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중엽 몽골제국이 쇠약해지면서 유럽 귀족들의 불만은 한껏 고조됨 무역을 중시해 동서
무역을 보호해 주던 제국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중동의 투르크족들이 발흥해 동서무역을 훼방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약탈로 인해 동양의 귀중품 값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뛰어 올랐다.
무려 180여년 동안 7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으로 동양의 각종 진품에 맛 드린 유럽 귀족들은
갑작스런 제국의 붕괴에 많은 타격을 받게 된것이다. 후추,계피, 육두구,정향 등의 향신료나
생강 같은 휘귀한 농산물,고급스런 실크, 진귀한 보석들은 이미 귀족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귀한 제품이었다.
특히 문제가 됐던것이 후추였다. (후추는 몰쿠카 제도의 특산물 이었다.)
물론 동양의 진품이 유럽에 들어오는 길이 하나만 있었던것은 아니다 투르크를 통한 길 외에 또
하나의 대표적인 교통로가 있었으니 바로 지중해를 통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당시ㅏ 이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상인들.역사에돟 기록될 만큼 이利에 밝은 장사꾼 들이었다. 무려 10배의 이윤을 챙기겠
다며 배짱은 튕기니 유럽의 귀족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그나마 물량도 충분하지 못했다.
1495년 그(콜럼버스)는 50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유럽에 보냄으로써 무려 400년이나 가까이 유
지 됐던 노예무역의 첫장을 열었다.
신대륙의 황금은 유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은 당연히왕실의 소
유가 되었다.스페인 16세기 전반에 이미 어마한 돈으로 왕실의 부채를 대부분 상환했고 넘쳐 나
는 돈으로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황금을 차지하려는 여러나라의 도전을 받아야 했으니
돈든 군비에 쓰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돈이 쓰여진다는 것은 또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돈이 시중에 널린
다는 것은 곧 돈 값을 떨어뜨린다. 신대륙에서쏜아져 들어온 돈은 결국 유럽의 물가 상승을
부채질 했다. 당시 물가의 척도는 소맥인 밀. 16세기 중여에서 말까지 스페인에서는 소맥가가
무려 4배 올랐으며 이탈리아에서는 3.3배, 영국은 2.6배 올랐다.
이에 물가 상승의 가장 큰 피해자인 민중이 가만있으리 없었다.가난과 빈곤에 생계를 위협받던
이들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이주해 빈민이 되거나 아니면 격렬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니 왕실
은 당황했다. 16세기 들어 유럽 여러나라에서 노동자의 단결이나 부랑과 걸식을 금지하는 칙령
이속속 제정된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부랑아와 거지를 붙잡아 강제노동을 시키는
강제노역소가 첫 선을 보이기도 했다.
1513년 프로투갈인들이 처음으로 해로를 통한 중국 입항에 성공한다. 포르투갈의 입항은 다른
유럽국가들의 중국 입항을 유도해 1575년에는 스페인이,1622년에는 네덜란드가 그리고 엇
비슷한 시기에 영국이 중국을 찾아왔다.1685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에 공장 설치까지
허가 받을 만큼 유럽과 중국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햇다. 그러나 이 관계에서 유의
해야 할점이 있다. 프로투갈인들이 중국을 찾은 이래 모든 유럽인들은 300년이상 중국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는 점이다.
후세 학자들이 농업 혁명으로 명명하기도 한 영국 농촌.14~15세기까지만 해도 영지와 농업노예
를 중심으로한 전토억인 봉건 영주제가 주류를 이루던 이곳에서 16세기 들어 강렬한 상업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것이다. 농업의 상업화란 곧 자신의 필요성 보다는 팔아서 돈이 될 상품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필수 요건인 경제적 합리화가 대두 됐다. 콩과 목초지
를 번갈아 재배함으로써 휴경지를 줄이고 풍부한 수확을 거둘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경제적 합
리성이이룩한 개가였다. 이것이 곧 레이농법으로 알려진 전환농법의 핵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주들은 자신의 땅에서 꼼작도 못하고 농사만 져야 하는 농노보다는 차라리 농민들이 자유롭
게 경작하도록 한후 소작료나 세금을 받는 쪽이 유리한것으로 생각됐다. 16세기 들어 이같은
영농방식은 급속도로 확대돘다. 이것이 바로 소농 엔클르저 였ㄷ.
그러나 영국의 엔클로저는 단순히 영농방식에서만 진행됐던것은 아니다. 더 중요했고 광점위
하게 전개됐던 목양엔클로저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소농엔클로저와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아예 토지의 용도자체를 변경 시키기 때문이다.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농사를 짓는 것보다 양을
키워 그 털을 파는 것이 훨씬 많은 이익을 얻을수 있었다. 따라서 목양 엔클로저는 소농 엔클로
저보다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유럽을 휩쓸었고 더많은 농민들이 불기피하게 정든 농토을 떠나
게 했다.
어쩔수 없이 고향을 등진 농민들은 도시로 향했고 그곳에서 부랑자로 떠돌거나 아니면 도적이
되어야 하는 신세였다. 시골 곳곳에 폐촌이 형성돼고 을씨년 쓰러운 시골 분위기가 연출됐다.
역사가들은 1518년에서 50년 사이 잉글랜드 주우지방에서만 약 10% 가량의 촌락이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16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 엔크로저 운동은 절정에 달한다. 이때는 농지의 소멸을
어쩔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농민들이 스스로 엔클로저를 단행한 경우도 많았다.
..물론.헨리 8세도 처음에는 신교를 반대했다. 그러나 왕후 캐서린과의 이혼 사건이 그의 마음
을 돌리게 했던 결정적 사유, 이혼에 반대하는 교황과 대립하면서 신교도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발포,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됐으며 향후 영국 내 수도원을
해산시킥고 그 소유지를 몰수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왕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한것 이었다. 따라서 영국 신교도들이 곧장 자유를 얻었던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상당
기간 신교에 대한 영국 왕실의 태도는 들쭉날쭉 이었다.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는
신교를 받아들였지만 메리여왕은 카톨릭을 받아들여 신교를 탄압했다. 신교와 구교의 사이
를 왔다갔다 하던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이르러서는 아예 영국 국교를 따로 만들고 만다
신교도들은 탄압 대상이었다.이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은 16세기 중반이후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최소 두가지 특성을 갖고 있었다.
엔클로저 운동이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활성화 됐고 신교도의 자유를 찾는것이 늦어졌다는 점이
다. 많은 농민들과 신교도들은 오갈데가 없었다. 이들이 갈곳은 바로 신대륙 뿐이었다.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다가 1581년 독립한 이후 해양 강국 으로서의 우세를 떨쳤던 나라가 네덜
란드 였다.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며 동남아
무역권을 차지했다. 또 자바, 수마트라, 말래카 실론등을 점령하고 바타비아를 차지(1619년)한
후에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여기에 중계지로 삼기 위해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를 획득
했고 북아메리카에는 뉴 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설탕의 원산지는 갠지스 텔타와 아샘지방 사이의 벵골연안이다. 유럽 민중이 설탕을 처음
접한것은 십자군 전쟁 당시 이집트에서 였다. 10세기경 이집트에서 씨앗이 발아된후 이곳에서는
정식으로 사탕수수가 재배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군사들은 이곳에서
철수하며 한줌의 싸앗을 유럽에 가져갔고 따뜻한 이탈리아 남부 시프러스 섬에서, 또 시칠리아
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시프러스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던 설탕은 마침내 1520년 브라질에 당
도, 그러부터 수십년 사이 브라질은 설탕의 최대 생산지로 부상한다.
엄격히 말해 소식을 전하다는 의미의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한것은 17새기 초반부터다. 초기에는
비정기적인 간행물이 주류. 국내외 관시사를 팜플릿 형식으로 만들어 여기저기 뿌리던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609년 세계 첫 주간 신문이 독일에서 간행되기 시작해 1622년에는 영국
에서 1631년에는 프랑스에서 그리고 1690년에는 북아메키라에서도 주간으로 찍어내는 정기 간
행물이 등장했다. 1660년에는 세게 최초의 일간지인아인 코멘데 자이퉁(독일)이 선을 보였다.
이중 가장 영향력 있던 신문이 1631년 프랑스 관보로 시작된 가제트 드 프랑스 였다. 본격
적인 최재 활동도 겸했던 이 신문은 1780년대 정기 독자만 1만 2000명에 달했을 정도, 물론
수익성도 당대 최고 였다.
1744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었던 리버풀의 노예 무역은 무역 총액의 절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1783~1793년의 10년 동안 리버풀의 노예 판매 총액은 1500만 파운드
이중 순이익이 1200만 파운드로 잡혀 있으니 수익률은 무려 80%에 이른다. 원가 20원짜리
를 5배인 100원에 팔수 있었던 제품이 과연 자본주의 500년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아마도 수익률 순위를 따져 본다면 최고 였을지도 모른다.
7년전쟁(1756~63)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48)의 원인 제공자요, 피해자였던 마리아테레
지아 여제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일녀으로 일으킨 전쟁 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프로이센과 영국이 손을 잡고 무려 7년동안 세계 곳곳에서 치른 이 전쟁은 이후 세계사의 변동
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전쟁이후 승자였던 영국에 관한 부분은 독자분들이 많이 아시리라고 판단하에해 생략하겠
습니다.-글쓴이) 반면 영국과 경합하던 프랑스는 완전히 궤멸된 형국 이었다. 북미와 인도 식민
지는 고스란이 영국에 넘겨주고 거의 완전하게 철수하고 만다. 여기에 7년전쟁에서 패한 복수심
결과 미국독립혁명기에 루이 16세는 너무 많은 돈을 미국 지원에 쏙아 붓고 말았다. 그결과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할수는 있었지만 프랑스는 재정악화라는 치면적인 결함을
면할수 없었다. 1789년 의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으로 재정부족에 시달리던 왕실이 귀족에 세
금을 부과하려는 데에서 시작 한것이니 혁명 이후의 모든 사건은 바로 7년 전쟁에서 시작된것으
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것이다.
여기서 좀더 프랑스 국내 상황을 설명하게 된다면 당시 프랑스는 1730년대 이래 장기 호황을 누
리고 있었다 생산량은 줄곧 증가했고 식민지를 통한 부의 축적이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15세기
식민지 경쟁에 뒤늦게 참여 했으면서도 7년전쟁으로 영국에 식민지를 빼앗기기 이전까지 프랑
스는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에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1763녕에서 75년 까지는
루이 15세의 황금기로 부릴 만큼 경제가 번창했다. 생산력 향상으로 소비와 함게 생산이 늘어
돈을 버는 계급이 형성되었다. 당시 재무총감 네케르는 프랑스는 유럽 화폐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775년 돌연 불경기가 찾아 왔다. 1773년 대 흉작으로 수출도 소비도 일어나자 못한
탓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785년에는 한발이 찾아 온데 이어 1788~89년 겨울의 한해로 흉
작은 쉬지 않고 계속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프랑스는 1788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적극적인
미국지원에 나섰다. 그런데 이것이 치명적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지원에 무려 20억 리브르
라는 거금을 썼다. 그러면서도 1785년 프랑스는 영국과의 관게 개선을 위해 영불 통상조약을
체격, 영국 상품에 대한 시장을 전면 개방하게 된다. 나약해진 프랑스 산업이 위축이 될것은
뻔한 일이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인도산 면직물을 영국에 갖다 파는 것은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닐수 없었다.
이익률은 무려 50%에 달했다
그러니 이익에 민감한 영국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인도산 면직물 처럼 생산해
낼수 있다면 떼돈을 벌수 있었으니 말이다.
18세기 중반이후 영국전체에 면직물 만들어 내기 열풍이 불었다는 것은 이 정도 맥락에서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면직물 생산은 영국의 국가적 소망으로 까지 발전해 갔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세계 최대 면직물 수출국이었던 인도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다. 산업혁명이
성공하자 인도는 이제 영국 면직물 산업의 경쟁자로 여겨진 탓이다. 이에 대한 영국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생산지에서 소비자로! 였다 인도의 생산 시설을 초토화 시키는 한편
영국산 면직물의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더, 영국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관세를 통해
이를 달성했다. 인도산 면직물에 대한 영국의 수입 관세는 최대한 높이고 영국산 면직물에 대한
인도의 관세는 초대한 낮추는 전략 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무렵 인도가 수입하는 영국
산 면직물에는 불과 3.5% 관세가 부과 됐지만 산업 혁명이 이후 영국은 인도산 면직물에 무려
70~80%의 관세를 부과 하였다.
인도 면직물 산업 초토화 전략으로 1818년 부터 10년 사이 인도 수공업 직포공의 수입은 43%
,직공수는 2/3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도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모색하지 않을수가 없엇다.
인도의 주요 산업인 면직물의 붕괴가 곧장 소비 시장의 붕괴를 초해한 것이다. 산업의 붕괴는
곧장 소비의 붕괴를 의미했다. 식민화된 인도의 재정이 극도로 궁핍해질것은 뻔했다. 그렇다면
영국은 인도를 먹여 살려야 했을까? 물론 아니다. 영국 정부는 본국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식민지를 운영할 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아편이 해결사로 등장한 것은 이때문이다.
세계시장을 장악한 영국면직물 업계는 고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위기를 맞는다. 19세기의
20년대들어 프랑스,독일,미국등 후발 공업국들의 산업혁명이 급속하게 진행된 탓이다. 이들
국가들의 초기 산업화를 이끈것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면업. 모든 국갇ㄹ이 영국신 산업 시장을
쫓은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유럽대륙과 미국의 거대 시장을 일게 생겼고 비 유럽지역 시장
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판이었다.
식민지 개척과 면업으로 벌어들인 영국 자본가의 돈은 철도로 쏟아 들어갔다. 사실 1830년대
까지 축적된 영국의 거대자본은 거의 이윤을 낼수 없는 상태였다. 이들이 볼수 있는 최대
이익은 공채였지만 연간 수익률은 고작 3.4%에 불과했다. 자본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고
철도는 이 같은 영국 유휴 자본의 훌륭한 안식처가 되었다.
영국이 빈회의에서 얻은것은 몰타, 실론, 케이프 식민지 등 비 유럽 지역의 작은 식민지에 붉ㅘ
했다. 어떻게 보면영국은 아무 욕심이 없는 나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이들은
세계를 장악하려는 영국에게 있어 유럽 대륙으 어느 영토봐 중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에서의 이권은 포기했다 해도 영국은 충분히 실리를 챙긴 셈이다. 나아가 남미라는
새로운 대규모 시장이 출현함으로써 영국은 대륙의 영토 투쟁에 더욱 초연해질수 있었다.
실제로 영국은 남미를 장악했다. 전쟁 중이었던 1804~06년 전체 면직물 수출액중 중남미가
차지하는 비중은 4%에 불과했지만 전쟁이 긑난 직후, 즉 1814~16년에는 7%, 1830년대 중반인
1834~1836년에는 14$로 급증했다.
1830년대까지 미국 경제를 떠 받쳐 준것은 단연 면업이었다. 그리고 광활한 영토의 확장과
인구 증가가 이를 보완해 줬다. 원면이 미국 경제에 끼친 공헌은 절대적이어서 1815년 부터
총수출액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원면 수출액은 1830년대 50%를 넘고 있다. 원면의 대량
수출은 단순히 외화 소득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 발전이 부진하면서 뜸해졌던 해외
자본의 유치에까지 하게 되었다. 원면은 한편 저가로 국내생산업체에 공급되어 면제품 생산
을 활성화 시켰다. 이기기 면제품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해 1820년 600만 달러였던 생산액은
1831년 2600만 달러로 4배, 18399년 4600만 달러로 7배 이상 증가햇다. 1840년대 이후
일반 영국산 면제품은 미국을 침투하기 어려운 상황 이었다.
이번에는장차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되는 프로이센을 보자. 빈 회의에 참여할때 까지 프로이센은
본질적으로 구 제도를 탈피할수 없었고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연방은 1830년대 까지 유럽
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1806년 이른바 슈타인의개혁이 있었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로 성공할수 없었다. 여기에 섹소니에 대한 완전 병합도 실패했으니 프러이센은 별로 얻은
것이 없어 보였다. 당시 프로이센은 대부분이 농업지역 이었으며 농장과 산업 설비는 전 유럽
에서 규모가 가장 작었다. 가장 강력한 길드제도가 적용되고 가장 낡아빠진 금융과 법체계로 운
영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직은 경제적 통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마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경쟁적으로 독일 연방을 구성하려 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일이 19세기 후반 가장 발전된 지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1834년의 관세동맹
으로 통일의 첫발을 내딛고 나서였다. 연방구성은 오스트리아와의 경쟁관계에서 빠르게 진행
됐다. 관세동맹은 독일 연방에 대규모 내부시장을 제공했으며 1840년대 서부와 남부 독일의
공업지역을 연결해 주는 철도의 등장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8세기 초만 해도 진품에 사치품으로 귀족들이나 맛을 볼수 있었던 차는 세기말에 이르러
영국의 범국민적 대중 음료가 되어 버렸다. 1784년 수입관세가 119%에서 12.5%로 무려
10분의 1의 수준으로 떨어지자 급속하게 일반인을 파고 든것이다. 1784~86년의 3년간
1400만 파운드였던 영국의 차수입액은 1834~36년 4100만 파운드로 3배 증가했다.그럼에도
중국은 영국 상품중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중국인에게 유럽상품은
필요가 없었다고 할수 있었다. 이같은 상황은 수십변간 계속됐다. 영국의 국부인 은의 유출이
심가한 상황에 이르렀던것은 당연한일. 요즘 식이라면 영국의 대 중국 무역적자액이 감당할수
없을만큼 커진것이다. 1780~84년 사이 78만냥이었던 영국의 은 유출은 1785~89년에는 188만
냥으로 약 2.5배 증가했다. 19세기 들어서도 이 같은 양상은 별 변화가 없었다.
아편을 통해 엄청난 은이 빠져나감으로써 (청나라는)물가가 급등한것이다. 19세기 들어 문제가
심각해지다 청은 아편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햇다. 그러나 단속은 더욱 큰 경제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은의 유출이 더욱 가속화 된것이다. 단속으로 인해 영국 상인들이 물물교환으로
이뤄지던 아편 매매를 즉각 현금으로 바꿨기 대문이다 이를테면 위험 부담금을 요구 했던 셈이
다. 은의 유출로 인한 경제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은의 유출은 곧 은가의 상승을 유발시켰고
이는 곧 은본위제도로 운영되던 중국의 화폐 제도하에서는 물가와 지가의 상승을 의믜했다.
결과적으로 아편은 급속한 인플레의 원인 이었던 것이다. 1830년대 지가 상승에 다른 세금은
이전 10년에 비해 2배씩 뛰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 이다.
도광제때 영국상인들은 매년 1,800톤의 아편, 돈으로는 3000만냥 어치를 중국에 들여 보냈
다고 한다. 연간 국고가 3000만냥 이었으니 한해 국가 수입에 맞먹는 액수이다.
1825년 영국을 휩쓴 불황은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적 불황이라는 말로 불릴 만했다. 생산 과잉
에 따른 기업의 도산, 실업,물가 하락등은 요즘 말한는 버블 경제와 그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불황을 타개 하려는 다각적인 노력이 전개됐다.자유 무역의 추진과 곡물법 폐지 운동은
아마도 불황을 이기려는 가장 대표적인 노력 이었을 것이다.
초기 불황이 닥쳤을때 영국 상공업자들이 불만 스럽게 쳐다본것이 전통 귀족인 지주층,나폴레옹
과의 전쟁이 끝나자 저가의 농산물 유입을 우려한 이들이 외국으로부터의 농산물을 억제하면
서 국내 곡물의 고가정책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1815년 믾은 상공업자들 특히 면직업자들의 반대에도 제정됏던 곡물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정책은 영국 상공업자의 이익을 세가지 측면에서 깍아 먹었다.
첫째, 농산물의 고가정책은 노동자들의생계비를 높여 임금상승을 부추기는 효과를 불러 일으켰
다.국내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당연히 국제시장에서의 상품 경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둘째, 농산물의 수출입을 통제함으로써 무역상의 잠재적 이익을 빼앗았다. 농산물 수입과정에서
수출입 업자들은 적지 않은 이익을 차지할수 있었을 것이다.결과적으로 상공업자들은 지주들로
인해 주요 돈벌이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셋째,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다른 국가의 보
호무역정책을 유발시켰다는 점이다. 저가의 농산물 생산국은 영국의 곡물버븡로 자국의 주요
시장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국내시장도 패쇄적으로 운용했다. 하지만 이는 비단 농업
국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의 공산품유입을 우려했던 후발산업국가
들에게게 영국의 곡물법은 시장을 방어할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 였다. 해외시장 개척이 무엇
보다 중요했던 영국의 상공업자들이 자국 지주츠의 이익을 반영한 곡물법을 폐기를 줄기차게
주장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20년대 들어 상공업자들의 반말은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거의 예측하지 못했던 불청객 불황
이 정기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는 대공황이라는 말이 나올정도으 악성 불황
이었다. 그럴때마다 임금 삭감과 해외 시장이 해외시장이 필요했던 상공업자들의 곡물폐지
목소리는 한층 커질수밖에 없었다. 1820년대 최초의 불황을 계기로 이 움직임은 본격적으로
개시되어 1840년대 결실을 봤다. 그리고 1846년 관세개력과 함께 곡물법이 폐지됐다.
20여년의 투쟁 끝에 영국 상공업자들은 마침내 정상적인 관세로 영국의 자유러운 곡물 수입을
이끌어 낸것이다. 여기에 1849년에는 항해 조령이 역사속으로 사라졋다. 비로소 영국 상공업자
들의 희망인 자유무역이 본격적으로 출발을 알린것이다. 영국의 자국의 보호 무역 조향을 폐지
함으로써 외국에 대한 시장 개방을 한층 더 강력하게 요구 할수 있었다. 그래서 몇몇 역사
학자들은 이 때의 영국 정책을 자유무역 제국주의로 부르고 있다.
이같은 자유무역제도가 1840년대 후반 시작됏다는 사실은 당시 새로운 종류의 불황이 찾아
들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1840년대 후반 유럽은 새로운 형태의 경기 체에 고통 받았다는 애기
다.1846년 유럽의 일기 불순은 농산물,특히 유럽인의 주요 식량 원이었던 감자의 작황에 치명
적인 영향을 줬고 아지 농업이 중심을 이뤘던 산업구조얐단 탓에 흉작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다. 1846년 곡물가가 1844년에 비해 두배로 뛰었다는 저은 흉년의 심각성을 알게 해주는
단적인 사례. 이는 필연적으로 전박적인 소비력을 떨어뜨려 공산품의 수요를 줄였다. 기업은
도산했고 주가는 떨어졌다. 영국의 곡물법이 페지된것은 이를 타파하려는 영 상공업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 불황은 아직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했던 프랑스에게 더 치명적으로 다가 왔다.
아이구 손가락 아퍼....일단 여기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사 -5세기에서 19세기 까지-이재광,김진희 지음 인용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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