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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과 치열한 눈싸움 벌이던 죠안이 입을 열었다.
“대체 뭐야?”
“뭐가 뭐야?”
“무슨 이유로 우리 집에서 빈둥거리느냐고 묻잖아.”
“아빠 말 못 들었어? 피앙세라잖아. 즉, 결혼할 사람이란 얘기지 몰라?”
죠안은 겉보기엔 희연과,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일 만큼 성숙해 보였다.
열여섯의, 아빠를 빼닮은 금발과 엄마를 닮은 파란 눈, 170센티인 희연보다
결코 작지 않은 키, 풍만한 몸매.
심술 맞은 아이의 표정이 아니었다면 십대로는 결코 보이지 않을 용모였다.
머리카락 말고는 닉과 닮은 곳이 없어 보이는 걸로 보아 죠안의 엄마가 무척이나
미인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보았다.
“너도, 돈 보고 덤비는 거야? 말해 두지만, 아무리 돈이 좋아도 저런 일하는 로봇과는
살기 힘들 걸?“
“뭐? 아빠보고 저런이 뭐야. 일하는 로봇이라니 열심히 일해서 이런 좋은 곳에 살게 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도대체 당신 몇 살이야, 혹시 미성년자 아냐?”
“흥, 스물셋이다. 이 겉만 늙은 아이야.”
“쳇, 하여간 동양인들은 나이가 생긴 것과 따로 논다니까.”
“따로 노는 건 너야, 열여섯 짜리가 그게 뭐니? 노는 여자들 따라하는 거야?
아예, 벗고 다녀라. 여자가 감추는 맛이 있어야지 원.“
멋진 저녁 식사 후 체크아웃을 하고 늦게 닉의 집을 쭈뼛거리며 들어섰다.
다음 날 아침 죠안을 인사시킨 닉이 전화를 받고 잠시 나갔다 온다며
자리를 비우자 죠안이 희연에게 심술을 부렸다.
“죠안, 너 지금 나한테 샘내는 거지? 아빠 뺏길까봐.”
“아빠? 이 집에 오고 이 년 동안 내가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사람인지 돌인지 분간도 안가는 사람을 상대로 질투를 할까봐?“
“흥! 하면서”
“안해”
“해”
“안해”
둘이 다시 눈싸움을 시작하는데 닉이 들어왔다.
희연이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가 폴짝 안겼다.
닉이 대롱거리는 희연을 안고 잠시 당황하다, 희연을 매단채로 소파로 와서 앉았다.
희연이 냉큼 닉의 무릎에 올라갔다.
닉은 편하게 자세를 잡고 희연의 머리 결을 쓸었다.
죠안이 입을 딱 벌리고 경악했다.
집사인 존슨 씨와 존슨의 부인이자 요리사인 멜린도 ‘헉’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연은 닉의 품에 안겨 그의 손길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닉이 희연의 행복해 하는 얼굴을 바라보다 그녀의 이마에 길게 입 맞췄다.
집안에 감출 수 없는 짧은 비명 세 개가 울린 후 죠안이 소리쳤다.
“뭐야, 딸인 나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아놓고 내 앞에서 이럴 수 있는 거야.
닉 사이먼?“
“흥! 그야 죠안 네가 안아 달라고 안 했으니 그랬겠지.
닉은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은 원래 안 하거든.“
“난, 딸이라고 남이 아니고”
“그러니까 안아달라고 해, 남이면 안아달라고 해도 안 안아줘, 너 바보니? 맞죠~ 닉!~“
닉은 대답대신 희연에게 키스했다.
닉의 그 모습에 죠안이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벌떡 일어난 죠안이 손에 닿는 것을 닥치는 대로 희연에게 집어 던졌다.
책이 날아오자 닉이 희연을 안고 고개를 숙였다.
책 모서리에 맞은 닉의 이마에 핏방울이 맺혔다.
조지와 멜린이 놀라 허둥거리고, 희연이 비명을 지르며 울상을 짓자
죠안이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멜린이 죠안을 안아 달래고, 조지는 닉의 이마에 반창고를 붙였다.
멜린이 죠안을 달래며 ‘불쌍한 죠안’ 하며 중얼거리듯 반복하자,
닉이 미안한듯 죠안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희연이 비죽거렸다.
“아냐, 내가 더 불쌍해. 난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엄마 아빠도 몰라.
죠안은 엄마와 살았었고, 지금은 아빠와 살잖아. 닉이 나에겐 엄마도 아빠도
남편도 애인도 다 돼 주어야 한단 말이야. 난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고.“
희연이 울음을 터뜨리자 닉이 당황해 희연을 부둥켜 않았다.
조지와 멜린이 ‘저런 불쌍해라’ 하고 중얼 거리고,
죠안은 우는 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불쌍해’ 하며 울먹거렸다.
희연은 닉의 품에서 울면서 겁에 질렸다.
자신이 한 말에 겁을 먹은 희연이 울며 바들바들 떨자 닉이 허둥거렸다.
병원에 가자는 닉을 희연이 훌쩍거리며 말렸다.
그녀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괜찮아, 겁쟁이. 내가 희연의 엄마도, 아빠도, 남편도, 애인도 다 되어줄게.
걱정 하지 마. 이렇게 무서워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희연. 제발......,“
훌쩍이던 희연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울던 채로 잠이 들었다.
잠든 희연을 쓰다듬던 닉이 죠안에게 말했다.
“죠안, 희연은 사랑을 상대에게 강요하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사랑을 무서워한단다. 네가 조금 양보해 주면 나도 너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마. 우린 모두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미안하다 죠안“
닉의 말에 죠안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닉은 소리도 없이 줄줄 흘리는 죠안의 눈물을 보며, 자신의 딸은 부모가 있음에도
사랑에 목 말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토요일 닉의 저택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새벽 일찍 일어난 죠안이 닉이 깨기를 기다려 닉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죠안을 떼어내려다 실패한 희연도 반대쪽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멜린이 혀를 차며 ‘가장 불쌍한 건 백작님이라니까, 이 나이에 겨우 연인을
만들었는데 연인이 딸로 변한 것 같으니‘ 하고 중얼 거렸다.
“죠안, 너 분명 어제 닉이 돌이라고 했지. 왜 이러는 거야?”
“안아 달라고 말해야 된다면서? 난 지금 안아 달라고 하고 있는 거야.”
“너무해, 넌 계속 닉과 있지만, 난 내일이면 돌아가야 된단 말야.”
그 말에 죠안이 찔끔하더니 곧이어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싫어, 이제부턴 파파에게서 한 걸음도 안 물러 설 거야. 나도 불쌍한 애야
나도 안아 달라고 할 거야.“
닉은 하루 종일 끌려 다녔다.
“희연, 죠안과 잘 지내줘서 고마워”
“쟨, 내 라이벌이야. 절대 사이좋지 않아. 흥”
죠안을 괴롭힌다고 할까봐 은근히 걱정했던 희연이 볼을 물들이며 틱틱거렸다.
하루 종일 둘을 방해하던 죠안이 저녁식사 전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닉, 죠안을 자주 안아 주세요. 난, 아빠 엄마가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어요.“
“안아 주기만 해도 되는 거야, 희연?”
“그럼요. 말로 안 해도 가슴이 점점 따뜻해지는 걸요”
“그래서 희연을 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로군. 알았어. 고마워 희연”
“다음에 영국에 오면 어머니도 소개시켜 주세요.”
“물론, 자 이리와. 내가 안아줄게”
밤이 깊도록 희연과 닉은 체온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이 영원히 오지 않길 바라는 두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희연은 닉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자신이 선물한 커플링을 만지작거리며
볼 때마다 생각해 달라고 했고, 닉은 감미로운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음날 희연은 닉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탔다.
“어머, 얼굴이 활짝 폈네. 애인과 재밌게 지냈나봐?”
월요일 출근한 희연은 오 대리의 인사에 얼굴을 붉히며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
급한 계약이 모두 끝나 얼굴을 못 봤던 직원들과 인사도 하고,
일방적인 문서번역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직장인이 된 것 같은
마음으로 한 주를 보냈다.
저녁시간의 전화 데이트를, 이전보다 더 애틋한 그리움으로 기다리며,
사랑을 쌓아가던 희연은 화요일 오후, 퇴근시간을 두 시간 남기고 닉의 어머니
사이먼 백작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대현호텔 커피숍에서 닉의 어머니를 기다리며 희연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백작부인의 입에서 나온 대현호텔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닉과 만나던 날의
비참함이 스쳐지나갔고, 지금 느끼는 이 불안함에 비하면 그때의 기분은
턱없이 가벼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지기와 어지러움이 밀려와 희연은 물 컵으로 손을 뻗었다.
컵을 쥐는 손이 덜덜 떨려 물이 조금씩 흘러 넘쳤다.
냅킨을 꺼내 흘린 물을 닦는 순간 ‘김 희연 씨?’ 하는 중년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희연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닉의 에미’라고 자신을 소개한 백작부인은, 희연이 알고 있는 오십대 중반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젊었을 적의 미모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성이었다.
시선을 테이블에 두고 있던 희연을 한동안 자세히 살피던 백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놀랬다면 미안해요. 희연 씨. 여행을 다녀온 후 희연 씨가 다녀간
얘기를 죠안에게서 듣고 희연 씨에 대해 조사를 좀 해봤답니다.“
희연의 등줄기로 소름이 확 돋아 올랐다.
떨리는 손을 꽉 쥐어 무릎에 눌렀다.
“내가 전대 백작을 만났을 때가 부모님을 사고로 잃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때였어요.
철없는 나이에 사랑을 하고 영국으로 건너갔을 때 가문의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배척을 받았답니다.
매달리는 닉의 아버지를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임신한 것을 알았죠.
닉을 낳았어도 그들은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더군요.
수모를 견디고 닉의 아버지 곁에 있을 용기가 없던 나는, 닉을 낳아 혼자 길렀습니다.
그리고 닉이 다섯 살 되던 해 빼앗기고 말았죠.“
희연은 속으로 ‘제발, 제발’ 이라고만 외치고 있었다.
그녀라면 어쩌면 자신을 불쌍하게 봐주지 않을까.
그래서 닉의 여자로 인정해 주지 않을까.
“칠년 전 닉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위 계승이 이루어지려 할 때,
가문에서 닉을 반대 했습니다.
이 년 동안의 힘든 싸움 끝에 닉은 백작의 작위를 받아 냈습니다.
그리고 날 불러들였죠.
난 또다시 닉이 희연 씨 때문에 상류사회의 불미스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게 싫습니다.
어미인 나의 출신 때문에 당한 고통을,
자신의 아내 때문에 또다시 평생 짊어지고 가게 할 수는 없어요. 이게 내 용건입니다.“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희연의 갈라진 입술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닉은, 어......., 백작부인께서 오늘 저를 만나러 오시는걸 알고 있습니까?”
“닉은 내가 희연 씨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도 생각 안 할 겁니다.
나는 닉이 비슷한 가문의 아가씨를 만나서,
어미로 인해 받았던, 차별과 고통의 기억을 잊고 당당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나도 사랑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짧았던 사랑이 남긴 것은, 내 평생을 사슬에
묶은 고통밖에 없었어요.
억지겠지만 희연 씨를 생각해서도 닉을 포기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말을 끝낸 그녀는 희연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는 듯 말없이 앉아있었다.
“제가 죽어도 닉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있겠어요?
단지 에미의 입장에서 자식의 고통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희연 씨가 자신의 고통 뿐 아니라, 닉의 고통까지도 감수할 자신이 있다고 한다면,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몇 년간 그 애가 힘들어하는 것을 지켜본 나로선,
그저 반복되는 상황이 괴로울 뿐이에요. 그게 희연 씨의 답인가요?“
한참을 입을 달싹거리던 희연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닉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희연도 따라 일어났다.
백작부인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희연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희연 씨.
상처투성이 여자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이것 밖에는 생각해 낼 수 없었어요.
지금은 안 되겠지만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용서해 주세요.“
첫댓글 또 일빠네요 ㅋㅋㅋ 저녁 늦게 올리신다고 해서 수시로 봤었는데..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네요 ㅎㅎㅎ 한편 한편 볼수록 빨리 다음편을 보고 싶은 이 조바심은 어찌해야할지~~~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잼있어요~~~ 닉 캐릭터 넘 멋쪄요 ㅋㅋ
죄송합니다^^ 감기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 군요.^^ 감사합니다^*^
희연이가 가엾어ㅠㅠ
네, 가엾어 죽겠습니다.ㅠㅠ 감사합니다^^
희연이 잘 극복하길... 사랑에는 역시 고통이 따라야
잘 극복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