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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통일 신라 복음전파설
- 소제목; 절을 짓고 목탁 두드리는 기독교가 가능한가?
1.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이 통일 신라 때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1000년 전에 기독교가 전래된 셈이다. 그러나 다만 이 때 복음전파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는 개신교나 가톨릭이 아니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는 경교(景敎; Luminous Religion; 밝은 종교, 빛의 종교라는 뜻)로 알려져 있는데 아직도 기독교 일각에는 경교가 교회사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 경교의 통일신라 복음전파설 자체도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는 AD 431년 에베소에 모인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이 신학이 기독론에서 신성(神性)을 부인하고 인성(人性)만 주장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 예수의 어머니라고 바른 주장을 했다. 그는 당시의 신조와 같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면 이것이 곧 아리우스주의에 빠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반대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아리우스주의자라는 비판과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결국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로마제국에서 추방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고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의 말라바르, 아라비아, 중앙아시아, 중국, 몽골까지 퍼져나가 전도를 했다. 경교는 신앙고백과 특색을 살펴볼 때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는 것을 거부한다. 십자가의 표시를 사용한다. 죽은 사람의 사후속죄론을 부인한다. 성찬에 있어서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지 않는다. 금식을 권장한다. 육식을 금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을 볼 때는 오히려 가톨릭보다 개신교에 가깝다고 하겠다.
중국에서는 경교비가 발견되었다. 경교비는 경교가 당나라에서 크게 부흥될 때(781년, 덕종 建中 2년) 장안(長安) 서남쪽 주칠현 오군성(五郡城)에 소재하는 대진사(大秦寺) 경내에 검은 대리석으로 세워진 비석이다. 1625년에 발견된 비석 머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에 총 1,870자의 한자와 40자의 시리아문자로 네스토리우스 선교사가 어떻게 중국에 와서 선교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비에 의하면 알로펜(Alopen, 아브라함의 중국명)을 단장으로 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AD 635년이었다. 이때가 당나라 태종 9년이었다.
이 내용에는 ① 경교의 교리와 교회 의식에 대해 기록하기를 1) 여호와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일 2) 사탄의 유혹으로 인간이 타락하여 방황하는 일 3)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셔서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 4) 27권의 성경을 세계교화의 경전으로 삼는다는 일 ② 세례와 성령의 힘이 죄를 씻을 수 있음을 설명하고 구원얻을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중생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 ③ 신도들은 아침 7시에 예배하고 성경을 읽어야 하며 영생을 기원하고 재물을 흩어 봉사해야 하고, 노비를 축적하지 않는다. ④ 당나라에서의 경교 전파의 흥망성쇠를 기술하였다. ⑤ 경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또 경교는 영관(靈關; 성찬), 욕수(浴水; 세례)의 예전을 거행하며 죄를 씻어 깨끗케 하며, 십자가의 인(印)을 가지고 사방에 비추어 만민을 융화케 한다. 목종(木鐘)을 쳐서 인혜(仁惠)의 음을 떨치게 한다. 동방에 예(禮)함으로써 생영(生榮)의 길을 지향케 한다. 수염을 기르는 것은 외행(外行)의 위품(威品)을 말하는 것이다. 이마를 미는 것은 속마음에 정결을 표백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물질을 쌓아두지 않고 만민을 고루 잘 살게 하는 것이다. 재화를 모으기를 힘쓰지 않고 몸을 청빈한데 두도록 노력한다. 매일 일곱 번 예배를 드린다. 7일에 한번씩 마음을 깨끗케 하여 정결한 신앙을 가지도록 한다.
(이 경교비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인도 방갈로르에서 사역 중인 이용범 선교사는 경교비를 직접 살펴본 결과 위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비문이 당나라때 새긴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짜 비석을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알로펜 일행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당태종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태종은 알로펜의 설교를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선교를 허락해 주었다. AD 638년에는 토지도 하사하고 국비로 파사사(波斯寺)도 건립하게 했고, 경전을 번역하게 함으로써 중국 선교의 길을 크게 열어놓았다.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 ‘대진(大秦)을 넣어 대진교(大秦敎)라 불렀다. 대진승(大秦僧)은 네스토리우스 신도를 의미하고, 대진사(大秦寺)는 그 사원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광명정대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 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대진경교‘(大秦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알로펜은 641년 이전에 <서청미소소경(예수메시아경)>, <일신론>, <일천론>, <세존포세론> 등 경전을 번역해 냈다. 경교는 결국 불교의 한 종파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복음을 전했고, 예배당을 불교의 사원처럼 지었다. 불교 신자와 같았다.
김성일 장로는 당태종이 경교를 믿었고, 세계선교의 비전을 김유신 장군과 나누었다고 하는데 상상력이 지나친 것 같다. 김유신도 100일 기도후 성령을 받아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졌다고 했는데 여전히 근거가 없다. 태종이 경교를 믿었다는 증거도 없고 다만 경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다고 보면 된다. 태종에 이어 고종도 경교를 보호했다. 고종은 경교를 진종(鎭宗)이라 했고, 전국에 경사(景寺)를 건립했고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란 칭호를 붙여줄 정도로 후대했다. 그래서 수도인 장안이외에도 낙양, 영무, 주질, 사주, 성도, 공주 등 전국에 경교가 융성했다. 고종이후 측천무후가 통치할 때 경교 활동이 약한 주춤한 것을 제외하면 현종, 숙종, 대종, 덕종에 이르는 1백년 동안 경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했다. 중국 고위 관리 가운데 알로펜을 영접한 방현령을 비롯하여 명장 곽자의와 그 밑에 있던 이사가 경교 신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AD 845년 무종의 명에 의해 삼이사(三夷寺), 즉 경교, 회교(이슬람교), 요교(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 약 4백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원대에 이르러 재흥했는데 돌궐 계통 위구르, 네이만, 케레이트, 온구이트족들 가운데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몽골족을 따라 중국에 들어왔다. 칭기스칸의 양아버지인 케레이트의 수장인 토그릴과 그 부족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이었고, 칭기스칸의 며느리는 모두 100%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이었다. 김성일 장로는 심지어 칭기스칸의 아버지인 예수카이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름에도 ‘예수’가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칭기스찬의 아버지가 경교를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사료적 근거도 없다. 다만 칭기스찬이 제정한 몽고대법전(야사)에 보면 1조에 몽골의 지배 하에 있는 모든 민족은 하늘의 신(하나님)을 섬기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막연하게나마 칭기스찬이 하나님을 인정했던 것 같다. 원대에는 경교라 하지 않고 야리가온(也里可溫), 아이개온(阿爾開이溫)이란 칭호가 붙여졌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불교도였지만 야리가온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2. 경교의 통일 신라 복음전파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할 때 당나라 군대의 원조를 받았다. 그런 관계로 통일신라에서는 당(唐)과 왕래가 빈번하여 1년에도 몇 차례씩 사신이 오고 갔으며, 무역하는 장사꾼들과 당에 유학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예로부터 종교심이 많은 우리 민족이 이런 과정에서 경교에 접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를 입증만한 사료는 없다.
영국인 여류 고고학자 고든(E.A. Gordon)은 한일합방 무렵에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 사찰을 살펴보고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의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과 통일신라시대의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신장 부조나 능 앞의 무인상에서 페르시아의 경교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든은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경교비를 세웠는데 “도의 상징”이란 책에 이 내용을 주장했다. 이 경교비는 경교 동진사(東進史)를 깊이 연구한 고든 여사가 1917년에 자비로 세웠다. 이 경교비의 탁본은 현재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같은 고든의 주장은 김양선 목사에 의해 받아들여져 1956년 경주에서 돌십자가가 발견이 된 것, 또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동제 십자가, 그리고 마리아상과 유사한 관음상을 예로 들며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주장했다. 경주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는 숭실대 구내의 기독교 박물관에 비치되어 있다.
오윤태 목사도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주장하는데 그의 설에 의하면 불교가 경교의 영향을 받아 변절되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가르친 불교는 개인의 구원과 해탈에 관심을 두는 소승불교인데 석가가 죽은 후 400여년이 지나면서 교세가 점점 약화되어 갈 무렵 인도의 북방에는 사도 도마가 와서 기독교를 선교한 후 기독교가 왕성해 졌으므로 이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중생의 구원을 가르치는 대승불교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분리된 것은 184년이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들어본 불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로서 아미타불, 미륵불, 대일여래는 예수라고 해석하고, 관세음보살은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고 했다.
그 외 일제시대에 압록강 건너편 안산(鞍山)에서 경교 유물이 발굴된 적이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평북 지방까지 전파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 일이 있다. 조선 시대 헌종(憲宗) 때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五洲衍文)”에 경교를 알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일본 서기에는 당에 유학 갔던 홍법대사(弘法大使)가 귀국시 경교 신자를 데리고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일본보다 당과의 교제가 더욱 빈번했던 신라에 경교가 안 들어왔을리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3. 경교가 쇠퇴한 이유와 선교의 토착화 모델에 대한 연구
정치적으로 당의 무종이 외래종교 배척정책을 써서 대박해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또 방지일 목사는 그의 저서 ‘福音歷史半白年’에서 경교의 쇠퇴이유를 정교혼합정책을 쓴 것을 들었다. 선교는 복음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경교는 중국에서 정치적 세력의 환영과 비호, 후원을 받고 성장했다. 이런 방법은 오래 갈 수 없었다. 태종(627-649), 고종(650-683), 현종(713-755) 때는 정부의 비호를 받아 정치가 크게 힘이 되었으나 무종(841-846) 때부터 크게 박해를 받았다. 사원 50,000여개가 훼파되고, 승려 260,000명을 환속시켰다. 그 외 인재 양성을 못한 것도 지적한다. 처음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끝나자, 후계자가 없었다. 그만한 시일이 흘렀으면 벌써 인재 양성기관인 신학교를 세워 후대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웠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혼합종교를 만들었다. 절대 구속의 복음, 계시의 신앙을 현실의 비유에 맞추어 혼합종교를 만들고, 또 이미 중국에 널리 퍼진 유교사상에 혼합되어 적당주의로 나가는 까닭에, 경교비에 기록된 대로 우상종교로 전락되고 말았다고 한다.
경교는 불교권에 선교할 때 절을 짓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복음을 전했다. 다만 그 절에 불상이 없으며 대신 십자가가 있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 다르다. 동양에 불교의 옷을 입고 들어온 경교는 일종의 토착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경교는 토착화를 시도하여 큰 열매를 얻었다. 그러나 결국 정치적 지도자의 핍박을 이겨나가지 못했다. 토착화 모델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중국 명나라 시절 예수회 신부인 마태오 리치가 선교한 모습도 유사한 점이 있다. 예수회 신부들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전통 때문인지 처음에 불교 스님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스님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것을 보고 유교의 사대부와 같은 모습으로 복장을 바꾸고 유교의 용어를 사용하여 선교했다. 제사를 문화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관대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마태오 리치는 로마 교황청의 이단 정죄를 받아 사역의 길이 닫히게 되었다.
현재 방글라데쉬의 한 이슬람 분파가 이와같은 형태를 취한다. 분명히 그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지만 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고 그대로 모스크에서 다른 무슬림과 함께 예배드린다. 이들은 소그룹으로 셀교회의 형태로 신앙생활을 한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종교적 핍박이 있다거나 고통스런 사회적 격리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들은 다른 무슬림들에게 무슬림이지만 좀 다르게 믿는다고 간주된다. 자기들과 믿는 것이 똑같은데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 선지자 이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일종의 무슬림 이단으로 간주된다. 오히려 방글라데쉬 교회는 너무나 타락하여 한달에 1000불만 주면 한 교단이 움직일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이런 교단에 비해 오히려 무슬림으로 남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 분파가 더 생명력이 있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토착화 선교 모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