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태수 유탁(劉度)은 현덕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유현(劉賢)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아버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비록 장비나 조자룡이 용맹이 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한테는 상장(上將) 형도영(邢道榮)이 있습니다. 힘으로는 만부당의 용사이니 저들과 한판 해볼만 합니다.”
아들의 말에 든든해진 유탁은 유현과 형도영에게 만여 명의 병력을 주어 성밖 30여 리 되는 지점으로 나가 산을 의지하고 물을 앞에 둔 곳에 영채를 만들게 했다.
현덕 군이 나타나자 형도영은 손에 개산대부(開山大斧)를 들고 말에 올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크게 고함을 질렀다.
“반적들이 어찌 감히 우리 영내로 들어왔느냐!”
그러자 현덕 군의 진영 안에서 황색 깃발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문기가 열리고 사륜거가 앞으로 나왔다. 수레 위에는 단정한 자세로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머리에는 윤건(輪巾)을, 몸에는 학창의를 두르고 손에는 새깃으로 만든 부채인 백우선(白羽扇)을 들었다. 윤건이나 학창의는 덕망 높은 선비가 입는 옷이기는 했으나 평상복에 해당하는 옷이었다. 전쟁터에 나온 것이 어디 경치 좋은 곳에 놀러나온 것 같아 보여 어울리지 않았다. 전쟁터에 낯선 학자 분위기를 풍긴 사내가 백우선을 들어 형도영을 가리키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바로 남양의 제갈공명이다. 조조의 백만대군도 내가 작은 계략 하나를 쓰자 갑옷도 챙기지 못하고 달아났거늘 너희 따위가 나와 대적하려 드는거냐?”
형도영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저런 복장을 하고 나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상대도 안되는 너희를 위해 내가 무장을 갖출 필요도 없다는 거였다.
“내가 지금 너희들을 초안(招安)코자 하니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어떠냐?”
형도영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적벽대전은 주랑의 지모로 만들어진 것이다. 네까짓 게 한 일이 뭐가 있다고 흰소리를 늘어놓느냐!”
형도영이 커다란 도끼를 머리 위로 돌리면서 공명을 향해 말을 달렸다. 공명은 바로 사륜거를 돌려 진중으로 들어가버렸다. 공명이 들어가자 진문이 닫혔다. 그러나 닫히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형도영은 그대로 진문을 짓밟을 기세로 달려갔다. 그러나 형도영이 도착하기 전에 진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형도영은 그런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고 황색 깃발이 움직이는 방향을 살폈다. 공명을 잡아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형도영은 달아나고 있는 한 무리 가운데 황색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추격하기 시작했다. 산기슭을 돌아 쫓아가자 황색깃발은 가만있는데, 그 무리가 다시 한번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륜거는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하앗!”
장비가 장팔사모를 곧추 세운 채 형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도영이 어리둥절할 새가 없이 장비는 크게 기합을 내지르고는 달려들었다. 형도영도 정신을 가다듬고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는 가까이 있는가 싶으면 터무니없이 먼 곳에 있었고, 멀리 있는가 싶으면 어느 틈에 도끼 사이로 창날을 들이밀었다. 형도영은 도저히 대적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복병들이 길을 막았다. 복병들 사이에서 한 장수가 뛰쳐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상산의 조자룡을 아느냐!”
형도영은 장비와 겨뤄본 결과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 앞에는 조운이 있고 뒤에는 장비가 오는데 양 옆으로도 달아날 곳이 없었다. 형도영은 도끼를 던지고 말에서 내린 뒤 투항했다. 조운은 형도영을 포박한 뒤에 현덕과 공명 앞으로 끌고 갔다. 현덕이 성을 내며 말했다.
“역적 조조의 편을 들어 우리를 오히려 반적이라고 부른 놈이 아니냐! 당장 참수하라!”
도부수들이 형도영을 끌고 나가려는데 공명이 제지했다.
“저자에게도 기회를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공명은 형도영에게 물었다.
“네가 나와 함께 유현을 붙잡는다면 네 투항을 받아주겠다.”
“네! 네!”
형도영은 목이 붙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네’라는 소리만 되풀이했다.
“넌 어떤 방법으로 유현을 잡아오겠느냐?”
“군사께서 저를 풀어주신다면 저는 잘 둘러대서 유현을 안심시키겠습니다. 그랬다가 늦은 밤에 군사께서 기습을 가하시는 겁니다. 전 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그러면 유현을 잡는 것은 간단한 일이죠. 유현을 잡으면 유탁도 항복할 겁니다.”
형도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몰랐지만 현덕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형도영의 말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하고 있는 말일뿐이었다. 그러나 공명은 옅은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형 장군의 말에 틀림이 없어야 하오.”
형도영을 끝내 공명이 풀어주니 형도영은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유현의 영채로 돌아갔다. 형도영은 현덕이 걱정했던 것처럼 바로 유현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모두 고해 바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적의 계책을 가로채는 장계취계(將計就計)를 사용하면 됩니다. 오늘 밤에 군사들을 영채 밖에 매복시켜 두십시오. 영채 안에는 가짜로 깃발만 잔뜩 꽂아두면 됩니다. 제갈량이 야습을 가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제갈량을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유현은 형도영의 계략을 따르기로 했다. 과연 2경(밤 9시-11시)이 되자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다들 마른 풀을 한묶음씩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에 불을 붙여 영채를 일시에 불태우기 시작했다.
형도영이 그들의 배후를 치자 모두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현과 형도영은 기세가 올라 현덕 군을 바짝 뒤쫓아갔다. 그러나 십여 리를 쫓아가자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적군이 보이질 않았다. 유현과 형도영은 크게 놀라서 영채로 돌아갔다. 영채에 왔던 적군이 많은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도망친 병사들도 많지 않았던 것이다.
영채의 불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는데, 그 불빛 사이로 야차같은 얼굴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꿈엔들 잊겠는가? 털복숭이 장비의 얼굴을.
유현도 기겁을 하고 말했다.
“적들이 모두 여기로 온 모양이다. 차라리 제갈량의 본진을 치는 것이 낫겠다!”
형도영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군사를 돌려 현덕 군의 본진을 향했다. 그러나 십리도 가지 못해 조운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형도영이 주인 앞이라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달려나갔지만 이미 의욕이 없었다. 조운이 내지른 한 창에 산적구이마냥 꿰어버리고 말았다. 형도영이 말 아래로 짚단처럼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니 유현은 등골이 쭈삣 서버렸다. 그대로 말을 돌려 오던 길로 달려갔다. 그곳의 장비 때문에 반대길로 왔다는 생각같은 게 들 리가 없었다. 유현은 장비를 만나자 그대로 말에서 뛰어내려 항복해 버렸다. 장비는 유현을 포박해 공명 앞에 끌고 갔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형도영이 꾀를 낸다고 해서 따라한 것뿐이고 절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공명은 유현의 포박을 풀어주고 옷도 갈아입혀준 뒤 술과 음식으로 대접을 했다.
“공자가 성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잘 설득해 주기 바라오. 만일 항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데 피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오.”
유현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크게 의지했던 형도영이 이미 죽었고 군사도 크게 잃어 더 이상 저항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공명이 체면을 세워주려는 판이었다. 유현은 돌아가 공명과 현덕의 덕망을 높여 이야기하며 항복을 권유했다. 유탁도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공명은 현덕에게 영릉태수로 유탁을 유임시킬 것을 권했고 현덕도 승낙했다. 아들 유현은 형주 수군판사(隨軍辦事)의 직위를 주어 수행하게 했다. 영릉의 백성들은 현덕의 처사에 무척 기뻐했다.
현덕은 이번 영릉 공격에 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포상을 한 뒤 공명과 함께 막료들을 불러놓고 다음 일에 대해서 의논했다.
“영릉은 이제 우리 손에 들어왔고 다음 차례인 계양은 누가 맡겠습니까?”
조운이 제일 먼저 나섰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장비도 조금 늦었지만 큰 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가기를 희망합니다!”
공명이 결정을 내려주었다.
“자룡이 먼저 말했으니 이번 일은 자룡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장비는 승복하지 않았다. 공명은 제비뽑기를 했지만 그 결과도 조운이었다. 그리고 장비는 여전히 승복하지 않았다.
“나는 장수들의 지원 같은 거 없어도 됩니다. 군사 3천만 주시면 계양을 평정할 겁니다!”
조운도 지지 않았다.
“저도 군사 3천이면 됩니다. 계양을 얻지 못한다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군령장을 쓰겠습니다.”
공명은 조운의 말에 크게 기뻐하고 군령장을 받았다. 정병 3천을 엄선해서 조운에게 지휘를 맡겼다.
“어 참, 나도 군령장 쓴다니깐!”
“이 놈! 그만하고 물러가라!”
결국 현덕이 한마디를 해서야 장비를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조운은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즉시 지름길을 골라 계양으로 떠났다. 조운의 발진은 곧 계양태수 조범(趙範)에게 알려졌다. 조범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관군교위(管軍校尉)로 진응(陳應)과 포룡(鮑龍)이 출전을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은 계양령 산마루에서 사냥꾼으로 지냈었다. 진응은 비차(飛叉)의 명수였고, 포룡은 활을 잘 쏘았다. 사냥하던 시절에는 화살 한대로 호랑이 두 마리를 잡은 일도 있어 자신의 힘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