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정족산 전등사(鼎足山 傳燈寺)를 찾아서 ① -입구에서 동문 삼랑성, 대조루, 대웅보전까지- 지난 4월 7일 일요일에 전등사를 다녀왔습니다. 강화도로 봄나물을 채취하러 들판으로 가고 싶어하는 옆지기의 청원이 있어 한 군데 사찰을 순례하고 나물을 채취하러 들판으로 가면 좋겠다 싶어 일단 전등사로 가기로 했습니다. 전등사는 몇 번 다녀온 바 있지만 오래 전의 일이고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참에 자세히 살펴볼 요량이었지만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준비없이 떠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전등사에는 무슨 새로운 주련이 없을까 기대하면서 전등사로 향했습니다.
오전 07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8시 20분경에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주차장에서 잠시 쉬고 바로 전등사로 향했습니다.
아주 최근에 시멘트로 포장한 것 같습니다.
아직 순례객들이 없어 호젓하게 새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는 중입니다.
나무 계단 위는 무슨 건물일까 했는데 즐비한 먹자골목 식당들입니다.
먹자골목을 지나 동문매표소에서 문화재구역 입장료를 끊었는데 일반 어른은 개인 3000원입니다. 바로 삼랑성이 나옵니다. 오랜만에 와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삼랑성(三郞城) 동문(東門)입니다.
삼랑성(三郞城) 안내문
삼랑성(三郞城) 사적 제130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夫餘ㆍ夫虞ㆍ夫蘇]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三郞城)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傳燈寺)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史庫)와 선원보각(璿源譜閣)이 있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고종 3년. 1866년) 양헌수(梁憲洙)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선원보(璿源譜)』를 지켰다. 1976년에는 남문인 종해루(宗海樓)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삼랑성(三郞城) 모습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비각(碑閣)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안내문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1866년(고종 3년. 丙寅年)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수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梁憲洙 將軍))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 라고 새겨저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憲宗) 14년(184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항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181cm, 비신의 높이가 163cm, 너비 60cm, 두께가 27cm이다.」 멀리 보이는 것이 남문(南門) 종해루(宗海樓)인가 봅니다. 이곳을 가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에 전등사 순례갈 인연이 이르게 되면 남문을 통해 전등사로 가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 왔는데 모두 동문을 통해서 전등사 경내로 들어갔는데 이는 남문의 존재를 잘 몰랐던 탓입니다. ^^ 본격적인 경내로 들어갑니다.
큰나무와 윤장대(輪藏臺) 큰나무 안내문 전등사 윤장대(傳燈寺輪藏臺) 전등사 윤장대(傳燈寺輪藏臺) 안내판 여기서 전등사 윤장대를 <보물 제684호>를 똑같이 재현했다고 하였는데, <보물 제684호>는 예천 용문사 대장전(大藏殿) 안에 시설되어 있습니다. 이 용문사 윤장대를 모범으로 하여 전국 사찰 곳곳에 시설되어 불심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윤장대를 보면 연상되는 것이 티벳불교의 마니차입니다. 마니차는 티벳불교의 독특한 불구인데, 겉에 불경을 새기거나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으로 들고 돌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돌리면 불력이 사방에 퍼진다고 믿고 있으며,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한 번 독송한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니 윤장대와 동일한 소용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_(())_ 보호수 은행나무 -강화 4-9-66 수령 약 700년- 보호수 은행나무 안내판 보호수 은행나무 -강화-4-9-67 수령 약 350년- 비니초님이 은행나무 밑의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 이야기>를 읽는 중입니다. 보호수 은행나무 안내문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 이야기 글씨가 작아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옮겨 봅니다.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 이야기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전국의 사찰은 조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승려는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일에 사역을 나가야 하였고 사찰에서는 제각기 특산물을 공물로 받쳐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해에 관아에서 전등사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에서 수확량의 두 배를 공물로 바치라고 한다고 동자승이 노승에게 전하였다. 전등사의 노승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풍년이 들어야 열 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노승은 도술이 뛰어난 백련사의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자승을 추송 스님에게 보냈다. 동자승과 함께 온 추송 스님은 은행열매가 더 열리게 하는 3일 기도에 착수하였다. 마지막 날 늦은 오후 은행나무 앞에서 3일 기도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추송 스님이 축원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은행나무가 앞으로 천년만년 열매를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관군들과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가 들었을 땐 기도하던 추송 스님과 노승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하였다. 이후 은행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았으며, 긴 세월의 풍상과 역사의 상처를 안은 채 오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사고 있다.」
추송 스님께서 더 많이 열매를 맺게 하였다면 수탈도 더 많아져 두고두고 수탈을 당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라 아예 문제의 근원을 없애 버리는 기지를 발휘했네요. ^^
은행나무 앞에 세워진 석비(石碑)
진무중군 이공용의 애휼승도 영세불망비 鎭撫中軍 李公容儀 愛恤僧徒 永世不忘碑
뒷면에 동치칠년무진십이월 립(同治七年戊辰十二月 立)이라 했으니 동치(同治)는 청나라 연호입니다. 우리나라는 고종 5년(1868)에 해당합니다. 병인양요(고종 3년 1866년) 2년 후에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무중군(鎭撫中軍) 이용의(李容儀)가 승도를 구휼한 일을 잊지 말자고 세운 비입니다.
강화도는 고려 때는 몽고군과 싸우고 조선 말엽에는 외세와 싸웠던 격전지였음을 감안할 때 강화도의 도민과 승도들이 얼마나 처절한 고난을 겪었는지 헤아려 보게 됩니다.
전등사로 걸음을 옮깁니다. 전등사는 큰 나무들이 즐비합니다.
가다 보니 죽림다원이 내려다 보입니다.
죽림다원 여유가 있어 머물다 가면 좋겠지만 통과합니다.
전각배치도
강화 정족산 전등사(鼎足山 傳燈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정족산성 안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입니다.
1942년 편찬된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의하면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11년(38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그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했으며, 또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년)과 원종(元宗. 1259~1274년) 때에 가궐(假闕)을 짓고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베푼 다음, 원종(元宗) 7년(1266년)에 사승(寺僧)이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고 합니다.
그런데 창건에 관해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강화도가 고구려의 영토가 된 것은 소수림왕 11년보다 약 100년이 지난 장수왕(長壽王) 63년(475)의 일로서,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백제의 불교공인은 침류왕(枕流王) 원년인 384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恭愍王) 15년인 1366년에 제작된 연기(年記)를 지난 향로(香爐)에는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이 보이고 있어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라 합니다.
충렬왕(忠烈王) 8년인 1282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 왕씨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중국의 송(宋)나라에 들어가 당시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가졌다는 중국 복주(福州) 동선등각원판(東禪等覺院板)의 송나라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여 이 절에 보장했다고 합니다.
사찰의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이름 전등사(傳燈寺)는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玉燈)을 이곳에 시주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고쳐 전등사(傳燈寺)라 했다는 것입니다. 혹은 당시 고려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조계선종의 법맥과 종지(宗旨)를 천명하는데 필수적인 책이었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의 이름에서 기인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처음 만나는 누각입니다.
전등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없습니다. 아마도 삼랑성의 남문이나 동문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전등사(傳燈寺) 사액이 보이는 이 누각을 일러 대조루(大潮樓)라 합니다.
이 계단을 올라 웅장한 대조루 밑을 통과하면 바로 대웅보전이 바로 나옵니다. 전에도 몇 번 왔거만 새롭기만 합니다.
정족산 전등사(鼎足山 傳燈寺) 사액(寺額).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선생 글씨-
안쪽에는 대조루(大潮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대조루(大潮樓)는 밀려오는 조수(潮水)를 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운치있는 누각입니다. 이 대조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입니다.
이 대조루의 초창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英祖) 25년(1749년) 총섭(總攝) 초윤(楚允)ㆍ청민(淸敏)ㆍ보학(寶學)등이 개건 하였다 하며, 헌종(憲宗) 7년(1841년) 총섭 (演弘) 스님이 중건하였고, 그후 불기 2460년(1916년) 창환(昌煥) 스님이 중축하였으며, 불기 2476년(1932년) 대조루를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5언 14구의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이 대조루 기둥에 있는 주련을 찍느라고 정신이 팔린 나머지 대조루 사진을 놓쳤네요. 나중에 <주련의 향기>방에 소개해볼까 합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엔 연등달기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178호-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九龍吐音)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전등사 홈피에서 옮김-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광해군(光海君) 13년(1621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합니다. 이 건물이 처음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의하면 고려 원종(元宗) 7년(1266년)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1916년 대웅보전 수리 때 발견된 『양간록(梁間錄)』에 의하면 선조(宣祖) 38년(1605년)에 대웅전의 일부가 불탔으며, 이로부터 광해군(光海君) 6년에 다시 불이 나서 대웅전 건물 전부가 소실(燒失)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해빙(解氷)과 동시에 바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광해군(光海君) 13년(1621년)에 연목(椽木)을 얹어 건물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목을 올렸다는 기록과 함께 양식적인 면에 있어서의 가구(架構)의 특징으로 보아서는 조선 중기적 수법에서 다소 뒤떨어져 보인다고 합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1915년 당시 주지였던 국창환(鞠昌煥) 스님이 중수(重修)했으며, 1932년 주지 이보인(李普仁) 스님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고 기타 부속건물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 몸 두루 하여 시방세계 충만하니 月印千江一切同 월인천강일체동 천강에 달 비추듯 일체도 이와 같네.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네 가지 큰 지혜가 두루 밝은 모든 성인 賁臨法會利群生 분림법회이군생 이 법회에 왕림하여 많은 중생 이익 주네.
이 게송을 읽어보니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첫구가 다르게 쓰여져 있네요. 이 게송은 《석문의범(釋門儀範》『칠성청(七星請)』이나 『미타청(彌陀請)』「가영(歌詠)」에 나오는데 '威光遍照十方中(위광변조시방중)'으로 나옵니다. "위광이 두루하여 시방세계 비추심이"로 새겨지는 글이지요. 그래야 해석이 매끄럽게 되는데 '佛身普遍十方中'으로 해 보니 좀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
목조삼존불좌상(木造三尊佛坐像) -보물 제1785호-
상서로운 불단 화려한 보궁형 닫집 아래 세 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중앙에 석거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습니다.
강화 전등사 목조삼존불좌상(江華 傳燈寺 木造三尊佛坐像) -보물 제1785호-
강화 전등사 목조삼존불좌상(강화 전등사 木造三尊佛坐像)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首畵僧)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수연이 수화승으로 조성한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두 번째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조각승들과 나타난 발원시주자들의 명단이 잘 전하여 불상(佛像), 면금(面金), 체목금, 체목, 오금(烏金), 좌대(座臺), 보단(甫團), 채안(彩安), 복장(腹藏) 등 세부적인 시주 항목이 기록된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져 시기적으로 앞서는 같은 수연 작의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 보물 제1751호)에 비해 조각적으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삼존불상의 얼굴은 각각 독특한 상호를 보이고 옷주름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전등사 삼존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들 가운데 수화승 수연과 함께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조성에 참여했던 성옥(性玉)의 조각적 개성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화원으로 참여한 영철(靈哲)은 이후 《옥구 보천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34년, 익산 숭림사 봉안)과 《남원 풍국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39년, 예산 수덕사 봉안)의 조성에 수연을 따라 참여했으며 성옥에 비해 연배가 아래인 조각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위키백과>에서 옮김.
강화 전등사 목조삼존불좌상(강화 전등사 木造三尊佛坐像)은 2002년 12월 23일 시도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12월 27일 해제되고, 보불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신중탱화(神衆幀畵) -불기 2460년(1916년) 제작-
화기를 읽어보니 불기 2943(2460)년 5월 13일 금어(金魚) 출초(出草) 고산 축연(古山 竺演) 편수(片手) 보경 보현(寶鏡普賢) 스님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신중탱화는 좀 특이해서 간단히 설명을 붙여 봅니다.
일반적인 신중탱화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중앙에 배치하고 좌우에 범천제석(梵天帝釋)을 배치하거나 그 위에 예적금강을 배치하고 있는데, 전등사 대웅보전의 경우는 중앙에 예적금강(穢跡金剛)을 화면에 꽉 차도록 배치하고 좌우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배치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용왕(龍王)과 역사(力士) 그리고 판관(判官) 등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데 아주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예적금강은 석가모니부처님이 화현(化現)한 모습으로 부정금강(不淨金剛), 화두금강(火頭金剛)이라고도 합니다. 더러운 것을 없애므로 예적부정(穢跡不淨)이라 하고, 온 몸에서 지혜의 불길을 내뿜기에 화두(火頭)라고 합니다. 엄한 상을 하고 있으며, 삼면(三面), 삼목(三目), 팔비(八臂)로서 독사를 몸에 감거나 잡고서 법륜(法輪)을 굴리면서 온 몸에 치솟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일반적인 예적금강도상은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고, 정면의 얼굴에 눈은 셋이며, 힘줄솟은 근육의 팔로 항마구인의 칼과 금강령(金剛鈴)을 집지(執持)하고, 불바퀴[火輪] 위에 서서 나계범왕(螺髻梵王)을 조복시키시는 형상입니다.
예적금강(穢跡金剛)은 밀교 오대명왕(五大明王) 중 한 분인 부동명왕(不動明王)의 화현이라 합니다. 중생에 대한 깊은 자비심으로 더러운 곳을 피하지 않고 구제하는 명왕(明王)입니다. 적(跡)은 적(迹. 積)으로도 씁니다.
예적금강(穢跡金剛)은 범어 Ucchuṣma를 음사한 오추사마(烏樞沙摩)오추슬마(烏芻瑟摩. 烏樞瑟摩)로 음사하며,신역에서는 오추삽마(烏芻澁摩)라 음역하며, 예적금강오추삼마명왕(穢積烏芻澁摩明王), 예적명왕(穢跡明王)이라고도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오락에 빠져 오지 않은 나계범왕(螺髻梵王)을 소환하기 위해 석가여래 왼쪽 옆구리에서 화현했다고 해서 석가화현(釋迦化現) 예적금강이라 합니다. 범왕 주변의 부정(不淨)을 대지로 변하게 하고 범왕을 소환하였기에 대역사(大力士)라고도 합니다.
대장경판(大藏經板)
고려 충렬왕(忠烈王) 8년(1282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인기(印奇) 스님을 통해 송나라 대장경을 가져다 두게 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경판은 조선(朝鮮) 중종(中宗) 39년(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불단의 모습. 참고사진으로 모셔온 사진입니다.
불단은 인천유형문화재 제48호라고 하는데 미처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광해군(光海君) 13년(1621년)에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전등사에 가시면 자세히 살펴 보세요.
그런데 불단을 일러 수미단(須彌壇)이라고 하는데 수미산(須彌山)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는 대좌(臺座)를 말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수미단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이 대좌가 수미산(須彌山)을 본 딴 모양이라는 일본학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말로 이치에 맞지 않은 아주 잘못된 용어라고 미술사학자 강우방(姜友邦) 교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수미산 정상에는 도리천(忉利天)이 있으며 제석천(帝釋天)이 머물고 있는 것이지, 여래가 머물러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 정상에 여래가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정체불명의 잘못된 용어를 불교미술계에서 계속 쓰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하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으니 부처님께서 계신 곳은 언제나 상서롭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충만한 곳이기에 "영기단(靈氣壇)"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 타당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아직 용어가 정립되지 않았기에 일단 <불단(佛壇)>이라고 칭합니다.
난치병 어린이 돕기 자선모금
무엇을 담으려 하는걸까요?
전등사 대웅보전이 유명한 것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네 귀퉁이 보머리 사이에 있는 나신상(裸身像) 때문입니다. 일명 나부상(裸婦像)이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침 저녁으로 목욕재계하며 절을 짓던 도편수(都片手)가 어느 날 피곤을 풀기 위해 마을로 내려와 주막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려던 차에 그만 주모에게 반해 정을 주며 공을 들였고, 사랑을 키워 살림을 차리려고 하였는데, 공사가 끝나갈 무렵 주모가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하고 믿고 맡겼던 돈을 가지고 달아나 찾을 길이 없어 도편수는 크게 절망하고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아 증오심이 커져 갔지요. 그래서 복수할 방법이 없자 묘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묘안이 떠올라 복수할 요량으로 벌거벗은 여인상을 깎아 법당 네 귀퉁이 추녀 밑에 나부상(裸婦像)을 안치하여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며 세세생생 고통을 받으라고 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자대비 부처님 법당을 지으면서 술을 먹고, 애정행각에 빠지고, 복수할 증오심으로 처마에 나부상을 안치했다는 전설이 자비무적(慈悲無敵)의 불교정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부상(裸婦像)이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부상(裸婦像) 모습 1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고 이로 인하여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부상은 언제 조성이 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아무래도 인 건물이 중건된 때이겠지요. 이 건물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광해군(光海君) 13년(1621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나부상(裸婦像) 모습 2
이 대웅보전의 나신상(裸身像)을 바라보는 견해가 또 하나 있는데, 이 나신상은 나부상(裸婦像)도 원숭이상도 아닌 나찰상(羅刹像)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습니다.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허균 선생의 저서 《사찰 100美 100選》에서 전등사의 조각상은 나부상(裸婦像)이 아닌 불법 외호하는 호법신장인 나찰상(羅刹像)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의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형상은 사람의 모습을 닮았는데, 옷을 거의 다 벗은 채로 작고 네모난 연꽃 대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손과 머리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 전체가 핑크색을 띤 살색으로 채색된 이 인물상 중에는 몸에 폭이 좁고 긴 천으로 사타구니 사이의 부끄러운 곳을 가린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도 있다. 눈은 크고 부리부리하게 생겼으며, 약간 벌린 입술 사이로 하얀 이빨이 드러나 있다.
대웅보전 사방 모퉁이 추녀마다 하나씩 모두 네 개의 조각상이 배치돼 있는데, 그 중에서 북서쪽에 있는 눈동자가 파란색인 인물상은 왼쪽 팔은 위로 들어 추녀를 받치고, 오른쪽 팔은 오른쪽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어 양손을 다 들고 있는 다른 것과 차이가 난다. 파란 눈동자는 다른 신중 계통의 인물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나찰(羅刹)만이 가진 특징으로, 이것은 이 조각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 위의 사진을 말함.)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조각상들을 나녀상(裸女像), 또는 나부상(裸婦像)으로 알고 있으며, 이 상이 대웅보전 추녀 밑에 있게 된 내력에 대해서는 이 조각상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전설의 내용을 맹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등사 측에서도 절을 찾아 온 일반 관광객들에게 이 조각상을 설명할 때도 전설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관광 안내 책자. 문화재 답사 단체의 안내인들도 모두 전설의 내용을 들먹이며 이 조각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일까?」 (☞ ↓ 흥미가 있어 계속 인용해 봅니다)
나부상(裸婦像) 모습 3
「전설에 따르면 광해군 시절에 대웅보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래 마을에 사는 술집 아낙네와 정분이 나서 자기가 갖고 있던 물건과 돈을 모두 그녀에게 맡겨두었는데, 공사가 끝나갈 무렵에 술집 아낙네가 그 돈과 물건들을 갖고 도망 가버렸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삭히지 못해 그 여자를 나체 형상으로 만들어 무거운 추녀를 들고 있게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전설의 여자주인공이 주모가 아니라 도편수가 사랑한 여인이고, 그 여인이 목수가 공사에 전념하는 사이에 다른 남자와 함께 도망가니 그에 대한 복수로 나체상을 만들어 법당 모퉁이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전설의 내용처럼 법당 불사에 참여하고 있던 목수가 과연 자유롭게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여자와 놀아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을 조성하는 동안 바깥출입을 못하는 남편 아사달에 대한 그리움에 지쳐 영지(影池)에 투신한 아사녀의 슬픈 이야기가 담긴 불국사의 '무영탑 전설'을 보더라도 전등사 목수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자유롭게 술집을 드나들 수 있었다손 치더라도 술집 아낙네의 배신에 대한 복수심을 담은 조각상을 신성한 불전 건물, 그것도 불전 건축의 구조상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전등사 스님들이 아무리 넓은 아량과 이해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행위까지 용납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한 개도 아닌 네 개의 조각상을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 불전 건물을 돌아가며 배치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의 인물상이 단순히 벌거벗은 여인상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사례가 보은 법주사 팔상전 추녀 밑에 있다. 팔상전은 부처님 생애의 여덟 가지 중요하고 극적인 장면을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한 전각으로, 법주사 불전 건물 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다.
팔상전은 5층 목탑 구조로 되어 있는데, 2층 추녀 밑에 용의 상과 난쟁이 조각상이 공포(包) 위에 올려져 있다. 네 곳의 추녀 중 세 곳에 난쟁이 상을, 한 곳에 용의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난쟁이상은 공포를 구성하는 수서(垂舌 ; 공포에서 쇠서 끝이 아래로 삐쭉하게 휘어 내린 모양으로 된 것) 위 두 개의 연꽃 봉오리 위에 쪼그리고 앉아 두 팔과 머리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입에 용의 꼬리를 물고 있다. 눈은 왕방울 눈이고, 나선형으로 표현된 눈썹과 수염은 짙은 색깔이다. 전등사의 조각상과 이 난쟁이상들의 유사점은 첫째, 반나체의 모습이라는 점, 둘째, 배치되어 있는 위치가 추녀 밑이라는 점, 셋째, 쪼그리고 앉아 두 팔로 추녀를 떠받치고 있다는 점 등이다.」 (☞ ↓ 계속 인용해 봅니다)
나부상(裸婦像) 모습 4
「일본의 사찰 건물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조각상을 찾아 볼 수 있다. 나라 현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의 오층 목탑에 장식된 난쟁이 조각상이 바로 그 예인데, 일본에서는 이 물상이 나찰상으로 알려져 있다. 호류지 목탑도 법주사 팔상전과 마찬가지로 오층 목탑 구조로 되어 있는데, 2층의 네 모서리 추녀 밑에 나찰상이 올려져 있다. 쪼그리고 앉아 두 팔로 무릎을 짚고 양 어깨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것과, 두 팔을 들어 추녀를 받치고 있는 것 등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어느 것이나 얼굴에 힘겨운 표정이 역력한데, 이것은 이들이 그냥 추녀 밑에 앉아 있지 않고 힘겹게 추녀를 떠받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묘법으로 보인다.
나찰상의 원형을 살펴 볼 수 있는 예가 동인도 오리샤 주(州) 코나락 지방의 태양사원에 현존하고 있다. 이 나찰상 역시 배가 통통한 난쟁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두 팔과 머리로 위쪽 건축 부재를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상과 꼭 닮은 난쟁이상이 팔공산 환성사 대웅전 불단 우측면에서 발견된다. 적갈색 몸에 볼록 튀어나온 배, 부리부리한 눈과 주먹코가 인상적인 이 난쟁이상은 쪼그리고 앉아 짧고 통통한 두 팔을 들어 위쪽의 단을 받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스님들은 이 상을 나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찰은 범어 락샤사(Raksasa)를 음역한 것이다. 남성신은 나찰사(羅刹娑) 또는 나차사(羅叉娑)로 불리며, 여성신은 나찰사(羅刹斯) 또는 나차사(羅叉私)라고도 불린다. 뜻으로 번역해 사용하는 말에는 식인귀(食人鬼), 가외(可畏), 속질귀(速疾鬼), 호자(護者) 등이 있다. 나찰은 그 이름처럼 원래 잡귀(雜鬼)의 하나로, 신과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였다. 푸른 눈, 검은 몸, 붉은 머리털을 가진 모습을 하고서 신통력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며 언제나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다고도 한다. 이런 나찰이 불교의 성립과 더불어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 외호신이 된 것이다. 나찰은 야차(夜叉, yaksa)와 함께 다문천왕 권속에 들어가 있으며,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부정을 물리쳐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긴 인용문을 통해 살펴보았지만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번 굳어진 통념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이 설명이 호응을 얻더라도 나부상 전설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웅보전의 모습
대웅보전의 이야기는 많은데 끝으로 법당안을 보면서 또 하나 느꼈던 것은 법당 내부 기둥이나 불단의 나무 기둥 등을 보면 붓으로 쓴 이름들이 수없이 보입니다. 이는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그 불안한 마음을 안고 불전에 들어와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자 하는 염원이 서려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대웅보전에 서린 여러 가지 일을 깊이 느끼며 물러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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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_()_
전등사 나부상에 대하여 의문이 드는 점이 어찌 자비문중에서 실연으로 증오심으로 불순한 의도가 있는 나을을 보고 이야기를 꾸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감사합니다. _()_ _(())_
안치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더구나 대웅보전의 성전에 말입니다. 저는 허균선생의 설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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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