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어때서 45회
새로운 날이 밝았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나이 박
철수가 어제까지는 애인이 없었지만 오늘 부로 애인이 있는 삶을 살아 갈 것이
다. 나는 한가지 맹세를 하겠다. 나는 내 애인이 나가라, 나가라 할때까지 곁에
서 버틸 것이다. 절대 내가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 문을 열고 복도에 서 아침 공기를 마셨다. 좋은 아침이다.
"덜컹."
누나 방 문이 열렸다. 저 방 문을 열고 예쁜 숙녀가 나 올 것이다. 저 여자가
바로 내 애인이다. 푸하하.
"너 나와 있었니? 일찍 일어 났네?"
"응. 지금 학교 가는 거야?"
"응."
"일찍 가네?"
"그래. 아침 먹으러 갈래?"
"나는 아침은 대충 먹거나 거른 버릇 때문에 잘 안 먹어요. 은정씨."
"후후. 왜 철수씨?"
"그 듣기가 아직 어색하네. 나 누나 애인 맞아요?"
"그래, 이제 날 사랑한다는 말도 들었는데 애인 하지 뭐."
"하하, 그 참 신기하네."
"뭐가?"
"나에게도 애인이 생겼다는 게 말입니다."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마. 연애도 건강한 삶의 한 부분일 뿐이야. 생활과
따로 생각하지 마."
"알았어요. 음, 좋은 말 해줄게요."
"해 봐."
"당신의 그림자 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박철수."
"무슨 뜻이야?"
"좋은 말을 해 줘도 알아 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구나."
누나를 곁눈질해 보았다.
"치."
"누나 곁에 항상 그림자가 붙어 다니죠? 힌트 끝."
"그래 알았어. 그 마음 변치 마."
"당연하죠."
"호호. 사랑해 철수야."
으으, 졸라 낯간지럽다. 뭐야? 애인이라서 함 봐줬다. 저 여자가 어린아이 얼
르 듯 내 엉덩이를 톡톡 쳐 주고 갔다. 날 어린 애 취급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
지만 이제 날 어린애 취급한다고 고민하지는 않겠다. 나 저 여자에게 귀여움 받
는 남자가 되고 싶다. 하하, 우리 아버지 아시면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겠다.
"낮에 밥 사줘요?"
"그래 와."
내가 남자기 때문에 내가 애인의 밥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해 보지만 급격
한 생활의 변화는 몸에 해롭다. 단지 그 이유다. 앞으로 저 여자에게 밥 얻어 먹
는 것은 계속 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누나에게 애인으로서 남들 하는 것들을 하나씩 다 해 보리라. 잠
시 하늘을 보며 상상을 해 보았다. 아이, 부끄러버라. 근데 저 여자가 날 애인
시켜준다고 해 놓고 말 뿐이었으면 어떡하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머리 잘 써야
겠다. 그래 다음 주에 애인 된 기념으로 술 파티를 한 번 해야 겠다.
푸하하.
방에 들어 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바로 정희 누
나네로 달려 갔다.
"안녕 누나."
"오늘도 아침부터 여길 왔어?"
"나 오는게 싫어요?"
"아니. 왜 왔어?"
"음, 나 애인 생겼어요."
"정말?"
"푸하하, 좀 늙었지만 졸라 예뻐요."
"후후, 너 그 말 은정이에게 이른다?"
"아, 누나는 은정이 누나를 알지 참.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랑을 하는건데?"
"진짜 너네 둘이 연인사이 하기로 한거야?"
"응."
"야, 박철수 축하한다. 결국 해 냈구나."
"응. 근데 은정이 누나가 날 차 버리지는 않겠죠?"
"모르지. 걔 곁에 멋있는 사람이 나타나 걔 마음을 흔들면..."
"우쒸."
"후후."
"왜 웃어요?"
"둘이 결혼 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에? 그건 다른 문제에요."
"얘 봐? 너네 둘이 오래 사귈 거 아냐? 그러다 보면 결혼도 하는거지."
"정말요?"
"그럼. 그러니까 은정일 꽉 붙들어 둬."
"알았어요. 누나 뭐 하나 물어 볼게요."
"뭘?"
"수면제 있잖아요. 많이 먹으면 죽어요?"
"응."
"한 번에 얼마만큼 먹으면 안 죽고 잠 들 수 있어요?"
"왜 잠이 안 오니?"
"수면제 안 죽을 만큼만 줘요."
"왜 사랑하는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었는데 잠이 안 오니?"
"너무 기뻐서요."
거짓말 한 번 했다. 영화처럼 놀아 볼 생각이다. 은정이 누나, 즉 내 애인에게
한 번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예전 누나가 내 방을 술에 취해 찾았을 때 느꼈
던 것이다. 나보고 음흉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꼭 해 보고 싶다. 누나 가슴
을 한 번 찔러 보는 것. 그 뿐이다. 저 번에 누나와 위스키 한 병을 마신 적이
있다. 누나는 그 독한 썸씽을 물 마시듯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같이 술을
마셔 누나가 먼저 정신 잃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수를 쓰자.
"이 번엔 주지만 수면제 먹는 버릇 들지마?"
"알았어요. 누나?"
"왜?"
"나 나쁜 놈 아니죠?"
"그럼."
"누나는 왜 애인이 없어요?"
"뭐야?"
학교를 졸라 거만하게 갔다. 수업도 졸라 거만하게 받았다. 내 동학년들은 대부
분 군대를 갔다 온 선배들이었지만 나 그들을 졸라 거만하게 대했다. 왜? 그들
은 불쌍한 공돌이고 나는 잘난 애인이 있기 때문이다.
"형 우리과는 졸업 사진 언제 찍는대요?"
"다음 주 쯤에 찍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양복도 한 벌 사야겠네."
"음, 그래요? 형은 애인 있어요?"
"포기했어. 직장 잡으면 만들지 뭐."
"그러고도 졸업 사진을 찍고 싶어요?"
"뭐야?"
"애인도 못 만들고 졸업하고 싶냐구요?"
"넌 있냐?"
"당연하죠."
"누군데?"
"노코멘트."
"외국 여자 사귀냐?"
우리 과에도 내가 누나와 같이 다니는 걸 본 사람들이 많다. 누나가 내 애인이라
는 사실은 나만이 간직해야 겠다. 저런 무식한 늑대들에게 누나를 소개시켜 주기
가 싫다.
애인이 있는 현실을 4일 동안 즐겼다. 금요일 서울로 돌아 가는데 누나가 나에
게 삐삐를 쳤다. 전철 같이 타고 가자고 삐삐 친 줄 알았다.
"언제 올라 갈거에요?"
"너 7시에 약대 앞으로 와라."
"왜? 누나 집에 들렀다 갈 거 아냐?"
"누가 차를 태워 준대. 우리 차비 아끼고 편하게 가자."
"누가 태워 준대?"
"한 번 봤잖아. 우리연구실 박사 과정 선배."
"그 겉멋 든 놈?"
"응."
"싫은대..."
"나도 별로 내키지 않지만 너랑 나랑 뒷 좌석에 앉아 가면 되잖아."
"그럴까?"
약대 앞에서 누나가 나오 길 기다렸다. 그 흰색 비엠더블류 자동차 앞에서 멀뚱
히 서 있었다. 심심해서 드렁크가 있는 표면에 '이 차 주인은 밥 맛없는 늙은
놈.'이라고 써 보았다. 이 차 주인은 내게 첫인상을 좋게 심어 주지 못했다.
누나가 보였다. 옆에 그 박사과정이라는 놈이 히히덕 거리며 같이 걷고 있다.
넌 브라운 계통으로 염색했다고 생각하겠지? 노을에 물든 그의 머리는 한 마디
로 똥색이었다. 한 일년 푹 썩힌 것 같은...
"철수야."
누나에게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같이 갈 사람이 얘야?"
얘? 날 언제 봤다고 날 어린애 취급하남?
"네."
누나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인사를 녀석에게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자네 93학번이라고 했지? 나 배 성준이야."
"어? 이 번엔 성준 배가 아니네요."
"여긴 한국이잖아."
녀석이 내게 악수하러 손을 내 밀다 누나의 말에 고개를 홱 돌려 손을 빼 버렸
다. 괜히 손을 내민 나만 바보 됐다.
녀석이 자기 차로 달려 가더니 조수석 문을 홱 열어 재쳤다. 뭐여? 누나가 날
멀뚱히 쳐다 보았다. 할 수 없다. 내가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다.
"자네는 뒷 좌석이야."
"누나도 뒷 좌석에 앉을 건대요."
"그건 자네가 상관할 바 아니지."
나 자네에게 삐쳤어 씨. 뒷 문을 열고 뒷 좌석에 가 앉았다. 누나가 그 사람을
보고 웃었다. 그래야지 암.
"저도 뒷좌석에 앉을래요."
"야, 태워주는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여기 앉아라."
"선배님이 태워 준다고, 준다고 해서 타는거잖아요. 제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
을래요."
결국 누나는 나와 뒷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녀석은 바보 됐다.
차 타고 가니까 편하네. 작년 이맘 때 누나 차가 아작났던 거 같다. 그 시절을
잠시 회상하게 만들었다.
"자네는 집이 어디야?"
"저요? 신사동이요."
"은정이는 청담동이랬지?"
"네."
녀석은 누나가 몰던 길로 가지 않았다. 과천 쪽으로 운전을 해서 갔다. 아무래
도 나부터 먼저 내려 주고 누나에게 수작 부릴 것도 같다. 역시 그렇다. 차는 사
당동으로 해서 신사동을 거쳐 날 먼저 내려 보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럴 수 없
다.
"둘은 어떤 사이야?"
"제가 동아리 후배였어요."
"철수군, 너무 은정이 곁에 붙어 다니는 거 아냐?"
"에?"
"선배님?"
누나가 말을 이어 받았다.
"왜?"
"얘랑 나는 선배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에요."
그럼, 나 이 여자는 내 애인인데.
"하하, 은정이 너하고 내가 연구실에서 같이 생활하는 시간이 하루 중 얼마야?
금방 역전될거야."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아저씨."
"엉?"
내 말투가 좀 그랬나? 은정이 누나가 내 손을 잡았다.
"선배에게는 선배님이라고 불러. 신사동 어디에서 내려 주면 돼?"
"나도 청담동 갈래요."
"자네가 왜 가?"
"누나랑 차 한잔 하려구요. 그리고 누나 집에 데려다 주려구요."
"자네 후배 주제에 주제 넘은 짓을 하려고 하는군?"
"이봐요 배성준씨."
"엉? 은정이 화났니?"
"말을 좀 함부로 하는 것 같지 않아요?"
누나야 그러지 않아도 돼. 난 남자에게는 심한 말 들어도 꿋꿋해 할 수 있어요.
"친한 후배에게 내가 말이 좀 심했나? 미안해."
"철수는 자주 날 집까지 배웅해 주었거든요? 오늘도 그럴거에요."
"암."
"둘이 사귀냐?"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죠."
"둘이 안 어울려. 은정이가 아깝다 야."
이 새끼가 진짜.
"차 세워요."
멀리 고속 터미널이 보이는 구 반포 정도였을 것이다. 누나가 차를 세우라고 했
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추어 서자 마자 은정이 누나가 차 문을 열고 내려 버
렸다.
"누나 왜 내려요?"
"철수야 너도 내려."
"에?"
"선배님 당분간 저 아는 척 하지 마세요."
"화 난거야? 왜?"
몰랐어 묻냐 새꺄? 너 같으면 니 애인 열받게 하는데 가만히 있겠냐?
"누나 남자한테 매정한 것 같애."
누나랑 내린 곳에서 우리 집까지 걸었다. 좋다.
"나 매정하지 못해."
"조금 헛갈리네. 누나?"
"왜?"
"나도 싫어지면 아까처럼 매정한 모습 보일거에요?"
"넌 왜 차일 생각만 하는거야?"
"난 내 곁의 사람을 차 버릴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럼 됐네."
"뭐가?"
"후후, 그래 이렇게 붙어 있다가 나중에 서약서 제출하면 되겠네."
"무슨 서약서?"
"혼인 서약서."
"이 여자가 진짜. 내 나이 이제 23살이다. 결혼은 한 참 뒤의 문제에요."
"난 25살인데? 곧 결혼 적령기야."
그건 그렇네. 요즘같이 연애 따로, 현실 따로, 결혼 따로인 세대에 연인 사이였
다가 부부 사이가 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래도 몇 년 누나 옆에 붙어
있으면 곧 누나가 결혼을 해야 할 나이가 될 것 같다. 어떻게 될까?
차도에는 소음을 내며 차가 달리고 있지만 바로 그 옆을 걷는 내 마음은 참 고
요하다. 누나와 팔짱을 낀 채 도심을 걸었다. 하하, 연인 사이가 좋긴 좋네.
"너 내 애인 맞니?"
"왜요?"
"아까 선배가 하는 말에 넌 한 번도 내 애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잖아."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먼저였잖아요. 누나에게 피해 줄까봐."
"무슨 피해?"
"괜한 소문 돌면 안 좋잖아."
"그 이유야?"
"응."
"후후"
"내가 차 태워 줄게요."
"그래."
"참, 승주 형은 연락와요?"
"아니."
"편지나 한 통 써 줘요."
"너 승주보면 자주 삐쳤잖아."
"승주형과는 추억이 많을 거 아니에요. 쉽게 지워 버리지는 마세요."
"그럴게."
그럴게? 그냥 잊어라 그래 볼까?
누나를 집에까지 배웅해 주었다. 참 많이 망설였는데 끝내 아무일 없이 그냥 집
으로 들여 보냈다. 티비에서 보던 차 안에서의 키스. 그거 하고 싶었는데, 하필
이면 수위 아저씨가 빤히 쳐다 보는데 차를 세워 그러지 못했다. 나 바본가봐.
토요일 새벽에 아버지 술 모아 놓은 데서 또 술 한병을 훔쳤다. 샴페인이 비싸
봤자지 뭐. 레미 마땡? 별로 비싸지 않을 것 같다. 샴페인은 뭔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많이 마신다. 누나와 연인이 됐다는 축하주로 안성 맞춤이다. 별로 독하
지도 않기 때문에 내가 술에 취하지 않을 것이다. 푸하하. 근데 이것도 비싼거
면 어떡하지? 우리 아버지 의외로 비싼 술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번엔 아니겠
지.
누나와 마주 앉아 이 샴페인을 마시는 거야. 누나방에서 마시는 게 낫겠지? 누
나 안 보는 틈을 타 수면제를 타고 모른 척 건배를 해야지. 누나가 잠이 들
면... 푸헤헤, 낯 뜨거워라.
연하가 어때서 46회
내가 누나보다 두살 어리지만 애인 하기로 한 이상, 누나에게 남자의 거만함과
대단함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오전에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가고 있다.
"난데."
"어, 철수씨?"
"오늘 나 좀 봐."
"저 오늘 바쁜데,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그건 아니지만..."
"나 볼거야 말거야."
"볼게요. 언제 어디로 가면 철수씨 볼 수 있죠?"
"다시 연락할게 기다리고 있어."
음, 기분 좋은 상상이다.
"여보세요."
"전데요."
"응, 철수구나. 주말은 잘 보냈어?"
"그럼요. 오늘 뭐 할거에요?"
"오늘? 집에서 쉬어야지."
"나 좀 봅시다."
"넌 학교 가면 매일 보잖아. 참, 나 오늘 오후에 약속 있다."
"무슨 약속이요?"
"결혼식 가야돼."
"여자 친구?"
"응."
"벌써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요?"
"벌써라니? 25살이면 빠른 거 아니다."
"내가 아는 친구에요?"
"모를걸. 고교 친구라 잘 모를거야. 학과 친구래도 넌 내 얼굴 보기 바빠서 어
디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 왔었겠니."
"에구, 성에 가둬 버리고 싶다."
"정 나보고 싶으면 기사 노릇이나 하던지?"
"에스코트 하라구요?"
"아니, 운전 기사. 나 보려면 한 시까지 우리 집 앞으로 와."
내 상상과 아주 조금 빗나갔다.
남자의 거만함과 위대함을 살려 일요일 오후, 누나 기사 노릇을 했다. 누나가
결혼 예복 입고 있는 여자는 다 예뻐 보이기 때문에 들어 오지 말래서, 또 호텔
식당 앞에 식권 있나 없나 지키는 놈들 때문에, 결혼식 열리는 시간에 나는 주차
시켜 놓은 차 안에서 빵하고 우유로 점심까지 때우는 대단함까지 발휘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던 건 이 말 때문이다.
"똑, 똑."
잠시 졸았나 보다.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누나가 왠 여자
를 하나 데리고 와 있었다. 누나 친군가 보다.
"끝났어요?"
문을 열어 주었다.
"응. 인사 해, 내 친구야."
"안녕하세요."
"얘 먼저 집에 데려다 주고 나도 집에 데려다 줘."
"그러죠 뭐. 집이 어디세요?"
여기까지는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누나와 누나 친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내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누나 친구 집으로 가는 도중에 둘이 얘기하는 말
을 들었다.
"누구야?"
"얘?"
백미러로 뒤를 보니까 누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 사귀는 사람?"
"잠깐만."
"아니니? 저 분이 너에게 존댓말 쓰는 것 같은데?"
"저거 바뀔거야 아마. 철수씨?"
둘이서 얘기하다 말고 누나가 날 불렀다.
"왜요?"
"내 친구가 네가 누구냐고 묻는데 뭐라고 답할까?"
"맘 내키는대로 대답하세요."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답해도 될까?"
"에? 에..."
내가 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누나는 피식 웃고는 자기 친구에게 속삭였다.
"쟤 내 애인이야."
그 말은 날 아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흐흐, 애인 사인인데 가슴 한 번 찌른
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 날 것 같지가 않다. 내일 반드시 성공하자.
"아자!"
"뭐야 너?"
"아닙니다."
월요일 아침, 좀 늦게 학교로 출발해도 되지만 누나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전
철 안, 사람들이 많을 경우 누나를 내가 아니면 누가 보살펴 주리.
"가슴에 품은 거 뭐야?"
"오늘 집에 일찍 들어 와요?"
"왜?"
"에, 애인 된 기념으로 한 잔 하자구요."
"너 또 술 훔쳐 왔니?"
"어? 훔쳐 온 줄 어떻게 알았어요?"
"니가 가져 왔던 술, 다 비싼 거잖아. 너 그런 고급 술 살 능력은 안되지? 답
이 금방 나오네 뭐."
"이번엔 별로 안 비싼거야."
"한 번 봐바."
"레미 마땡이에요."
"에? 꼬냑이니? 제법 비쌀텐데."
"샴페인이에요. 비싼 거 아니에요."
"그래, 저녁에 가서 한 번 보자."
"올 때 작은 케익 하나 사 와요."
"그러지 뭐."
하루 종일 계획을 세웠다. 내 방에서 마실까? 누나 방에서 마실까? 약은 언제
탈까?
저녁을 먹지 않고 집에 와 망설임을 억누르고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을 계속
되내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술 병을 올려 놓고 너만 믿는다, 너만 믿는다.라고
도 중얼거렸다. 누나가 어둠이 제법 내려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게 연락을 주
지 않았다.
"딩동!"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드디어 내 방 초인종이 울렸다. 가슴이 뛰었다.
"누구세요?"
"술 가지고 내 방으로 와."
"그러지요."
비장한 모습으로 술병을 안고 누나 방으로 갔다.
누나는 테이블 위에다 작은 케익을 올려 놓고 잔도 두개를 올려 놓았다. 분위
기 있는 모습, 어디서 구했는지 장식 초에 불도 밝혀 놓았다. 꼭 분위기가 바깥
으로 싸도는 남편을 꼬시기 위한 새댁의 정성이 들어 간 모습이다.
"그 샴페인 지금 찹지 않지?"
"그냥 먹어요."
"안 돼. 한 시간만 냉장고 넣어 두자."
"우쒸."
"왜? 오렌지 주스 줄게."
"싫어요."
"후후, 애인 되고 나서도 별로 바뀐 거 없지?"
"응."
"그냥 이렇게 지내면 돼.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 더 배려하는 것. 조금 더 생각
해 주는 것. 그리고 간혹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뽀뽀도 한 번씩 하는 거지 뭐."
"많이 바뀌네요."
"사실 나도 연인 사이로 남자를 대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잘 몰라."
"승주형은?"
"뭐 계속 마음을 숨기고 친구 사이였잖아. 연인 사이 되려다 어색해 졌었구."
"음, 누나."
"왜?"
"우리사이 오래 유지 될까요?"
"노력해야지. 참을 줄도 알아야 되고."
참을 줄 알아야 돼?
"안주가 근데 케익 뿐이에요?"
"샴페인 먹는데 안주가 필요하니?"
"과일 없어요?"
"다 떨어 졌는데, 그래 과일이라도 사먹자. 좀 사가지고 와."
"나 애인 맞죠?"
"응."
"누나가 사 와라."
"내가 사와야 돼?"
"응, 누나도 한 번 사러 갔다 와. 그래, 사랑하는 은정씨가 사 가지고 와. 푸짐
하게..."
"후후, 사랑하는 은정씨라고 해서 내가 갔다 온다."
야, 기회다.
은정이 누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샴페인을 바로 꺼내
어 뚜껑을 땄다.
"펑!"
흔들어서 딸 걸. 소리가 너무 작았다.
내 잔에다 한 잔 가득히 따랐다. 그리고 낄낄 거리며 누나 잔에도 가득히 따랐
다. 정희 누나에게서 받은 수면제 모두 탔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별 표가 나
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는 과일과 함께 정희 누나도 데리고 왔다. 뭣 때문에 데리고 왔을
까. 정희 누나가 피식 웃고는 나에게 삐친 적 했다.
"그래, 둘이 사귄다고 나는 빼놓고 이런 파티를 하고 있었구만? 철수 너?"
"누나도 한 잔 해요 그럼."
"나를 이제는 찬 밥 취급을 한다 말이지?"
눈 흘기지 마라. 늙어서 그러고 싶냐.
누나가 컵을 한 개 더 가지고 왔다.
"벌써 따라 놓았네. 난 김 나간거 안 좋아 하는데. 나는 새로 따라 줘."
"에?"
"정희 넌 이거 마셔라."
"그래, 너도 날 찬 밥 취급 하는구나?"
"마시기 싫어? 이거 고급 샴페인이다?"
"에?"
고급이라는 말과, 정희 누나가 수면제 탄 잔을 드는 것에 무척이나 놀랐다. 으
이쒸.
"야, 건배 한 번 하자."
정희 누나가 잔을 들더니 내 뱉은 소리다. 힘 없이 정희 누나를 바라 보았다.
약 탔는디... 은정이 누나의 공주 건성을 원망하여 빈 잔에다 샴페인을 따랐다.
"이거 진짜 고급이에요?"
그 병 잠깐 줘 봐. 이 숫자 보이니?
"뭘요?"
"1983이라는 숫자."
"비싼 거에요 그럼?"
"나도 잘 몰라. 근데 왠지 그럴 것 같지 않니? 병도 장식용으로 어울리는 각진
원통형 검은 색."
"비싸 봤자지 뭐."
"그래. 오늘 다 마시자."
"잠깐."
정희 누나가 따라 놓은 잔 두개를 들어 어느게 많은 지 열심히 비교를 하더니
내게 떡 잔 하나를 주었다. 좀 헛갈린다. 정희 누나의 독촉으로 헛갈리지만 나
도 잔을 들었다.
"건배."
은정이 누나, 정희 누나, 그리고 나. 모두 한 잔을 쭈욱 마셨다. 그리고 담소
를 나누며 그 뒤로 한 잔을 더 마셨다. 케익도 먹고 과일도 깎아 먹으며 이런 저
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이 왔다. 그 뒤로는 나도 모르겠다. 분명 정희 누나가
약이 든 잔을 들었었는데... 놀다가 보니까 잠이 오는 건 나였다. 어디서부터 잘
못됐을까. 헤헤.
"야!"
잠이 들기 전 내 마지막 기억속에 은정이 누나가 날 째려 봤다는 것이 떠 올랐
다. 둘이서 나 하나 옮기는 것도 못했을까? 나는 잠에서 깨어 보니 누나 침대 위
에 누워 있었다. 제법 늦은 아침에 나는 누나 침대에서 누나 베게를 베고 누워
있다 잠에서 깼다. 누나는 학교를 갔나 보다. 아무도 없다.
테이블 위에 스프를 담은 그릇과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일어 나면 전화 해."
정희 누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어제 내가 언제 잠이 든 거에요?"
"11시쯤."
"왜 잤대요?"
"몰라."
"누나는 잠 오지 않던가요?"
"아니."
"누나하고 은정이 누나가 날 침대로 옮긴거에요?"
"아니. 너 스스로 자연스럽게 가던데? 자기 침대도 아니면서 참 자연스럽게 눕
더라. 그리고 이불을 덮더니 우리 보고 소리 쳤었어. 불 꺼, 그래서 은정이랑 내
가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아니?"
"에? 어제 잠이 들때 쯤 은정이 누나가 내게 뭐라 그랬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
이에요?"
"그거 기억 안나니?"
"뭘요?"
"호호, 은정이가 너 베게 바로 해주려고 다가 갔다가 봉변 당했잖아."
"내가 어떤 다른 짓을 했어요?"
"뽀시시 웃다가 가만히 있는 애 가슴은 왜 찌르니?"
"에?"
"너 은정이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어. 안 맞은 걸 다행으로 생각 해."
"내가 정말 그랬어요?"
"응."
"왜 그랬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근데 너 술에 그렇게 약했니? 아니잖아."
"나도 잘 몰라요. 누나는 어제 언제 갔어요?"
"나 네 방에서 잤어. 은정이랑."
"에?"
"은정이가 잘 곳이 없었잖아. 네 방에서 혼자 자기가 좀 그랬나봐. 나랑 같이
잤어. 인형들 많더라. 근데 이불에서 냄새가 좀 났어. 그래서 아침에 둘이서 빨
아 놓고 갔단다. 방 청소도 했어."
"왜 그런 짓을..."
"그런 짓? 고맙다고 해야지."
"뭐 뒤지고 그러지는 않았죠?"
"응. 너 아직 은정이 방이구나."
"그럼요. 내 방엔 전화도 없는데..."
"둘이 그냥 같이 살아라."
"은정이 누나와 제가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은정이 누나가 화 났던가요?"
"가슴 찔렀다고?"
"네."
"화났는데 아침에 방 청소도 해 주고, 이불 빨아 놓고 학교 갔겠니?"
"스프도 끓여 놨던데."
"잘해 봐. 걔가 도도한 것 같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간도 쓸개도 빼
줄 애야."
"누나는요?"
"나? 나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또 모르지 뭐."
"약 장사 잘 해요."
"그래."
약은 내가 먹었나 보네. 음... 내가 약을 먹어도 찌르는구나. 근데 기억이 잘
안나는디...
연하가 어때서 47회
연하6
바라지 않고 해주고만 싶은 사람이 존재하지는 않겠지요. 나도 철수에게 바라
는 것이 자꾸 생기겠죠.
"여보세요?"
"나 철수에요."
"이제 일어 난거야?"
"응. 누나 내 방에서 잤다면서?"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정희 누나에게 전화 해 봤죠."
"정희에게 먼저 전화 했었니?"
"응. 누나에게 먼저하기 미안해서. 그리고 상황 판단도 해야죠."
"앞으론 나먼저 생각해."
"화나지 않았죠?"
"왜?"
"그거 있잖아요. 어제 밤에..."
"너 겨우 삼페인 두 잔에 골아 떨어질 정도로 술에 약하진 않았잖아."
"당연하죠."
"어제 일부러 그랬지?"
"그건 절대 아니에요."
"앞으론 그러지마."
"나 기억나는 거 없어요. 내가 진짜 찔렀어?"
"그래 임마."
"기분이 어땠어?"
"황당했다."
후후, 철수는 아직 어린애죠? 저럴 때 보면 아주 어린애 같아요. 그래도 종종
나보다 커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항상 커 보이는 존재보다 내게는 간혹 커 보이
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에요. 철수처럼 말이죠.
"또 베꼈죠?"
"왜 자꾸 나만 갖고 그래."
"그래?"
"그래요."
교양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하나 둘 레포트를 내고 갑니다. 이게 모이면 상당
히 무겁죠. 연약한 여자 혼자 이걸 어떻게 들고 가라고...
중간 고사가 끝나고 또 한 번 레포트 숙제가 나갔었나 봅니다. 내가 조교로서
또 레포트를 걷으러 갔었어요. 수 많은 학생들 중에 유독 내 눈에 띄는 애가 있
죠. 모르는 학생들 투성인데 그 중에 아는 사람, 맘을 주고 받은 사람 하나가 있
다는 게 이렇게 재밌고 정겨울 수가 없네요. 다른 학생들은 그냥 묵답으로 레포
트를 받았는데 특별하게 철수 것은 넘겨 보았어요. 철수는 내게 특별하니까 그래
도 되지요. 또 모른척 조교 역할만 했습니다.
"의심이 가니까 그렇죠."
철수를 장난스런 눈빛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딴청 부리 듯 나와 시선을 마주하
지 않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의심만 늘어나나."
"흠, 너 다시 써 오고 싶어?"
"재밌지? 재밌어서 이러는 거지?"
"후후. 가지 말고 좀 기다려."
모르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는 것, 재밌긴 하네요.
"으쒸."
"무겁니?"
"누나가 들어 볼래?"
"싫다, 그걸 내가 왜 드니."
"이거 누나가 들고 가야 하는거야."
"지금은 니가 들고 있잖아."
"이거 누나가 점수 매겨요?"
"아니. 내 임무는 레포트 거두어서 교수님 책상에 갖다 놓는 것 뿐이야."
"누나."
"왜?"
"나 누나 애인 맞아요?"
"뭐 애인이라는 게 별거 있니. 나는 이렇게 편한 사이가 좋아. 그리움도 있고,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거기다가 곁에 있는 사이. 그럼 됐지."
"그런건가?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니? 넌 내게 특별한데."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달라지려고 애쓰지 마."
한 동안 무난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학교 생활은 그 나름대로 평안했
고, 철수와의 관계도 별 탈 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조금 철수의 신경을 거슬리
게 하는 게 있다면 배 성준씨. 그리고 내 마음에 조금 여운을 일으키는 승주에게
서 간혹 오는 편지.
"야이, 밥 맛 없는 놈아. 여자에게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
약대로 들어 가다 참 많이도 웃었습니다. 배 선배 차의 본네트 표면에 손가락으
로 써 놓은 글씨. 저건 아마 예전 내 차에 쓰인 글씨체와 같을 겁니다. 배 선배
가 보기 전에 내가 지워 버렸어요. 철수가 배 선배에게 괜한 신경을 쓰는 것 같
아서요.
연하라서 그럴까요. 난 철수에게 조금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아요. 실험실에서 약간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철
수를 찾게 되죠. 그때 만약 철수가 정희와 같이 있으면 기분이 나빠요. 그냥 웃
어 넘기다가도, 내 친구와 서로 친하다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가도 어느때면 질
투심이 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벼운 문제들 뿐입니다. 난 철수에게 여유로운 편이고, 철수도 날 구속
하려 하지는 않았어요. 연하의 핸디캡을 그대로 안고 그것을 굳이 떨쳐 버리려
고 하지 않았기에 철수는 내게 여전히 조심스러운 면이 남아 있었어요.
"철수야."
철수와 종종 집에 같이 올 때면 난 자주 그의 엉덩이를 쳐 주었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며 엉덩이를 쳐주는 것, 잘 들어가라는 인사였습니다.
"자꾸 이러면 나도 친다?"
"이건 어린애 취급하는게 아니고 애정의 표시야."
"사람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거야. 승주형에게도 이랬어요?"
"승주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네 입에서 승주 얘기가 나오면 부담스러워."
"부담스러워? 쩝, 간혹 연락 오죠?"
"응."
"흠, 그리울 때가 있을 거에요."
"너 태연한 척 하는거야?"
"아직은."
"무슨 말이야?"
"나중엔 힘들어 질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또 어려운 말 쓴다."
"잘 들어 가요."
"그래 잘 들어 가."
엉덩일 톡톡 치는 것, 이것도 버릇이 되어 가네요.
"으쒸. 또 쳤어."
철수가 엉겁결에 내 엉덩이를 치려다 손을 내리네요. 아직 그의 마음엔 뭔가 불
안함이 있나 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
한 학기가 또 지나갑니다. 철수와 같이 했던 시간, 삼년으로 접어 든 시간도 반
이 흘러 가네요.
교양 과목 시험 감독을 들어 갔습니다. 조금 아쉽네요. 철수를 강의실에서도
볼 수 있었던 기회는 이 것으로 끝이 나겠죠. 여러 사람들 중에 신경이 가는 한
사람. 비록 철수 외에 아는 학생이 거의 없다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찾아 볼 수 있게 했는데.
철수 뒤에 섰습니다. 기말 고사는 거의 상식에 가까운 것들로 단답형으로 냈는
데 철수는 여러 개를 공란으로 비워 놓았습니다. 내가 뒤에 서 있는걸 눈치 챘는
지 고개를 들어 씩 웃네요.
"4번 힌트 좀 줘요."
철수가 아주 작게 속삭입니다.
"싫어."
"애인인데 그것도 못가르쳐 줘요?"
"공과 사는 구별해야지."
"그럼 딴 데 가서 서 있어요. 신경 쓰이잖아."
"내 마음이다."
철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교수님!"
엉? 교수님을 왜 찾아? 교단에 서서 책을 읽으시며 딴 일이시던 교수님이 멍하
니 이 쪽을 보았어요. 그것보다 또 한 번 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
다. 쑥스럽더군요.
"왜 그러나?"
"옆에 조교가 계속 서 있어서 문제 푸는 데 방해가 됩니다."
교수님이 철수의 얘기를 듣더니 나를 뚜러지게 쳐다 보시면서 말했습니다.
"자네는 왜 거기만 서 있나? 거기 꿀 발라 놓았나?"
"네?"
두고 보자 너. 중간 고사 때는 왜 때려요? 그 걸로 날 골탕을 먹이더니 이제는
교수님을 불러? 다음 시험때는 눈길도 안 줄거다. 흠흠, 다음 시험은 없군요. 앞
으로 계속 곁에 있을 녀석이지만 오늘 이 자리의 작은 헤어짐 하나 때문에 다소
허전합니다. 그를 볼 수 있었던 자리 하나가 사라지는 것에도 아쉬움이 남네요.
혹시 더 큰 의미가 되는 헤어짐이 있다면...
연하가 어때서 48회
날씨가 참 덥습니다. 길 가의 옥수수들이 다시 내 키만큼 자랐고 더운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시험이 끝이 난 학생들은 여름 방학에 들어 갔
습니다. 철수는 뭔가 실험할 게 있어 아직 자취방에 머물지만 곧 서울로 올라
가 버릴 것 같습니다. 철수는 날 위해 애써 자취방을 지켰던 적이 있지요.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네요. 이 번 여름 방학 때 전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학기 중일
때보다는 한가하겠지만 연구실을 지켜야 하는 신세입니다. 철수더러 학교에 내
려 와 있으라는 부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도 자기만의 시간이 있는데 날 위
해 희생시킬 수는 없겠지요.
"낮에 더운데 수원가서 시원한 냉면이라도 한 그릇 먹고 오자."
연구실을 찾은 배선배는 내 핀잔에는 아랑곳 없이 계속 내게 친한 척입니다.
"학교 근처도 냉면하는 집 많아요."
"이왕이면 맛있는 곳을 찾아가자."
"저 애인 있거든요."
"하하, 진짜 연하 사귀는거야?"
"연하 사귀면 안되나요?"
"걔는 너하고 안 어울려."
"왜요?"
"걔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데 은정인 나이보다 성숙해 보여. 걔는 은정이 상대
가 안돼."
살 기분이 나쁘네요.
"그럼 제 상대는 어때야 되는데요?"
"나 정도는 되야지. 그 철수라는 애 공대생이지?"
애? 나보다 나이가 적지만 그래도 이제 대학 4학년인데 애라고 그러냐.
"네."
"걔 졸업하면 취직할테지?"
"아니요. 대학원 갈거에요."
"그래 봤자지 뭐. 어디 취직해서 평범한 회사원 되겠지?"
"그래서요?"
"아깝지 않냐? 너 정도면 잘난 남자들과 어울려야지. 평범한 사람과 평범하게
사는거, 그거 재미없는 거다."
"철수도 잘났어요."
"너 나이 이제 곧 26살이다. 너 학위 받고 나면 곧 바로 결혼 문제 생각해야 될
거다. 거추장스럽게 그런 애 옆에 데리고 있으면 나중에 귀찮아 진다?"
"말이 너무 심하네요. 철수가 어때서요. 나 걔랑 이렇게 지내다 결혼 할 거에
요."
"야, 결혼은 현실이야. 좋다고 하는 게 아니야. 감정은 일순간이고 현실은 평생
이야. 걔 졸업하고 기반 잡으려면 적어도 5년 후의 일일텐데, 넌 그때 서른 살이
야."
"같이 살면서 기반 잡아도 돼. 배선배 그렇게 까진 안 봤는데 물이 잘못 들었네
요?"
"나이 드니까 다 그런 생각 가지게 되더라. 너도 그렇게 될거다. 사람만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난 그렇게 되지 않을거야. 그렇게 되기 싫어요."
"그래, 학생일 때가 그래서 좋지."
기분이 나빴습니다. 나도 배선배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현실을 따지며 사람
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철수를 잘나지 못하다고 말한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철수에게 삐삐를 쳤습니다. 배 선배는 홀로 점심을 해결하러 떠났습니다.
"왜 삐삐 쳤어요?"
"뭐해?"
"밥 같이 먹자고 삐삐 친거에요?"
"아니. 뭐 하냐니까?"
"당구쳐요."
"뭐야?"
"왜요? 오늘 실험 끝내고 선배들과 당구 한 게임 치는 중이에요."
"너 졸업하고 뭐 할거야."
"나? 대학원 갈거라니까."
"대학원 마치고 나면?"
"거기까지 생각 안해 봤는데. 뭐 정해진 거 아닌가? 군면제 해주는 회사에 취직
해야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취직하면 나가라, 나가라 할 때까지 월급 받으며 사는
거지."
"뭐야?"
"왜요?"
"넌 꿈 같은 거 없어?"
"다 그렇게 사는데 뭘. 그렇게 살면서 재밌고, 가치있는 꿈 하나 만들고 하는거
지."
"훗, 그럼 결혼은 언제 할래?"
"결혼? 우리 아버지가 집은 하나 사준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내 밥그릇은 해
결해야 될테니까 28살에서 30살 정도 되야 하겠죠."
"나는 그때 노처녀 소리 듣고 있겠다."
"왜 그래요. 누나는 누나에게 맞는 사람 찾아서 일찍 결혼하면 되잖아."
"야! 너 지금 나하고 그래도 연인 사이다? 애인에게 그런 말 하는거 모진말이
야."
"흠, 그건 알지만 나 아직 결혼에 대해 생각할 나이도 아니고 평범한 회사원이
잘난 약대출신 여자하고 결혼하는 게 어렵다는 것도 알아요. 나 아직 누나를 내
반려자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너 나뻐 씨."
그렇나요. 철수는 그냥 학생의 신분으로서 다른 생각없이 나를 사람이라는 한 가
지만 보고 좋아하고 있나 봅니다. 나도 아직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요. 결혼은 현실이다. 현실을 생각해야 될 시점이 오면 난 철수를 져 버릴까요.
과연 져 버릴수 있을까요. 난 내 자신을 능력있는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내 능력
만으로도 남들 만큼은 살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실? 그게 뭐. 지금은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너 내일 서울 갈거야?"
"응."
"방학 내내 서울에 있을거야?"
"종종 내려 올게. 누나는 학교 와 있어야 되지?"
"그래."
"누나 보기 위해서라도 자주 내려 올게요."
"이 번 주말에 영화나 보러가자."
"그래요."
"짐도 가져 갈거야?"
"가을 되면 겨울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짐이 많아 질거에요. 필요없는
것들은 집에 갖다 놓아야지."
"인형은 내 방에 갖다 놓고 가."
"왜요?"
"깨끗하게 빨아서 안고 자려고 그런다."
"흠. 그럼 갈 때 주고 갈게요. 이제 누나 방 가세요."
"그래. 잘 자."
"누나!"
"왜?"
"뽀뽀라도 한 번 해주고 가면 안될까요?"
"아직까지도 그러니?"
"뭘?"
"계속 물어보고 하잖아."
"처음엔 안 그랬어."
"네 마음속에 나와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나도 그런 생각이 들고
있다고 생각을 해. 나도 네 마음과 비슷하다고 그렇게 생각해."
"진짜루?"
"그래."
하루 밤이 지나면 철수는 한 동안 내 옆에 있지 않겠네요.
너무 친근하면 종종 그 존재를 기억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기억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려 종종 다른 사람의 모습에 치워져 버리
는 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사람이 곁에 없으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지요.
철수가 서울로 떠난 다음 날, 승주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아직 그에 대한 여
운이 많이 남아 있나 봐요. 철수를 완전히 내 사람으로 받아 들였지만 내 곁에
그가 없는 지금 멀리 있어 그리운 승주는 날 가슴 떨리게 합니다. 그의 편지 내
용에 이런 물음이 있었습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니?
내 지금 마음으로는 승주에게 떳떳하게 철수를 얘기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불
과 반 년 전에는 반대였지요. 그때 보다는 덜 하지만 난 잠시 철수를 치워 놓고
혼자라 생각하며 승주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주말에 서울로 올 때는 철수 생각만 했어요. 많이 설레었어요. 고작 3
일 철수를 내 옆에 두지 못했는데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혹시 낯설지 않을까 하
는 생각도 했어요.
"은정이? 그 나이 많은 처자 맞지?"
"네. 근데 저 이제 25살인데요."
"허허, 우리 철수는 23살인데?"
"네?"
"처자가 철수보다 나이 많은 거 맞지?"
"네."
"그러니까 내가 나이 많은 처자라고 해서 기분 나쁘고 그러지 않지?"
"네."
"철수는 오늘 집에 안들어 올텐데."
"네?"
"군대 간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면회 갔어. 오늘 면회가 안되었던 모양이
야. 벽제라고 했나? 그 근처 여관에서 하룻 밤 묵고 내일 친구 면회하고 온다고
전화 왔었어."
"저에겐 그런 말 없었는데..."
"우리 철수가 처자 꼬봉인가?"
"네?"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처자에게 보고해야 되냔 말이지."
"아니에요."
"어디 김씬가?"
"저 홍씨인데요. 남양 홍씨에요."
"음, 그런가? 철수 오면 전화 왔었다고 전해 줄게."
"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저녁이었지만 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볼 생각으로 철수집에 전화를 해 보았어
요. 아버님이 받으시더군요. 이제 저도 목소리만이지만 상당히 친근한 존재가 되
었나 보네요. 아버님이 예전보다 전화 받으시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다른 질문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시네요.
친구 누구 면회 간 거야? 오늘은 그냥 집으로 바로 가야 겠네요.
저녁에 엄마가 병원 일로 집에 오시지 않아 아빠와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
습니다.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베스트 극장 드라마를 봤어요.
"아빠."
"왜."
"저 결혼 안하고 있으면 뭐라 하실거에요?"
"뭐라고 하다니?"
"시집 가라고 강요하실거냐구요."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그럴려구. 그래도 28살 안에는 시집 가라."
"에? 강요하겠단 말이네요 그럼."
"흠, 자식이 너 하나라고 니가 결혼을 늦게 하면 행여 여러 잡념들이 많이 생
길 것 같아. 남들 시집갈 나이에 너도 시집 가."
"저 그럼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 니가 대학 졸업할 때부터 그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흠."
"자식이 저 하나라고 사위 고르실 때 까다로우실 것 같아요."
"아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찬성이다. 난 너를 믿지. 내가
널 못 믿었으면 학교 근처서 그렇게 자취생활 하게 하지 못했다?"
"엄마도 그럴까요?"
"그럴거야."
"아빠."
"왜?"
"저 그냥 회사원에게 시집 가도 되죠?"
"회사원이 어때서?"
"그럼. 음..."
"사귀는 남자 있니?"
"네."
"응? 넌 남자 친구는 많아도 사귀는 사람은 없다고 했잖아."
"이젠 있어요."
"누군데?"
"아빠도 한 번 봤잖아요."
"언제?"
"제 졸업식때요."
"으엉? 그 남자애?"
"네."
"걔 너보다..."
"네, 두살 연하에요."
"허허."
"왜 웃으세요?"
"너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지?"
"네."
"너 걔하고 결혼 할 마음도 있는거야?"
"아직은 결혼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못할 건 없잖아요."
"그 애 아버지가 한의사라고 했지?"
"네."
"더 깊이 생각해 봐라. 그리고 기회 있으면 걔 한 번 집에 데리고 와."
"나중에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난 뒤에 데리고 올게요."
"그래, 넌 아직 학생이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네."
왜 이런 말을 물어 봤을까. 대학원 졸업하려면 아직 일년 반도 더 남았는데.
배 선배가 했던 말이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니었나 보네요.내 가까운 한 사람에
게라도 철수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싶었나 봅니다. 그게 아빠였다
연하가 어때서 49회
누나와 연인 사이가 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 기간 누나를 대하는 데 있
어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가끔 뽀뽀 한 번씩 한다는 게 예전과 달라진
것이다. 쿠쿠, 뽀뽀 한 번 한다는 거. 그걸 단지라고 말하다니 내가 주제 파악
을 잠시 못했나 보다. 감히 가슴 떨리는 일이라 꿈에 조차 잘 나타나지 않는 그
런 일을 두고 단지라고 말하다니... 생 후 처음 와 보는 이런 낯선 곳의 여관 방
에서 하룻밤을 묵을려니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른다.
병장 되기 꼴랑 한 달 남겨 두고 탈장인가 뭔가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승헌이를 보러 이 곳에 왔지만 그 새끼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난 지금 낯선 여관 방에 혼자 누워 냄새 나는 베개를 꼭 껴안고
누나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잘난 여자가 내가 뽀뽀 하자고 하면 한다. 처음엔 장
난 같기도 했는데, 요즘은 결혼 얘기도 나오는 것이 나를 진짜 애인으로 생각하
는 것 같다. 나는 누나와 애인하기로 했지만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고는 아직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헤어짐이 오면 웃어 줄 것이라 다짐하고 누나는 언젠가 딴
남자의 여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연애와 결혼은 항상 같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최근들어 누나에 대한 그런 내 생각이 많이 틀려지고 있다. 누나와 키스하면서
눈을 말똥히 떠고 누나의 표정을 살폈던 적이 있다. 그 잘난 여자는 내게 뽀뽀
를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수줍고 행복한 여
인의 모습이 바로 누나에게 있었다. 한 남자에게 입술을 맡긴 채, 잠시 세상의
일은 한 쪽으로 치워두고 그 남자만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은 모습, 누나도 그랬
다. 조르는 동생에게 마저못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누나는 나를 느끼고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딴 사람에게 줄 수 없을 것 같다. 장하다 박
철수,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정말 수고 많았다.
베개를 꼬옥 더 껴 안았다. 헤헤...
그래서 그럴까? 예전에는 누나가 어떤 모르는 남자와 팔짱을 껴고 걸어 가던,
같이 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조금 서운했던 적은 있지
만 질투심 나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너들이 암만 그래봤자 누나
는 나하고 더 친하다. 이렇게만 생각했었다. 근데 더 친하게 된 연인사이가 되었
는데 요즘 누나하고 친한 척 하는 놈들이 보이면 불안하고 질투심나고 기분 나쁘
다. 분명 요즘이 예전보다 더 친해졌고, 더 가까웁게 지내지만 예전보다 태연하
지 못한 것 같다. 그 새끼... 한 번 날 잡고 싶은 새끼가 있다. 그 자식 참 밥
맛 없는 놈인데 누나 곁에 오래 붙어 있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여전히 불안한 사람이 있다. 예전 누나의 연인이었던 사람, 승주 형. 승주
형이 돌아 와서 누나 곁에 나타나면? 나는 예전처럼 그냥 삐친 모양으로 나 혼
자 내 기분을 삭일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조금 떨어져 주면 더 편할 것이라 생
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누나에게 따지고 들지도 모른다.
껴 안았던 베개를 풀었다. 베개를 머리 쪽으로 옮기고 이불을 덮었다. 한 여름
이 가까이 왔는데도 난 이불을 덮고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잠이 들었다.
"꼬끼 오~"
율전 그 촌 동네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겁나
게 촌 동네인거 같다. 새벽 동이 밝아 온다. 내가 누나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
고 이렇게 일찍 일어 날 필요 없다. 다시 잤다.
"삐리리~"
잠결에 전화 벨 소리를 들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방 빼야죠?"
"아, 지금 몇시인데요?"
"12시 다 되었어요."
내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다. 나, 덮었던 이불을 돌돌 말아 껴안고 있었다. 후
후, 이불 말고 자는 건 은정이 누나가 하던 짓인데...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군발이 면회 가는데 외모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아무리 겉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가지만 군
발이 보다는 확실히 잘 나 보일거다.
면회하는 매점에 앉아 승헌이를 기다렸다. 외모에 좀 신경을 써고 오는건데 그
랬다. 제법 예쁜 아가씨 둘이가 내 가까운 곳에 앉아 나를 흘깃 쳐다 본다. 그
려, 나 금방까지 자다 온 사람이여.
승헌이가 나왔다. 몇 일동안 세수 안한 모습, 그 짧은 머리가 한 쪽은 눕고,
한 쪽은 섰을 정도니 물 근처를 아예 안 간 것 같다. 초라한 국군 병원 복을 입
고 플라스틱 딸딸이에 다리를 절며 반가운 모습 반, 아픈 모습 반으로 나에게 오
는 데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제 저기 앉아 있는 여자들이 날 쳐
다 보아도 된다. 왜? 나 확실히 승헌이 보다는 몰골이 괜찮아 보일 것이기에.
"어찌 된거냐?"
"응? 탈장. 탈장은 말년에는 잘 안 걸리는데..."
"탈장이 뭐냐?"
"한 마디로 장이 탈났다는 거지. 장이 밑으로 떨어져서 수술해서 끄집어 올려
야 되는 병."
"왜 걸렸냐?"
"낸들 아냐."
"병원에 얼마 동안 있은거냐?"
"2주 다 되어 간다. 모레 수술 날짜 잡혔다."
"다리를 절던데?"
"다리가 아픈게 아니고 아랫배가 결려서 그런거다.너 다음주에 한 번 더 와라.
심심해 죽겠다."
"이 더운 날 훈련 안 받고 병원에 있으면 더 좋지 않냐?"
"그건 그렇지만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우리 집에 전화 했었냐?"
"응."
"그 사자 머리더러 자주 오라고 하지?"
"헤헤, 의정이 걔랑은 당분간 모른 척하고 지내기로 했다."
"걔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냐?"
"아니다. 그 애인 사이라는게 말이다. 자꾸 속박하려고 해서, 내가 좀 괴롭더라
구. 걔가 뭐하고 지내는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신경 써 줄 처지가 못되었잖
아. 그래서 그냥 모른 척 내가 의정일 피했어."
"그럼 니가 군화 거꾸로 신은거냐?"
"하하, 그런 셈이지만 사회로 나가면 다시 시작해야지. 친구는 오래만에 만나
도 어색하지 않지만 연인사이는 다르거든."
"군발이다운 생각을 하는군."
"야, 나는 메인 몸인데 애인이 딴 남자 만나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 봐. 기분
어떻겠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먹을 거나 좀 사와."
"지금 내 복장이 이런데 내가 돈이 있을 것 같냐?"
"야, 비싼 차비 들여가며, 어제 면회가 안 되어 비싼 여관방 신세까지 지며 너
만나러 왔으면 대접을 해야 할 거 아냐."
"진짜 싸가지 말년 병장 군기보다 더 없네. 아픈 놈 면회 왔으면 니가 날 대접
해야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대접도 못할 거면서 무슨 배짱으로 날 불렀냐?"
"너 내 친구 맞어?"
"다른 놈들이나 부모님 오셔서 뭐 먹을 거 사다 놓고 갔을 거 아냐. 그거라도
좀 가져 와."
"여기가 무슨 민간 병원인 줄 아나. 잔말 말고 빨리 먹을 거 사 와."
"나 진짜 돈 없어. 어제 여관비 내고 나니까 돌아 갈 차비 밖에 안 남더라."
"참 내. 그럴려면 뭐하러 왔냐?"
"그래, 나 갈게."
"야. 나 심심해. 그럼 커피라도 한 잔 뽑아 와."
승헌이 녀석하고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두 시간을 앉아 놀았다.
"너, 모레 수술하고 나도 일주일 더 여기 있어야 하거든? 다음 주 수요일 쯤에
여기 한 번 더 와라."
"그때 오면 잘 대접해 주냐?"
"면회 오는 사람이 대접하는 거 아니냐?"
"고정관념을 버려라 임마."
"그건 그렇고 너 요즘도 나이 많은 여자들하고 노냐?"
"응."
"너 그러다 빨리 늙는다? 너 이런 심보 가진 것도 아마 나이 많은 여자들 영향
일거야."
"승헌아."
"왜?"
"너 은정이 누나 알지?"
"자가용 타고 다니던 누나 말이지?"
"응. 그 누나 어떻던?"
"예쁘긴 한데 남자를 잡고 살려는 경향이 있어 보이더라. 우리 큰누나와 비슷
해."
"하하, 예쁘긴 하지?"
"졸업했지 않냐?"
"대학원 다녀. 푸하하."
"왜 웃어?"
"너 여자랑 뽀뽀해 봤어?"
"야이씨,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의정이하고 근 육개월 사귀다 군에 들어 온 나
다."
"해 봤구나."
"못해봤다. 흑흑. 다른 놈들은 군대 들어오면서, 와서도 잘만 하더만..."
"불쌍한 놈. 너 진짜 공대만 안 들어 왔으면 진짜 잘난 남자 됐을거야. 내가 봐
도 넌 잘 생겼어. 어쩌다 삶이 그렇게 꼬였냐?"
"공대가 어때서 임마."
"넌 눈이 아주 낮잖아. 그 잘난 외모로 그 사자머리하고 사귄걸 보면."
"니가 몰라서 그렇지 의정이 걔 참 예쁜 여자야. 근데 갑자기 뽀뽀 얘기는 왜
했냐?"
"그 사자머리보다 백 배는 예쁜 은정이 누나가 내 애인이다. 그 누나하고 나 시
도때도 없이 키스하고 그런다."
확실하게 기를 죽이기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본다.
"푸헬헬! 거짓말 치지마. 그 잘난 여자가 대가리 총맞았냐 너하고 키스하게. 술
먹고 장난삼아 뽀뽀 해 준걸로 너 뻥치는거지?"
왜 안 믿지? 그럼 좀 더 강한 거짓말로...
"내 애인 맞다니까. 나 누나 가슴도 만져 봤어."
"뭐! 가슴을 만져?"
야이, 저 옆에 아가씨들이 다 듣잖아.
"아니, 찔러 봤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누나가 내 애인이라니까."
"야, 나이 많은 여자는 나이 어린 놈에게 종종 애인처럼 잘 대해줄 때가 있어.
거기에 속아 넘어 가면 넌 하인되는 거야. 내가 힘으론 우리 누나들 셋이 다 덤
벼도 이기지만 막내 누나에게도 쩔쩔 매는 것은 다 그런 그녀들의 수법에 넘어
갔기 때문이야."
"이 새끼 군발이 되더니 의심만 늘었나."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너 혼자만 아무도 몰래 그렇게 생각 해. 쯔쯧. 나
중에 아픔이 커겠구만."
"나 수요일 날 다시 온다. 그때 보자."
"야, 좀 더 놀다 가, 삐쳤냐? 다섯시까지 있다 가."
"너 혼자 놀아 새꺄."
내가 은정이 누나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친구가 믿어 주지 않았다. 별로 기분 나
쁜 것도 없다. 하지만 누나가 나와 애인사이 된 것이 대가리 총맞을 정도인가?
내가 내 가까운 친구에게도 그 누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랗게 느껴졌나?
지하철 역으로 들어 가 화장실을 찾았다. 내 모습이 별 볼일 없어 보였다. 히
죽 웃었다. 은정이 누나에게 이런 내 모습이 잘 어울릴까?
집에 와서 바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친구 면회 갔었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
"너네 아버님이 그러시더라."
"우리집에 전화 했었나 보네요?"
"응."
"누나 내 애인 해 주기로 했죠?"
"해 주기로? 그거 너 싫어하던 말이었잖아."
"하여튼. 내 애인 맞죠?"
"왜 자꾸 그런 걸 묻니?"
"그 새끼가."
"좋은 말 좀 쓰라. 면회갔던 친구 말하는거니?"
"응."
"걔가 왜?"
"누나가 내 애인이라고 막 자랑했는데 그 새끼가 막 놀렸어. 거짓말하지 말라
고."
"후훗, 너 장난스럽게 말했지?"
"씨, 누나 수요일날 바빠요?"
"바쁘진 않지만 연구실에 있어야 돼."
"그때 결석해요."
"왜?"
"나랑 그 새끼 면회 갑시다."
"응?"
"가서 내 애인 맞다고 좀 말해줘요."
"너 이럴 때보면 참 어린 애 같다."
"내가 누나보다 두살 적다고 그러는거지?"
"또 삐칠려고 그런다."
"갈거야 말거야."
"꼭 가야 되니?"
"응. 내가 오늘 참 많이 수모를 당했단 말이에요."
"너 아직 불안한거지? 그런 생각 언제 떨쳐 버릴래?""
"에?"
"그래, 가서 확인시켜 줄게. 화요일날 서울 올라 오지 뭐. 하루 정도 빠진다고
날 제적시키겠어 어쩌겠어."
"정말 갈래요?"
"가자며?"
"하하, 그럼 내가 화요일날 누나 데리러 갈게요."
"흠. 철수야."
"왜?"
"두 살차이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마. 그리고 내가 너보다 대단한 사
람이라고도 생각지 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보여요?"
"응, 많이."
"그게 보여요?"
"응."
보이나? 어떻게 해서 보이지? 두 살 많다고 나보다 제법 많이 아네. 그건 그렇
고 푸하하, 승헌아 수요일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