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년식 2000년 10월
◆주행거리 13000KM
◆차량색상 곤색
◆차량가격 1400만원
◆차량기어 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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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국민차이자 귀엽고 깜찍한 클래식비틀을 판매합니다.
차량은 뉴비틀 이전 모델인 클래식 비틀이며 비틀 애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입니다.
차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비틀의 매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계실겁니다.
스텐범퍼,에어콘,알루미늄휠이 장착되어 있으며 차량은 무사고에 신차 수준의 차량상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틀에 관한 모든사항에 대해서 서술한 내용이니 참고하세요.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사에 독재자라는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독일의 아우토반과 "폴크스바겐"을 만들어내 독일 국민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4년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국민차의 생산을 위해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한 자동차 기술자였던 포르쉐 박사에게 "어른 두명과 어린이 세명이 탈 수 있는 차, 650kg의 무게, 속도 100 km/h, 26마력, 연료 7리터로 100km (14.5km/1L) 이상을 달릴 수 있으며, 정비가 쉬운 차, 그리고 차 값은 1천 마르크 이하인 차" 를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39년 포르세박사는 히틀러에게 우스꽝스럽게 생긴 딱정벌레 같이 생긴 자동차를 제작하여 보여준다. 결국 포르쉐의 비틀은 히틀러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자동차사에 빛나는 국민차 폴크스바겐 (Volkswagen/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으로 탈바꿈했다.
비틀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단순하면서도 뜻깊은 한 마디를 남겼다. "내 아이디어를 살리기 위해서는 히틀러의 지원이 불가피했다." 히틀러의 고아가 되어버린 이차는 파괴된 독일을 짧은 시간내에 경제대국으로 일으켜 세우는데 큰 공을 했다.
비틀은 판매된 30년 기간동안 초기와 동일한 모양을 유지한채 메커니즘과 편의성을 끊임없이 개선해 단종될 때는 초기모델과 똑같은 것이 단 한가지도 없었다.모양은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모델을 바꾸기 위해 투자되는 개발 비용을 절약해 값싼차를 만들었고 포르쉐박사의 천재적인 기술을 밑바탕으로 설계된 소형차는 유지관리비를 대폭 절약해 주어 세계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비틀` 이라는 차명의 유래
비틀은 영어로 "딱정벌레,풍뎅이"란 뜻이다.
비틀의 원래 차명은 폴크스바겐 (독일어로 국민차란 뜻)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에 참가했던 미군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값이 싸면서 실용적인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을 전리품 겸 선물로 구입하게 되었고, 이들 차들이 미국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비틀이라는 이름은 그 둥근 디자인 때문에 한 미국의 기자가 이 차를 딱정벌레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데서 유래하였다. 이 후 미국에 수출되는 폴크스바겐은 차명을 비틀로 사용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국민차라는 아이디어는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30년대전에도 이 같은 심플한 소형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많았으나 성공으로 이끌지 못했을 뿐이었다. 디자인, 설계하는 데는 성공하였더라도 보통사람의 연봉을 넘는 비싼 비용 때문에 생산할 수가 없었다.
1930년 포르쉐 박사가 자동차설계회사를 만들었고 이 회사는 `포르쉐 뷰로`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기존의 서스펜션보다 가볍고 기능적인 독립식 프론트 서스펜션을 개발했다.
1931년 독일의 모터사이클 업체인 Z?dapp에서 포르쉐 박사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2도어 세단차를 만들었고 그 모델은 Type 12였다. Z?dapp에서는 그들의 모터사이클엔진인 1.2리터 래디알 엔진을 장착하길 원했으나 이 차는 더 이상 만들어 지지 않았다.
그 뒤 포르쉐 박사는 1933년 NSU 사의 차 Type 32를 디자인하였다. 이 차는 Type12보다 더 KdF Wagen(이후 양산 모델)과 비슷한 모양을 하게된다. 이 차는 Tatra V570과 디자인이 비슷하고 기계적인 부분도 비슷하였다. 이차대전후 폭스바겐은 Tatra 에 이에 대한 보상을 하였으며 Tatra에서는 KdF Wagen 개발에 있어서 디자인과 기술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에 NSU 사는 Type 32 프로젝트를 중단하게 된다.
히틀러의 제안으로 포르쉐 박사가 초기 디자인 한 차는 Type60이었으나 곧 V1으로 바뀌었다. 히틀러가 컨버터블 버전을 생산할 것을 제안하여 V2 모델이 디자인 된다. 포르쉐 박사는 첫 두 모델의 원형차를 만들기에 시간이 매우 부족했으나 결국 1935년에 완성되었다. V1의 디자인은 곧 개선되어 VW3이 만들어지고 이들 세종류의 차는 1936년 혹독한 테스트를 거치게 된다.
VW3는 철판 바닥을 가진 후륜구동차였으며, 앞 독립 서스펜션. 백본 프레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시험과정을 통해 공냉식 수평대향 1.1l 엔진이 선택되었고 이22.5마력 4개의 실린더 BOXER 엔진은 오늘날까지 비틀 모델에 장착되고 있는 엔진과 거의 같다. VW3의 테스트 과정을 통해 VW30이 탄생하였고 결국 이 차가 대량 생산 모델이 된다.
히틀러의 고집으로 국가 기관인 DAF에서 이 차를 관리하고 테스트 하여 초기 차량의 품질문제를 고쳐나갔다.젨1938년 Wolfsburg 에 KdF Wagen 공장이 건설되었다. 이 지역은 30년대의 신도시로 새공장의 일꾼들을 공급했다. 이 공장에서 1939년 VW38s (pre-production) 과 VW39s (demonstration cars) 가 만들어져 마지막 버전 모델을 보여주었다.
이 차는 985 cc에 공기냉각식 엔진, 후륜구동, 24마력, 최고속도97 km/h였다. 앞에 문고리를 가지고 있고 뒷유리가 분리되어 있으며 큰 후드를 가지고 있고 기타 다른 작은 부분들까지 다른 차들과는 매우 달랐다. 이 차는 전후에 생산되는 비틀의 기본 모델이 된다.
V38s 가 소개되었을 때 히틀러는 이 차의 이름을 KdF Wagen으로 명명하였다. KdF 는 "Kraft durch Freude" 의 약자로 `즐거움을 통한 힘`(Strength through Joy) 이라는 뜻이다.
이 일은 포르쉐 박사를 열받게 만들었고 나찌당원이 아니었던 그는 차를 선전하는 자리에서 히틀러의 선동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차대전이 발발한 후 폭스바겐은 이 공장을 군용차량생산공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전쟁용으로 포르쉐박사가 디자인한 KdF-wagen의 군용버전으로 4륜구동이며 차체가 높아졌다. 오프로드에서의 성능이 매우 좋았으나 포장된 길에서는 승차감이 좋지는 않다. 667 대만이 1942 에서1944사이 생산되었다.
전후 폭스바겐공장은 연합군의 손에 들어가고 영국은 폭스바겐사에 Wolfsburg 공장의 남은 부분으로 생산을 재개할 것을 지시한다.
이 차는 유럽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으며 네델란드 사업가가 1947년 처음으로 네델란드에 수입하게 된다. 이 것은 폭스바겐사의 큰 성공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듬해 생산은 증대되고 모델이 조금씩 개선되어 1948년에는 1131cc 엔진, 1953년에는 1192cc의 비틀이 나온다.
1949년 폭스바겐사는 독일정부로 다시 돌아왔고 일년 전 영국에서 지명한 Heinz Norddhoff 가 운영을 맡게 되자마자 카브리올레 버전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 모델은 신형모델 개발과 대용량 엔진개발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비틀이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폭스바겐사는 전세계에 공장을 지었고 수백만의 비틀이 팔렸다. 꾸준히 비틀은 디자인이 개선되고 엔진도 바뀌었으나 70년대 들어와 비틀은 구형 모델이 된다. 비틀은 획기적으로 바뀌어 새 맥퍼슨 방식의 서스펜션을 가지게 되고 디자인도 바뀌어 더욱 넓어지고 부풀어 졌다. 하지만 이것이 비틀을 부활시키지는 못했고 폭스바겐사는 후속 모델로 골프를 내놓았다. 70년대말의 비틀은 60년대 모델과 대쉬보드만 달랐고 소비자들의 관심을 더 이상 끌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1978년 1월 19일 마지막으로 생산되었고 이후 브라질과 멕시코에서 2천 200만대의 비틀이 1990년대 후반까지 만들어 졌다. 1998년에는 "뉴 비틀"이란 이름으로 다시 새롭게 등장해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비틀은 세계 최장기 모델 및 세계 최다 생산 차종으로 2차 대전후 1948년부터1978년까지 2,000만대가 생산되었으며 이후 멕시코에서의 생산분까지 2천2백만대에 육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