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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등짐장수 세 사람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관도를 힘없이 걸었다.
"지겹게 덥군."
"그러게 말야."
한사람이 허리춤에 찬 호로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곧 그의 입
에서 독한 화주(火酒) 냄새가 풍겨났다.
"자네 술 너무 먹는 것 아냐?"
"이런 제길! 그럼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무슨 수로 이런 고생
을 견디나?"
세 사람은 어깨가 딱 벌어지고 눈빛이 날카로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상이 아니었다.
"잠시만 참아. 곧 이 황금밭이 우리 것이 될 테니까."
"제길! 황금밭은 고사하고 목숨이나 부지했으면 좋겠다."
"무슨 방정맞은 소리를 하는 거야!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
등짐장수중 한명이 술취한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저기서 차나 마시고 가는 게 어때? 더위도 식힐 겸."
"나는 요기나 해야겠다. 속이 불편해서 아침을 걸렀더니 배고
파 죽겠어."
그는 어제 저녁에도 과음(過飮)했다.
주루에 있는 모든 술은 다 마셔 버리겠다는 듯 술옹기를 옆에
가져다 놓고 퍼부어 댔다.
오랜만에 얻은 자유였다.
얽매여 있던 생활이 풀어지자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 즐겁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남창부에 가까워지면서 불안으
로 변하는 중이었다.
"이봐! 여기 차 안 가져와!"
여태껏 말이 없던 등짐장수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본색을 숨기느라 어지간히 고생했다. 일하기 싫고, 땀
흘리기 싫고, 편히 놀고먹고 싶어서 택한 길. 어렸을 적부터
골목대장 노릇은 한 번씩 해본 사람들이었다.
'그저 고함 한 번만 지르면 될 것을 돈까지 줘가며 사먹어야
하다니. 이거야 원 성질나서.'
등짐장수의 호통이 워낙커서인지 아니면 그들의 체격이 유별나
게 크고 얼굴이 험상궂어서인지 노점상에 앉아 국수와 만두를
먹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버렸다.
"헤헤! 이거 죄송합니다. 오늘은 손님이 하도 많아서..."
다늙어 저승문턱에 반쯤은 발을 들여놓은 듯한 노파가 주담자
를 들고 와 차를 따라주었다. 노파는 수전증(手顫症)에 걸렸는
지 손을 벌벌 떨었다.
"이봐 할망구. 우리가 따라먹을 테니 주담자는 여기다 놓고...
음... 우리도 요기나 할 수 있게 국수나 말아오슈."
"국수는 다 떨어졌고 만두는 있는뎁쇼."
"그럼 그거라도 가져오슈."
등짐장수들은 마음이 적이 놓였다.
지나가는 행인이 급증했다는 것은 그들 일행이 많이 지나갔다
는 소리였다. 남창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이 불안했는데.
"에고! 손님이 또 오네. 오늘은 무슨 길손이 이리 많이 지나가
나."
노파의 말을 쫓아 관도 저편을 바라보자 자신들과 흡사한 모습
을 한 행인 네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떠돌이 의원들이었지만
인상이 험상궂고 걷는 모습이 특이해서 동네 불량배들을 연상
시켰다.
"응? 저놈들은? 크크크! 저놈들 이제야 오는군."
"우리가 늦은 건 아닌 모양인데?"
행인들도 그들을 보았는지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잠시 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이거 너무 조용하니까 오히려 불안해서 말야."
"흐흐! 모두 눈 뜬 장님들이라고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곽가장 놈들이 그림자도 비치지 않으
니 불안하잖아."
"그건 우리도 그래. 이놈들, 날씨가 덥다고 꽁꽁 웅크리고 있
는 모양이야. 흐흐흐! 그러다 뒤통수를 얻어맞으면 얼마나 아
플까?"
인상이 험악한 등짐장수들은 서슴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만두
네 접시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기세가 워낙 당당하기 때
문에 주위에 얼씬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봐도 그들을 등
짐장수나 떠돌이 의원으로는 보지 않았다.
이상한 행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수를 더해갔다.
일다경(一茶頃),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인데도 허름한 노점상에
모인 사람들은 스무 명에 이르렀다.
"이거 이렇게 몰려 있다가는 치도곤 당하겠네. 우리가 먼저 일
어섬세. 천천히들 쉬다가 뒤따라오게."
등짐장수 세 명이 먼저 일어섰다.
"먼저 가. 이따가들 보자구."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앉은 채 눈인사를 보냈다.
워낙 허름한 노점상인지라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다. 그나마
차는 몇 모금 마실 수 있지만 먹을 것은 동난 상태였다. 그래
도 그들은 다시 만난 것이 즐거웠다. 쉽게 엉덩이를 떨치고 일
어설 분위기가 아니었다.
등짐장수들은 아쉬운 눈길을 남기고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
러나 그들이 채 열 걸음도 떼어 놓기 전,
슈릿! 뻑! 촤앗...!
병기가 날라오는 독뜩한 음향이 터지고, 그들은 각기 처절한
비명을 토해 냈다. 그것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
다.
"암습이닷!"
노점상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행낭
속에서 서슬 퍼런 검과 도를 꺼낸 행동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
다.
"커어억!"
"크윽! 함... 정!"
비명소리는 더 빨리 새어나왔다.
땅에서 솟아오른 검, 짚더미 속에서 튀어나온 검, 관도 옆에
서... 도저히 사람이 은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서 튀
어나온 검날이 숨통을 저며 버렸다.
"죽엇!"
개중에 몇 명이 반격을 시도했다.
슈각! 슈우욱...!
암습자들 중에도 희생자가 생겼다. 하지만 그는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는 순간에도 비명을 토해 내지 않았다.
찰나간에 노점상은 피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험상궂은 행인들 중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열
여덟명 흑의를 입은 암습자는 모두 열 명, 그 중 두 명이 피바
다에 목을 뉘었다.
흑의인들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신속하게 죽은 자들을 한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일부
는 노점상을 수리했고, 또 일부는 미리 퍼놓은 흙으로 핏자국
을 지웠다.
잠시 후, 노점상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원상태로 회
복됐다. 핏자국도, 격전의 흔적도, 시신도 일체 보이지 않았
다.
"저, 저는 이만 가도..."
한쪽 구석에서 머리를 싸매고 철퍼덕 주저앉아 버린 노파가 간
절한 눈빛으로 흑의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싸늘한 안광을 접
하자 움찔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계, 계속 하겠습죠. 계, 계속..."
사우맹의 연락 방법은 연이었다.
사람, 다람쥐, 나비 등 갖가지 모양으로 전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했다. 날씨가 불순하다거나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사용
할 수 없는 연락망이었다. 그럴 때는 약정된 장소에 황자(幌
子:간판)를 세워 놓아 연을 대신했다.
서단 일조(一組)는 연을 날려 사우맹도들에게 연락을 취하라는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신법이 특출한 무인들이라 통상적
으로 부여받던 임무였다.
장우생(張禹生)은 선화교(仙花橋)라는 다리 아래에 자리잡고
연을 점검했다.
사우맹 문도들은 집결지(集結地)를 알지 못했다. 혹시나 신분
이 발각되어 곽가장 문도에게 잡힐 경우에 대비해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일조 소속 무인 오십 명은 남창부로 들어오는 길목 곳곳에 배
치되었다. 황가도 설치해 놓았다. 남창부 성내로 들어가려면
사대문(四大門)을 거쳐야 하고, 성문 가 움푹 파인 돌 위에 세
워 놓은 황색 깃발을 보면 함산(鹹山)으로 오라는 전갈을 읽게
되리라.
장우생은 다리를 긁적거리며 다리 밑에 있는 거적을 흘낏 쳐다
보았다. 거지 다섯 명이 머물던 곳이다. 그들은 이미 저승을
떠도는 귀혼(鬼魂)이 되었고, 그곳은 장우생에게 편안치 못한
하룻밤을 제공했다.
더운 여름이고, 다리 밑이라서인지 모기들이 극성을 부렸다.
물린 곳이 열 군데도 넘는 것 같았다.
'슬슬 연을 날려 볼까.'
그가 준비한 연은 모두 다섯 개였다.
그 역시 집결지가 어딘지 몰랐다. 무조건 남창으로 치달아 왔
고, 조장을 만나 연꽃 모양의 연을 날리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
지는.
장우생은 연꽃 모양의 연을 골라 연줄을 슬슬 잡아당겼다.
바람은 미미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람이 약간이라도 있
으면 연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리라.
연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다리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참 한가한
인간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리라. 개중에는 의미있는 미소를
짓는 형제들도 있을 것이고.
연은 계속 올라갔다. 그리고 한 순간 기우뚱거리더니 쏜살같이
곤두박질쳤다.
"아!"
다리 위에서 누군가 놀란 외침을 토해 냈다.
"살인이다!"
누군가 다시 말했다.
다리 밑에는 장우생이 눈을 부릅뜨고 널브러져 있었다.
두 손에 연줄을 힘껏 부여잡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기습을 받
는줄도 모르고 죽은 모양이었다.
"저 사람이 죽였다!"
이번에는 여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인이 가리키는 곳은 강둑. 그곳에는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
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날쌘 신법을 펼쳐 사라져 갔다.
장우생이 날린 연꽃 모양의 연은 개울로 떨어졌고, 곧 물 속으
로 잠겨들었다.
함산에 도착한 한담거사는 드문드문 앉아 있는 수하들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겨우 오십여 명.
대야성을 출발할 때는 천여 명이었는데 도착한 인원은 오십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담거사는 그들이 중도에서 기습
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의 입에서는 호통부터 터져 나왔다.
"으음... 이놈의 새끼들...!"
동단주 비폭노검도 분통이 터지는지 노화를 터뜨렸다.
함산에 모인 오십여 명 중 동단 소속임을 알리는 백건(白巾)을
두른 무인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기습이다. 곽모천이 움직였어.'
곽요연은 사태를 단번에 직감했다.
모든 것이 틀렸다. 사우맹이 당했다면 신창윤가라고 무사할 수
는 없을 게다.
'함산, 이곳에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진다.'
"맹주, 기다려 보죠. 도착이 조금 늦는 모양인데. 윤가주에게
는 연락을 해 줘야겠죠? 기다릴 테니."
그녀는 아직 기회가 한 번 더 남았다고 생각했다.
"음! 천상 공격은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군."
한담거사는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머리가 받쳐 주지
않는다. 미련한 인간. 오히려 다행이지 않은가. 그와 사우맹
중요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면 훌륭한 미끼가 되니. 천
지유불과 서른 두 명의 살수도 마찬가지다. 그들이라면 곽가장
공격을 두 시진은 막아 주리라.
"그럼 저희는 남창부에 다녀와야겠군요."
"남창부에?"
"후훗! 걱정 마세요. 남창부에서 자란 몸이에요. 정대원이 있
는 곳이면 몸 하나 숨기기에는 충분하죠. 곽가장이 어떤 형세
인가 파악해 보고 오죠."
파로가관 담구, 무결군 유의는 곽요연의 뜻을 알아차렸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곽요연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상공, 상공도 같이 다녀올래요?"
"그게 좋겠군요.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면 도와주실 수 있고."
왕중분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담구가 부추겼다.
왕중분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살아 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이지 않은가. 곽모천을
상대로 이긴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는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평생 아프게 살아온 동생 요와와 햇볕을 보지 못하고 숨
어 지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싶었다. 꼭 그
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내 곽요연도 아프게 살아온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모진 충격을 받고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왔다면 그
고통이 어땠겠는가. 얼굴에 찬바람이 돌고 성격이 잔혹해진 것
은 당연한 귀결이다. 누구라도 그런 환경에서는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남편이라는 작자까지 원수와 한통속이
되어 날뛰었으니.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아내.
왕중분은 갈등했다.
"다녀와 오... 빠. 푸훗! 사올 수 있으면 연지와 분합 좀 사다
줘. 며칠 동안 화장을 하지 않았더니 영 이상해."
요와는 싱긋 웃으며 요염한 교태를 자아냈다.
뭇사내를 현혹시키며 버릇이 되어 버린 유혹이었다.
왕중분은 아버지에게 눈길을 주었다.
천지유불은 애써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곳은 사지...'
살수의 본능이었다.
천지유불뿐 아니라 서른 두 명의 살수들도 상당히 긴장했다.
모든 일이 예상했던 대로 순조롭게 풀릴 때, 그속에 함정이 도
사려 있다. 예정했던 일과 크게 틀어졌을 때, 거기도 함정이
있다.
싸움에서 공격 시기라는 것은 승패를 가름할 만큼 중요하지 않
은가.
사람이 도착하지 않아서 공격 시기를 늦춘다? 이것은 손대고
싶지 않은 싸움이었다. 게다가 일부분이라면 모르지만 거의 대
부분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대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이
된다.
사우맹 사람들은 전부 돌머리들이란 말인가. 이런 간단한 이치
를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는 이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 만난 자식들이라도 살리고
싶었다.
"요... 와야, 너도 따라가지."
"이해해 주세요. 오빠 소리는 쉽게 나오는데 아... 버지 소리
는 잘 안 나오는군요. 저는 여기서 쉬고 있을래요."
요와는 천지유불의 간절한 눈빛을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이상하다, 눈빛이.. 저것이 자식을 보는 아비의 눈인가...?'
왕중분은 천지유불의 이상한 태도를 흘려 버렸다.
따그닥! 따그닥...!
이제 갓 함산에 도착한 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창
부를 향해서.
'빨리...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곽요연은 마음이 조급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말고삐를 잡아당
기는 손에 힘을 풀었다. 조금이라도 눈치채게 하면 그때야말로
모든 일이 엉망으로 변하고 마니까.
그녀는 언니 곽사연에게 마지막 눈길을 주었다.
언니는 변함없었다.
어느새 한쪽 그늘에 자리를 잡고 검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언
니는 대야성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짬만 나면 검을 손질했다.
그 검으로 곽모천의 심장을 가를 생각인 것 같은데.
'어차피 우리는 핏줄이 다른 자매. 언니, 미안하지만 이게 마
지막 일 것 같군. 그만 죽어 줘야겠어. 사우맹은 무너지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신계각 요원들이 있어. 이번 기습에 실패한다
해도 재기할 수 있지. 남은 사람들은 짐이 될 뿐이야.'
그녀는 곽가장을 기습할 생각이었다.
분타가 움직였다 해도 남창부와 지척에 있는 함산을 공격하려
면 본장무인들이 움직여야 되리라. 그러면 본장은 오히려 비게
된다.
혈단이 움직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역공(力攻)을
가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정대원, 그들이 맡은 몫을 못해냈다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말
과도 같았다.
'나에게는 아직도 신계각 요원들이 있어.'
본인 스스로 용기를 부추기기 위한 위안에 불과했다.
곽요연 일행이 떠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본 한담거사는 천지유
불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네도 따라가지 그랬나?"
"알고... 있었습니까?"
"허허허! 자네는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군. 이래봬도 자네의 사
형인데 말일세."
"그랬군요. 하하하!"
"요와의 일... 정말 미안하네. 저 아이가 지닌 요기(妖氣)를
썩힐 수가 없었네. 흑도인을 규합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
어."
"어쩔 수 없었겠죠."
천지유불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자식이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도 똑같은 우(遇)
를 저질렀으리라.
요와는 뚜렷하게 예쁜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요와가 풍기는
기질을 접하는 사내라면 그 누구도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
킬 수 없었다. 욕정(欲情)이었다. 세상 모든 사내의 정혈(精
血)을 갈취하고도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은 호(湖)가 요와였다.
왕중분이 떠날 때 요와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
러나 생각을 바꿨다. 요와는 이미 사내 없이는 살 수 없는 몸
이 되고 말았다. 딸자식이 이 사내 저 사내를 전전한다면 구천
에서나마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차라리... 여기서 생을
접게 하자. 천지유불이 딸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었
다.
"사형, 여기서 곽모천 졸개들과 승부를 결할 필요가 있습니
까?"
천지유불은 화제를 바꿨다.
"이미 끝났어. 사우맹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네."
적이 바라는 싸움에서 승산을 점치기는 힘들었다.
"곽모천은 얼굴조차 비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혈영일검이나 이하극륜이 나타나겠지. 사우맹이 몰
살한 것으로 미루어 곽모천은 자네의 등장까지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네. 그만한 인물은 나올 거야."
"저보다는 사형 때문에 나오겠죠. 사형의 쇄심십이파법은 강서
성 사대 절기 중 하나이니까요."
"허허허! 그러고 보니 같은 사부 밑에서 배웠는데 무공이 너무
달라졌군그래. 나는 쇄심십이파, 자네는 쾌방백... 죽기 전에
우리의 무공부터 가늠해 봐야 되는 것 아닌가? 누가 진정한 오
의를 이어받았는지 말일세."
"후인은 두셨습니까?"
'왕중분. 자네의 아들이 후인일세."
"그렇군요."
"자네는?"
"원방파에 다섯 명을 남겨 뒀습니다. 그들이 제 맥을 이어갈
겁니다. 실전을 치른 적은 없지만 하나같이 놀라운 놈들이죠.
후후후!"
"자신있군."
"자신있습니다."
"그럼 한은 없는 셈인가?"
"제 아들놈이 곽모천을 죽여 준다면 남은 한이 어디 있겠습니
까."
그들이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도 사단주들은 몇 명밖에 안
되는 수하들을 맹렬히 다그쳤다.
"너희 놈들, 정신이 완전히 썩어빠진 놈들이야. 그런 정신상태
로 어떻게 곽가장을 공격하나! 곽가장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
여."
"이 개새끼들. 내가 그따위로 가르쳤어!"
"오면서 본 놈들 있으면 말해라. 분명히 술 처먹고 어디선가
퍼질러 자겠지."
그들은 아직도 수하들이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오직 한 사람, 곤지룡만은 달랐다. 그는 쥐눈을 번뜩이며 요리
조리 몸사릴 장소를 물색하기에 여념 없었다.
그는 곽요연의 제안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수혼혈마는 방풍막(防風幕)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
신을 지켜 주었다. 그래서 그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현재
로 좋았다. 세상을 마음껏 희롱하며 살면서도 안전이 보장되는
것처럼 만족한 삶은 없었다.
수혼혈마가 죽자 그의 생활도 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방풍막이 절실히 필요했다.
사우맹주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많은 수하들이 있고, 그들 중 일부로 인식되었다가는
이용만 당하다가 죽게 된다. 더군다나 그는 신경이 거슬렸다는
이유만으로 한 팔을 자르고 말았다.
곤지룡이 곤궁에 빠져 있을 때, 곽요연이 제안을 해온 것이다.
한쪽은 정대원을 통해 혈단을 움직이고, 다른 한쪽은 사우맹을
움직여 공멸시키자는 제안. 대가는 곽가장의 모사였다. 그것으
로 충분했다. 정도놈들은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미련한 것이
있었다. 필요없는 수하라도 체면상 붙들고 있는다는 것.
곤지룡은 사단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그래서 곽요연이 떠날 때
부지런히 눈짓을 해 같이 떠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곽
요연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욱 얄미운 놈은 파로가관 담
구. 그놈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멍청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
도록 만들었다.
'빠져 나가야 되는데...'
아무도 모르게 함산을 빠져 나가는 방법... 그렇게 잘 돌던 머
리가 족쇄라도 채워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 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있습니다
즐~~~감!
일일 올려 주심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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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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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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