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이야기를 만들려 많은 사람들이 제주해안을 찾는 여름입니다.
올 여름도 물마루가 있는 제주협제 해변가는 많은 이야기들로 충만합니다.
작년에 이어..
아니 어제 전야제에 이어 본행사가 시작되어지는 개막식엔...많은 인파가 몰려 듭니다.
여운의 축제였습니다.
가수 백난아(1927~1992·본명 오금숙)가 저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17년이 됐다. '찔레꽃', '낭랑18세'로 올드 팬들에게 익숙한 그의 이름을 딴 '제1회 백난아가요제'가 제주시와 백난아기념사업회(회장 오경욱) 주최로 이달 26일 제주 한림 협재해수욕장에서 열린다.
제주도 한림 출신의 백난아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학술심포지엄과 백난아 기록전시회도 함께 개최될 이번 행사에는 미공개 자료 60점도 함께 공개될 예정이다. 이 자료들은 1940년대부터의 친필 악보와 발표 당시 음반 전단지, 포스터, 사진들이다. 왜 이 자료들은 백난아가 숨진 지 20년 가깝도록 묻혀 있었을까.
백난아가 활동을 시작한 건 1940년 11월이다. 당시 나이 13세로 '오동동극단'과 '갈매기쌍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주위에서 변성기 이전 목소리라는 우려를 했을 정도로 나이가 어렸다.
우리나라 최연소 가수로 당시 태평레코드 전속가수가 된 백난아의 노래 대부분은 광복 이전에 발표됐다. 이후 작사가 박영호 등이 월북했던 탓에 발표곡 중 상당수가 월북작가의 곡이라 해서 한동안 방송이 금지됐다.
작곡가 입장에서는 이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인 채 사장되어 묻혀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후 가사 일부와 제목 등을 다른 인물에게 개작시켜 작자표기를 달리함으로써 월북작가의 곡이라는 화살을 교묘히 피해갔다.
'한국 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 출간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서울 상수동에 위치한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54) 씨의 17평짜리 사무실은 2만5천장의 SP(축음기음반)ㆍLP판과 각종 포스터, 사진자료, 육성 테이프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22일 이곳에서 만난 그는 잡지사 기자 출신으로 15년간 대중가요사를 연구해온 대중음악평론가다. 그가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25일 연구의 첫 결과물인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50년대 말까지의 대중 가요사가 담겼다. 이 시기 발표된 SPㆍLP의 재킷과 포스터, 원로 가수 및 작곡가들의 희귀 사진, 친필 악보,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 부산의 도미도레코드와 미도파레코드 등 당시 음반사 흔적까지 귀한 자료들이 생존한 원로 음악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수록됐다.
15년간 발품을 팔며 자료 수집과 원로 음악인들을 인터뷰한 박씨는 "대중가요사가 결국 우리의 역사이자 자화상"라며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당시의 신문보다 노래 속에 역사가 더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시대적 배경, 인물, 노래를 통해 우리 가요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책을 소개했다.
그가 책의 연대를 한국전 전후로 잡은 것은 2007년 부산 40계단문화관 초청으로 한국전쟁 관련 가요를 조명하는 전시회를 마련한 게 계기였다.
전시회 자료를 보완해 책에 담은 수집물들은 무척 방대했다. 그는 회현동 지하상가와 청계천 벼룩시장을 뒤지며 SP와 LP를 손에 넣었고 가수 백난아의 유족과 가수 금사향 등 원로 음악인들은 선뜻 소장 사진과 악보 등을 제공해줬다.
이날 박씨가 직접 보여준 사진과 악보, 레코드판들은 코끝을 찡하게 했다.
가수 한명숙 등 '먹물도장(위문공연 활동 중 죽어도 국가에 보상을 요구않겠다는 일종의 각서)'을 찍고 참전한 군예대원들의 사진, 작곡가 박시춘이 지휘하고 금사향이 '임계신 전선'을 취입하는 사진, 월북 작가로 분류돼 가요사에서 묻힌 작곡가 김해송이 태극기 앞에서 지휘하는 사진 등 빛바래다 못해 누래진 흑백 사진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악보들은 세월에 찌들린듯 너덜너덜해진 채로였다.
박씨는 "피아노 앞에 있는 백난아 씨의 사진은 '번지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등을 쓴 작곡가 이재호 씨가 1960년대 폐병으로 타계할 당시, 그의 머리맡에 붙어있던 것"이라며 "또 당시에는 공연이 '만원'을 이루면 출연자에게 사례한다는 의미에서 '만원사례' 봉투에 돈을 넣어줬는데 바로 이것"이라고 백난아가 받았던 봉투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어 그가 꺼내든 SP는 1952년 한국전 당시 이재호 작곡의 '경상도 아가씨'가 수록된 레코드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SP가 나오기 시작해 1958년부터 10인치 LP, 1964년부터 12인치 LP가 등장했다고 부연 설명했다.
"전쟁 당시엔 물자가 부족했잖아요. 고물상에서 한번 썼던 레코드판을 수거해 재활용했죠. 세월이 반세기 가량 지나면서 '경상도 아가씨'라고 써진 레코드판 라벨이 떨어지니 이처럼 일본 레코드판 라벨이 보이잖아요. 어려운 시절에도 노래를 만들고 부른 이 시절 음악인들의 열정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더불어 박씨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작사가 겸 가수 반야월,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작곡가 손석우, '전선야곡'의 가수 신세영 등 원로들을 수차례에 걸쳐 인터뷰 한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그는 이들이 정정할 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마치 생활하다시피 눈을 마주쳤다고 한다.
"신세영 씨는 인터뷰 도중 '전선야곡'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추억의 다방'을 요청하자 기억을 못 하셨는데, 제가 노래를 들려드리자 '맞아, 맞아'라며 따라부르시더니 다시 우셨어요. 인터뷰 때만해도 정정하셨는데, 지금 요양원에 계셔서 안타깝습니다."
그는 "5살짜리 딸의 죽음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썼다는 반야월 씨, 군예대 시절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노래 한곡이 주는 힘을 실제 목격했다는 가수 안다성 씨의 이야기는 코끝이 시린다"고 했다.
박씨는 책 마지막 장에서 한국 가요사를 정리했다. 1885년부터 1959년까지의 한국 가요 주요 약사, 연대표도 담았다. 여기에는 SP 수집가 이경호 씨가 소장한 초기 음반형태의 편면반(노래가 한쪽면에만 수록된 레코드) '삼인육자가'의 사진도 넣었다.
그는 이 책을 시작으로 시대별로 일목요연하게 가요사를 정리할 계획이다. 현재 작곡가 박시춘과 박춘석 평전을 집필 중이며 최종 목표는 가수, 작곡가, 연주가의 활동을 기록한 '한국 가요 인물 총서'를 쓰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말은 그 시대의 이성, 멜로디는 그 시대의 감성"이라며 "원로들이 살아계실 때 자료가 더 소실되고 누락되기 전에 글과 사진과 영상으로 이들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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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섬 전역에 봄이 무르익었다. 거리에 벚나무가 꽃을 가득 터트렸고, 들녘에는 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춘풍(春風)의 유혹을 따라 발 닿는 곳으로 가니 명월(明月)이 기다리고 있다.
제주시내에서 한림읍 명월리로 가기 위해 1136번 도로로 40분 정도 차를 달렸다. 제주시내를 빠져나와 광령 마을로 들어서서 벚꽃 터널이 연출하는 절경을 마주 대하면 ‘옛 사람 풍류’를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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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입구(하동) 길가에 활짝 핀 꽃이 춘풍명월을 실감하게 한다. | 오래 전에는 명월 일대를 항상 물이 흐른다는 의미로 "수류촌"이라 불렀다. 서기 1300년(고려 충렬왕 26년)에 제주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고 현 제주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14개의 현을 두고 다스렸다.
그 중 하나가 명월현이었는데, 명월이란 이름은 산세가 좋아 청풍명월(春風明月)의 의미로 붙여졌다고 한다. 당시 명월현의 중심 마을이었던 명월은 현재의 상명리, 동명리, 금악리 지경을 모두 포함하는 큰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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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월리 마을을 알리는 표석 | 서기 1608년에는 현촌제를 폐지하고 방리제가 설치되자 명월은 우면(지금의 한경면, 한림읍, 애월읍) 소재지가 되었다. 그 후 17세기 초에 금악이, 18세기 초에 독포(독개 : 현 옹포리)가 명월에서 분리되었다.
그 후 명월리는 웃명월, 동명월, 서명월 등으로 나누어 졌는데 웃명월은 상명리로, 서명월은 명월리로, 동명월은 동명리로 분리되었다. 과거 제주 서부의 행정 중심지였던 명월이 지금은 그 중 일부만이 남아있는 작은 농촌이다. 지금의 명월리는 상동, 중동, 상동 등 세 개의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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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명월진성(하동), 과거 명월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 | 한림에서 명월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하동이 있는데 그 곳에 서면 큰 성과 성문이 보인다. 명월진성이 복원된 것으로, 명월이 군사적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삼별초 군대가 탐라를 장악하기 위해 1270년(원종 11년)년 명월포구에 상륙하면서부터 명월은 제주방어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 후 원명 교체기에 원의 목호들이 조정의 말 진상 요구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을 때도, 최영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난을 진압하였다.
한림1리 해안에는 목호 군과 최영 장군이 이끌던 관군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임을 알리는 안내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니 제주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졌다. 1510년(중종 5년)에 제주목사 장림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로 둘레 3200척, 높이 8척의 성을 쌓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년)에 제주목사 이경록이 돌로 다시 성을 쌓았다.
한편 명월성은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도들이 민군을 공격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민중의 분노는 증폭되었고, 비폭력 평화운동을 띠던 초기의 투쟁이 무력항쟁으로 급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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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꽃 노래공원(중동), 가요 '찔레꽃'을 부른 가수 백난아가 이 마을 출신임을 자랑하기 위해 비석과 함께 세워진 노래공원이다. 내부에 백난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음향시설이 되어 있다. |
명월리 중동 마을에 이르면 지금은 폐교된 과거 명월초등학교 터가 있다. 이 학교 입구에는 ‘찔레꽃 노래비’와 ‘노래비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가요 ‘찔레꽃’을 부른 가수 백난아가 이 마을 출신임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노래비 공원이라 써진 방안에는 백난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음향시설이 갖춰져 있다.
가수 백난아는 본명이 오금숙으로 1925년에 명월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가수 백년설이 오금숙을 양녀로 삼아 그녀의 본명과 출신 고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찔레꽃’은 그녀가 1941년에 이 곡의 작사가(김영일), 작곡가(김교성)와 더불어 고향인 명월을 방문했을 때, 암울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가수 백난아는 1992년 12월에 세상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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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월대(중동), 과거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근처에 석교도 잘 보존되어 있다. | 한편 이 노래비 앞에는 이 세 사람이 회포를 풀었다고 전해진 명월대(明月臺)가 있다. 명월대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풍류를 즐겼던 명소인데, 주변이 자생 팽나무 고목으로 덮여 있어서 춘풍명월(春風明月)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명월대 앞에는 오래된 석교가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고림동’이라고도 부르는 명월상동은 갯거리오름을 배경으로 한다. 상명, 금악과 접하고 있는 상동은 중동이나 하동에 비해 해안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4·3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던 곳이다. 지금도 상동에는 당시 토벌군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았던 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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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담(상동), 과거 토벌대가 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성담이다. | 그리고 상동과 금악의 경계지점에 있던 빌레못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파괴되어서 복원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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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민가수죠~~~~~~~~~~~
백난아씨! 음악이좋아 스크랩해갑니다 감사하게 잘들었습니다
네~~이나라 여성을 대표하는 국민 가수죠 ~~노래 스크랩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