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용이 이어집니다.
우리의 참 마음인 진여, 진짜 우리의 주인인 진여는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나를 끌고 다니느 가짜 주인이다. 그러므로 진여는 죽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가짜가 진여를 죽이려 한다. 진여는 반항하고 저항한다. 여기서 죄업의 힘이 센 자들은 진여를 꼼짝 못하게 가둬둔채로 자신과 함께 잔혹하게 죽여 버린다.
수행을 하게 되면 진여는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본연의 모습은 불생불멸이다. 그러므로 안 따라 죽겠다고 한다. 그러면 내부적 고통이 일어난다. 안 죽겠다는 자는 자기이고 죽겠다는 자는 남이다. 이 둘이 싸우는 세력이 비슷할 때 가장 큰 고통이 야기된다.
죽음의 세력이 강하면 그냥 힘없이 죽는다. 동물들이나 삶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 그들의 죽음은 담담하다. 뭐 아쉬울 것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다. 그냥 죽어버리면 된다. 그래서 수준 낮은 인간들도 다 그렇게 죽으면 된다고 그런 방향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 해야 할 일이 많고 세상에 한이 많은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죽는 것이 어렵게 된다. 미련과 아쉬움이 많아 그냥 인생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런 고통이 처절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가히 단말마적이다.
그 위에 수행자의 죽음이 있다. 수행자들은 생각보다 어렵게 죽는다. 뭐 앉아서 죽는다느니 서서 죽는다느니 하는 것은 그냥 전해져 내려오는 선사들이 이야기일 뿐, 범부는 절대로 그렇게 자유자재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분은 벌써 범부의 지위를 벗어나 있는 현자임에 틀림없다.
수행자의 죽음은 죽지 않아야 되는데도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이기에 대단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부처님 역시 열반하실 때 인연으로 만들어 진 육신의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지 그것을 직접 모든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알고 받는 고통은 모르고 받을 때보다 더 깊고 더 극심하다. 하지만 그 고통이 장차 다가올 평안을 보장한다면 그 고통은 웃음으로 참아 넘길 수 있다. 오래된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커다란 대침을 맞는 환자처럼 죽음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고통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고통 속에서 편안히 열반에 드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마는 범부는 죽음도 고통이고 그 다음 삶도 고통으로 연속되기 때문에 거기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_()_
본래 생사가 없다고 하지만~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