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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집결 및 서울출발
09:00 마곡사 아침산책
10:40 석장리 구석기유물
12:00 점심(예가 석갈비 041-854-7900: 공주대 들어가는 초입)
13:00 공산성 산책(시간이 없으면 생략)
14:20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포함)
15:30 국립공주박물관(무녕왕릉 유물 중심)
17:00 윤증고택
18:00 윤증고택 출발
21:00 서울도착 예정
* 공주답사 참가자 명단
1)버스
이종원/은사시나무/with/포비/우드/덜깬주님/늘푸름/비비안리/왕족/왕족옆지기/아낙수나문/장인아/아나키/호찬짱/휘리릭/명수기/그냥 그리움이네/김나영/김소영/풀빵/pony/happ4u/영옥/누아/동행/청한/심승현/똥구랑땡/팔방/소담/낮은나무/프로메테우스/초록빛바다/모카/데이지킴/갈색추억/따님/겨울안개/이화에 월백하고/노란장미/yerim/yerim동행인/궁시렁둘두이/겨울안개남편/뮈토스
2)개별차량
토깡이/레아/청주레아/밀림의왕자/아코/곤피곤피/엿장수아주매/고운/꽃님이/온달이/블루화이트/발바리/달빛사냥/레오/카메노/블루베리외 4명
* 비상연락망
이종원 016-219-6001
똥구랑땡 010-8884-5347
토깡이
마곡사 개요
마곡사(麻谷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있으며, 태화산(泰華山)의 지맥(支脈)에 의해 둘러싸인 명승지에 자리한 이 지역의 대표적 고찰이다.
국사봉(國師峰)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내려온 마곡천(麻谷川)의 상류가 계곡 사이에서 동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바꾸며 돌아가고 있는 우회지역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산수가 겸비된 경승지로 이름 높다.
특히 이 곳의 산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擇里志)]·[정감록(鄭鑑錄)] 등에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빼어난 자연환경 못잖게 마곡사는 오랫동안 이 지역 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온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사찰의 규모뿐만 아니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 등의 여러 측면에서 이 지역 최고의 사세(寺勢)를 갖춘 곳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전국 사찰의 사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곡사는 충청남도 지역을 총 관장하는 사찰로서의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1902년 당시 궁내부(宮內府) 소속으로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서 마련한 <대한사찰령(大韓寺刹令)>에 의해 전국 16개 중법산(中法山) 사찰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당시 충청북도 지역에서는 법주사(法住寺)가 중법산 사찰이 되었으며 충청남도 지역에서는 이곳 마곡사가 유일하다. 이러한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30본말사법에 의한 30본산(뒤에 31본산으로 늘어남)의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도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로서 인근 지역의 상당수 사암을 관장하는 위상을 간직하고 있다. 마곡사는 그 중요한 불교사적 위상에 비해 사찰 역사와 관계된 자료가 너무 소략한 상태다.
마곡사
새봄은 아니지만 그 약속을 지키려고 마곡사로 향한다. '春麻谷 秋甲寺'란 말을 보여주듯 입구부터 노랗게 물든 유채꽃이 상춘객의 마음을 빼앗는다. 여느 사찰과 달리 주차장부터 절집까지는 꽤 멀어 걸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걸 탓하는 사람은 없다.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와 풍성히 내뻗은 나무들 때문인지 오히려 다리품 파는 것에 감사 드린다.
해탈문
가까히 다리를 낼 수 있음에도 태극 문양의 개울 때문인지, 오솔길도 자연에 순응하듯 휘감아 돌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해탈문은 담벼락도 없다. 번뇌와 망상의 그물에서 벗어나는데 무슨 격식이 필요할까? 해탈문엔 큼직한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보살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진흙이 떨어져나가 너덜 너덜거려 안스럽게 보인다. 금강역사의 주먹이 유난히 커서 사악한 마음은 한방에 날릴 태세다. 또 다른 금강역사는 보이지 않고 빈 공간만이 자릴 잡고 있다. 해탈문을 벗어나면 작은 부도밭이 두 개의 문 사이를 지켜보고 있다. 절구처럼 생겨 질박한 모습 그 자체다. 대찰에 비해 너무나도 소박한 부도가 매일 신도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서도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하는 고승의 소망이겠지.
천왕문
천왕문이 나온다. 왜 현판 '天王門'에서 유독 '王'자의 크기가 작을까?
"왕이라는 단어가 위압적으로 느꼈기에 글자라도 자세를 낮춘 것이 아닐까?"
"사천왕은 아무래도 진정한 왕인 부처보다 격이 낮기에 작게 쓴 것 일거야"
함께 한 일행과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 설전을 벌일 때 고목 밑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꾸벅 졸고 있다. " 그래. 쓸데없는 집착은 하지 말자. 그저 천왕문이다."
절묘한 가람배치
극락교가 나타난다. '春麻谷'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 세속의 때를 벗고 해탈에 이르러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야.' 울창한 나무가 개울을 향해 배례를 하고 있으며 큼직한 물고기가 한가하게 노닐고 있다. 이 개울이야말로 남북분단의 원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은 절터를 절묘하게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극락교와 천왕문, 해탈문이다.
해탈문, 천왕문을 개울 남쪽에 세워 남쪽 영역도 북쪽의 품안에 넣은 것이다. 그리하여 홀로 떨어진 영산전, 명부전 그리고 여러 요사채도 자연스레 북쪽 영역에 포함이 된 것이다. 지형의 약점을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선과 악도 두 개가 아닌 하나며, 미혹함과 깨달음도 하나라는 진리를 가람배치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영산전 (보물 제800호)
극락교를 건너기전 영산전을 놓치면 곤란하다.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어서 나이로 따지면 가장 큰 형님이기 때문이다. 배홀림의 주심포 건물로 납작한 맛배지붕을 하고 있다. 현판은 세조가 썼으며, 왼편에 '世祖大王御筆'이란 작은 글씨가 보인다. 막돌을 천연덕스럽게 쌓아놓은 기단석이 의외로 높지만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법당 안에는 영산회상도 밑에 부처가 모셔진 것이 아니라 천불이 모셔져 있다. 서로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천 개의 부처를 살펴보는 맛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 영산전-문화재청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1651)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해탈문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의 글씨라고 하며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건축 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부전
영산전 옆에는 명부전이 자리 잡고 있다. 영산전이 단정스런 느낌이 든 반면 명부전은 추녀가 높아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새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만약 영산전처럼 기단석이 높았다면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김구선생님과 향나무
극락세계로 건너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나보다. 죄가 많아서 그런지 날이 더워서 그런지 땀이 이마에 송글 송글 맺혔다. 가장 반가운 것은 대롱을 따라 살며시 흘러 내려오는 약수다. 한 모금 축이고 극락세계를 구경해본다. 김구가 민비시해후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한 후 마곡사에 은거하여 도를 닦았다. 조국 광복 후 우연히 대웅전 주련에 '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속의 일 같구나"라는 글씨를 보고 김구는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을 것이다. 어찌나 감개무량 했던지 그는 즉시 이곳에 향나무를 심었다. 사미승으로 입산하면서 얼마나 많은 번민을 했을까? 그리고 3년 동안의 마곡사 스님 생활..훗날 민족의 스승이 된 원동력은 자연과 벗 삼으며 심신을 단련했던 것은 아닐까? 김구가 은거한 내용이 적힌 무지막지한 표석이 향나무 앞에 서있다. 소박한 김구선생님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조그맣게 써도 좋으련만.......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799호)과 굴뚝
기존 사찰에서 흔히 보던 탑모양이 아니다. 높은 기단석 위에 날씬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금속으로 된 호리병까지 얹어 있어 더욱 색다른 모습이다. 바로 라마식 탑모양이다. 고려 말기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으로 전 세계 3개밖에 없다는 탑이다. 모방은 했어도 손맛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지붕선의 반전과 새겨진 부처 모습은 영락없이 고려의 것이다. 탑 오른쪽에 요사채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담벼락에 우직한 굴뚝이 세워져 있다. 탑은 날렵하게 하늘로 치솟고 있고, 굴뚝은 질박함을 보여주고 있어 조화를 이룬다.
* 오층석탑-문화재청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심검당
스님의 요사채인 심검당은 아늑하다. 근래의 명필인 해강 김규진의 멋진 초서현판이 걸려있다. 현판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린 것은 당시 청나라의 기풍을 따랐을 것이다. 해강의 이런 풍의 글씨는 강화도 전등사에서도 본 적이 있어 더욱 반갑다. 심검당 앞마당엔 이렇게 예쁜 창고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이 한번 일렁일 때마다 자연에 맛이 살포시 배일 것이다. 주렁주렁 매달린 저 시레기국에 밥 한공기 말아 먹었으면.....
대광보전(보물 802호)
앞 건물이 대광보전이고 뒷 건물이 대웅보전이다. 전자가 수평이라면 후자는 수직의 모습을 취한다. 대광보전은 아주 큼직한 건물이다. 지붕도 아주 넓다. 탑의 뾰족한 상승감 때문에 그걸 보완하듯 옆으로 길게 늘려놓은 것이다. 듬직한 기둥도 민홀림으로 안정감 있게 서있다. 대광보전 현판은 영정조시대의 화가 '표암 강세황'의 글씨란다. 표암의 자화상을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섬세함에 놀랐는데..글씨까지 만나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대광보전에서 다양한 문양의 문살을 보는 맛이 그만이다.
*대광보전-문화재청
이 건물은 뒷편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으로서 경내(境內)의 전체 건물배치상으로는 해탈문(解脫門)·천왕문(天王門)과 일직선상에 놓이어 가장 중심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창건연대(創建年代)는 미상이나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조선시대(朝鮮時代) 말기(末期)인 순조(純祖) 13년(18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單層) 다포식(多包式)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공包)는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이며 쇠서는 끝이 날카롭게 위로 뻗쳐 있고 그 위에 연(蓮)봉이 장식 되었으며, 봉황(鳳凰)머리의 운공(雲工)도 첨가되었다. 전면의 3분합문(三分閤門)에는 꽃모양의 장식이 가미되고 내부도 2단의 우물천장에 연화문(蓮華紋)·운학문(雲鶴紋)이 그려져 있으며, 불상(佛像) 위에는 섬세한 조각의 닫집이 있어 공간구성을 한층 풍성(豊盛)하게 해 준다. 전면 어칸(御間)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은 내부의 화려한 구성과 함께 건물 전체를 풍만한 장식으로 가득 채워 주고 있다. 장식적 특징을 잘 살린 조선(朝鮮) 후기(後期) 건축의 걸작품의 하나이다
마곡사 비로자나불
지난 가을에 이 불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나를 마곡사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비로자나불이 불전 가운데 모셔진 것이 아니라 법당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모셔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영주 부석사 아미타불이 이런 형태를 취했는데...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이런 위치에 앉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무엇보다 마곡사에 다시 찾아온 이유는 부처님의 인간적인 얼굴을 보기 위함이다. 대개가 둥글고 넓적하여 일률적으로 '부처님의 얼굴'이라는 도식이 있게 마련인데, 이 부처는 사람과 무척이나 닮았다. 그것도 이곳 충청도 사람의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어 더욱 인간미가 넘친다.
이것보다 평범한 진리가 어디 있을까? "누구나 기도하면 부처가 된다."
대웅보전 (보물 801호)
다시 계단으로 몇 걸음 올라서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높은 지대에 2층으로 세워 더욱 상승감이 돋보인다. 2층이지만 내부는 통층이다. 화려한 단청에 포작이 무척 화려하다. 이곳에서 바라본 지붕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포근한 산세와 비스듬한 지붕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저 안에서는 끊임없는 수행이 계속될 것이다. 계곡에는 이렇게 맑은 물이 가득하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봄나들이하기에 적합하다. 마곡사 입구엔 상당히 큰 장승공원이 있다. 역대 대통령의 장승까지 보인다.
*대웅보전-문화재청
이 건물은 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640)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마곡사의 한 전각(殿閣)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兵火)로 소실된 것을 조선(朝鮮) 효종(孝宗) 2년(1651)에 각순대사(覺淳大師)와 당시의 공주(公州) 목사(牧使)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전각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집이다. 기단(基壇)은 막돌허튼층 쌓기이며, 이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공包)는 주심(柱心)은 물론 주칸(柱間)의 평방(平枋)위에도 짜올린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 모두 내(內)·외3출목(外三出目)으로 쇠서 끝에 연봉(蓮峰)을 새겨 조선시대(朝鮮時代) 중기이후 말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이 전각에는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은 신라(新羅) 명필(名筆)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전하여 온다.
마침말
이 일대가 조선조 '십승지지'다. 즉 전란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곳이 마곡사다. 임진왜란의 전난을 피했으며, 한국전쟁때도 병화를 입지 않았던 곳이다. 김구선생도 왜경에 발각되지 않고 은거 했을 정도다. 한 마곡사는 오늘날까지 계속 선승을 배출한 참선도량이다. 근대의 선승 만공스님도 마곡사에서 주지를 역임했던 적도 있었다. 찬란한 불교문화 그리고 정신세계가 곁들여진 마곡사가 미래에도 '십승지지'이길 그저 바랄뿐이다.
(참고)십승지지(十勝之地)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안동(安東)의 춘양면(春陽面),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영월(寧越)의 정동상류(正東上流), 무주(茂州)의 무풍동(茂豊洞),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을 가리킨다.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장암리, 금강의 북쪽 강둑에 자리하고 있다. 1964년 5월 14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뗀석기 유물을 찾음으로써 알려지게 된 이 유적은 앞서 1963년에 찾아진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구석기유적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를 처음으로 알려준 중요한 유적이다.
1964년 11월부터 1974년까지 10차에 걸쳐 해마다 발굴을 하였고 1990년 3월에 유적 범위 확인을 위해 11차 발굴을 하였다. 바닥 암반에 이르기까지 자연층위와 문화층의 관계를 뚜렷이 밝힐 수 있게 되었고,1990년 10월 31일 사적 제334호로 지정되었다.
11차에 걸친 그 동안의 발굴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적의 층위는 모두 27∼29층의 자연층위로 나뉘어지는 데, 크게는 3개의 큰 묶음으로 이루어져 아래로 부터, I묶음(깊이 720∼850cm)층은 제3빙하기(12 ∼30만년사이 ) , II묶음 (깊이 450∼720cm)층은 제3간빙기 (7∼ 12만년사이 ), III묶음 (깊이 40∼450cm)층은 제4빙하기 (1∼7만년사이)에 각각 쌓인 것으로 나타났다.
III묶음의 쌓임 층에서는 17,800년, 20,000∼25,000년 쯤에 있던 매우 추운 기후 아래서 생긴 서릿발 갈림 (Ice wedge)이 나타난다.
자연층위의 묶음 지층은 각기 I묶음이 전기구석기, II묶음이 중기구석기, III묶음이 후기구석기 문화에 해당하며, III묶음 위층에서는 좀석기를 주로 하는 중석기 문화층이 드러났다. I묶음층에서는 찍개, 주먹대패, 긁개 등 차돌 석기 들이 나왔다. II묶음층에서는 주먹대패, 긁개, 찍개, 자르개, 주먹도끼, 팔매돌의 석기와 석기 만들던 공방터가 드러났고, 여러 작은 층으로 나뉘어져 석기수법의 발달을 보여준다. III묶음층에서는 한데 집터가 찾아졌고 사람머리털, 새겨진 돌이 나와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살림과 생활모습을 여러가지로 보여주며 석기는 차돌, 반암, 규장암, 수정, 흑요석 등으로 만든 돌날, 돌날 몸돌, 밀개, 새기개, 찌르개 들의 석기가 나와 각 시기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대전에서 공암을 거쳐 공주로 가는 국도변 금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1963년 미국인 알버트 모더씨 부부에 의해 발견된 것인데 1964년부터 1972년 사이에 연세대 박물관에서 연차계획으로 한반도에서 최초로 구석기 유물 포함층을 발굴 조사하였다. 이 구석기 유물 포함층은 하안단구의 점토층과 각력층으로 형성되었는데 3개 지점에서 13차에 걸쳐 매년 발굴이 진행 되었다.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선사시대 전기, 중기, 후기의 다양한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으며 집터, 불 땐자리, 사람의 털과 짐승의 털, 불에 탄 곡식 낟알 등 주거지가 발견되었고 긁개, 찌르개, 자르개, 주먹도끼. 주먹대패 등 타제석기 3,000여점이 발굴 출토되어 선사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석장리 구석기 문화 유적은 한국의 구석기 문화 그리고 공주의 구석기 문화가 전기구석기 중기구석기 내지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가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1)전시관
건축가 이응묵의 작품으로 외부에는 왼쪽은 석기 떼는 구석기인 동상과 석장리 출토 대표석기 5점의 모형, 오른쪽은 사냥하는 구석기인 동상과 반구대 암각화 모형, 그리고 중앙기둥에는 석장리를 상징하는 주먹도끼 모형이 있다. 내부에는 구석기에서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문화를 “자연, 인류, 생활, 문화, 발굴” 이라는 5가지 테마로 전시연출한 상설전시와 일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특별 전시 될 기획전시, 영상실, 기념품을 판매하는 뮤지엄샵, 각종 정보검색과 쉴 수 있는 편의시설인 휴게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선사공원
옥외 전시장으로 한복판에 선사인들의 대표 주거형태인 막집을 중심으로 선사인들의 생활복원상(석기 만드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 등), 선사시대 동물복원상, 그리고 당시 석장리 지역에서 자생했던 식물군 등을 복원하여 선사시대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3)석장리구석기유적지
1964년부터 1992년까지 연세대학교 박물관과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서 12차례 발굴했던 유적지로 1990년 10월 26일자로 사적 3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이해의 편의를 위해 1지구에는 막집 2채를, 2지구에는 1채를 복원했다. 향후 다시 발굴하여 발굴체험장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4)체험공간
요즘 박물관은 전시위주의 보여주는 관람에서 직접 체험하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전방위적인 관람으로 나아감에 따라 석장리박물관에서도 석기체험, 움집체험, 토기체험, 발굴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어린이 박물관학교, 찾아가는 청소년 박물관 교실, 박물관 대학 등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폭넓은 사회교육 활동을 함으로써 앉아서 기다리는 박물관에서 적극적으로 발 벗고 뛰는 박물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百濟)의 웅진성(熊津城)으로 공주를 지키기 위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문주왕(文周王) 원년(471) 한산성(漢山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都邑)을 옮겨 삼근왕(三斤王), 동성왕(東城王), 무령왕(武寧王)을 거쳐 성왕(聖王) 16년(538)에 부여(扶餘)로 옮길 때 까지 5대 64년간 왕도(王都)를 지킨 이 산성은 북으로 금강(錦江)이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包谷形)이며 원래는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朝鮮) 선조(宣祖)인조(仁祖)시대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로 외성(外城)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현재의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0m로 대부분 보수되었고, 성내 유적은 금서루(錦西樓), 진남루(鎭南樓), 공북루(拱北樓), 쌍수정(雙樹亭),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쌍수산성사적비(雙樹山城事蹟碑), 영은사(靈隱寺), 연지(蓮池) 및 만하루(挽河樓), 임류각(臨流閣), 군창지(君倉址), 광복루(光復鏤) 등이 남아있다.
①금서루(錦西樓)
금서루는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유지(遺址)만이 잔존하면서 성내(城內)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1993년도에 복원되었다.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②쌍수정(雙樹亭)
문화재재료 제49호」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李括)의 난(亂)을 피하여 일시 파천(播遷)한 곳이다. 쌍수(雙樹)에 기대어 왕도(王都)를 걱정하던 인조가 평정(平定)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에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영(令)을 내리셨다는 유래가 있다.
③진남루(鎭南樓)
「문화재 자료 제48호」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南門)이며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의 관문(關門)이었다.
④동문루(東門鏤)
동문루는 공산성(公山城)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밑부분 구조를 확인하였다. 문터 옆 양쪽에서 원래의 문을 지탱하는 돌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공산지(公山誌)」에 의하여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동문의 누각을 복원하였다.
⑤광복루(光復鏤)
광복루는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옆에 있던 누각을 현 위치로 옮기고 8.15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 개칭한 것이다.
⑥ 임류각(臨流閣)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東城王) 22년(500년)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고층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980년에 공산성에서 발굴조사된 추정임류각지(推定臨流閣址)의 구조를 근거로 1991~1993까지 새로 복원한 것이다
⑦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도지정유형문화재 제 36호」정유재란(丁酉再亂)때 충주에 주둔하면서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주민을 평안하게 하였던 명나라 장수 이공(李公), 임제(林劑), 남방위(藍芳威)의 사은(思恩)송덕비(頌德碑)이다.
⑧영은사(靈隱寺)
영은사는 세조 4년(1458)에 지은 사찰로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으며, 광해군 8년(1616)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⑨연지(蓮池) 및 만하루(挽河樓)
연지는 공산성 안에 있었던 연못 중 하나며 단(段)을 둔 석축(石築)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서양측에 넓은 통로를 둔 것이 특징이고 깊이는 약 9m다. 연못과 금강사이에 만하루(挽河樓)라는 정자를 세웠다
⑩추정왕궁지(推定王宮地)
⑪공북루(拱北樓)
「도지정유형문화재 제 37호」공북루는 공산성의 북문(北門)으로서 선조 36년(1603) 옛 망북루(望北鏤)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루건축(門樓建築)이 좋은 예(例)이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과 강북을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關門)이었다.
* 웅진성 수문병근부교대식
웅진성 수문병 근무교대식은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국내외에 선양하기 위하여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의해 제작된 의상과 소품을 이용하여 왕성을 호위하던 수문병의 근무를 재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 기 간 : 매년 4월~10월 토, 일요일 14 :00 ~ 19 : 00(7,8월은 혹서기로 휴무)
■ 장 소 : 공산성 서문(금서루)
※왕, 왕비, 장수 등 의상분장을 제공하고 있어 관광객들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문화행사 둘-백제문화제(상설무대)
백제문화제는 전국 3대 문화제의 하나로써 옛 백제의 찬란한 문화와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매년 10월(9~12일)에 공주와 부여에서 번갈아 개최됩니다. 제전 서막식, 민속놀이 문예행사 등 각종 행사가 펼쳐지며, 이곳 공산성에서는 성안마을에 상설무대를 설치하여 다양한 문화예술행사와 체험프로그램을 운영,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에 즐길거리 볼거리를 제공합니다.환상적인 조명으로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고 백제문화제 기간 중에는 공산성 상설무대를 비롯하여 도시 전체가 축제분위기 속에 휩싸입니다.
또 하나의 관광명소-금강교 조명
금강교 전 구간에 9가지 색상으로 조명등을 설치하여 시간별, 요일별, 계절별로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집니다. 특히 색상의 변화를 임의로 연출할 수 있으며 대폭 보강 된 공산성의 야경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오색찬란한 조명아래 공주의 밤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오십시오. 그 환상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무령왕릉
■ 무령왕(武寧王)
백제 개로왕 8년(462)에 태어난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 융, 시호는 무령이라 하였다. 그는 키가 8척(중국 양나라 척관법에 1척이 23.61cm - 25.15cm 사이에 해당하니 8척은 188.8cm에서 201.2cm정도로 추측-이도학의 새로 쓰는 백제사)이나 되는 장신에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인자하기 이를데 없어 나라의 민심이 잘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서기 501년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523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간 백제 25대왕으로 통치하였으며, 재위하는 동안 국내외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안정을 이루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안으로는 고구려의 침입으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김에 따라 경제 기반이었던 농업생산력을 높이고자 금강 주변에 제방을 튼튼히 쌓아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랑민을 귀향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여러 가지 농업진흥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전부터 계속 되어 온 고질적인 귀족세력의 반란을 잠재우고 전국에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22담로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의 잦은 침입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시키고 새로 많은 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국방을 더욱 강화하였다. 또 밖으로는 중국 남조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 가야와도 화친하여 강성한 고구려의 침입에 따른 국난을 외교적으로 극복함과 동시에 국가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많이 받아들여 무령왕릉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은 독창적인 백제문화를 꽃피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무령왕은 나라 안팎으로 여러 가지 선정을 펼쳐 국가 안정을 이루어, 이후 백제가 부여에 도읍을 정했던 사비도읍기, 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송산리 고분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은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9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 13기 이상의 분묘가 분포되어 있다. 해발 높이 130m의 송산(宋山)을 북쪽의 주산으로 한 능선의 중턱 남사면에 분포되어 있으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궁륭상 횡혈식석실분(둥근 천장의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횡혈식의 전축분(굴식 벽돌무덤)이다. 석실분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이며, 전축분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나라로부터 우리 나라에 전해진 무덤양식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송산리고분군이 백제 왕들을 모셨던 왕릉군임이 분명해졌고 공주 일원의 주미리, 교촌리, 금학동, 옥룡동 고분군이 동시기 귀족의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 발굴
1971년 7월 6일 송산리 5호, 6호분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벽돌무덤(전축분) 1기가 발견되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처녀분인 채로 조사되었다. 무덤의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 해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1442년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였던 무령왕과 왕비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어 백제사와 백제고고학 연구의 진일보를 알려주는 순간이었다.
■ 구조
능은 경사면의 풍화암반층을 굴착하고 벽돌로 연도와 묘실,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직경 20m의 원형 봉토를 쌓아 만든 아치형 전축분이다. 묘실은 장방형의 방이 하나 있는 단실분으로 남북 4.2미터, 동서 2.72미터, 높이 3.14미터에 이른다. 묘실의 내부는 남쪽 벽면에서 1.09미터를 제외하고 모두 바닥보다 21cm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시신을 함께 모시는 합장관대로 하였다.네 벽 가운데 남북벽은 아래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올라갔고 동서벽은 벽면의 상부에 이르러 차츰 안으로 기울어져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벽돌을 쌓은 방법은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번갈아 하였는데, 길이모쌓기는 4개의 벽돌을 뉘어 포갰고, 작은모쌓기는 1개의 벽돌을 세워서 배열하였다. 묘실을 구축한 벽돌에는 사격자와 망상문에 6내지 8엽의 연꽃무늬, 그리고 인동무늬가 새겨져 있다. 묘실의 벽면에는 총 5개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북벽에 1, 동서벽에 각 2개의 감을 설치하고 그 안에 백자등잔을 하나씩 올려놓았다. 묘실의 바닥과 관대는 벽돌을 이중으로 깔았는데 밖으로 드러나는 윗면의 벽돌을 삿자리모양으로 배열하고 밑부분의 벽돌은 석회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켰다.
■ 연도(출입로)
연도는 묘실의 남벽 중앙에 설치되었는데 길이 2.9미터 너비 1.04미터, 높이 1.45미터로 묘실과 같은 아치형이며 바닥에는 삿자리 모양으로 벽돌을 깔았는데 묘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와 동일한 면을 이루고 있다. 연도의 입구 좌우에는 벽돌로된 벽을 수직으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3.04미터이다. 연도의 구축방법은 묘실과 같다. 배수구는 묘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으로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8.7미터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연도 입구의 지석에서 보며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든 후 마지막으로 무덤을 밀봉할 때 사용된 폐쇄전 중 "士 壬辰年作"의 글이 세겨진 기와로 보아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 준비가 되어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 벽돌(塼)
왕릉 축조에는 모두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중 주목되는 것으로는 명문 있는 벽돌과 문양 있는 벽돌이다. 명문 있는 벽돌은 '…士壬辰年作(사임진년작)' 명문이 새겨진 벽돌과 '大方(대방)' '中方(중방)' '急使(급사)'명문이 압출된 벽돌이 있다. 문양 있는 벽돌에는 각각 짧은 변과 긴 변에 문양이 있는 것이 있는데 짧은 변에는 연꽃무늬와 인동연꽃무늬로 장식되고 긴 변에는 연화사격자무늬와 사격자무늬로 장식되었다.
■ 유물 출토 상황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무덤의 큰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돌로 만든 이상한 짐승이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묘실의 관을 올려 놓은 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 조각이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하였던 장신구와 몇 점의 부장유물(시신과 함께 묻는 여러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 허리띠, 금동장신발, 금제팔지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대도(용과 봉황이 새겨진 큰 칼)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시신의 머리에 베는 베개)및 족좌(시신의 다리를 올려놓는 발 받침)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은제탁잔 등이 출토 되었다.
■ 무령왕의 유물
○관장식 : 왕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透彫-도려내면서 조각함)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 5mm 정도의 영락을 달았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이다. 중국 구당서에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 ...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왕릉 출토의 관식은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 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생각된다. (국보 154호-높이 30.7cm, 너비:14cm)
○뒤꽂이 : 왕의 머리 부분에 있는 수대경 위에서 출토되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과 유사하다. 새날개와 비슷한 역삼각형의 상단부에는 화문과 인동당초문이 타출되어 있다 하단부에는 세갈래의 꽂이를 만들었다. 이 뒤꽂이는 금판을 꽂이부 쪽에서 상단부 쪽으로 갈수록 얇게 두드려 폈고, 끌을 이용하여 절단하였으며 테두리를 따라가면서 두둘겨 세겨 놓은 가는 선을 돌려 완성하였다.
(국보 159호-길이 18.4cm)
○귀걸이 :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주환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다. 큰 귀걸이의 중간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실과 금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넓은 나뭇잎) 장식이 달려 있다. 끝장식은 큰 심엽형 장식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장식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장식은 금알갱이를 붙여 만든 깍아 만든 둥근 원형 문양 5개를 연결하였고 끝장식은 담록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모를 씌운 것으로, 금모에도 좌우대칭으로 2개의 심엽형장식이 달려 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과 일본 구마모토 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국보 156호 길이 8.3cm)
○목걸이 :왕릉 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목걸이가 출토되었는데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각종의 기법을 구사하여 만들었다. 왕비가 착용하고 있던 9절과 7절의 목걸이처럼 금봉을 깍거나 두드려 만든 것이 있고, 투작구체나 금박 유리옥 및 옥을 엮어 만든 것도 있다. 그리고 탄화목을 장기알처럼 그 테두리에 금판을 감아 장식품을 만들고, 그것을 수십 점씩 이어서 만든 예도 있다.
○허리띠 장식 : 왕의 허리부위에서 2벌의 금속제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한 벌은 띠고리와 띠끝장식, 과판, 드리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한 벌은 띠고리와 과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 드리개를 갖춘 허리띠 -
띠고리는 버섯모양을 띠며 띠연결부에는 7엽장식과 하트형 장식이 투조되어있다. 과판은 표면이 오목하게 패인 타원형 금구로 크기에 따라 대, 소의 두종류가 있는데 교대로 배열하였다. 띠끝장식은 전체 형태가 5각형에 가깝다. 드리개는 금제 오각형판과 금제와 은제 타원형 금구, 금제 사각형판, 은제 장방형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개의 금판에는 도깨비문양, 두꺼비 무늬를 투조하였고 장방형 은판에는 백호, 주작도를 끌로 새겼다. 귀면은 벽사(귀신을 몰아냄)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두꺼비무늬는 달의 상징이며 백호와 주작의 표현은 사신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길이 95.7cm)
○신발 : 왕의 신발은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각판은 다시 안의 은판이 있고 그밖의 금동판을 덧낸 것이다. 신발속에는 3중의 포가 밭어 있고 얇은 나무껍질이 함께 나왔는데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10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추 모양이다. 내측면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북등 무늬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를 장식하였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 무늬가 타출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다. (길이 35cm)
○베개와 발받침 : 왕의 베개와 발받침은 모두 커다란 나무둥치를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그 가운데 부분을 U와 W자 모양으로 파내어 각각 머리와 두 발이 올려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표면에는 검은 칠을 두껍게 한 다음, 6각형의 거북등무늬와 금꽃으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길이 38cm)
○환두대도 : 왕의 좌측에서 발견되었다. 손잡이 끝의 둥근 고리에는 용무늬가, 손잡이의 상하에는 거북등무늬와 봉황무늬, 인동무늬가 베풀어져 있다. 손잡이 중심부는 뱀배무늬가 새겨진 금실과 은실을 교대로 빽빽하게 감아 장식하였다. 칼집은 나무에 칠을해 만들었다.
용과 봉황이 장식된 환두대도는 5세기 후반 이후의 삼국시대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한정적으로 출토되며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무령왕이 패용한 이 대도의 용무늬는 함께 출토된 다리작명 은팔찌의 정교한용문양과 비교할 수 있으며 국내 출토 용봉문대도 중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머리가 둥근 큰칼 - 길이 82cm, 25.5cm)
■ 왕비의 유물
○관장식 : 2점의 관식이 왕비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다. 왕의 관식과는 달리 문양이 좌우대칭이며 영락을 달지 않았다. 중앙에는 7판의 복련(伏蓮-뒤집어진 연꽃)을, 그 위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을 꽂은 화병)을 투조하고 있어 불교적인 요소가 관식의 제작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비의 머리부근에서는 사각형과 오각형 금판장식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판장식의 테두리에는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어 실을 이용, 대륜에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귀걸이 : 모두 4쌍이 출토되었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주환, 중간식, 수하식 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주환과 수하식만 갖춘 것이다.
- 귀걸이 1 : 유환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다. 길이11.8cm로 길쭉한 귀걸이는 영락이 붙은 사슬형 연결금구에 탄환형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장식으로 투작반구체를 덮어씌운 담록색 유리구슬을 사용하였고 사슬형금구로 사익형의 수하식을 연결하였다.
- 귀걸이 2 :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다. 크기는 아주 작다. 주환에 금실을 두 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서 마무리하였다. 수하식은 작은 원형영락이다.
○9절 목걸이 : 모두 아홉 마디로 되어 있는 이 목걸이는 한 마디의 길이가 6cm 정도인데 가운데가 가장 넓으며 6면으로 각져 있고 전체적으로 약간 휘었다. 각 마디의 양끝은 끈처럼 가늘게 늘여서 걸기 위한 고리를 만들고 끝은 다시 몸체에 다섯 바퀴 정도 정교하게 감아서 마무리하였다. 착용고리는 금봉을 말아 만든 세환이며, 여기에 9절 중 양끝 마디의 고리를 걸어 연결하였다.
○다리 작명 은팔찌 : 왕비가 왼쪽 손목에 찼던 이 은팔지의 안쪽에는 그 제작에 얽힌 이야기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즉 왕비가 세상을 따나기 6년 전인 경자년(庚子年, 520) 2월에 다리라는 장인이 대부인, 즉 왕비를 위하여 이 팔찌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의 230주이는 무게단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함께 나온 은꽃잎장식 안에 새겨진 일백주와 통하는 것이다. 팔찌의 바깥면에는 혀를 길게 내밀면서 머리를 뒤쪽으로 돌리고 발이 3개인 두 마리의 용이 막 꿈틀거리듯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었는데, 그 솜씨에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발톱과 비늘이 섬세하게 표현된 한 마리 용의 꼬리가 다른 용의 목 밑으로 들어가 포개어진 채 바깥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신발 :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신발의 형태와 제작기법은 왕신발과 비슷하지만 문양의 구성등에서 차이가 난다. 내외측판은 전면에 거북등무늬를 구획하고 그 안에 봉황무늬, 인동당초무늬를 표현했는데, 모두 문양부분만 남기고 바탕을 투각하였다. 영락은 신발이 맞닿는 부위를 제외하고 전면에 달았다. 바닥판의 문양은 내외측판과 같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9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원형이다. 전면에 영락이 달려 있다.
○베개 : 나무토막을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윗부분은 U자형으로 파낸 다음 전면에 붉은 칠을 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육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 새그림, 어룡, 연꽃, 인동, 네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윗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다. 이 봉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의 금박을 띠처럼 돌렸다. 입안에는 청동막대를 박았으며, 봉황 밑에는 ' 甲·乙'자(字)가 붓글씨로 씌어 있다.
○발받침 : 크기와 바탕색은 베개와 비슷하다. 전면에 붉은 칠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를 돌린 다음 그 안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앞뒷면에 모두 그려져 있는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등이 표현되어 있다. 윗부분의 좌우에는 철막대가 박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철막대에는 금제릉형장식이 붙어 있는데,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장식이 세겨진 칼 : 왕릉 안에서는 모두 4점의 장식도자가 출토되었다. 왕의 허리춤에서 1점, 왕비 쪽에서 3점이 출토 되었다. 목조(木鳥-나무새) 부근의 청동발 안에서 출토된 도자는 은판으로 만들어 졌고 손잡이 끝과 칼끝 장식에 인동당초문을 투각한 점이 특이하다. 손잡이 밑의 측면에는 패용할 수 있도록 작은 고리가 달려 있다. 나머지 3점은 나무칼집에 금과 은장식을 하였다. 금판 장식의 한쪽 측면에는 고리를 달 수 있는 돌기를 만들었고 손잡이와 중간부는 은선을 빽빽하게 돌렸다.
■ 그릇유물
○중국도자 : 무령왕릉에서는 청자육이호 2점과 흑갈유장경사이병 1점 등 3점의 중국도자기가 출토되었다. 가운데 청자육이호 2점은 크기와 세부문양이 약간 다를 뿐 모두 푸른 기를 머금은 유약이 두껍게 발려 있는 청자로, 둥그스름한 어깨에 6개의 고리모양 귀가 달려 있고 몸체는 연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바닥에는 낮은 굽이 부착되어 있는 등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뚜껑이 갖추어진 것도 있는데 뚜껑에도 연꽃잎을 방사상으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두 줄의 음각선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흑갈유장경사이병은 타원형에 가까운 몸체의 어깨에 4개의 고리모양의 귀가 달려 있고 좁고 긴 목에는 두 줄의 돌선이 장식되어 있으며 아가리는 반구형으로 단이 져 있다. 표면에는 흑갈색의 유약이 발라졌으나 많이 산화되어 백색이나 암갈색으로 변해 있는 부분도 있다.
○백자등잔 : 무령왕릉에서는 6개의 백자잔이 나왔다. 그 가운데 5개는 무덤 안을 밝힌 감실 안에 놓았던 등잔으로, 타다 남은 심지가 남아 있다. 백자는 유리질의 흰색 태토에 투명한 유약을 입혀 1,28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자기를 말하는데, 주로 고위층들만이 사용하였던 품격높은 용기였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등잔도 이러한 백자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양이나 태토, 유약 등이 모두 같아서 같은 가마에서 구워낸 것임을 알게 한다. 이 백자잔은 주로 청자를 구워내던 중국 남조의 월주요 계통의 가마에서 태토와 유약만 달리하여 청자와 함께 구워낸 것이라고 할 수 있어 백자 생산의 선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겠다.
■ 유리제품유물
○유리동자상 : 왕비의 허리부근에서 나온 2개의 유리동자상 가운데 하나는 하반신이 파손되어 있다. 담록색이 감도는 두 개의 동자상은 몸체의 형상을 간략하게 새겨서 표현하고 있는데 얼굴표정이 각각 남, 여를 표현하여 동남, 동녀를 형상화 한듯하다. 이 동자상은 왕비가 살아 있을 때 부적과 같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장신구에 매달아 왕비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수호신적인 성격이 짙다.
○유리제연관옥 : 연관옥이란 여러 가지 색깔의 납유리를 나선형 줄무늬로 서로 엇갈리게 꼬아서 만든 구슬을 말하는 것으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미 기원전에 나타난다. 무령왕릉의 연관옥은 짙은 주황색과 황색, 녹색의 3색을 나선형으로 조화시켜 세련된 장식을 가미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구주를 중심으로 6세기 중엽의 무덤에서 종종 출토되고 있다.
○각종구슬 : 왕·왕비의 머리와 가슴 및 허리부분에서 무수히 발견되었다. 색조는 담황색, 감색, 녹색, 황색, 청색 등이며 크기와 모양이 다채롭다. 크기는 대개 직경 2∼3mm 정도이고 모두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옥과 유리로 만들었다.
○금박유리구슬 : 각종 구슬과 함께 왕비의 가슴과 허리부분에서 출토되었다. 금박이 입혀진 유리구슬은 보통 연주상으로 붙어 있으나 분리되어 떨어진 것도 있다. 이러한 금박유리구슬은 백제의 경우 천안의 청당동을 시작으로, 이후 6∼7세기대의 대형묘에서 종종 출토된다.
○모자형장식과 곱은옥 : 백제에서는 금, 은 못지않게 옥을 귀히 여겼다고 한다. 무령왕릉에서는 목걸이 등에 사용한 조그만 유리구슬들 이외에 곱은옥에다 모자 모양의 화려한 금장식을 씌워 한껏 멋을 낸 것들이 여러 점 나왔다. 모자형장식은 모양과 크기에 따라 모자형인 것, 탄환 모양인 것, 관형인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모두 얇게 펴서 만든 금판을 오려 붙여서 이와 같은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에 금알갱이와 가는 선을 누금하여 만든 원 안에는 붉은 주를 감입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탄목제 짐승모양 패식 : 왕비의 머리부분에서 1점, 왕의 허리띠드리개 부근에서 1점이 출토되었다. 사자나 호랑이로 생각되는 동물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편평한 탄화목편에 얼굴과 사지를 선각하고 중앙에 0.5mm정도의 소공을 하나 뚫었다.
○조옥과 관옥 : 조옥은 모두 왕비의 가슴부위에서 나왔는데 탄목으로 만든 것과 호박으로 만든 것이 있다. 상하면은 편평하게 자른 대추모양이며 몸의 중앙이 불룩하다. 관옥은 왕비의 허리 아래에서 나왔다. 유리제와 호박제가 있다. 유리제관옥은 단면이 사각형이며 녹청색을 띤다.
■ 금속유물
○방격규구신수문경 : 무령왕릉에서 나온 3개의 청동거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뒷면의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4각의 구획이 있고 그주위에 신수를 표현한 방격규구신수문경이다. 이 거울에 묘사된 사람은 신선을 표현한 듯,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반나체에 삼각하의만 입은 모습이며 손에는 창을 들고 4마리의 큼직한 짐승들을 사냥하고 있는 중이다. 손잡이 주위에는 4각형의 윤곽을 만들고 작은 돌기들을 배열한 다음 그 사이에 12간지의 글씨를 새겨 놓았다. 이와 같이 거울은 일상용구로서보다 오히려 지배자들의 권위의 상징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의자손수대경 : 이 거울은 거울과 똑같은 문양을 새긴 틀에 동을 녹여 부어서 만든 것으로 가죽끈이 끼워져 있는 거울걸이 아래에 의자손이라는 글씨가 있고 7마리의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하여 의자손수대경이라 하며 테두리에 동물상)의 문양대가 있는 수문연수대경에 포함된다.
○동탁은잔 : 무령왕비의 머리부근에 놓여 있었던 이 탁잔은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미를 지니면서 표면에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치 단아한 산봉우리와 같이 만든 잔 뚜껑에는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에 짐승이 노닐고 있으며, 위로 올라가며 나무가 있고, 연꽃잎이 꼭대기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뚜껑 덮인 잔의 윗부분에는 구름이 물흐르듯 부두러운 무늬가 너울거리고 그 밑으로 3마리의 용이 유유히 날고 있으며, 이 모두를 연꽃과 고사리 같은 꽃들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어 연화화생한 극락정토의 포근함과 정감이 감돈다.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은잔은 다시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진 널직한 잔받침에 올려져 위아래가 안정된 조화를 이룬다.
○동제용기류 : 왕릉 내부에서는 단 한 점의 토기도 출토되지 않은 반면 금속제 생활용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중 동제 발은 같은 시기 대가야연맹권내의 대형묘에서 출토되고 있어, 양 정치집단간의 교류관계를 알려준다.
- 동제 발 : 왕비의 머리 쪽에서 출토되었으며 출토시 장식도자와 동제 숟가락 1점씩을 담고 있었다. 모습은 구형에 가깝고 구연은 수평면을 가지며 안으로 급격히 꺾여 두툼한 사다리꼴을 이룬다. 구연 바로 아래에는 3줄의 가로로 세긴 선이, 다시 동부에는 4줄의 가로선이 돌려져 있다.
- 동제 완 : 모두 3점 출토되었다. 1점(A)은 왕비의 머리 쪽에서, 2점(B, C)은 연도입구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A형 완의 전체형태는 반원상이다. 구연 내면에 턱진 점은 왕비 동제 발과 같다. 구연 바로 아래에 2줄의 가로선을 돌렸다. 굽은 0.9cm정도로 높은 편이다.
B와C형 완은 2점 모두 구연이 외반되었고 구연끝이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다. 동체부에는 1cm가량 돌출된 돌대를 2줄 돌렸다. 굽은 0.6cm내외의 높이로 A에 비하여 낮은 편이다.
- 동제 접시 : 모두 3점이 출토되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깊이가 얕은 원형의 용기이며 내면에 침선이 있어 뚜껑보다는 접시로 사용되었을 것 같다. 구연은 윗면이 둥글며 두툼하고 아랫면이 직선적인데 구연 끝은 뾰족하다.
○동제수저 : 무령왕릉 출토 수저(수저)가운데 숟가락은 몸체가 은행알 모양이고 손잡이가 끝으로 가면서 넓어져서 길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젓가락의 경우는 자름면이 각져 있다. 무령왕릉의 숟가락은 여러 줄의 돋을선과 가는 선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으며 젓가락 가운데에는 손잡이 부분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고려시대)의 젓가락처럼 끈으로 묶는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숟가락과 꼭같은 숟가락이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물교류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동제잔 : 굽이 달린 이 소형잔은 모두 크기와 모양이 같지만 틀에서 뽑아낸 다음 가공하여 세부 모양이 약간씩 다르다. 잔 가운데 하나는 안팎에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몸체 밖에는 연못에 피어오르는 듯한 9송이의 연꽃을 줄기와 함께 묘사하고 안에는 서로 마주보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연꽃과 줄기, 연밥을 치밀하게 그려서 연꽃이 활짝 만개한 연못에서 두 마리의 물고기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장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하여 불교에서의 내세관 내지 극락정토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청동다리미 : 무령왕비가 살아서 사용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이 다리미는 근래에까지 시골에서 숯불을 담아 사용하던 다리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반 모양의 다리미 몸체와 긴 손잡이는 각기 따로 만들어 붙였다. 바닥은 납작하며, 약간 오목하면서 넓은 테두리에는 8줄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자름면이 반원형인 손잡이는 끝으로 갈수록 들려 약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몸체에 모시와 같은 천조각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직물로 감싸서 무덤 안에 넣었던 것 같다.
○철창 :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들 가운데 무기류는 매우 드문데, 그중의 하나인 이 철창은 창 끝에 3갈래의 철판을 씌워서 가운데 부분에 돌기를 만들었고, 나무자루를 끼운 흔적이 있는 자루꽂이 부분은 자름면이 8각형이며 그 끝은 얇은 은판을 감아서 마무리하였다. 이와 같이 자루꽂이 부분에 각이 져 있는 철창은 5, 6세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철창의 커다란 특징이다. 특히 은판을 감아 장식한 철창은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주로 대형무덤에서 격조높은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고 있어 실제 무기로 사용되기보다는 의례용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목관에 쓰인 못>
○목관부속구 : 무령왕과 왕비 목관의 측면에 부착하여 손잡이로 썼던 관고리에는 위아래 2겹으로 크고 작은 여덟 잎의 연꽃 좌금구로 장식하였다.
목관을 짜맞추는 데 쓰인 관목은 못머리가 네모난 추모양과 연꽃모양 그리고 둥근 모양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못머리는 은판을 씌워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 왕릉 입구쪽 유물
○지석 :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장방형 돌판이다. 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의 청회색 석록암에 해서체로 글을 새겼다. 무령왕이 523년에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하여 2년 3개월 간 가매장하였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후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529년에 안치할 때 매지권을 상하로 뒤집어 뒤편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비록 내용은 짧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할 수 있었고 매지권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인들의 사상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 지석 2장이 고분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왕릉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연구 특히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다. 영동대장군이란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 고조에게서 받은 작호이며, 사마왕은 무령왕의 이름인데 「삼국사기」에는 "斯摩(사마)"로, 「일본서기」에는 "斯麻(사마)"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죽음을 붕, 무덤을 대묘로 표현하고 있다. 지석의 사망년월은 「삼국사기」기록과 동일하다.
○2면 -干支圖(간지도)- : 직선을 음각하고 그 선 위에 방향을 가리키는 십간, 십이지를 세 변에 안쪽을 향하여 새기고 서쪽을 가리키는 부분에는 간지(申, 庚, 酉, 戌)를 쓰지 않고 비워두었으며 이 부분은 왕릉의 입구 쪽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이 간지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방위도 혹은 능역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석 제3면 : 세로로 14줄을 그어 13칸을 만들었으나 묘지는 네칸에만 채워져 있다. 왕비의 묘지는 왕비의 시신을 대묘에 모신 성왕7년(529년)경 왕의 매지권 뒷면에 추가하여 새긴 것으로 이해된다. 글씨가 1∼3면보다 작게 쓰였고 가득 채운 줄의 한 줄에 12자 내지 13자가 새겨져 있다(글자크기 1∼1.5cm).
○철제오수전 : 무령왕릉의 지석 위에는 오수라는 글씨가 새겨진 쇠돈 한 꾸러미(90여 개)가 놓여 있었다. 실제 지석의 매지권(땅을 산 증명서)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에게서 무덤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토지신에게 무덤터를 사기 위해 실제 유통되는 돈을 무덤 안에 넣는 것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였던 풍습으로 도교사상이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철제오수전은 양나라 무제 때 만든 것으로 523년 무령왕의 사망에 즈음하여 양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릉의 수호자 돌짐승 : 널길의 입구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석수는 응회암제이며 뭉뚝한 입을 벌렸고 코는 크나 콧구멍은 없다. 높은 콧등날이 등뒤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불룩 튀어나온 긴 무늬가 네 곳에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에는 철제의 나뭇가지모양의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에 날개모양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다리는 짧고 발톱의 표현도 똑똑하지 않다. 출토 당시부터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 이 석수는 중국 한 대 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묘실 앞에 세우는 진묘수의 일종이다.
자료출처 : 국립공주박물관 http://gongju.museum.go.kr/
윤증고택
명제 윤증
본관 파평(坡平). 자 자인(子仁). 호 명재(明齋) ·유봉(酉峯). 시호 문성(文成). 조부는 팔송 황(煌)이고, 우계 성혼(成渾)의 사위였다. 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윤휴(尹) ·이유태(李惟泰)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박세채 ·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 ·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에서 실증되고 있다. 그것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조선의 라이벌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을 지나면 조선은 붕당정치(朋黨政治)에 휩싸인다. 붕당(朋黨)은 조선 중엽에 모습을 드러내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등장한 조선말까지 이어진다. 애초 붕당정치로 정국 주도권을 잡은 건 동인(東人)이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을 거치며 서인(西人)이 득세했다. 서인은 숙종(肅宗-1674. -1720. 6) 초 분열을 일으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며 약 100여 년 가량 각종 현안에 대해 대립과 갈등을 보였다. 노론과 소론, 그 중심엔 송시열과 윤증이 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선조 40∼숙종 15)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은 죽어서도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천하를 휘어잡은 독특한 정치인이다.
선조(宣祖) 40년(1607)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일곱 살 이 되어선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썼다고 한다. 여덟 살 에 송이창(宋 爾 昌 1561∼1627(명종 16∼인조 5)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선조 39∼현종 13) 이조판서)을 만난다. 두 사람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로 지낸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명종 3∼인조 9) 형조참판)과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선조 7∼효종 7)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는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인조 7∼숙종 40)우의정)의 아버지 윤선거(山泉齋 尹宣擧 1610∼1669(광해군 2∼현종 10) 문과 급제 벼슬사양)와 우정을 나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과(1636년) 효종의 북벌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조정과 재야를 넘나들던 중 근 20년 가까이 절친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진다. 발단은 백호 윤휴(白湖 尹鐫 1617∼1680(광해군 9∼숙종 6) 우찬성)의 경전해석 때문인데, 윤휴가〈중용〉에 대해 집주(集註)를 달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예송논쟁(禮訟論爭-1659년)으로 극에 달했고, 윤휴는 숙종 6년 허적(默齋 許積 1610∼1680(광해군 2∼숙종 6) 1671년 영의정 )의 서자 허견(許堅 ?∼1680(?∼숙종 6))의 모반사건에 연루돼 사약을 받았다.
윤선거는 송시열과 달리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샀다. 오직 주자(朱子-중국 남송(南宋))해석만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시각이다. 윤휴와 송시열의 입장 차이는 효종(孝宗) 4년 황산서원에서 벌어진 시회(詩會)토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두 사람의 논쟁은 윤증에게로 이어져 서인을 노론·소론으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됐다.
명재 윤증은 인조(仁祖) 7년(1629)에 태어났기 때문에 송시열보다 22세 아래다.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해 유계(市南 兪啓 1607∼1664(선조 40∼현종 5) 1663년 대사헌·이조참판))와 송준길, 송시열에게 수학했고, 윤휴·윤선도 등 남인계 석학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양명학(陽明學 -명(明)나라 왕수인(王守仁)이 주창한 유학의 한 계통)에도 관심이 컸다. 특히 송시열 문하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았으나 한사코 뿌리쳤다.
소론 영수로 나선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은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로 불린다.
송시열이 대전 시내의 동쪽에 자리한 회덕에 살았고, 윤증이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니성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다.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예송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윤선거 부자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감싸고 돌자 병자호란 당시의 강도(江都)수난과 탈출 사건을 들고 나오면서 시작됐다.
송시열 주장에 따르면,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한 뒤 성을 사수하기로 약속했다. 친구인 권순장(權順長)과 김익겸(金益兼), 등은 성이 청나라 군사에 함락되던 날 약속대로 죽었고, 윤선거의 처도 자결했다.
오직 윤선거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더구나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봉림대군 사신 일행이 성에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로 위장한 뒤 돌아가는 사신 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으로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윤선거·윤증의 주장은 다르다. 윤선거에 따르면, 권순장과 김익겸은 남문을 지키던 정승 김상용(金尙容-우의정)이 분신자살하자 적과 싸우지도 않고 자결했으며, 자신의 처가 죽은 것 역시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낫다고 여긴 탓이다. 미복으로 강도를 탈출한 건 교전은 이미 끝났을 뿐 아니라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급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양쪽 주장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다만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은 사실이다. 때문에 윤선거는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자숙하며 재야에서 지냈다. 죽을 때까지 강화도의 일은 그를 옭아맨 족쇄였다.
어쨌든 송시열은 윤선거와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절교하지 않았다. 윤선거가 현종 10년(1669)에 죽자 제문까지 보냈다. 한데 윤선거 비문 찬술과 윤증의 배사론(背師論)을 둘러싸고 감정이 폭발하며 루비콘강을 건너고 만다.
윤증은 박세채(南溪 朴世采 1631∼1695(인조 9∼숙종 21) 우참찬)가 지은 행장과 자신이 작성한 연보를 송시열에게 주며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윤선거 부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비명을 지어 보냈다. 그의 덕을 기리는 구절에서는 "망연해 할 말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뒤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我述不作)"고 마무리했다.
이에 윤증은 4~5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띄우거나 직접 찾아가 개찬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비문 요지에 전혀 손대지 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줬다. 송시열이 제자 윤증의 마음을 저버린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송시열은 옛정을 생각해 윤선거를 칭송하는 제문을 보냈는데도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윤휴의 제문을 윤증이 거절하지 않고 받은 데서 무척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윤증이 비명을 요청하며 가져간 '기유의서(己酉疑書)'도 화근을 낳았다.
윤선거가 죽기 4년 전에 작성한 기유의서는 설령 윤휴·허목 등이 잘못했을지라도 같은 사림이니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중용하는 게 옳다며 송시열에게 충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증은 윤선거가 생전에 보내지 않았던 서신을 선의로 보여줬지만 이는 송시열의 비위를 더욱 건드린 격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신유의서(辛酉疑書)가 덧붙여지면서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증오가 싹텄다.
신유의서는 숙종 13년(1687) 경신환국이 있었던 다음해 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나 기질이 편벽돼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송시열의 존명벌청(尊明伐淸)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여줬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해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다. 한데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박세채 집에서 의서를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했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다. 그 뒤 둘은 의절했고, 노·소론 분당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회니시비는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시비로 이어졌다. 삼전도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白軒 李景奭 1595∼1671(선조 28∼현종 12) 영의정)이 지었다. 송시열은 숭명(崇明) 의리에 입각해 이경석을 성토하고 나섰다.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어차피 군신이 청에 항복한 이상 누구든지 그 비문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했다.
〈가례원류〉의 간행문제와 찬자 시비에서는 윤증의 배사론이 불거졌다. 〈가례원류〉는 윤증의 스승 유계가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킨 책이다. 집필 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윤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떴다. 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했을 뿐더러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햇빛을 봤다.
송시열의 제자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1641∼1721(인조 19∼경종 1) 숙종으로부터 좌의정. 우의정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는 윤증이 스승의 유언을 저버린 채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였으며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반면에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도모하고 현실에 바탕한 정치를 꿈꿨다. 그 바람에 스승과 제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라섰다.
과연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붕당정치 밑바닥엔 나름대로의 정치철학이 도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후덕한 선비의 집, 윤증 선생 고택- 신영훈선생의 한옥의 향기에서 -
선비의 집이니 조촐할 수밖에 없다. 부자옹(부잣집)이나 벼슬살이한 사람들의 뻑적지근한 저택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예의를 감추고 염치 있게 내외의 살림을 꾸릴 수 있을 정도로만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와 사당을 지었다. 이집의 특성은 매우 안정감이 높다는 데 있다. 부근의 넓은 대지를 연상시키는 평탄함과 후덕스러움이 집안에 가득하다. 종손이 지금도 기거하고 있는 사랑채에 올라가 수인사를 나누었다. 사랑방의 넓고 한적한 멋에 압도당한다.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솟는다. 전생에 웬만한 적덕을 하지 않고서는 금생에 그런 호강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니 체념은 하지만 마음은 몹시 부럽다.
사랑채에는 눈에 띄는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사랑방 아랫목 북쪽 뒷방으로 들어가는 샛장지이다. 만살창으로 만든 네 짝의 미닫이인데 가운데 두 짝을 좌우로 밀어 끝의 짝에 겹치게하고 열면 여닫을 수 있다. 끝의 문짝이 돌쩌귀에 달렸기 때문에 개폐가 가능하다. 이때 문지방의 일부가 문짝과 함께 열린다. 문지방을 잘라 놓은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말라 뒤틀리면 문지방이 이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도편수가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놀랍다. 이런 문은 지금도 현대 주택에서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우리의 집 구경은 이런 흥미있는 생동감 넘치는 자료수집으로 신이 난다.
사랑채는 정면4칸, 측면2칸이다. 8칸인데 그중 방은 2칸뿐이고 나머지는 마루깐 구조인데 사랑방 아랫목 편에서 이어져있는 마루깐 한칸은 다락(내루)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락에서 문을 열고 내려서면 작은 사랑방이다. 큰사랑방 미닫이여닫이를 열고나면 뒷방이 이어져 있다. 작은사랑방의 북쪽 문을 열면 안채의 부엌 옆 골목이 된다. 안채는 대문으로 들어선다. 지금의대문은 꼭 중문같은 맛을 지녔고 그리고 사랑채 보다 깊숙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 옆의 층계로해서 대문으로 접근한다. 문앞에 다시 돌층계가 있다. 대문간은 한칸통이고 다섯칸이다. 문을 들어서면 바로 벽이다. 가로막는 벽을 피해 한 칸 지나야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내외벽의 시설이다. 예의를 중시하던 학자님댁 답게 내외벽을 들였다. 여름에 여인들이 가벼운 차림으로 있다가 갑자기 손님의 방문을 받으면 준비할 시간이 있어야 단정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내외벽을 만들었다. 내외벽은 면벽, 가리개라고 부른다. 문의 안이나 밖에 작은벽을 따로 쌓기도하고 문간의 내벽을 이용하는 구조인데 이댁은 문간 안벽을 활용하였다. 문을 들어서면 방문객이 벽을 향하고 "이리 오너라 부른다" 계집종이 쪼르르 쫓아나와 "누구시냐고 여쭈랍신다" 하며 찾아온 연유와 신분을 묻는다. 벽체를 사이에 두고 안팎에서 주고 받는 대화다. 그 사이에 안에서는 손을 맞을 준비가 끝난다. 신분이 확인되고 들어와도 좋다는 통지를 받아야 벽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올 수 있다.
안마당은 널찍하고 반듯하며 정갈하다. ㄷ자형의 안채가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다. 기둥 사이의 간살이가 넓어 보인다. 편안하게 구조된 것이다. 안채에서의 일품구조는 양명한 햇볕이 가득한 넓은 대청이다. 육간대청이라 하면 썩 넓은 대청을 의미한다. 이집 대청은 8칸이다. 육간보다 2칸이 더 많다. 대청에서 안방으로 가는 내고 앞에 1칸과 대청에서 건넌방으로 가는 서고 앞에 2칸의 마루가 더 있다. 여기 2칸 중 1칸은 건넌방 사이의 골방 같은 위치에 있어서 이를 제외 한다면 8칸의 넓이로 대청이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대지와 같은 평활한 넓이다. 담대하다. 안방에서 내다보면 그 넓은 대청이 차분하고 광활하게 바라다 보인다. 기둥 사이의 간살이가 넓은데 비하여 기둥은 낮은 편이다.그래서 이집은 평활하며 안정적이다. 신곡간의 집들이 간살이보다 기둥이 높아 입체적이며 구축적인 것과 대조되는 구성이다.
간살이가 넓고 기둥이 짧아서 대들보도 낙낙한 높이에서 마루를 건질렀다. 굵고 투실한 목재를 사용하였는데도 대들보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날렵하고 아담스럽게 바라다 보이도록 꾸미는 일은 대목에겐 큰 고심거리다. 여기에서 연등천장이 고안된다. 오량집에서 짧고 긴 서 까래가 걸린다. 그것을 다 들어내 보이도록 하고 서까래 사이의 벽체를 양토하여 싸발라 말끔하게 정리한다. 이것을 연등천장이라 부르는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대들보에 의지하고 우물반자(천장의 한 가지)나 설치하였다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한 공간이 되어 시원한 맛은 싹 가시고 만다.
대청은 마루를 깔았다는 점이 구조상의 특색이다. 마루는 남쪽 지방에서 발달한 구조이다. 북방에서 발전하여 남쪽으로 전파해 온 구들과 마침내 접합한다. 구들과 마루가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것을 한옥의 특색이라 일컫는다. 대청의 마루는 그 점에서 한옥만의 특색을 지닌 것인데 그 마루를 우물로 짜는 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한옥만이 지닌 독보적인 구조다. 현대인들에게는 잊혀져 있다. 대청을 올라서 서쪽을 바라다보면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세짝이 보인다. 맹장지 사분합이라 부른다. 맹장지 중앙 부분에 산대가 드러나 있다. 넉살무늬 구조다. 창호지 한 겹만 발라 빛을 받게 마련한 것이다. 맹장지 부분을 안팎으로 싸발라 햇빛을 차단한 것과는 대조되는 구성이다. 이 창을 불발기창이라 부른다. 불발기창은 집에 따라 그 살대의 꾸밈이 다르다.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서서 동쪽을 바라다보면 대청 끝자리로 띠살무늬에 궁판을 들인 분합문이 보인다. 건넌방의 출입문이다. 띠살무늬는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래위로 긴 살대를 장살이라 하고 가로댄 살대를 동살이라 하는데 동살은 상.중.하의 세 구간으로 구성 되었다. 상구간의 동살대 수는 넷, 중앙의 것은 여섯, 아래쪽 하구간은 다시 넷이다. 또 장살은 여덟이다. 4.6.4와 8의 수인데 4에 2를 더한 6과 6에 2를 더한 8이 채택된 것이다. 8은 4의 곱이고 4는 2의 곱이며 2는 짝수로 1의 홀수를 기다려 3의 기반수(基盤數)를 이룬다. 철학의 수로 표현되는 통례에 따라 이들의 수는 그것의 논리를 표상하고 있다.
대청의 뒤쪽엔 머름대 위에 세운 문얼굴이 있고 바라지창이 달렸다. 이 바라지창을 밀어 좌우로 열어 제치면 바로 뒤뜰, 후원이 바라다 보인다. 대나무숲이 무성한 후원의 시원한 바람이 여름의 더위를 씻어 준다. 트인 앞과 열린 뒷문을 통하여 부는 시원한 바람은 슬슬 부치는 태극선 하나로 시원한 여름을 지낼 수 있다. 대청은 여름에 시원하게 지내는 장소로도 유용하다. 잔치를 하거나, 음식을 장만하거나,여러 사람이 즐기거나,다듬이질하고 다듬질하는 일들이 진행된다. 제사도 여기에서 지내고 방문객과 환담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안방 남쪽의 4칸 넓이가 부엌이다. 이 시기면 반빗간 제도가 가시고 부엌이 본격적으로 경영된다. 대가댁 부엌답게 널찍하게 생겼다. 이 정도 넓이면 현대인들의 생활생활방식에 맞게 꾸밀 수도 있다. 옛집에 오늘을 사는 지혜가 들어서는 일이다. 안채는 어머님의 도량이다. 사랑채가 남자의 기상(氣象)이라고 하면 안채는 우주의 산실(産室)이다. 기(氣)와 정(情)이 어울려 인격을 함양하는 터전이 되면서 집은 이와 같은 형상을 지니게 된다. 안채에서 사랑채로 가려면 낮은 샛담에 설치된 쪽문을 지나야 한다. 사랑채에 손님이 오시면 이 문은 닫힌다. 수발하는 동자나 계집종말고는 출입이 통제 된다. 예의를 지키기 위한 담이고 문이다. 그러면서도 문과 담은 그렇게 딱딱한 구성이 아니다. 오히려 소박하며 느긋한 맛을 풍긴다. 갖추되 지나침이 없다는 옛말을 이런 데서도 맛볼 수 있다. 그런 맛은 대청에서도 즐길 수 있다. 바라지창을 활짝 열면 후원이 다가선다. 대숲의 바람소리가 가슴을 스치는 사이에 소담한 장독대가 눈에 들어온다. 정서와 생활이 공존하고 있는 실존의 세계다. 부엌에서 뒷문을 열고나서면 곳간과 창광이 있고 후원으로 가면 언덕 위에 장독대가 있다. 정결한 장소에 깨끗하게 정돈된 독이 가지런하다.
윤증고택
향리와 주택(중요민속자료190호)
윤증선생 고택은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았다. 선생이 생활하던 원래의 살림집은 인근 병사마을, 유봉이라 불리던 곳에 있었다. 1681년까지도 유봉에 살았다고 하며 윤증선생의 말년인 1709년에 교촌리 현재의 집과 월명동의 종가와 함께 지어졌다.
고택의 서쪽에 인접하여 '노성향교'가 자리잡고 있고, 동쪽 능선을 넘어 공자의 영당인 '노성궐리사'가 자리잡았다. 뒤의 노성산 정상부에는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노성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택 앞 남쪽 작은 언덕이 안산을 이루며, 안산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어, 외부로부터 집 전체가 노출되는 것을 살짝 가려주고 있다. 또한 안산에는 윤증 모친의 정려각(호란 때 윤증일가는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빠져 나오기를 시도했다. 가족 대부분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고, 모친 공주 이씨는 자결하여 정조를 지켰다.)이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서 집안에 우환이 많다고 하여 정려각의 위치를 옮겼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대부 가옥들이 읍내에서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독자적인 근거지를 운영했던 것과는 달리, 윤증고택은 노성읍내와 불과 500m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만큼 향리의 실질적, 상징적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위치뿐 아니라 주택의 구성도 향리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다. 비록 마을의 제일 끝 깊숙한 곳에 위치했지만,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조성했고, 석가산과 우물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일절 담장이나 별도의 경계물을 두지 않았고, 꽃나무들로 아늑한 분위기만 조성했다. 네모난 연못은 향교 앞까지 걸쳐 있어서, 이 집에 소속되었다기 보다는 노성면 전체를 위해 제공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사랑 앞마당은 마을에 개방되어 향교에 오는 참배객들의 공동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담장과 행랑을 둘러 안채만 보호하고 나머지 영역은 과감히 향리에 공개하고 있다. 향리의 지도자로서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구성이다.
윤증고택의 개방성은 세도가의 강요된 위세가 아니라, 윤증이 평소에 주력했던 향촌민의 교화와 보살핌에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카리스마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향촌에 공개해도 부끄럽거나 감출 것이 없다는 철저한 예학자적 자신감의 결과일 것이다.
청빈한 주택의 예학
고택은 앞의 사랑채와 안쪽의 안채, 그 사이의 행랑채로 구성된다. 아울러 사랑채 뒤쪽 동편 높은 곳에 사당채 영역이 별도로 조성되었고, 안채의 서쪽에는 곳간채가 숨어있다. 그것이 전부다. 적어도 열채 이상의 건물들로 이루어지는 경북일대의 사대부가와 비교되고, 같은 지방인 대전의 쌍청당이나 동춘당 들과 비교해 보아도 매우 청빈한(?) 주택 규모다.
윤증이 일생의 신조로 삼았던 '예'란 성리학적 명분만이 아니었다. 그를 비롯한 17세기의 예학자들에게 '예'는 근복적인 철학이요,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훈련 방법이었다. 수양을 통해 도달하려고 했던 이상은 일상적인 풍요가 아니었다. 의식주와 같이 일상적인 삶은 극히 청빈해야 했고, 그 속에서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구가했던 것이다. 윤증이 살던 유봉의 고택은 "겨우 초가삼간이었고 그나마 무너져서 긴나무로 떠받쳐 지탱하였지만, 선생은 그 가운데 거쳐하면서도 책이 선반에 가득차 있었고 제자들이 나열해 모셨다." 한가지 반찬과 보리밥에 나물국만을 고집했으며, 그나마 봄여름 해가 긴 날에도 두 번만 식사했다. 아들들이 고위관직에 나아가 부양할 때도 이 습관을 고집했다. 그의 일상적인 청빈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벼슬을 위해 향리를 떠난 적이 없지만, 정승에 임명될 정도였고, 역대 집안의 재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의 주택은 비교적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안채 대청은 5 X 2칸의 10칸으로 무척 넓다. 넓은 대청으로 인채 마당도 넓어지고, 밝고 시원한 공간을 가지게 된다. 밝음과 평온함이 윤증고택의 대표적인 인상이지만, 이를 위해 대청을 넓힌 것은 아니다. 대청의 넓이는 제사 때 참례하는 인원에 비례한다. 윤증가의 제사 참례인원은 줄잡아 오십여명은 되었을 것이다. 제사 인원에 맞추어 대청의 크기를 정하는 것을 비경제적이라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시 종가집들의 제사는 일년에 십여차례 일어나는 극히 일상적인 행위였고, 주택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계획인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한옥의 구조, 즉 안채와 사랑채의 분리, 가묘(개인집의 사당)의 발달 등은 조선조 중기 성리학적 규범이 지방사회를 지배하면서, 특히 17세기 이후 '가례'와 같은 예학이 강력한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으면서 정착된 것들이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분리하는 주생활 규범은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잘 지켜지지 않아서 강제적으로 시행한 노력 끝에 16~7세기에 와서야 일반화된 내용들이다.
윤증고택을 이루는 두 개의 중심영역은 안채와 사랑채다. 두 건물 사이는 기다란 행랑채와 담장으로 차단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세상에 공개되고 당당한 형태를 갖지만, 안채는 완벽히 폐쇄되고 무표정하다. 사당채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안채와 사랑채의 대조적인 구성이 예학자들이 추구했던 '주택의 예'인 것이다.
[ 사랑채와 행랑채 ]
부유하는 사랑채
윤증고택의 첫인상은 넓은 마당 끝에 우뚝 자리잡은 사랑채의 단정함이다. 뒷면의 긴 행랑을 배경으로 날렵하게 대조를 이루는 사랑채의 정면 양 끝칸은 모두 마루면으로 구성된다. 서쪽은 누마루, 동쪽은 사랑대청이다. 매스의 양 끝을 비움으로써 수직적 분절과 동시에 수평적인 경쾌함을 얻고 있다.
이 지방의 살림집들은 수평적 구성을 주조로 삼는다. 충청 전라지역의 지형이 경상도에 비해 평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증고택의 안채와 행랑채는 물론 수평적이다. 반면 부유함을 갖는 사랑채는 당연히 수직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역적 정서에 맞지 않음은 물론 뒤쪽 안채와도 심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채택된 수법은 사랑채의 기단을 두 단으로 나누는 것이다. 기단을 이중으로 구성함으로써 수평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바닥 높이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사랑채 바닥이 높아져야 하는가? 향촌 중심으로써의 권위를 얻기 위함도 이유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경관이 아닐까? 사랑마당은 넓게 개방되어 있고, 조금 떨어져 커다란 연못이 있다. 연못의 수면을 효과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사랑채에서의 시점이 높아야 하고, 당연히 바닥의 절대높이가 높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사랑채는 오브제로, 행랑채는 그의 스크린으로 역할 한다. 팔작지붕의 사랑채는 완결적이며 풍부한 표정을 갖는다. 반면 스크린으로서의 행랑채는 연속적이며 중성적이다. 두 건물은 형태적으로 완벽히 분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뒷부분의 작은 사랑방은 구조적으로 행랑채에 속하지만 기능적으로 사랑채에 포함된다. 윤증고택의 뛰어남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간단한 구조와 풍부한 형태 그리고 그 이중성 동시에 행랑채는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존재한다.
이 건물은 자체적인 성격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문이라는 중요한 기능이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에 입구성을 보장할 수 있는 수법을 동원해야 했다. 행랑채의 5칸 중 서쪽 두 번째 칸이 대문이다. 대문의 양 옆 칸에 방화벽을 쌓아 대문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대칭은 또다시 중심을 만들고, 그 중심을 통해 출입을 유도하게 된다.
[ 안채와 안마당 ]
대칭을 위한 노력들
ㄷ자 안채는 일견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5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 날개채의 길이가 같고, 날개채 끝에 모두 부엌을 설치했다. 양날개채 전면에는 같은 크기의 툇마루를 두어 완전한 대칭의 입면을 이루고 있다. 세 부분의 지붕 용마루선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서 만나며, 대칭적 구성과 함께 수평적인 평온함을 안마당에 부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대칭인 공간. 그러나 이 대칭성은 지극히 조작된 결과이다. 안채를 이루는 세 날개채의 구조는 모두 다르다. 대청부분은 앞뒤 5칸씩이 나란한 이른바 양통구조이며, 안방이 있는 서쪽 날개는 앞뒤에 퇴간을 둔 전후퇴구조, 동쪽 날개는 앞에만 퇴간이 있는 전퇴구조이다. 구조적으로는 전혀 비대칭적 구성인 것이다. 세 날개채는 서로 다른 건물의 두께를 가지고 있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지붕을 구성한다면 서쪽 날개의 지붕이 동쪽보다 높아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날개채의 대칭은 깨지고 만다. 그래서 동쪽날개의 지붕은 물매를 급하게 하여 서쪽의 완만한 지붕과 높이를 맞추었다.
절제되고 밝은 안마당
안마당의 중심성은 마당의 비례에 의해서도 얻어진다. 거의 정사각형의 비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의 다른 마당들이 길쭉한 직사각형의 비례를 가진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마당의 비례만 독보적인 것이 아니다. 외부공간도를 그려보면 정방형 안마당의 중심적 장소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안채 동쪽의 독립된 마당, 뒤쪽의 긴 길과 같은 공간, 서쪽 곳간채와 이루는 긴 통로, 그리고 행랑채 앞마당 등 안채를 둘러싼 사방의 외부공간들이 모두 긴 직사각형의 비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채 엇물리면서 안채를 에워싸고, 다시 정사각형의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안마당의 중심성은 대칭적 안채로 둘러 쌓였을뿐 아니라, 그 바깥의 직사각형 외부공간들로 다시 한 번 둘러 쌓였다. 안마당은 형태와 비례뿐 아니라 공간적인 위상까지도 완벽한 중심성을 획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