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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동목의 간자인 강근도가 파악해온 것도 곽요연의 정대원이 파
악한 것과 같았다.
곽선연은 그의 처소인 풍봉각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했다.
풍봉각을 벗어나지는 못하되 안에서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조중은 화광(火光)이 충천하자 소리없이 풍봉각으로 잠입했다.
경비상황은 이미 알아 놓은 터였다. 풍봉각 밖에 네 명, 그들
이 전부였다. 당연했다. 풍봉각은 곽가장 심처(深處)에 세워진
관계로 경비가 삼엄하지 않아도 빠져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었
다.
퓨웃! 풋!
유엽도 두자루가 날아가 무인들을 꼬꾸라트렸다. 그와때를 같
이하여 범도와 황백은 각기 무인 한 명씩을 쓰러트렸다. 이제
는 무인지경이었다. 강근도가 알아온 정보는 한치도 틀리지 않
았다.
쉬익!
문을 박차듯이 밀치고 들어선 조중은 고아한 방안에서 낯익은
향기를 맡았다. 아내가 발하는 풋풋한 향기였다.
"상공!"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서는 곽선연, 그녀의 눈가에는 이슬 같
은 눈물이 아롱졌다.
"살아계셨군요."
조중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내에게로. 그리고 힘껏 껴안았
다.
"고마워요. 살아계셔서..."
"고생... 많았지?"
조중은 목이 콱 잠겨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가녀린 여인이 억겁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걸어왔다
니.
"갑시다."
곽선연은 씁쓸한 웃음을 떠올렸다.
"여기는 함정이에요."
"알고 있소."
"뭐하러 오셨어요."
"당신은... 내 생명이니까."
곽선연의 눈에 뜨거운 감동이 스쳐갔다.
"우리 자매는 어렸을 적부터 보약을 먹었어요."
"...?"
"기혈을 강화시켜 주고 운공을 도와준다는 보약이었죠."
"그런 이야기는..."
"마저 들으세요. 그 보약... 비궁(秘宮)을 막아 버리는 약이에
요. 아이가 생기지 않아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알게 됐죠. 우리
자매들은 석녀(石女)예요."
"선연..."
"저는 여기 있을래요. 그래요. 여기서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요. 상공,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사세요."
곽선연은 침상으로 걸어갔다.
"이리 오셔서 여기 좀 밀어 주세요."
"선연!"
"어서요."
조중은 곽선연이 가르킨 침상 모서리를 잡고 한쪽으로 밀쳤다.
그러자, 아! 신계각주의 집무실에 있던 밀실과 비슷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곽가장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예요. 가세요."
"선연."
"보셨잖아요. 제가 이 밀실을 알고 있는데도 안 빠져 나간 이
유가 뭐겠어요?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신다면 아무 말씀마시고
가세요."
조중은 아내의 심정을 잘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하려는 것이다. 곽선연이 살아 있는 한 곽모천은 추
적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리라.
쫓기는 삶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곽선연은 자신에게라도 자유를 주려는 것이리라.
조중은 그러한 마음을 받을 수 없었다. 부부는 일심동체, 불가
불 천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같이 죽음을 맞을 일이다.
"선연, 용서하시오."
쒜에엑!
말을 마침과 동시에 조중의 신형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아들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곽선연은 육장을 마주했다.
타다다닥...!
곽선연의 무공은 조중 못지않았다. 익힌 무공의 차이이기도 했
다.
조중은 봉법을 집중적으로 익혔지만 곽선연은 권각(拳脚)을 수
련했다. 권각을 사용한 싸움이라면 곽선연이 훨씬 유리했다.
쉬익!
황백이 가세했다.
그는 곽선연의 배후에 막강한 일장을 쳐냈다. 정통으로 맞으면
즉사하고도 남을 장력(掌力)이었다.
쉬릭!
곽선연은 빙글 몸을 돌림과 동시에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황백
의 두 눈을 찔러 갔다. 조중에게 사용한 수법과는 위력면에서
천양지차였다. 황백이 가공할 일장을 쳐냈듯이 그녀의 지법에
도 살기가 물씬 묻어 있었다.
"허엇!"
놀람과 다급함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곽선연과 황백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더군다나 황백은 전력
을 다해 일장을 날렸는지라 그의 몸은 아직도 곽선연을 향해
쏘아지는 중이었다.
황백은 다급히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순간,
퍼억!
어느새 날아온 원앙각(鴛鴦脚)이 황백의 가슴을 걷어찼다.
"크윽!"
황백의 몸은 거칠게 날아가 석주(石柱)에 부딪친 다음 나뒹굴
었다. 그의 입에서는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기식(氣息)
이 엄연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태였다.
곽선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뽑아들고
있는 범도의 턱 밑으로 바짝 달려들었다.
"차앗!"
범도는 살공(殺功)을 전개했다.
누가 봐도 살공이었다. 파르륵 떠는 검신(劍身)에서 날카로운
예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곽선연은 그녀답지 않게 얼굴색을 굳히고, 범도의 완맥과 가슴
앞 화합혈을 향해 쌍장을 쳐냈다.
"엇! 저건!"
조중은 이번에도 놀라고 말았다.
황백이 중상을 당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는 일심각 무인, 무
공으로는 각당의 대주와 버금간다는 자가 아닌가. 그런데 곽선
연의 일초지적에 불과하다니.
무공이란 그렇다. 상대가 사용하는 무공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한참을 겨루고 난 후에야 허점을 잡을 수 있다. 무공이 비슷하
다고 가정하는 경우에 한해서. 하지만 장단점을 환히 알고 있
다면 다르다. 무공이 약간의 차이만 있다 해도 단 일초로 허점
을 뚫을 수 있다.
지금 곽선연이 그랬다.
그녀는 황백과 범도의 무공을 손바닥 보듯이 알았고, 살심(殺
心)을 품었다.
퍼억!
범도 역시 곽선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선연..."
조중의 안색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무언의 표정으로 해명을 촉구했다.
"이들은... 아버님의 수하들이에요."
"뭐, 뭐라고?"
"구궁산에서 살아난 일심각 무인 세 사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혈단이 산 전체를 빼곡히 둘러쌌는데. 아버님은 세
명을 죽이지 못한 게 아니라 살려 준 거예요. 목적은 오직 하
나. 혹시 빠져나갈지 모르는 딸들을 죽이기 위해서죠. 이들이
같이 따라다니는 한 곽가장은 모든 행로(行路)를 환히 알게 돼
요."
조중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빛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에서는 그 동안 의심쩍었던 사안 하나가 풀리는 중이었다. 구
궁산에서 탈출해 나올 때, 일행은 무척 조심했다. 하지만 혈단
은 정확히 길을 가로막았다. 만약 반여량이 없었다면 분명 죽
었으리라.
그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밀옥을 빠져 나온 다음 이삼재가 연락할 틈을 주지 않았는데
곽가장은 벌써 알고 무인들을 파견했다.
잊고 있었다. 흑서채에서 빠져 나올 때, 일행 중에 누군가 간
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그런 것을 잊는단
말인가. 그들이 범도와 황백이었다니. 솔직히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모든 것이 초토화(焦土化)다. 대야성에 남아있는
사우맹 가족들은 몰살당했으리라. 그리고... 그리고... 아! 산
귀, 동목, 석수, 곽소연...
조중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선연, 소연이 위험하오. 빨리 갑시다."
"그럴 거예요. 소연이는 참 착하죠. 가셔서 구해 주세요. 부탁
드릴게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진심으로 갈구할게요."
곽선연은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보내는 마지막 예의
였다. 그때,
"가거라."
나지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방문 너머로 무모증에
걸린 것 같은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아!"
곽선연은 놀란 외침을 발하며 황급히 조중의 앞을 가로막아 섰
다. 이하극륜 삼정검사 중 일인이 나타났다면 탈출은 불가능해
진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하극륜에게 륜법이 있는 것은 알
지만 나는 새를 능가할 만큼 빠른 신법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염려하지 말고 가거라. 단 두 가지 약조를 해야 한
다. 무림에서 떠날 것, 그리고 강서성에 영원히 들어서지 말
것."
이하극륜이 손에 든 보자기를 풀자, 여인의 머리 하나가 또그
르르 굴러 떨어졌다.
곽선연의 머리였다.
눈을 감고 있으되 약간 긴 듯한 속눈썹하며 오똑한 코, 붉은
입술... 똑같았다. 완전한 곽선연이었다.
"왜...?"
곽선연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보다 이하극륜이
살려 주고자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가짜 얼굴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곽모천이 점검하러 왔을 때는 장대에 꽂혀 높이 걸려 있을 것
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인한다는 것은 여간
용의주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베었는가? 이하극륜과 혈영일검이 아닌가. 그들이 자신을
속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너는 장주에게 대항하려 했으되... 포기하고 말았다. 수족이
잘리는 것을 보면서도 남편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 목숨을
내건 사랑이지. 허허! 행복한 가정을 일궈 봐라."
이하극륜의 말 속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고, 고마워요. 고마워요."
"빨리 가라. 주일의 질고도 편안치 않을 것이야. 소연이도 살
았으면 좋겠다만 장담하지 못하겠구나."
곽선연과 조중은 이하극륜에게 대례를 올렸다. 그리고 침상 밑
에 있는 암굴로 신형을 날렸다.
이하극륜은 침상을 제자리에 돌려 놓고 긴 한숨을 불어쉬었다.
"휴우! 혼이의 광기(狂氣)를 치료하기 위해서, 혈단을 곽가장
일원으로 양성화하려고 시작된 싸움이었는데. 장주...장주는
삼정검사도 모르는 수를 두고 있었구려."
이하극륜은 답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다.
신무귀부를 제외한 네 사람은 오직 혈단을 강하게 양성하는데
온 일생을 바쳐왔다.
혈함망 혈영일검, 혈류묘 이하극륜, 혈갈류 흑사섬도, 혈곡음
(血哭音) 탈명화검.
강남무림을 일통한다는 원대한 야망이 네 사람을 죽은 듯이 숨
어 살게 했다.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희망과 그들이 이룩하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니까.
탈명화검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였다.
앙산(殃山)에서 혈단 이백 명을 양성하던 탈명화검은 오랜 지
우를 만나고자 구궁산으로 유람왔다. 그리고 우연찮게 혼이와
부딪쳤다.
그것이 발단이었다. 이 싸움은...
이하극륜은 불현듯 의문이 치밀었다.
네 명은 각기 다른 곳에서 서로의 안부를 전서(傳書)로 물어왔
을 뿐 만나고자 하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철저한 비밀을 요했
기에. 그런데 탈명화검은 왜 구궁산으로 움직였을까? 장주...
장주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행동이다.
혼이가 미쳤다는 것을 안 순간, 장주는 탈명화검의 죽음을 계
획했다. 아니 이 싸움 전체를 계획했다. 반여량이 혼이를 죽이
지 않고 치료했다면 보다 완벽한 계획이 되었으리라.
'친자식이 아니라 해도 기른 정이 있는 법인데...'
이하극륜은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이제
저 해를 맞이하면 강서무림은 새로운 질서 속에 움직이게 되리
라.
* * *
가산 중턱에 있는 연공실, 탈명화검의 시신이 누워 있던 곳.
교교가 납치되어 있는 장소였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함정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죽음 자체
였다.
곽모천은 죽음을 만들어 놓고 죽고 싶으면 죽고, 죽고 싶지 않
으면 가라는 투였다.
곽가장 내에서 반여량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장소는 가산에 있
는 연공실과 잠시 머문 적이 있는 자죽헌이었다.
교교를 연공실에 가두어 놓은 이유 묻지 않아도 분명하지 않은
가.
그렇지만 산을 오르는 길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무인들이 발산
하는 예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동기감응을 끊임없이 펼쳤
지만 매복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거야 이상하지 않은가?'
반여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인을 하려고 미끼를 던져 놓고는 아무런 조처가 없다? 조처
는 있을 것이다. 감지할 수 없을 뿐.
곽가장에서 화광이 충천할 무렵, 반여량은 연공실 입구에 다다
랐다.
이상했다.
연공실 입구로 사용되었던 바윗돌이 치워져 있지 않은가. 마치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아무리 곽가장의 중처(重處)라고는 하
지만 이렇듯 경계서는 무인 한 명 없다니.
함정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알고 왔지만 표시되지 않은 죽음의 그림자는 자연 어깨를 움츠
러들게 만들었다.
동굴을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
다. 더군다나 동기감응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전혀 없는 비에
야.
주작등에서는 불이 타올라 동혈 안을 환히 비춰 주었다.
대체적으로 주작등에 부어 넣은 기름은 두 시진 동안 빛을 발
한다. 그런데 지금 활활 불꽃심지가 제법 높다는 것은 반 시진
이나 한 시진 전에 사람이 다녀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반대로
한 시진이나 한 시진 반 정도가 지나면 기름을 보충해 주러 사
람이 나타나야 한다.
"이거 기분이 영 께름칙하군."
학구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있습니다."
인기척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에 한 번 와본 동굴이기 때문에 내부구조를 생생히 기억했
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면 우측으로 꺾어지고, 그곳을 돌면 넓
은 연공실이 나타난다.
전에는 초혼향 냄새와 시신 썩는 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욱신거
렸다.
그곳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 명이군."
학구도 인기척을 들었다.
"그렇습니다. 무인이 아닙니다. 강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거 꼭 도깨비 놀음을 하는 것 같아서..."
차라리 검을 부딪쳐 싸웠다면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으리라. 반
여량이나 학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잠입했다. 이렇게 숨막히는
고요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음...! 교교!"
탈명화검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머리를 산발한 여인 한 명이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
었다.
그녀는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깨를 가늘게 떨더니 고
개를 쳐들었다.
"바, 반여량!"
과연 교교였다. 그러나 과거의 교교는 아니었다. 옷이 군데군
데 찢어져 맨살이 드러났고, 채찍 자국인 듯싶은 상처가 가득
했다. 얼굴도 달랐다. 여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 교
교의 얼굴은 마치 헤어진 헝겊 조각처럼 엉망으로 변해 있었
다. 얇은 면도로 가늘게 저며낸 상처 자국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교교... 고생이 많았구나."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으랴.
평생 언니에 가려 그늘에서만 살아온 불쌍한 여자. 불운한 자
는 불운만 계속되는가. 세상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지간해서는 상소리를 하지 않는 학구가 거친 소리를 내뱉었
다. 사람이 차디차기로 쇄심파 소중분과 버금간다는 학구에게
서 거친 소리가 나올 만큼 교교의 몰골은 눈 뜨고 보기 어려웠
다.
반여량은 치를 떨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씩 떼어 놓았
다.
교교의 향기가 맡아졌다.
'석관 값이 얼마죠?'
'드릴... 돈이 없어요.'
'어려서부터 살던 곳이라 괜찮아요. 어머니도 같이 계시고...
한동안 묘소를 돌보지 못했어요.'
청순하고 맑았는데...
손을 묶은 삭근(索筋)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발을 향해 손을
내리던 반여량은 움찔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잔인할 수가!
일어설 수 없는 몸이었다. 족근(足筋)을 잘라 버린 상처는 아
직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치료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상
처에 농(膿)이 생겨 악취가 물씬 풍겨 나왔다. 발을 절단해야
할 정도로 심한 상처였다.
교교는 부끄러운 듯 발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조
차도 정강이 아래로는 전달되지 않았다.
"교...... 교교."
"흑!"
마침내 교교가 울음을 터뜨렸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새어나왔다.
"모르겠어요. 흑흑! 왜 나를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정말이에요.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
요. 흑흑!"
분통을 참지 못한 학구가 주먹으로 연공실 벽을 내리쳤다. 그
도 교교가 무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아무 잘못이 없다는
사실도 안다. 반여량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도 안다. 그
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애꿎은 처자를 이렇게 만들 필요가 어
디 있단 말인가. 이것이 그 동안 자랑스럽게 몸담아 왔던 곽가
장이란 말인가.
"죽... 인다...!"
반여량이 토한 분노가 이빨 사이로 흘러 나왔다.
"가자. 지금쯤 이공녀가 곽모천 그놈을 치고 있을 터, 죽었다
면 시신에, 죽지 않았다면 심장에 일검을 박아야 직성이 풀리
겠다."
학구가 정이 뚝 떨어지는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교교...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내가...'
교교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닐 아픈 상처였다.
육신의 상처, 마음의 상처, 무엇으로 보상한단 말인가.
반여량은 교교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안아 일으켰
다. 순간, 그의 눈은 의자 바닥에 새겨진 글씨를 읽었고, 경악
으로 일그러졌다
- 재래(在來).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글씨. 다시 오라니. 이게 무슨 뜻
이란 말인가.
'재래, 재래...'
뚜벅! 뚜벅...!
동혈 안을 가득 메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학구가 들끓는 분노를 응축시켜 걸음을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심한 것 같다. 장주의 몸에 일검을 새겨 놓기로.
"가려는가?"
반여량과 학구는 동혈 앞 공터에 서 있는 노인을 보자 증오부
터 피워 올렸다.
"사람의 탈을 쓴 악마..."
학구가 검경(劍莖)을 잡았다.
곽가장주 곽모천, 그는 태연히 뒷짐을 진 채 학구를 쳐다보았
다.
"악마라고 했느냐? 악마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인
게냐?"
"더러운 놈!"
"허허허!"
곽모천은 온갖 모욕에도 너털웃음만 터뜨렸다.
"죽여 버리고 말겠어."
"안되!"
반여량은 급히 학구를 제지했다.
장주는 지금쯤 왕중분과 일전을 겨루고 있어야 한다. 곽가장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천광탄이 하늘을 수놓는 것으로 봐서 곽요
연은 기습을 시도했다.
신계각 책사(策士)들이 다듬고 또 다듬은 기습 계획. 약간의
어긋남은 있을지언정 그에 비슷한 결과라도 있어야 한다.
곽모천의 경우도 그렇다.
한담거사와 곽요연의 판단대로라면 설혹 죽이지는 못했을망정
상처라도 입혔어야 옳았다.
반여량 자신이 동기감응으로 왕중분을 읽은 결과도 좋았다. 장
주의 여서들 중에서는 왕중분이 가장 강한 투혼을 지녔다. 무
공의 높고 낮음은 모른다.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지
닌 기질(氣質)이었다.
소중분은 두어 수 윗길의 고수와도 접전을 벌일 만큼 강한 투
지를 뿜어냈다. 그런데 지금 곽모천은 깨끗하다. 상처를 입은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 반여량을 놀라게 한 것은 장주가 내뿜는 기운이었다.
구궁산에서 읽었던 살기와 비슷한 기운.
생각의 힘, 뇌력이 극도로 높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무공
이전에 평범한 사람이라도 위험하다. 자신이 그렇지 않은가.
상단전과 중단전을 동시에 연결할 수 있기에 남들과 똑같은 무
공을 전개하더라도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
의 투지를 분쇄하기에.
남저명이 말한 삼혼검법의 오의가 옳았다.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통합. 그래서 삼혼검법이라는 소리
가.
'상대가 안 된다. 곽요연과 쇄심파는 죽었다. 장주의 미간(眉
間)에 떠오른 흑기(黑氣)는 방금 전에 살인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피해야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반여량이 힘껏 고함을 지른 이유였다.
그러나 늦었다. 학구는 이미 신형을 허공에 띄워 그가 자랑하
는 능공십자를 펼치는 중이었다.
파르륵...!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나와는 반대다. 장주, 상대의 투지를 분쇄하는 것이 아니라
부추겼다. 같은 주율에 들어갈 수 있다니. 이건 동기감응이야.
삼혼검법은 동기감응으로부터 탄생한 검법이야!'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무공도 모르는 남가일족이 어떻게 검법을 완성했는가.
동굴 속에서 죽은 곽혼은 진실한 삼혼검법을 연성했음이 틀림
없다. 그렇기에 그만한 능력을 발휘했고, 남저명이 인위적으로
발산시킨 악기에도 쉽게 노출되었다. 직감으로 펼치는 검이었
기에.
"허허허!"
장주는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신법은 학구가 펼치는 도기룡이었다. 학구가 전각보에서 터득
해낸 독문신법. 하지만 구궁산에서 혈함망이 사용하는 것을 보
았는데 또다시 자신의 신법이 나타나다니. 더군다나 장주가 펼
치는 도기룡은 학구보다 정교해 보였다.
이것이 동기감응을 터득한 사람의 능력이다.
어떤 무공이든지 보는 것만으로 오의를 터득할 수 있다. 밀집
된 뇌력이 파악하는 것이기에.
수련을 한다면 더욱 발전하게 되어 있다. 반여량이 호소봉왕의
투월채법을 보고 정교하게 다듬었듯이 영혼을 울리는 것처럼
다가오는 환상 속에 진의(眞意)가 떠오른다.
"물러섯!"
반여량은 다시 한 번 외쳤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날
아올랐다. 역시 그의 신법도 도기룡이었다. 수련하지는 않았지
만 학구가 펼치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 버린 것이
다.
"허허허!"
장주는 바짝 따라붙는 학구의 검을 중지로 퉁겨냈다.
안공(眼功)과 지법이 절정에 이르러야 사용할수 있는 수법.
타앙!
검은 마치 쇳조각에 부딪친 듯한 음향을 토해내며 왼쪽으로 밀
려버렸다. 그리고,
퍼억!
옆으로 차올린 붕각(崩脚)이 정확히 학구의 턱에 걸렸다.
비명도 없었다.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뒤로 나가떨어진 학구는
나뒹굴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몇 걸음 허우적거렸다. 이미
그는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촤르륵...!
반여량이 펼친 사검도 빗나가고 말았다.
교교를 한쪽 어깨에 올려 놓고, 한 손으로 장주와 겨룬다는 자
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반여량도 장주를 굳이 벨 생각은 없었다. 학구를 죽음에서 구
하고자 취한 행동이었다.
반여량과 장주는 한 걸음씩 물러섰다.
쿵!
학구는 그제야 쓰러졌다. 두 다리에 힘을 잃어 비틀거렸지만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지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
다. 그러나 결국 육신의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눈동자가 돌아갔다. 흰자위만을 드러내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끄르륵...!"
기어이 그의 혀는 목구멍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단 일격에 죽
은 것이다.
반여량은 어깨 위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교교를 한쪽에 내려
놓았다. 전심전력을 다해도 장주를 이길 공산은 극히 적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가라."
장주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내가 남긴 글을 읽었을 터... 너는 다시 온다. 우리의 겨룸은
그때로 미루자."
"이유가 뭐요? 다시 오라는 뜻이..."
"나는... 인간이 당하는 아픔 가운데 가장 슬픈 아픔을 당했
다. 자식을 앞세운 아픔... 너도 그런 아픔을 당해 봐야겠지.
저 여인은 좋은 본보기다. 아무 죄 없는 여자가 너 때문에 평
생 불구로 살아야 돼. 허허! 무거운 죄업이지. 한동안 괴로울
거야. 네가 죽기까지."
"당신은 정말 악마로군."
"아직은 아니지. 그런 정도의 복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
후후! 소연이와 혼인했다고? 아내를 잃는 아픔은 어느 정도일
까? 허허! 아무리 그래도 자식을 잃은 아픔만은 못하겠지. 너
는 내가 당한 아픔만큼 고통을 겪어야 돼."
"야앗!"
반여량은 더 참을 수 없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은 잘 알지
만 미친 인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지금 이 자리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금빛 사검이 한성(寒星)을 토해 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흐르는 검광(劍光)이 몸서리쳐지도
록 싸늘했다.
"허허허!"
장주는 공격할 줄 알았다는 듯이 여유롭게 물러섰다. 뒤로 물
러서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그것도 꼭 한 뼘 정도만 물러섰다.
도기룡의 묘용을 가장 정확히 시연해 낸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장주는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교교를 보고 의미있는 표정을 지
었다.
"허허허! 임산부 앞에서 피를 너무 많이 보이면 좋지 않을 텐
데."
반여량은 벼락을 맞은 듯이 멍청해졌다.
임산부! 그럼 교교의 정절마저...
"허허! 교교는 복이 많은 여인이야. 남편이 스무 명도 넘으니
까. 허허허!"
"개자식!"
"반여량. 다음에 또 들르게. 그때는 한담이나 나누세. 허허
허!"
장주는 반여량이 재차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고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의 뒤를 막 쫓으려던 반여량은 무엇인가가 머리
뒤꼭지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흠칫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그의 입에서는 짐승 울음 같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교교!"
교교... 그녀는 혀를 깨물고 말았다.
단숨에 달려간 반여량이 쓰러지는 상체를 받쳐들자 교교는 힘
겹게 눈을 떴다.
"나... 는... 죄 없어... 요."
툭!
힘없이 떨구어진 고개.
그녀는 남은 한이 쌓였는지 눈을 감지 못했다.
" 교교! 정신 차렷! 교교!"
동기감응이 이토록 얄미울 수가 없었다. 교교가 죽지 않기를
간절히 갈구했지만 동기감응은 그녀의 운명(運命)을 정확히 알
려 주었다.
"교교... 교교...!"
무척이나 따랐던, 그러면서도 마음 속 말을 꺼내 놓을 수 없었
던 교교. 언니의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받아들였는데. 거지도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 권롱촌으로 가면서도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게 됐다고 엷은 미소를 띠었는데.
반여량은 교교의 시신을 안아들고 일어섰다.
무인들이야, 감여가들이야 객사(客死)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
다. 어떤 때는 까마귀 먹이로, 어떤 때는 들개들에게 또 어떤
때는 물고기들에게 육신을 보시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 죽음을 당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본인 스스로 다짐
했다.
교교는 다르다.
그녀가 원하지 않은 장소였고, 그녀가 원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이었고, 그녀가 원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산에 버려 둘 수 없었다.
명당이라는 곳을 찾아 싸늘해진 육신이나마 편히 쉬게 해주어
야 한다. 편히 쉬게.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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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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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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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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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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