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적멸보궁터가 최고의 명당이라는 어사 박문수..
옛날에 명나라의 태조인 주원장이 동양 천하에서 제일 가는 대명당에다 자기의 능을 조성하고자 하였다.그리하여 이름난 풍수사 5명으로 하여금 광활한 중국대륙과 요동.만주 일대를 샅샅이 뒤지게 하여 명당자리에 점수를 매기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사들이 추천하는 명당자리들이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짐의 조상님은 원래 조선 사람인고로 그 나라는 산천이 빼어나 큰 명당자리가 많다고 하니 조선땅으로 가서 잘 살펴보도록 하라."
이런 칙명을 받은 지사들은 삼천리 강산을 차례로 답산하다가 마침내 이 오대산 보궁자리에 이르렀다고 한다.그들은 여기에서 사방의 산세를 자세히 관망하고 나서 하나같이 환희 용약하여 말하기를,
"이 하늘 아래 이런 대명당이 다시는 없을 거야. 이 자리야 말로 대명국를 창업하시고 천하를 통일하신 폐하께서 묻히실 만한 곳이 틀림없어."
중국에서 온 풍수 지사들은 제각기 패철을 보아서 좌향座向을 기록한다. 산도山圖를 그려 형국形局을 논단論斷한다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어찌된 노릇인가? 청정하던 하늘에서 난데 없는 우뢰가 진동하고 순식간에 벼락이 떨어져 보궁 앞에 서 있더 그 지사들을 내리쳤다.
혼비백산한 그들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벼락 한방에 모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이곳 적멸보궁에 올라온 스님과 신도들은 벼락을 맞고 쓰러져 죽은 중국 지사들의 시체를 그 왼편 골짜기 아래에 옮겨서 묻어주었다. 지금도 그 자리에 가보면 그들의 무덤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여기가 어떤 성지인데 감히 이곳에다 송장을 묻으려고 했으니 하늘이 진노하시는 것도 당연하지.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셔 놓은 이 자리에다 묘를 쓰려고 했으니 벼락을 맞아 죽는 것도 마땅한 일이여..."
그들은 하나같이 이 신령한 대명산에 대하여 한없는 공경심과 아울러 두려운 심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이 자리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마른 하늘에서 갑자기 우뢰가 진동하는 바람에 이 세상의 아무도 여기에 손대는 사람이 없게 된것이다.
그런데 6.25 사변 당시 모 육군 부대에서 군사 작전상 이 보궁 앞에다가 헬리콥터 장을 닦으려고 정지 작업을 시작했었다. 그러자 추운 겨울 날씨인데도 갑자기 청청 하늘에서 우뢰가 크게 진동하는 바람에 작업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풍수적으로 이유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오대산의 주봉은 비로봉인데 여기서 달려나온 용이 고개를 쳐든 곳이 바로 적멸보궁의 터다. 법당 뒤에 서 있는 바위가 곧 용의 뿔이니 이 자리는 어김없는 비룡상천飛龍上天인 것이다.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리에 함부로 묘를 쓰다가 하늘이 진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아랫쪽으로는 우물이 두 개 있다. 생룡生龍의 왼쪽 눈에 해당하는 왼쪽 우물에는 물이 있으나 오른쪽 터에는 물이 말라 있다. 이 물이 마르고 부터 우리나라 불교계의 쇠운衰運이 닥쳐왔으며 지금까지도 절 집안의 분규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고 옛 기록은 전한다. 또한 적멸보궁에 얽힌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박문수는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로가 많았다 하여 영성군에 봉해졌으며 영조 5년(1729)에는 영남 절도사가 되었다.
"절에서 사는 승려들도 이 나라의 백성이거늘 어찌하여 놀고 먹고만 있으니 국가적으로 큰 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전국에 산재한 사찰들을 모조리 폐쇄하여 젊은 승려들의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탁지정례>라는 저서까지 발간할 정도로 재정.경제에 밝았던 박문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참선에 열중하는 수자修者들도 날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서 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염불과 주력하는 스님들도 똑같은 단어를 끝없이 되풀이만 하고있으니 도무지 쓸데없는 시간낭비 같았다. 그 아까운 시간을 생산적인 일에다 사용한다면 얼마나 국가에 도움이 되겠는가? 이런 유휴遊休인력을 나라를 위한 노동력으로 전용한다면 그 성과가 클 것이 아닌가?
박문수는 이런 신념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불교개혁을 부르 짖었다. 그는 상감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도 불교의 폐단을 여러 번 지적하였다. 암행어사로 각 지방으로 돌아다닐 때에도 억울한 백성들의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면서도 사찰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묵살해버리곤 하였다. 이런 박문수 어사가 이 적멸보궁자리에 올라왔다.
"진실로 굉장한 자리로다. 이런 대명당에다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모셨으니 그 제자인 스님들이 산 좋고 물 맑은 좋은 곳에 위치한 화려한 큰 집에서 놀고 먹는 것도 당연하지...이 보궁자리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불교의 운세는 영원무궁할 것이 틀림없어. 내가 몰라서 잘못 생각한 거야. 앞으로는 불교에 대한 비판을 중단할 것이여."
이렇게 반성한 박어사는 그후 두 번 다시 배불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손석우님의 글에서-
*명당은 덕이 있는자의 것이다..
남원의 서쪽에 신선이 내리는 형상의 명당의 주인공은 황희 정승의 할아버지이다. 물론 그 윗대의 조상들도 묻혀 있기도 하다. 황희는 비록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으나 본관이 장수 사람으로서 남원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인물이었다. 할아버지 묘택이 대명당 발복을 받아서 18년 동안 영의정 자리에 있었으니 5천년 역사의 최고의 정승으로 평가받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 서선령의 홍곡단풍혈 묘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원래 이 자리가 명당터임을 알고 있었던 분은 고려 말의 대선사인 나옹화상이었다. 나옹화상이 대명당터를 알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람 중에 윤진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명당을 차지하고픈 욕심으로 나옹선사가 불사를 일으키는데 많은 돈을 시주했다. 나옹스님도 마다 않고 많은 돈을 받았으나 정작 그 터에 가면 눈이 가려 혈처가 번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윤진사는 다짜고짜 스님을 몰아세웠다. 요승이라느니 사기꾼이라느니 하면서 나옹스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당시 큰 부자였던 황경의 아들이 윤진사가 스님에게 희사한 돈을 대신 갚아주었다. 3천냥과 함께 나머지 불사를 마무리하는 일체비용을 모두 부담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것이 그저 무주상으로 행하는 보시였으니 말하자면 바라는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 스님은 황경의 아들과 함께 그 명당터에 다시 가게 된다. 그러자 그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 혈처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옹선사는 그제서야 그 터의 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곡단풍혈의 그 터에 황경의 시신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가 곧 황희정승의 할아버지이다. 이 묘를 쓰고 곧바로 아들을 낳으니 곧 영의정이 되는 황희다. -손석우님의 글에서-
첫댓글 복 있는 분들은 다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선근이 깊지요.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니무아미타불 니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다들 오대산을 명산으로 꼽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명당터도 다 임자가 있는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