이 있으되, 조그만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 조조(曹操)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무지하고 근면한 자는 쓰지 않았다. 유비(劉備)가 이런 부류였
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사람.
무지하고 나태한 자는 가장 안 좋게 보인다. 허나 담구는 무지
하고 근면한 자를 쓰느니 차라리 나태한 자를 썼다. 이런 사람
은 스스로 높은 직위를 차지할 수 없기에 근면한 자보다는 위
험 부담이 적었다.
총명 여부, 근면 여부 외에도 한 가지 더 주장하는 것이 있었
다.
나무는 큰 나무 밑에서 자라면 죽는다. 하지만 사람은 큰 사람
밑에 있어야 더불어 큰다는 지론(持論)이었다.
"곤지룡이 사우맹을 흔들고, 정대원이 혈단을 약간만 움직이면
공멸(共滅)은 시간 문제입니다."
무결군 유의가 맞장구 쳤다.
육시타성 이장무가 배신함으로써 생긴 공백은 무결군 유의가
대신했다. 그는 육시타성 못지않은 병법가(兵法家)이기도 했
다. 동종관은 곽가장 초기부터 지내온 연혁으로 정대주의 지위
를 차지했지만 이들은 무수한 난관을 뚫고 대주를 차지한 인물
들이었다.
"정대원들은?"
"혈단에 거짓 정보를 흘리고 있습니다."
"음...! 곤지룡을 설득해 봐요."
"그러죠."
파로가관 담구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말을 들었소. 장주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말도..."
"그래서요? 달라진 게 있나요?"
왕중분을 대하는 곽요연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
"당신의 그런 성격... 이제는 이해하겠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오. 장주를 죽인 다음 무림에서 은거하겠다고. 나와 같
이... 여생을 보냅시다."
곽요연은 냉랭한 눈으로 왕중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 속
으로 생각했다.
'그럴 수 없어요. 그러기에는 무림의 생리를 너무 알아 버렸어
요. 이런 일이 즐겁다면 믿겠어요? 솜털까지 곤두서는 짜릿한
전율. 아마 나의 아버지는 무인이었을 거예요. 그것도 이주 잔
혹한 피를 가진. 당신은 곽모천을 죽여야 해요. 그리고 능력이
있으면 내 혓바닥을 잘라 가요.'
그녀는 말했다.
"그러죠. 그때도 상공이 저를 버리지 않는다면."
* * *
사우맹 총단이 텅 비었다.
삼삼오오(三三五五)로 각기 흩어져 남창부 곽가장을 향해 움직
인 것이다. 곽가장 분타가 움직인다는 정보는 그 어디에도 없
었다. 정대원이 빠진 곽가장은 그야말로 눈먼 장님이었다.
곽사연은 곽요연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녀는 더 이상 미친 척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염원, 아버
지를 죽이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실현 가능성도 매우 높
았다.
천지유불과 살수들, 그리고 왕중분과 요와도 같이 움직였다.
그들 사이는 아직도 서먹했다. 왕중분과 요와는 긴 이야기를
나눈 듯한데 천지유불과는 대화를 기피했다.
천지유불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러나 왕중분과 요와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느꼈고, 사
우맹에 있는 기간동안 뚫지 못했다.
"옥순산 전투에서 시작된 싸움... 당시도 많이 죽었는데 지금
은 거의 열 갑절이 죽게 되는군."
동목이 중얼거리는 말에 일행 모두는 진한 피 냄새를 맡았다.
텅 빈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이래야 모두 아홉 명뿐이었다.
구궁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이 다시 모였다.
조중, 학구, 범도, 황백.
그들은 곽가장 틈에도 사우맹에도 섞이지 못했다. 곽가장 반도
로 낙인찍히기는 했지만 곽요연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그
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삼공녀 곽선연을 구출하는 데 역점을 두
었다.
동목과 석수는 이번 일을 끝으로 무림을 은퇴할 작정이었다.
동목은 창병가의 진기(珍技)를 이어가고, 석수는 끝없이 중원
을 떠돈다 했다. 아내와 친구를 찾아서.
모두 곽가장이 무너지고 목숨이 붙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행해
질 행동들이었다.
"우리도 가지."
산귀가 암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곽가장이 무너진다면 그는 살 희망이 생기게 된다. 천지유불은
그런 점을 잘 알기에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
섰다. 기필코 곽가장주를 죽이겠다고.
"그런대로 복원은 했지만 예전 성능이 나올지 몰라."
동목이 말했다.
그는 대장간에서 하루해를 보내다시피 살았다. 정대에서 사람
을 납치할 때 사용하던 마차를 재현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동목이 직접 만든 마차는 일행 모두가 발을 쭉 뻗고 탈 만큼
넓었다. 기관장치도 틀림없이 있을 터이지만 어떠한 암기가 숨
어 있는지는 동목밖에 몰랐다.
믿어도 좋으리라. 창병가의 소가주가 제작한 마차 아닌가.
일행이 모두 마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저..."
곽소연이 양볼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좋은 가문에서 자란
탓에 도도함이 배어 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답지 않은 모
습이었다.
일행은 멈칫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 산귀 어르신... 호, 혼인... 증인..."
그녀는 무척 힘들게 말한 듯 말을 끝내고 나서는 고개를 푹 떨
궜다.
사람들은 그녀가 한 말의 듯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모두 눈길
이 반여량을 향했다. 느닷없이 혼인이라니?
반여량, 그는 무안한 듯 대야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짐짓
태연한 듯 가장하고 있지만 그의 행동 또한 전처럼 담백하지
않다는 것은 금방 파악되었다.
"허! 우허허허!"
"하하하! 그러고 보니 어느새 둘이? 하하하!"
실로 오랜만에 유쾌한 웃음이 마음껏 터져 나왔다.
모든 의식은 생략되었다.
곽소연이 지하 암굴에서 챙겨 가지고 나온 주담자 한 병과 술
잔 두 개가 혼례의 모든 것이었다.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얼굴도 모르는 조상을 향해, 그리고
역시 얼굴도 모르는 부모 대신 산귀를 향해 절을 올렸다.
반여량은 어디서 구했는지 옥팔찌를 꺼내 곽소연의 손목에 채
워 주었다. 혼인 서약이었다. 볼일이 있다며 대야성에 다녀오
더니만 옥팔찌를 사온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곽소연은 진한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
옥팔찌에 담긴 사연은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한한의 혼인식 날 그를 제압했을 때, 그의 품에서 떨어진 백옥
팔찌.
교교는 반여량이 한 여인에게 쏟은 정성을 고스란히 말해 주었
다.
반여량이 끼워 준 팔찌는 청옥(靑玉)이었다. 한한을 잊겠다는
마음의 정표인 것이다. 이처럼 감사한 혼인 선물이 또 있을까.
곽소연은 쌍가락지를 꺼내 하나는 반여량의 손가락에 또 하나
는 자신의 손에 끼었다.
"가가(哥哥)가 없으면 저도 없어요."
그녀는 함초롬히 웃었다.
혼인은 간단히 끝났다.
"자네다운 혼인이네. 대야호 푸른 물을 벗삼아 혼인했으니."
산귀가 너무 초라한 혼인을 안쓰러워하며 마음을 풀어 주었다.
"처제, 축하해."
조중은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다.
"형부, 우리... 아직도 형부와 처제인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이 끝나지 않는 한 변함없어."
"고마워요, 형부. 흑!"
곽소연은 끝내 울음을 보이고 말았다.
여태까지 참은 것만 해도 오래 참았다. 정말... 꿋꿋하게 참아
냈다. 그녀는 매일 울고 싶었으리라.
"커험! 깜짝 놀라게 해주려 했더니... 이거 너무 쉽게 뺏기는
데..."
동목이 헛기침을 터뜨리며 울적해지려는 분위기를 바꿨다.
그는 품에서 헝겊에 둘둘 말은 물건을 꺼내 반여량에게 건네주
었다.
"혼인 선물치고는 괴상하지만 자네가 기습을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응? 언제 선물을 준비한 거야?"
석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마차를 만들면서... 심심하길래 만들어 봤지."
"고맙습니다."
헝겊을 풀자 금빛에 빛나는 사검이 나왔다. 반여량이 사용하는
사검보다 훨씬 날카로워 보이는 것이 보통 재질은 아닌 것 같
았다.
"이건...?"
"금잠사(金蠶絲)잖아!"
반여량의 물음보다 학구의 놀람이 더 빨리 튀어나왔다.
"후후! 사우맹에 금잠사가 약간 있더군. 그걸 썼지. 사우맹주
가 알면 눈이 튀어나올걸?"
동목은 그답지 않게 농담을 했다.
지금 이 순간간만은 모든 시름을 잊고 반여량과 곽소연을 축복
해 주고 싶었다.
"좋은 선물을 받았군. 금잠사는 무가지보(無價之寶)지. 그걸로
검을 들었으니... 어떠한 병기도 날카롭기로는 자네 사검을 따
를 수 없겠어."
조중의 말이 맞았다.
실같이 길게 늘어진 금빛 날을 살짝 손대기만 했는데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멋!"
곽소연이 화들짝 놀라며 옷깃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었다.
"이거야 원, 짝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황백이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하하! 이봐 추풍 아니지, 이제는 매부(妹夫:처매부)라 불러야
되겠지? 우리도 남남이 아니군그래. 앞으로 깍듯이 저부(姐夫:
처자형)로 모셔. 알겠나?"
모두 진실한 본연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행복, 그것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깊은 밤의 물결은 거친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두두두두두...!
여섯 필의 말은 둔중한 마차를 힘차게 몰았다.
일행은 깊은 침묵에 잠겨 말을 잊었다. 모두 눈을 감고 있지만
잠이 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힘들게 도피해 간 길.
그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다.
사우맹도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곽요연 일행은? 정대원은 강
서성 전역에 흩어졌으니 실제로 곽요연 일행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곽무연과 신창윤가는 약속을 지킬까? 온갖 걱정이 잡
다하게 밀려들었다.
걱정한들 무엇하랴. 이미 화살은 쏘아졌는데.
곽소연은 반여량의 한쪽 팔을 꼭 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예의바르지 못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합방도 하지 못한 혼인이었다.
남창부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생긴
다 하더라도 마음 편한 밤은 되지 못하리라.
어쩌면 이보다 확실한 죽음의 길은 없었다.
장주가 교교와 곽선연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기 전에 그들을 구
출해야 한다. 즉, 사우맹과 신창윤가가 곽가장을 들이치기 전
에 곽가장으로 잠입하여 두 사람을 꺼내 와야 한다는 말이 된
다.
어려운 일이었다.
기회는 찰나간에 스쳐 지나가리라. 갑자기 들이닥친 수많은 무
인을 보고 곽모천이 당황하는 그 찰나. 시간은 오직 그 잠깐뿐
이었다.
곽소연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
"아뇨."
"별이 참 아름답군."
곽소연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군요. 참 아름다워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해?"
"푸훗! 그럼요. 기억하고 말고요. 가가 같은 분... 처음이었어
요. 강서성 제일패주의 딸에게 그렇게 대할 배짱은 어디서 나
온 거죠?"
곽소연은 말을 꺼낸 다음 바로 시무룩해졌다.
강서성 제일패주의 딸, 이미 지나간 영화였다.
"그때는 노을을 보았지."
"금빛 해거름... 정말 아름다웠어요."
"가장 마음 편한 곳이 어디였소? 가만! 내가 알아맞춰 보지.
음... 곽매 같은 성격이면... 바로 그 자리, 서재겠군."
"푸훗! 맞았어요. 서재가 가장 마음 편했죠. 지금 다시 그 상
황이 된다면 달라질 거예요. 우리가 혼인한 대야호나 아니면
이 마차 안이 되겠죠."
"어떻게 맞췄는지 궁금하지 않소?"
"아뇨. 가가는 동기감응 감여가니까 그 정도도 못 맞추면 돌팔
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뭐? 이거야 원..."
"호호호...!"
"후후... 가장 좋아하는 것이 서적이었지. 묵자."
"가가는 무엇이 가장 좋았어요?"
"알아맞춰 보지."
"백옥 팔찌요."
반여량은 곽소연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한한은... 잊도록 노력하지. 곽매도 신경쓰지 마."
"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곽소연에게서 봄풀 냄새가 다시 풍겨나왔다. 맑고 깨끗한 영혼
의 냄새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도 책이었지. 곽매에게 준 감룡경."
"어멋! 그래요?"
"그 속에는 행복이 담겨 있거든. 집 크기가 사는 사람 수에 적
당 해야하고, 문은 작고, 담은 정연하게 세워져 있고, 도랑은
남동으로 흐르고, 나무를 심어 놓아 새들이 우짖는 집. 감여에
서는 이것을 오실(五實)이라고 하지.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
어."
"그런 집에서 살게 될 거예요."
두두두두...!
어둠을 뚫고 달리는 마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첫댓글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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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하셨습니다
2024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즐~~~감!
잘 읽고갑니다..올해도 건강과 행복하세요...
즐독 햇습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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