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를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고,
영화관 근처에 가서 가족과 함께 올만에 외식을 좀 하고,
영화를 좀 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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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와이즈의 1951년 작 <지구 최후의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을
리메이크한 영화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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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클라투(키아누 리브스 분)가 지구 멸망을 초래한 인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는 씬이 도입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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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의 투사물인 핵무기, 전쟁, 생태파괴 등등.
자학적이다 못해 파괴적인 인간이 결국은 지구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자 메시지를 들고 지구의 대표자를 만나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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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첫 대면부터 미쳐버린 인간의 광기를 접하면서,
후에 지구에 파견된 정보원의 최종보고를 바탕으로,
지구를 구하기 위해선 인류가 멸종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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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미쳤는가 하면, 아무 것도 모를 어린 아이, 제이콥까지도
외계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으로, 위치를 알려서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을 보면, 이건 구제불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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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살길이고 죽음의 길인지 모르는,
방향감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으로 봅니다.
어린 애가 핵무기를 장난감처럼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고,
신이 없는 인간의 위태로운 모습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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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이 다 오작동인 인간이 정점에 있는 지구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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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분이 좀 매끄럽지 못하죠.
절망 앞에선 인간의 자기희생?
그리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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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학자 헬렌(제니퍼 코넬리분)처럼,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외계인을 지구를 구할 구세주로,
적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이는 영성이 과연 인간에게 있을까 생각해보면,
거의 사기스러운 설정이라는 생각입니다.
낮설은 외계인을 처음부터 도와주고, 도망갈 길을 알려주는 설정은,
인간의 모습은 아니죠.
계시를 받은 세례요한이라면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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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이런 이유가 외계인 클라투의 마음을 바꾸어서
인류라는 종은 살아남는 스토리인데.
결론부분이 좀 안스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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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
뉴에이지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유기적 생태관은 동양종교의 연장선에 있는 뉴에이지 영성의 모습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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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종말이나, 종의 종말이나, 생태계의 종말이나,
또는 전 지구적인 종말 앞에서,
인간이 자기 희생과 사랑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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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사항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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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져놓고,
감성과 이성이 따로 노는 모습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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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을 살짝 베끼기만 했지,
그 사랑에 심층에 들어가지 못하는 뉴에이지 영성의 한계만 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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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역사가 보여준 인간의 뒤틀어진 모습은,
종의 개체수를 줄여서 생존을 모색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슬픈 현실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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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성과 이성은,
사랑이라는 말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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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사멸, 종의 멸종 앞에선
인간의 모습은 대통령의 위임을 받은 국방부장관(케시 베이츠)의 모습이
차라리 더 진솔하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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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시 베이츠가 미저리에서 워낙 강렬한 인상을 주어서 그런지 몰라도
여기서는 별로 활약이 없지만, 그녀의 태도를 보면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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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외계인에 대한 경계심 발동.
외계인 클라투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 심문을 하려는 모습.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서 괴로봇을 파괴하려는 모습.
외계인 클라투를 죽이려는 시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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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연적인 반응이라고 봅니다.
공포와 두려움 앞에선 인간의 감정이 오작동을 일으켜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성이 반응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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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보존이던지, 종족의 보존이던지
감성과 이성은 추후에 이를 대의명분으로 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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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상황에 대한 부적절한 감정적 대응과 이성의 오판이 있었고,
그 이전에 두려움과 공포가 근저에 깔린 것이고,
인류의 보존이라는 대의 명분은 포장지에 불과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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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가장 이성적이라는 판단이 결국은
인류를 살릴 수도 있는 외계인 클라투를 죽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합리적 이성의 비합리적 모습이고,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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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헬렌 박사를 풀어주는 모습에서 한계상황에 처한
이성과 감성이 결국 판단 중지를 내리고,
신의 가호를 바라는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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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죠.
개인의 종말이나, 종의 종말 앞에서
인간이 제니퍼 코넬리처럼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케시 베이츠처럼 행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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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양보를 해서,
뉴에이지 영성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두손 모아서 마음의 평정과 평화를 비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피는 영성으로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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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게 개인의 사멸과 종의 멸종을 바라볼 수는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그렇게 죽는다는,
그 깨달음, 또는 각성만 해도 감지덕지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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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자기 파괴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지구상에서 종의 사멸을 막을 수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아주 희박한 확률일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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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 기차가 멈출까요?
개인의 사멸로 향하는 죽음의 기차 안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죽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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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기차 속에서 벌벌떠는 인간이 애써서
태연한 척, 명상하고 마음을 진정한다고 해서
기차가 멈출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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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보고.
상대방에 비친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보고.
나의 모습에서 상대방을 보는 세계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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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진일보한 세계관임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나와 너, 대상을 유기체로 보는 세계관이니,
인류의 희망이 보이기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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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음의 열차 안에서
시시각각 사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거죠.
뉴에이지 영성의 한계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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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과는 전혀 다르죠.
인간의 감성과 이성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판단 중지를 내리고,
전적으로 자아가 함몰되고 티끌와 재처럼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험하는 자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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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승리하는 것을
지각을 초월에서 꿰뚫어 보는 자들이니,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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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과 생명의 길을 향한 열차를 타고 가는 자들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삶으로 가는 여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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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차 안에 시끌 벅적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생명의 몸부림이 아니라
생명의 활기가 넘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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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오늘이 감사하고, 지금이 즐겁고,
다가오는 삶이 기다려지고, 반가운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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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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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세주께서 오신 날이네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
첫댓글 고민은 이런 귀한 영성을 못 알아보고,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가는 현실. 천주교인들은 불교로 가는 현실. 젊은이들이 뉴에이지에 빠져드는 현실. 이 순서가 가속되고 있는 현실. 결국 껍데기들이 사랑 자체인 예수님을 대신하려는 현실. 뉴에이지가 기독교를 가르치려드는 현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개신교에서 많이 퇴색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통계를 쭉보니 개신교에서 불교나 뉴에이지 또는 종교다원주의로 직접가는 흐름은 거의 없더라고요. 정거장으로 천주교를 거치고 간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할 듯합니다. 천주교의 영성이 불교와 비슷하게 보이는 착시현상이죠.
점 점 그 타락의 수는 늘어만 갈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지각을 사용함으로 선악과의 독은 더욱 더 거세어질 것입니다. 다 똑똑하니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이 인터넷이란 지식의 바다에서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그 열차는 편도운행입니다. 왕복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모르니, 그래서 감정의 바다에서 춤을 추니, 그래? 그럴바에는 좀더 반짝이는 것이 좋아보이죠. 이성의 바다. 그러다 영성의 바다에 풍덩 들어가면, 이젠 참 진리와 유사진리가 구분이 안되거든요.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견인할 힘이 없다는 사실인데. 참 모순이죠. 우리 자체가 너무 오염되서 감성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수준이니.
예리하게 잘 보셨고, 잘 분별하습니다. 영화를 이렇게 잘 분별할 수만 있다면 영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오염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인기있는 영화는 딜런님이 한번씩 분석해주셔야 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