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뚜껑이란 참으로 곤혹한 관습이다. 체한 구름들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저물녘의 빗줄기 한 켠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거듭거듭 쌓이는 구름의 찌꺼기들
한 사내가 도시의 가장 낮은 부위를 열어젖히기 위해 등을 구부렸고, 한순간 물의 못이라도 박듯 낮고 질펀한 것들이 일시에 몰려든다. 오랫동안 먼지 속을 부유하던 소음들과 저녁 한때의 어스름이 휩쓸려 들어가고 누군가 헛디딘 추억 하나가 좁은 물살을 그으며 꾸역꾸역 사라진다.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도시 곳곳이 관습의 오래된 입구를 헤매다가 구름이 열어준 힘에 깨어나고 있다.
뚜껑이란 얼마나 곤혹한 관습인가 누군가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넋두리라도 여는지 비척비척 빗물의 가운데로 중심을 잃으며 쓰러진다. 그래 뚜껑이란 참으로 곤혹한 관습이다.
늙은 앵무새는 장마가 걷히기 전 침묵에 들 것이고 주인 여자는 입 안에 수화라도 숨기고 있는 듯 모든 우울을 몸짓으로 뱉어낼 것이다. 무언가 창유리 속에서 넋두리의 두께라도 살피듯 바깥 저기압을 넘겨다보던 그녀의 눈길이 방금 내리누르기 시작한 구름의 폭압에 납작해진다. 낮은 평온에 빠져 있던 꽃들이 달력 속의 날짜를 빠져나와 그늘진 구석으로 가늘게 휘어지고 비가 그친 어느 한때, 모든 우울들은 개미 소리처럼 부산하다.
어차피 어떤 인생도 맨홀 없이는 진실의 가장자리를 배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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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누란에 기대어
소금밭에 뛰어내린 비는 다 화상을 입었다
세상의 어떤 화상(火傷)이
재수 없이 소금밭을 택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대나무 잎새 속으로 절망의 발자국을 새겨 넣는
겨울새들의 착각과 같지 않을까
상처와 상처들이 모순에 빠지려고
서로의 이마를 포기하고 있는 한순간의 화상들
겨울 소금밭의 상처는 바람의 소행이 아니라
묵정의 날들을 보낸 비의 소행일 때가 많다
부패되지 않으려, 부패되지 않으려고
제 못 박힐 자리를 찾다가
천형을 택한 저 비들의 환한 범죄
이곳에 햇살의 길이 날 것을
나는 겨울이 되기 전 꿈꾸지 않는다
다시 소금밭에 들어온 햇살이
잘못 끼어든 미꾸라지처럼 화상을 입은 듯
용솟음치는 날이 될 때까지는
나 좀더 낮은 욕망으로 흩어져 지내야 할,
겨울 소금밭에 때늦은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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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밭
텃밭 안 모든 기억들은 노랗게 바빠지기 시작한다
어떤 기억이든 넝쿨을 밟지 않으면
꽃에 이르지 못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야광찌처럼 흔들리던 노란 생애들
나는 비루해지고
저녁은 잣씨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가벼움이란 한때 현기증과도 같았다
갓끈을 매고
발아래 길들을 정제하던 시절을 빠져나오기까지는
세상의 패륜들 참외밭을 훔치지 않았다
참외밭은 유배지다
넝쿨이 꽃들을 부르고 꽃이 넝쿨을 잠재우는 동안
수양은 단종을 유폐하고 청령포를 유폐하고
구중궁궐로 들기 위해 참외밭을 훔쳤던가
참외밭에선 낮은 곳의 욕망을 고쳐 신으면 안 된다
헛기침을 하거나 길을 물어서도 안 된다
노란 세월들에겐 그저 노란 은둔만이 약일 뿐,
오늘 공터 한 켠 텃밭에 이르러
이름이 되지 못한 망각들 욕망들이 익어가는,
그 고전적 사화에 묶여 있던 열매 몇 담는다
늙어 디뎠어야 할, 그 곳을 젊어 탕진한 게
애시당초 과오였음을 나 이제야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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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옥 / 강원도 양양 출생. 2009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누란에 기대어』.
첫댓글 멋있습니다. 간만에 선생님의 멋진글 읽으니 경주가서 쌓인 울화가 화~~~~~~악 풀립니다. 멋진 이일옥선생님
좋은글 축하드려요 ^**^
오늘와서 한번 더 읽어요. [참외밭] 참 좋습니다. 선생님의 깊은 내공에 박수를 보냅니다. 저도 젊어서 탕진한것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 과오를 아직도 모르고 그렇게 룰룰룰룰루~ 그러고 다니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