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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스넥탄 2세:지난번에 짐이 우트르메르(소아시아)성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야기를 들었지?
오늘은 성전 이후 짐의 치세를 이야기해볼까 해. 이 화면은 성전이 끝난 직후의 모습이지.
선왕 말스넥탄 1세께선 치세동안 스코틀랜드를 평정하시고 북아일랜드까지 장악하셨지만,
정작 짐은 즉위 후 13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백작령 하나밖에 얻지 못했지.
이제 조그만 더 노력하면 아일랜드 전체를 장악할 명분이 생길 것인데..,
그나마 성전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을 얻어서 다행이지.
내 능력이 얼만데 13년간 얻은 것이 꼴랑 백작령 하나야... 어휴..,
1123년 7월, 사라센놈들이 항복한 이후, 짐은 예루살렘 왕위를 나의 기본직위로 삼았어.
하지만 짐에게 필요한 것은 예루살렘이란 타이틀이지 그곳에 터잡고 산다는 뜻은 아니었지.
그리고 짐은 거금을 들여서 성당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을 짐의 봉신으로 삼았어.
앞으로 우르트메르를 사라센인들로부터 지키고, 한편으로 사라센인들을 깨우쳐주기 위해선
이 홀리오더의 힘이 필요했지.
헬가 오브 위체:성전의 승리로 저와 남편은 카톨릭 신자들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중요한건 이제 수많은 신자들의 피로 세운 업적을 지키는 일이었죠.
그건 업적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라 할 수 있죠.
먼저 광대한 점령지를 관리할 봉신들을 임명해야 했어요. 이 인재를 고르는 문제는 신중해야했죠.
유럽에 세력있는 귀족들을 우르트메르의 봉신으로 삼는 것은 그들의 힘을 키우는 꼴이죠.
그래서 저와 남편은 고민끝에 세속적인 신학도들을 뽑아 우르트메르의 봉신으로 임명했어요.
그들은 교회에서 배운 학식과 교리를 바탕으로 우르트메르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예요.
또한 유럽의 귀족과 연고가 없는 이들을 귀족으로 양성하여 구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결단이었어요.
하지만 우르트메르는 유럽과 거리가 머니, 그곳의 귀족들이 무슨 작당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일.
따라서 우르트메르에는 공작위를 두지 않았어요.
그리고 곧 장악될 아일랜드에도 가급적 공작위를 세우지 않을 계획이었죠.
하지만 내부를 단속하는 것만이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아니죠.
우리에게 땅을 뺏긴 사라센인들이나 제 땅을 노리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위협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것은 유럽 제왕들과의 외교이지요.
당시 남편의 동맹은 노르웨이였고, 잉글랜드왕과도 사신단 파견이나 원정에서의 동맹 등으로 사이가 좋았어요.
그러나 사라센인들이 온다면 더 많은 나라들의 힘이 필요했죠.
따라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아퀴탱에도 사신을 파견했어요.
말스넥탄 2세: 성전이 한창 중이던 1118년 8월, 요크 여공작이 스트레스로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이었던 요크 백작이 켄트 공작령을 상속했지. 덕분에 요크 백작령이 왕비의 영지에서 떨어져나갔고!
헬가 오브 위체:하지만 덕분에 저에 대한 잉글랜드 왕가의 견제가 약화되었으니 다행이지이요.
어차피 제 직할령이 떨어져 나간것도 아니고, 요크 공작위는 제 것이니 언제라도 되찾을 수 있는 땅이에요.
하지만 제 봉신이 떨어져나가 제 힘이 약화됐으니, 새로운 영지를 얻을 필요가 있겠군요. 그래서 웨일즈를 공격하겠어요.
귀네드 소왕:아니, 내가 뭘 어쨋다고?!
말스넥탄 2세:성전이 끝나기 직전, 짐의 재상이 더블린 백작령에 관한 클레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더군.
하지만 철군에 예루살렘 통치기반을 다지느라 재정지출이 심했지. 그래서 짐은 당분간 재정을 확보하며 자중했지.
하지만 재정이 확보되면 더블린을 공격할 계획이었지.
더블린이 확보되면 짐은 아일랜드의 대영주로써 아일랜드 지배를 주장할 수 있으니까!
헬가 오브 위체:1124년 4월, 남편은 더블린에 대한 클레임을 발동했어요.
그리고 상비군 4500명을 더블린으로 파견시켰죠. 더블린 백작은 킬데어 백작과 연합하여 2천의 병력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패퇴당했어요. 남편의 상비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섬멸시킨 후, 더블린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어요.
그런데 그때 우르트메르에서 급보가 전해졌어요. 사라센인들이 우르트메르를 침공했다는 소식이었지요!
그들 말로 '지하드', 우리의 표현으로 '성전'을 감행한 것이었어요.
말스넥탄 2세:사라센인들의 수장인 칼리프는 패배를 인정햇지만,
그 밑에 있는 졸개들과 이교도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었던 것이였지.
하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죽어나갔음에도 또다시 대군을 조직한 것은 놀라웠어.
듣자하니 저 동쪽 어딘가에 카톨릭교도들을 암살하기 위한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오더구만.
하지만 그런 얍삽한 놈들보다 더 문제인 것은 이교도들도 기사단을 창설한 것이야.
놈들은 우리와의 전쟁을 통해 기병전력을 더욱 강화하고 겠다고 마음먹은 모양이더군.
그리하여 이집트 방면에서 1만 8천, 다마스쿠스와 아라비아에서 1만 4천,
그리고 아나톨리아에서 8천의 이교도 군대가 성지를 빼앗기 위해 쳐들어왔어.
그것도 우리가 더블린을 공격하고 있을 때 말이지. 곧 아일랜드 왕위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야!
헬가 오브 위체:우리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을 이교도들이 1년만에 대군을 다시 조직해낸 것은 놀라웠어요.
하지만 패배자의 반격을 막아내야 하는 것이 승자의 숙명이더군요.
불행히 우리 예루살렘 왕국은 지난 성전처럼 장기간의 대규모 원정을 수행할 재정이 없었어요.
더군다나 아일랜드를 공략중이었기 때문에 병력을 우르트메르로 급파하거나 집중할 수 없었죠.
하지만 이런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거금을 들여 기사단을 봉신화했었죠.
그래서 남편은 주군으로써 기사단을 소집했고, 카톨릭 신자들을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써 그들을 성전에 참전시켰지요.
그리고 저는 유럽의 제왕들과 교황에게 호소문을 보내어
가톨릭 신자들을 지키기 위한 성전에 참전해줄 것을 요청했지요.
1년전 함께 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전우들은 천상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군대를 움직이겠다는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지난 성전에 미처 참전하지 못한 제후들이나 왕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참전을 신청하더군요.
말스넥탄 2세:1124년 5월, 짐은 가우리에 집결한 구호기사단과 성단기사단 병력 1만 3천을 출진시켰지.
하지만 이번 출정에 짐은 참전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어.
기사단의 목적지는 우르트메르가 아니라 놈들의 중심지인 이집트였어. 즉 빈집털이였지.
사라센놈들은 분명 대군을 우르트메르로 보낼 것이 확실했어.
만약 우리 기사단이 우르트메르로 간다면 3배나 되는 이교도들을 대적해야 했지.
그렇다면 기사단은 설령 많은 이교도들을 죽이더라도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어.
하지만 그때문에 놈들의 본거지는 수비대만 남을 상태일 것이고,
우리가 그곳을 쓸어버린다면 놈들은 우리를 잡으러 오겠지. 그때엔 배를 타고 우르트메르로 도주하면 그만이고.
헬가 오브 위체:1124년 8월, 예루살렘 왕국의 기사단은 이집트의 다미에타에 상륙하고 포위공격을 시작했지요.
그러자 우르트메트를 휩슬고 있던 4만의 사라센군 중 2만 2천이 이집트로 기동하기 시작했어요.
나머지 1만 8천은 우르트메르의 서부지역의 성읍들을 계속 공격했죠.
1124년 10월, 2만 2천의 사라센군이 시나이 반도를 지나자, 다미에타의 기사단은 배를 타고 자파에 상륙했어요.
그리고 잉글랜드왕 애설울프가 이끄는 지원군 1만 4천이 아스칼론에 상륙했지요.
그동안 신성로마제국,프랑스,아퀴탱,아일랜드,노르웨이,폴란드,헝가리 등 유럽 제왕들의 지원군도 조직되어
성지를 향해 출발한 상태였어요.
말스넥탄 2세:하지만 유럽 제왕들의 지원군이 모두 도착했을 때는 1125년 4월 이었지.
그동안 짐의 기사단은 사라센의 대군을 피해 남북으로 기동해야 했어.
행운이었던 것은 사라센의 대군이 급조된 대군이었고, 지휘계통이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지.
저들은 우르트메르 서부와 남부 지역의 성읍들을 공성하고 약탈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더군.
덕분에 유럽의 지원군이 집결할 시간을 벌 수 있었지.
1125년 5월, 티루스에 상륙한 프랑스,신성로마제국군 1만 9천은 우르트메르 서부로 진군하여
그 지역을 휩슬고 있는 1만 8천의 사라센군을 견제했어.
그동안 짐의 기사단과 잉글랜드 연합군 2만 7천은 우르트메르 남부로 진군하여
2만 2천의 사라센군을 공격했지.
수적으로 열세한 사라센군은 후퇴 기동을 했고, 어쩔 수 없이 잉글랜드군과 떨어져서 그들을 추격했지.
1125년 6월, 우르트메르 서부의 사라센군과 합세하려던 2만 2천의 사라센군은
케락에서 잉글랜드와 예루살렘군에게 포위되었지. 2만 7천의 연합군은 앞뒤에서 사라센군을 공격했어.
말스넥탄 2세:이번에는 사라센군이 요충지를 점령하고 우리의 공격을 막는 형세였어.
반대로 우리는 적을 격파해야 할 상황이었지.
하지만 궁기병 전력이 전무한 우리 연합군은 사라센군을 지치게 할 방법이 없었어.
그리고 사라센군은 지난번 우리가 했던 것처럼 철저히 수비만 했지.
그렇다고 지난 1차와 3차 예루살렘 전투처럼 대규모 물량으로 밀어붙이기는 힘들었어.
다른 십자군들은 사라센군을 견제하거나 뺏긴 성읍을 탈환하고 있었거든.
결국 연합군이 쓸 수 있는 방법은 전면전 뿐이었지. 전투의 지휘는 잉글랜드 왕이 지휘했어.
잉글랜드 왕 애설울프는 앞뒤에서 공격하는 것이 전력 분산을 초래하고 전투지휘에도 비효율적이라 판단했어.
그래서 앞뒤로 나눴던 전력을 적의 정면에 집결시켰지. 그리고 장궁병을 앞세운체 사라센군을 향해 진군했어.
그들 뒤엔 쉴트월 중보병대가 뒤를 따랐고, 양익에는 기사단이 진군했지.
양익의 기사단은 중앙의 잉글랜드 보병대와 발을 맞춰 전진했어.
사라센군이 화살을 쏘아댔지만 연합군은 전열을 유지하며 나아갔지.
화살에 인한 부상병이 속출해도 애설울프왕은 진격을 명령했어.
마침내 사거리를 확보한 장궁병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고, 중보병대는 빠른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지.
양익의 기사단도 돌격을 감행했고, 양익의 사라센 기병대는 기병돌격을 피해 물러났어.
원진을 형성한 중앙의 사라센 보병대를 향해 연합군이 공세를 퍼붓자.
물러났던 사라센 기병대가 아군의 측면과 배후로 돌격해왔어.
그들의 목표는 연합군의 지휘부를 참수공격하는 것이었어.
말스넥탄 2세:하지만 지휘부에 있던 애설울프왕은 쉴트월 중보병대와 함게 있었지.
쉴트월 중보병대는 헤이스팅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라센 기병대의 공세를 견뎌냈어.
오리혀 쉴트월 주변을 방황하다가 창에 찔리거나 사격당해 죽어나갔지.
그동안 중앙 전투에 있던 기사단이 애설울프왕의 지휘부를 지원하자 사라센 기병대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어.
덕분에 장궁병들은 원진으로 응집된 사라센 보병대를 향해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고,
중보병과 기사단이 총공격을 감행하자 사라센군은 무너졌지.
이 전투에서 사라센군 1만 6천이 전사했고, 우리측 피해는 7천명 정도였다더군.
헬가 오브 위체:케락 전투 이후, 사라센군과 십자군의 균형상태는 깨졌어요.
케락에서 패퇴한 사라센군은 이집트 방면으로 도주했지만 기사단이 그들을 추격하여 섬멸했지요.
한편 잉글랜드군은 우르트메르 서부로 이동하여 그 지역의 십자군과 합류했지요.
1125년 7월, 3만명의 십자군은 다마스쿠스로 물러나는 1만 8천의 사라센군을 티루스에서 따라잡고 공격을 감행했어요.
그 전투에서 십자군은 기사대를 앞세우고 물량으로 사라센군을 밀어붙였고,
물량에 밀린 사라센군은 1만 3천의 병력을 잃는 완패를 당했지요.
이후 1125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십자군은 사라센군이 함락했던 성읍들을 탈환하고 군대를 재정비했어요.
물론 그 기간동안 사라센군도 병력을 보강할 수 있었지만, 지난번처럼 대군을 동원하긴 불가능했죠.
오히려 십자군이 사라센인들의 영지로 진군했어요.
1126년 4월, 유럽 제왕들의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켰고,
다음달엔 예루살렘 왕국의 기사단이 다미에타를 함락시켰어요.
만약 사라센인들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사라센인들의 수장이 있는 카이로가 십자군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이었죠.
말스넥탄 2세:결국 1126년 6월,사라센인들의 수장이자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 나십은
우리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항복을 선언했지. 그리고 항복한 그 달에 병을 얻어 세상을 뜨더군.
자업자득. 인과응보야.
놈들이 자칭 '성전'이라 부르며 주도했던 전쟁이 패배로 끝나고, 수장이 곧이어 세상을 떠나자
저놈들끼리 내분이 벌어지더군. 덕분에 짐의 치세가 끝날때까지 사라센인들은 우르트메르를 넘보지 못했어.
헬가 오브 위체:우르트메르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 이후, 저는 잉글랜드의 영지관리에 신경을 썼어요.
이제 제 나이 50이 되었고, 두 아들들도 장성했으니 미래를 위해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예루살렘의 왕비가 될 무렵의 제 직할령은 제가 대공이 되었을때에 비해 5배 정도 늘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영지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잉글랜드 안에서 더 이상 영지를 늘리기가 힘들것 같더라구요.
귀족들과 왕의 눈치를 봐야하니까요.
그래서 먼저 제 영지 안에 있는 불충하고 사악한 봉신들을 쫓아내는 숙청을 통해 영지의 지배력을 강화했지요.
이 과정에서 언니의 둘째 형부이자 고드윈 왕가 사람이었던 애설울프의 백작위를 회수했고요.
그 다음 앞서 말한대로 웨일즈를 공격했지요.
웨일즈는 잉글랜드의 영토가 아니니 귀족들과 왕이 딴지걸지 못할 것이에요.
그리고 웨일즈는 같은 카톨릭 교도들이지만 미개한 사람들이니 문명화된 우리가 그들을 교화해줘야 합니다.
마침 아일랜드를 장악한 남편도 웨일즈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남편과 함께 귀네즈 소국에 클레임을 걸었죠.
결국 1129년 3월, 귀네즈 소국은 남편과 제가 나눠 가졌어요.
그리고 한때 귀네즈 소국의 왕이었던 아르눌프 아프 에글리마르는 자신의 영지를 모조리 잃고 말았답니다.
덤으로 귀네즈 왕의 아내는 귀네즈 공성전때 생포되어 남편의 지하감옥에 무기한 수감되었어요.
귀네즈에 클레임을 가진 종자가 태어나선 안되니까요.
귀네즈 소국 왕 아르눌프:왜날뷁!
말스넥탄 2세:뭐, 비록 사라센놈들의 성전때문에 잠시 염통이 쫄깃해지면서 성질이 뻗치는 상황이 초래하긴 했지만,
결국 1125년에 더블린을 접수하는데 성공했어. 그리고 이듬해인 1126년에 짐은 아일랜드 국왕을 겸하기로 선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일랜드 귀족연놈들은 짐을 아일랜드의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더군.
그래서 짐은 짐의 막강한 군대로 저 가엾고 딱한 자들을 일깨워줬지. 그들의 학습코스는 두가지였어.
요단강 익스프레스랑 고자되기VS거지되기 정도?
남아일랜드를 정벌하는 동안, 짐은 재상을 귀네즈 소국에 보내어 짐의 영향력이 웨일즈에 행사될 수 있게끔 했어.
마침 왕비의 영지가 웨일즈 옆에 있고, 왕비도 귀네즈 소국에 관심이 많더군.
덕분에 클레임을 확보하는 작업이 쉬웠어.
거기다가 웨일즈에 레온 왕국이 개입해서 정치가 좀 혼란하더군.
그래서 짐은 웨일즈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웨일즈를 장악하기로 결심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네즈 소왕놈이 말귀를 못 알아 먹더구만.
그래서 놈의 영지를 쓸어버리고 놈의 아내와 생이별 좀 시켜뒀지.
하지만 놈이 살아있는 클레임 덩어리이기 때문에 언젠가 꼬투리를 잡아 죽이던가, 아니면 가두던가 하려구.
헬가 오브 위체;이렇게 우리 부부가 20년동안 노력한 결과,
우리의 아들들이 물려받을 영토로 스코틀랜드,웨일즈,아일랜드,그리고 예루살렘 4왕국과
잉글랜드의 4개 공작위 13개 백작령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비록 유럽 최강의 국가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유럽의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죠.
그리고 우리의 뒤를 이을 장남 로버트는... 조그만 노력을 더 한다면 브리튼 제도를 통일하고 황제가 될 수 있겠지요.
말스넥탄 2세:하지만 아직 해결될 문제가 남아있지.
먼저 왕비가 내 아이들에게 영지를 분할상속하려는게 마음에 걸려.
그렇게 되면 내 둘째 아이가 아내의 영지 절반을 가지고 잉글랜드의 봉신이 되는거잖아?
그러면 곤란하지. 곤란해..., 왕비의 영지는 장남 로버트가 모두 물려받아야 돼.
하지만 왕비가 짐의 뜻을 따라줄까? 아이들을 끔직히 사랑하는데...,
결국... 가슴쓰리지만... 이제 최후의 싸움이 남은 것 같군.
이제 다음편이 마지막 편입니다. 재미없는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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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제 끝장내야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