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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장 1- 4)
성경본문: 로마서 8: 1- 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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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품입니다. 어디를 가나 우리는 그분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역은 그 경관이 더 탁월한 곳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캐나다 록키공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산물입니다.
66권, 어느 책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은 다른 성경보다 더 큰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기도 합니다.
로마서 전체가 성경 66권 가운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특히 로마서 8장은 그 보석 꾸러미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보석에 해당합니다.
로마서 5장이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한다면, 8장은 그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가운데 가장 탁월하고 감동적인 8장을 살피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껏 설교하던 방식과는 달리 8장에서는 본문의 길이를 보다 짧게 잡고, 좀 더 자세히 다루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도움으로 8장을 살필 때마다 원래적인 감동이 살아나는 말씀 선포가 되기를 바랍니다.
8장 1절은, 오늘 본문 네 절의 근본적인 명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8장 전부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4절은 이 근본 명제를 풀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감동적인 로마서 8장은 “그러므로” 하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접속사가 나오면 우리가 할 일은 연결 고리를 찾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하고 관련해서 여기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이 나왔는가를 살펴보는 겁니다. 그래야 논지의 흐름을 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8장 1장의 이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어떤 부분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7장이 말한 어떤 것하고도 자연스런 연결을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5장, 특히 5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시킬 때 그 흐름이 자연스러워 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8장에서 5장 끝에서 떠났던 위대한 주제로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은 이미 5장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 모든 자들이 누리는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보다 분명하게 감동적인 말로써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선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분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법정에서 결코 정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기소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정죄토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계명을 어기고 살았기에 우리를 처벌하려고 달려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후의 심판의 보좌에서 어떤 선고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여기 복된 선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정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죄 받는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정죄에서부터는 우리는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은 성경의 선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정죄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무엇을 선언하고 있습니까?
성경 그 자체가 뭘 우리에게 이야기합니까?
“이제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라는 말은 어떤 가능성도 부인하는 말입니다. 절대로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지금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성경의 선언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느낌과 우리의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우리의 신분, 우리의 법적인 상태에 대해서 말합니다.
의롭다는 선언을 한 번 들은 성도는 어떤 상황 속에도 다시 정죄 아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죄감 속에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정죄 받는 느낌에 빠져 들도록 자신을 버려둘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정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침체할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자신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절망에서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물론 마귀는 우리에게 정죄감을 안겨주려고 달려듭니다.
우리 양심이 고민하는 순간에 “봐라 넌 소망이 없어.”라고 위협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하나님 말씀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입니다.
이 말을 들려줄 때 마귀는 당장 도망을 가고 맙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죄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처리되었습니다.
제가 조금 오해를 받을만한 표현을 한번 써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다시는 정죄 아래 빠져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 지불했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죄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청산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계십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전 죄만 용서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은 여러분의 현재의 죄도 포함됩니다.
앞으로 짓게 될 그 어떤 죄도 이미 처리된 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이제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들으면서, ‘야! 됐다 이제부터는 마음껏 한번 먹고 마시자 마음껏 살자’는 생각이 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독교의 진리를 아직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은 6장에 대해서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니 어찌 더 죄를 지으리오.”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아직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제 되었구나. 매일 큐티, 통독, 암송하는 것을 멀리하고 이젠 옛날식으로 살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로마서 6장을 바로 이해한 사람은 결코 그렇게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정죄함이 없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감격합니다.
더 나아가 사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 대해서 더 이상 부담을 드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정죄함뿐만 아니라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나그네로 지낼 때에 두려워하면서 정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두려워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거룩하게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 소원이 생겨난다면 여러분은 지금 듣고 있는 로마서 진리를 깨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다는 것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나면서부터 우리는 바로 아담 안에 태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죄의 저주 아래 우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순간 부활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됩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동시에 그의 부활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누누이 생각하고 그 사실을 감격하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사흘 후에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의 생명이 지금 우리 안에서 약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과 연합되면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함께 살아났으면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은 그리스도와 결합한 순간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 분처럼 될 것을 내어다봅니다.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될 날을 바라보며 소망합니다.
더 이상 정죄 아래, 그러다가 또 무죄 방면 아래 들어갔다가 나갔다가 하는 자리에 있지 마십시오.
한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한번 정죄함이 없으면 영원히 정죄함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다고 하나님의 정죄 아래 다시 빠져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죄 선언은 영원히 유효합니다.
무죄 선언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객관적인 역사를 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과가 지불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죄인이고, 때론 죄를 짓지만 그 죄에 대한 대가를 그리스도께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값은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다시금 값을 지불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 그리스도를 믿어도 어떤 때는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을 때 이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싸우고, 죄를 미워합니다.
법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최선을 다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매사에 두려움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따라해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왜 정죄함이 없습니까?
‘이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하는 율법이 군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통치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국적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은혜 아래 거주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성령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하는 것은 그 생명의 통치 아래 우리가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과 대조됩니까?
전에는 죄 짓는 삶이잖아요?
죄 지으면 죄 지은 자에게 다가오는 어두움의 그림자 죽음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통치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성령 사역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생명을 주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속이고 미워하고 죽이는 일은 악령의 역사입니다.
수군수군하고 당 짓고 하는 것들은 악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섬기고 사랑하고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의 통치아래 속합니다.
그 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통치에서부터 벗어나게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동일한 진리를 아버지 하나님의 각도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그 아들 아래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도다.”
흑암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사랑의 아들의 환한 빛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3절은 이 사실을 좀 더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복음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시나니”
율법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는 것입니다.
왜 율법이 할 수 없었습니까?
농부가 밭에 나가서 하는 작업을 떠올려보십시오.
굳은 땅을 삽을 가지고 힘을 줘서 밟아서 올리는 순간에 우지직하고 그만 삽자루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삽은 삽 밑 부분은 그건 쇠로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결되어 있는 부분, 나무가 연결되어 있는 그 부분이 가끔 부러져서 삽으로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를 떠올려 보십시오.
율법 그 자체는 아직도 예리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이라는 이 삽자루가 튼튼해야 일이 될건데 이게 감당을 못해내는 겁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살았던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서 노력해 보았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모든 도를 깨치고 거기에서 삶의 평안을 마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고 나니까 그는 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바울은 이 진리에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게 영성의 척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진리에 가끔 감동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전하고 있는 복음에 여러분 스스로 감동해 본 적 있습니까?
사망의 절규를 하는 이웃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들의 감동적인 삶과 진리를 접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하고 소리칠 수 있는 자들을 우리의 주변 사람들은 만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자신도 감동하지 않은 진리를 아무에게도 전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도 감동이 안된 걸 가지고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시간만 가기를 기다리잖아요.
전도를 하면 어떻게 하면 이 사람 말을 막아서 돌려보낼까 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감동되어 가지고 전하면요, 별 생각 없이 왔다가도 그 이야기를 따라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감동해서 전하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연애 삼매경에 빠진 사람 못 봤습니까?
만나자마자 그냥 자기 사귀고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막을 길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인이 감동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죠?
본인이 감동하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부터 말주변이 좋아야 설교자가 되는 것 아닙니다. 사람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어야 설교자가 되는 것 아닙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사람 앞에만 서면 그냥 벌벌 떨렸습니다. 말 참 못했습니다. 지금도 못하지만 그 때는 훨씬 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감동시키면 우리는 나가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육신의 연약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여기 목메어 감격한 진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감동한 진리를 전하는 그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음 진리는 언제 들어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시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앞으로도 하실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에 여러분을 맡겨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동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찬송을 부를 권리를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을 칭송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만이 신랑 그리스도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구원 역사를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도 이 역사를 하실 것이기에 우리가 이 복음을 들고 나가고 잔치를 배설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에 감격한 사람은 누구나 이 소식 전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나 선교에 대한 관심은 선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에 감동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고 숭고한 특권입니다.
오호라 나는 절규하는 인생이기에 하나님은 전해 주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 생애에서 가장 보람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만족하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될 때에 비로소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파송하는 자가 없으면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나가든지 아니면 나가도록 파송하는 일에 참여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겁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나는 “home base”에서 일할 사람이라는 그 마음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기 고국 땅에 남아서 선교에 참여합니다.
비록 여기 있지만 내 관심은 저기 오대양 육대주에 가있습니다.
직접 나아가지 않지만 지원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취미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누구나 선교와 전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어떻게 동참할건지 그건 우리가 택한 소명에 따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의 참여는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야합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고통을 다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정죄 의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가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소식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동네에서, 직장에서, 여러분의 친구들 사이에서 그들의 표정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이 없으면, 사는 것이 황홀하다는 고백이 없으면 그는 복음을 들어야 할 자이고 다시 깨달아야 할 자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죄 처리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 식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지금 당면한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죄를 인하여 여기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집결된 부분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의 속죄양으로서, 구약 시대에는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목을 치는 대신 제물인 양의 목을 꺾어서 그 사람의 사해 주었습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예수를 십자가 위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속죄 제물로 그를 보내셨습니다. 그 육신에 죄를 뒤집어씌우시고 살이 찢기고 그의 피가 흐름으로써 화해의 새 장이 연출되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 했습니다.
죄를 인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 분께 지우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죄는 그 분의 몸에 지워졌습니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아들의 죽음이란 대가를 통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셨습니까?
최종 이유는 그 방법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을, 하나님이 하신 방법이 옳다는 것을 만 천하에 입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아들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셔서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 입증하셨다. 자기도 의롭고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자들도 의롭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로마서 3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를 율법 아래 태어나게 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했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 아래 그를 세우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덫을 놓았지만 주님은 그 덫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매 자녀들이 우리 인생들이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사망을 통해서 사망을 사망 선고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사망은 인류 위에 군림하던 사망의 사망 순간입니다.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은 몸, 혈육을 가진 인생만이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몸을 입고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우리 위에 군림하는 사망의 사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고발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여러분과 제가 지었던 죄들에 대해서 고발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만 천하에 공개하시는데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도 이미 그 죄에 대한 값이 지불되었기에, 하나님은 불공정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어머니가 아무리 다른 사람을, 착한 아이를 사랑한다고 자기 자식을 내어 줄 사람 있습니까?
죄를 지은 것이 인간입니다.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육신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육신에 처벌되어야 합니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육신에다가 죄를 뒤집어 씌우셨다는 겁니다.
죄는 인간이신 그 분의 몸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 아들의 몸에 죄 값을 물으셨습니다.
그의 육신에 우리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육신으로 죄를 지은 인간을 대신해서 그 아들의 육신에 죄를 물으셨습니다.
왜 이 특정한 죄 용서 방법이 필수적이었을까요?
왜 속죄 제물로 아들이 들여져야만 했습니까?
그 대답이 4절에 있습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육신을 좇지 않는다고 했을 때 육신을 무슨 말입니까?
육신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 나올 때는 인류를 가리키기도, 우리 몸, 살 신체를 가리켜 육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육신이라 말할 때는 비중생한 인간성, 말하자면 죄된 인간 본성을 가리켜 육신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인간 죄성에 따르지 않고, 죄악된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모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의롭게 살기를, 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더러워진 부분이 씻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다음 무엇이 필요합니까?
새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써 우리가 덧입게 될 때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자가 있는 있는가 하면, 아니 육신을 따라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영을 따라 사는 자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은 육신을 따라 사는 자입니까 아니면 그 영을 따라 사는 자입니까?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행패를 부리고 집안에서 가족들 못살게 하는 사람들이 전부입니까?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 중에서는 아주 착한 사람들도 있어요.
착하게 생기고, 착하게 처신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다만 그 중심에서 성령에 속한 것을 전혀 모를 뿐입니다.
지식도 있어요. 전문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자기 욕망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기 명예 그것이 참 착한 아이라는 그 착하다는 칭호 그것이 그의 삶의 동기입니다.
영을 따라 사는 자는 새로운 소원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그 아들이 우리의 속죄양이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모든 자격을 다 구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더러움은 씻겼고 우리에게 의의 새 옷이 입혀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옛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생명 안에서 우리가 연합하게 될 때에,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의 생명을 누리게 될 때에 우리가 어떤 것을 받아 누리게 되겠습니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지금 구출 받았습니다.
그 아들의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고 믿음 안에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지금 나아왔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새로운 성도의 신분으로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에게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고 우리의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원한 찬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속죄의 피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양심이 괴로운 순간마다 사단을 향해서 대답해 주십시오.
이제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십시오.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모두 세상에 있는 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인으로 취급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죄를 십자가 위에서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값을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변상을 하나님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죄인으로 태어나서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죄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이전처럼 죄 짓는 것을 낙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제는 죄를 짓게 될 때 그것이 내 양심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을 향한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삶을 살기를 원치 않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이 사죄의 자리로 이끄신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며 이 사죄의 자리로 이웃을 구역에 초대하는 한 주간을 살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