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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흰눈 내리는 겨울 밤에
(一)
팔월 사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남창부 사람들은 곳곳에 붙어
있는 방(榜)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방(榜).
곽모천은 양의 탈을 쓴 늑대다. 그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악마
다. 이에 만인을 기만한 가증스런 자의 죄목을 소상히 밝히고
자 한다.
패륜(悖倫) 일(一).
곽가장의 오늘이 있게 한 옥순산 전투는 곽모천의 날조극(捏造
劇)이다.
패륜아가 익힌 삼혼검법은 남가일족이 창안한 무공이다. 곽모
천은 남가일족에게 편안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조건을
내걸고 삼혼검법을 얻어 냈다. 그러나 자신 외에도 삼혼검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께름칙해지자 드디어 그들을 모
두 죽이기로 작심했다. 동시에 곽가장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
려 놓을 계책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혈단이 그들이다.
곽모천은 문도들 중에서 야망이 큰 인물들을 골라 암암리에 무
공을 전수한 다음 혈단이란 비밀세력을 만들었다.
혈단은 가공인물 혈조수란 이름으로 악행을 자행했고, 곽모천
은 혈조수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남가일족을 몰살시켰다.
곽가장 삼정검사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바로 혈조수 장본인들이
다.
옥순산 전투 후 은거에 들어간 다른 두 명도 혈조수다.
그들은 옥순산 전투가 끝난 다음에도 해체되지 않고 존속한다.
혈갈류 흑사섬도는 구궁산에서, 혈곡음 탈명화검은 앙산에서,
혈류묘 이하극륜은 칠음산(七陰山)에서, 혈함망 혈영일검은 태
모산(太牟山)에서 각기 혈단 무인들을 양성했다.
목적은 강남무림의 일통(一統).
지금도 위에 거론한 네 산에는 혈단 무인들이 죽인 양민의 시
신이 곳곳에 파묻혀 원통한 한을 토해 내고 있다. 폭우라도 쏟
아지면 시신이 드러날 지경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
는가. 그들은 가증스럽게도 양민을 납치하여 살인 수련을 한
것이다.
패륜(悖倫) 이(二).
친자식을 얻은 이상 남의 자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곽모천과
그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오 공녀는 자신의 기
반을 바탕으로 싸움을 벌인다. --- 중략(中略) --- 사우맹과
신창윤가는 희생양에 불과하다. 곽모천은 뻔뻔스럽게도 골육상
쟁(骨肉相爭)마저 이용했다.
패륜(悖倫) 삼(三).
곽모천은 성불구자다.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 그러나 그에게는 다섯 딸과 아들 한
명이있다. 패륜아는 아내에게 다른 사내와 교접(交接)할 것을
강요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이 오 공녀다. 물론 남의봉과 관계
를 맺은 사내들은 세상 모르게 제거되었다.
성을 망실한 곽모천은 색녀 음갈마희 초초를 알게 되고, 그녀
에게서 곽혼을 얻는다. --- 중략(中略) --- 천신만고(千辛萬
苦) 끝에 곽가장을 빠져 나온 호소봉왕 가심과 강서제일염 요
와가 산증인이다. 그들은 생명이 보장된 자리라면 언제 어디서
든지 자신들이 당한 일을 토해 놓을 것이다.
연서(連書: 곽가장(郭家莊) 대공녀(大公女) 곽사연(郭思娟),
원방파총수 산귀, 감여가 반여량.
여러 사람이 공동명의로 써놓은 방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각 구절마다 구체적인 증거를 열거해 놓
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참내... 아, 방을 붙인 사람이 곽사연 대공녀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미쳤다고 하더니만 정말 미친 것 아냐?"
"아냐, 미쳤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치밀해."
"원방 총수 산귀 이름도 있어."
"허허! 그것 참... 그런데 반여량이라는 사람은 누구지?"
"곽모천의 아들인 곽혼을 죽였다는 사람이잖아."
"곽모천이 정말 이런 짓을 했을까?"
"했으면 뭐하고 안했으면 뭐하나? 어디 발벗고 나설 문파가 있
어야 말이지."
"맞아. 이 방문이 사실이라도 곽가장을 어떻게 할 사람이 없
어."
술렁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곽가장 무인들을 바라보는 눈도 곱지 않았다. 방문의 진위여부
(眞僞與否)를 떠나 곽가장의 독단(獨斷)을 염려하기 시작한 것
이다.
방문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곽가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던 군소문파(群小門派).
곽가장이 있는 한 그들은 마음껏 성장할 수 없었다. 재질이 탁
월한 자는 곽가장 분타에 본장을 빼앗겼고, 문파를 확장하려
해도 곽가장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분통 터지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억눌려 살아온 세월들. 그런데 방문이 나붙은 것이다.
이것처럼 좋은 기회가 언제 또 올 것인가.
방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관계 없었다.
군소문파가 연합하여 곽가장주와 동등한 위치에서 해명을 요구
한다는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곽가
장도 태도를 달리 해야 하리라.
그들은 일제히 움직였다.
어쩌다 장문인들끼리 만났을 때 주고받던 연수(聯手)를 본격적
으로 시작한 것이다.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암중으로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서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대문파 무당파(武當派)로
파발마(擺撥馬)도 띄웠다. 각 문파에서 독자적으로.
커다란 바위도 낙숫물에 구멍이 뚫리는 법이다.
일개 문파에서 파발마를 띄웠다면 그것이 공동명의라 해도 무
당파는 무시하고 만다. 그것이 곽가장 같은 대문파가 누리는
이점이었다.
그러나 수십 개 문파에서 일제히 파발마가 쇄도한다면 무당파
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방문에 쓰여진 대로 증거를 수집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구궁산, 앙산, 칠음산, 태모산에 묻혀
있다는 시신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네 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군소문파는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곽
가장 분타가 산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진입을 통제한 까닭이다.
곽가장 분타와 맞설 문파는 아무도 없었다. 설혹 악행이 밝혀
진다 할지라도 강서성 전역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군소문
파들로서는 곽가장의 밀집된 힘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산을 점령한 곽가장 무인들이 시신을 캐내고 있다는 소문이 날
개를 달고 천 리를 날아갔다. 방문이 사실이란 것을 확인시켜
준 셈이다. 동시에 무당파 도인들이 장강(長江)을 넘었다는 소
문도 들불 번지듯 번져 갔다. 누가 발설했는지는 모르지만 강
서성 인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싸움이 언제 시작될까?"
"곧 시작되겠지 뭐. 곽가장이 어떤 곳인데 손놓고 당하겠어?"
"무당파 도인들이 그렇게 강한가?"
"중원 무림 양대산맥 아닌가."
"음...!"
"곽가장이 강하다 해도 무당파 도인들을 상대로 싸우기는 벅찰
걸?"
"난 곽가장이 더 강할 것 같은데."
사람이 둘 이상 모인 곳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였다.
* * *
"언니가 왜 상공과 산귀 어른 이름까지 썼을까요?"
곽소연이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인고의 나날이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은 소리를 들었지만 곽가장 무인들이 검
을 겨누고 달려드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자 곽가장에 대한 믿
음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천지유불이 남겨 놓고 간 무인 다섯 명.
그들은 혈단 무인들을 막아 주고 산화(散花)했다. 그들이 아니
었다면 산귀와 동목, 석수 그리고 곽소연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리라.
조중과 곽선연이 오면서는 전세가 역전되었다.
주일의 질고를 습격했던 혈단무인 열네 명은 속절없이 죽었다.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버릴 만했다. 반여량이 교교를 안고 왔을
때의 충격은 정녕 감당할 수 없었다. 정말 아버지 곽모천이 이
처럼 모진 행동을 했단 말인가. 여인에게... 무공도 모르는 여
인에게...
아무 잘못도 없는 여인을 단지 반여량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
나만으로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 다음 말은 충격도 아니었다.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말, 교
교를 처참한 죽음으로 몰고간 아버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일행은 새벽 찬이슬을 맞으며 남창부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오지산(悟遲山) 한 자락에 교교를 묻어 주었다. 반여량은 누구
의 손길도 거부했다. 손수 관을 짜고, 염을 하고, 땅을 파고,
묻어 주었다.
그 후부터 반여량은 달라졌다.
길을 가는 도중에도 오직 무공과 동기감응만을 생각했다.
왜 그런지는 너무 확연하지 않은가. 말릴 수도 없지만 권할 수
도 없는 사로(死路). 몇 명 안 되는 사람이 곽가장을 상대한다
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허허! 내 이름이야 그만한 가치가 있지. 원방파 총수가 밀옥
에 갇힌 일하며, 골육상쟁의 모든 것을 보았다면 곽모천 손을
들어 주려던 사람들이 많이 돌아서겠지. 허허! 아직도 내 이름
자가 쓸모 있는줄은 몰랐군그래."
산귀 역시 허탈한 심정으로 말했다.
곽사연은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 그녀가 붙인 대자보 자체는
별것이 아닐지 몰라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파장(波長)은 거세
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산귀는 왠지 거역할 수 없는 힘
에 이끌려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추풍을 거론한 것은 대공녀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반증이죠.
추풍은 무명인(無名人)입니다. 아는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
죠. 그런 이름을 쟁쟁한 이름과 어울려 써 놓는다면 읽는 사람
들은 순수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명분은 있습니다. 혼이를 죽
였다고 써 놓았으니까. 대자보에 대한 신뢰가 한층 높아지죠."
일행은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었다.
곽가장 눈을 피해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았지만 한 곳에 정착한
다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길을 가는 도중 곳곳에서 대자보를 읽었다.
남창부에 붙인 대자보는 곽사연이 썼겠지만 다른 도읍에 붙어
있는 대자보는 그녀가 쓴 것이 아니었다. 곽가장을 겨냥한 군
소문파들의 솜씨이리라.
곽가장 분타 무인들은 대자보를 보는 즉시 찢어 버렸다. 그러
나 다음 날 새벽이면 대자보는 어김없이 나붙었다.
"어디로 갈 텐가?"
조중이 물었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반여량이었다. 그는 동기감응을 펼쳐 기
운이 왕성한 곳을 찾고자 했다. 그런 길이기에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왼쪽."
오직 한마디였다.
반여량은 무엇을 하는지 늘 눈을 감고 지냈다.
간혹 가다 신음을 토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손으로 조그만 동
작을 시연(試演)하기도 했다. 손동작으로 봐서는 무공을 참오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무공인지... 곽가장주의
무공은 고사하고 이하극륜이나 혈영일검의 무공도 절정이지 않
은가.
반여량이 흑사섬도를 죽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진육이 준 배류
시 덕이었다. 지금 그들과 만난다면 상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
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담거사나 곽요연이 쇄심파에게 희망을
걸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다.
"왼쪽? 이 길은 서산(西山)으로 가는 길인데? 그럼 서산?"
반여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기분이 상쾌해지는군요."
곽선연이 기분 좋은 듯 방긋 웃었다.
모두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서산의 맑
은 공기를 들이키자 기분이 상쾌해지며 우울했던 지난 날을 잠
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땅이 그릇 밑바닥처럼 움푹 패여 물이 모여들고 좌청룡, 우백
호가 감싸고 있으니 장풍취수(藏風聚水)라. 지룡(地龍) 모이는
산이야. 그렇군. 융취명당(融聚明堂)이로군."
산귀가 감탄을 터뜨렸다.
서산은 남창부에서 백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산이었다. 그러나
일만여 명을 헤아리는 원방 감여가들은 서산에 융취명당이 있
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곳을 지나쳤으리라. 멀리 찾을 것도 없이 산귀 자
신도 서산을 몇 번인가 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
이 서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이곳만, 이 조그만 소로로만
걸어갔다면 또 한곳의 명당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눈에 보이는 혈처(穴處)는 어느 권문세가의 무덤이 들어섰으리
라.
"이곳이에요?"
곽소연이 묻자, 반여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할 거야. 곽모천을 죽일 수 있는 무공."
* * *
곽모천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깊은 고민을 계속했다. 그 앞
에는 이하극륜과 혈영일검이 앉아 역시 생각에 몰두했다. 그렇
게 얼마나 지났을까.
"당주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우렁찬 음성이 문 밖에서 들려왔다.
"들어와라."
세 사람은 비로소 생각에서 벗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문을 밀치고 들어선 사람은 비목당주 춘풍명검 무문생과 비금
당주 촌철살검(寸鐵殺劍) 고장탁(高奬卓), 그리고 제조각주 만
수일귀 첨필선이었다.
"부르셨는지요?"
당주들도 남창부에 방이 걸린 사건을 아는지 안색이 침통했다.
"앉아."
장주는 당주들이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본 후 다시 입을 열
었다.
"곽가장 구조를 개편해야겠어. 없어진 비수당, 비화당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 일심각, 신계각도 필요 없고... 본장은
이당 일각 체제로 가는 거야. 이하극륜, 내총관(內總官)을 맡
아주시게."
이하극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파에서 고수를 파견했다는 정보는 이미 접한 다음이었다.
녹(綠)자 항렬의 장로 두 명과 무(無)자 항렬의 관주(觀主) 열
명, 엽(葉)자 항렬의 고수 백 명으로 구성된 조사단(調査團)이
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엽자 항렬 밑에도 우(羽), 진(塵) 두 항렬이 더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백 명에 불과한 도인이지만 가히 곽가장과 상대할 수
있는 저력이었다.
더욱 상황이 힘든 것은 그들과 싸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
뒤에는 무당파가 도사리고 있고, 또 그 뒤에는 천하무림이 숨
쉬었다.
"음.. 그리고... 사십칠 개 분타를 하나로 모으면 큰 힘이 되
지. 혈영일검이 외총관(外總官)을 맡아 줬으면 하는데..."
"장주, 일전을 나눌 생각입니까?"
혈영일검이 물었다.
"할 수 없지 않은가? 무당파... 혈단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
어. 자네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느낄 수 있지. 점점 숨통을 조
여 온다는 것을. 그래서 혈단을 죽인 게야. 그러니 이제 와서
어쩌겠나?"
곽모천도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모두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다. 무당파가 혈단을 알고 있
고, 방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해명할 변명거리가 없는 셈이다.
무당파도 마찬가지였다. 장으로 두어 명만 보내 이야기를 들으
면 될 것을 무공이 고강한 무인을 백여 명이나 보냈다는 것은
곽가장과의 일전을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의향을 묻기 위해서지. 곽가장과 생사
(生死)를 나눠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네. 허허허! 이십여
년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옥순산 전투 때였지?"
그랬다. 옥순산 전투를 벌이기 전에 장주는 참여할 것인지 참
여하지 않을 것인지 자유의사에 맡겼다. 그러나 그 이면에 깔
린 이야기는 이십여 년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어렴풋이 윤곽
을 드러냈다.
단독 싸움을 반대하여 참가하지 않은 자들은 사전에 장주로부
터 밀명을 받은 자들이었다. 나머지 무인들은 투혼(鬪魂)을 발
휘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순수한 마음으로.
밀명을 받지 않은 자 중에 남은 사람은 동종관뿐이었다. 공격
에 참가한 자 중에 밀명을 받은 사람은 오정검사였다. 그들은
싸움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담하지 않
은 것이다.
곽가장에 남아 있으라는 밀명을 받은 사람들은 오늘날 뼈대가
되었다. 장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
중간에 제거당한 사람은 오직 한 명, 삼화일지 최신의 아버지
인 최명뿐이었다. 그는 비목당주직을 맡고 있었지만 옥순산 전
투에 의문을 품는 우(禹)를 저지르고 말았다.
화림사효를 제거하고 돌아서는 최명에게 살검을 날린 사람은
춘풍명검 무문생이었다.
"무당파와 싸우겠습니다."
무문생이 얌전하게 말했다.
"후훗! 살검이 피를 흠뻑 마시겠군요."
촌철살검 고장탁이 짙은 살기를 드러냈다.
"..."
만수일귀 첨필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약
간 수그려 보임으로써 마지막을 같이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
다.
"허허허! 이제야 곽가장이 하나가 되었구먼. 싸움을 앞두고 좋
은 징조야. 그럼 먼저 피맛에 익숙해져야겠지? 비목당이나 비
금당이나 너무 피맛을 못 봤어."
"장주 비목당이나 비금당은..."
이하극륜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중도에서 잘리
고 말았다.
"허허허! 이제 그만하세. 어차피 정도의 탈을 쓰기는 늦었지
않나? 모두가 죽는 마당에 피맛이나 흠뻑 보세나. 자네들도 그
래. 혈조수가 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 허허허! 이제
와서 양가죽을 덮어쓴다고 양이 된다던가?"
"..."
장주의 신랄한 말에 이하극륜과 혈영일검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정도인으로 이름을 남기지 못할 바에야 철저한 악인이 되는
거야. 이도저도 아니면 그야말로 개죽음이지. 무당파가 남창부
에 들어서기 전, 모두 죽이는 거야. 모두..."
곽모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살인 명령을 내렸다.
"비목당은 원방파를 쳐라. 가능한 병아리 한 마리 남기지 말고
씨를 말려. 놈들은 추풍의 뒤를 쫓으라는 명을 거역했어. 또
놈들은 곽가장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지."
"존명!"
무문생이 깊게 읍(揖)했다.
"비금당은... 손화장을 쳐. 비금당도 마찬가지로 마음껏 피맛
을 음미하도록. 그러나 계집 한 명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라. 한한이라는 계집. 후후! 내 아들놈을 죽인 놈의 옛애인이
라지? 보겠어. 반여량이란 놈... 계집을 구하러 오는지 오지
않는지. 허허허허허...!"
"존... 명!"
촌철살검 고장탁은 너무 짙은 살기에 대답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철저한 악인이 된다더니 장주는 정말 그런 명령을 내
렸지 않은가. 원방파는 감여가들의 집단. 손화장은 남창 제일
거부다. 둘 다 무림과는 상관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을 뒤집는 것보다 쉬우나 천하의 반목을 사게 될 것은 분명했
다.
장주는 정말 죽기로 작정한 것이다. 악인으로서.
"아아악...!"
"크억!"
원방파는 느닷없는 공격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솔개에게
쫓기는 병아리떼처럼 살 구멍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개미 한 마리 남기지 마라!"
쩌렁 울리는 일갈을 터뜨리며 앞장서서 살검을 휘두르는 사람
은 이하극륜이었다. 그가 비목당을 이끌고 원방파를 치는 총책
임자였다.
원방파와 지척지간인 손화장도 피보라가 휘날렸다.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장원 내에는 값나가는 금은보화가 꽤
많았다. 당연히 손화장에서는 호장무인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검깨나 쓴다는 그들도 곽가장 무인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
다. 아니, 제 목숨조차 보존하기에 급급했다.
"모조리 죽여라! 계집은 마음대로 취해도 좋다. 그러나 취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죽여라. 살아 있는 생명이 하나라도 발견
될 시에는 네 놈들이 죽을 줄 알아라."
혈영일검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검을 날리며 내당(內堂)을 걸
어 들어갔다. 그가 손화장 공격을 책임졌다. 공식적인 직책은
외총관이지만 곽가장과 손화장은 지척에 있는 관계로 그가 나
선 것이다.
장주의 명령은 절대였다. 한한... 그 계집을 놓친다면 장주의
심원(心願)은 풀리지 않으리라.
시녀 두 명이 뛰어오다 혈영일검을 발견하고는 되돌아 도망갔
다.
'쯧쯧! 조금이라도 편히 죽으려면 내 검이 나을걸... 하기는
조금이라도 오래 살려면 도주하는 편이 낫겠지.'
한한의 미모는 익히 들어서 안다.
바람둥이 좌계창이 치마폭에 휘감겨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사실
도.
그녀가 있는 곳은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정원석(庭園石)부터가 사치로 물들어 있는 곳. 그러나 난간이
며 문틀이며 금빛을 칠해 놓아 고아한 풍취는 없었다. 아니,
돈은 많지만 근본은 천한 느낌이 단번에 와닿았다.
벌컥!
문을 발로 박차고 들어서자 한 구석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남녀 한 쌍이 보였다.
"음...! 천하의 우물(尤物)이군."
진정으로 감탄했다.
한한과 같은 미모는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아름다움이었
다.
"어, 어르신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하겠으니 제발 목숨만..."
좌계창은 안면이 있었다.
"하하하! 바람둥이를 살려 둬서 어디다 쓰겠다고. 네 아내를
죽인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이, 이년 말입니까? 주, 죽이겠습니다. 죽이고 말고요."
"이 새끼가.... 커억!"
좌계창은 한한의 목줄을 움켜쥐고 힘껏 눌렀다. 정말 죽일 작
정으로. 순간,
쉬익!
"아아악...!"
날카로운 칼바람이 실내를 휩쓸었다 싶었는데 좌계창의 목이
멀찍이 떨어져 뒹굴었다.
"아! 너는 장주의 명을 듣지 못했지? 한한의 털끝 하나 건드리
지 말라는 소리를. 쯧쯧!"
혈영일검의 음성은 낮고 고즈넉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 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