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데서는 사람마다 달라서는 안 되고 똑 같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가 배운 것과는 다르게 경전을 이해하면 그것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대의 해석은 바르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문득 이런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배를 타러 갔습니다. 거기서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음, 이 사람은 배를 타러 왔군.’ 하고. 그런데 내 옆에 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이 사람은 아침은 무엇을 먹고, 여기까지 오는 데는 어떻게 왔고, 이 배를 타고 나서 가는 곳은 어디이군.’ 하면서 일의 처음과 끝을 모두 다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나는 저기 세상에만 각양각색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데도 각양각색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경전의 글을 보고 그 문장의 뜻만 이해하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문장이 내포한(또는 그 문맥에서 내포한) 많은 뜻까지도 함께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에는 취미도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듯이, 여기 경전을 이해하는 데도 다양한 방식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취미나 얼굴 생김새 때문에 내가 옳고 그대는 그르다고 사람들과 다투지 않듯이, 나도 이제는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과 다투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나는 그 문장에 쓰인 한 가지 뜻만을 말하고 그들은 그 문장이 내포한 두 가지 세 가지 뜻을 말해도, 나는 잠자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나는 내가 배운 방식을 좋아하고 거기에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씀하셨고, 어느 경전을 읽어도, 고와 고멸을 이해하고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훌륭하게 잘 설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몸이 병들어서 마음이 고통스러우면 오온을 사유해볼 수 있고, 살아가면서 온갖 괴로움을 다 겪으며 늙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일을 알아보려면 십이연기를 사유해 볼 수 있고, 저기 아름다운 형상이나 소리 냄새 맛 감촉 법 때문에 위험에 빠진다면 육내입처 육외입처를 사유해볼 수 있고, 아 이 세상에 있는 괴로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다면 사성제를 사유해 볼 수 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닦고 싶으면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를 사유해볼 수 있고, ...
그래서 이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저기 세상에서 취미가 다르고 얼굴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서 남과 다투지 않듯이, 여기 경전을 해석할 때도 한 가지 뜻만을 말하든 두 가지 세 가지 뜻을 말하든 사람들과 다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지난 토요일(11월 25일) 조계사 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깨달음 학술 세미나에 참가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듣고 배운 내용입니다.
인식과 행위,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찬다(欲)와 애(愛, 갈애)을 들었습니다.
갈애의 형성 과정을 들었습니다.
의(意)가 몸과 함께 하는 영역이나 식(識)이 몸과 함께 하는 영역 말고, 심(心)이 자기의 상(相)에 대해서 활동하는 영역을 들었습니다. 여기는 아직 과학이나 심리학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들었습니다.
‘번뇌’ ‘무명, 탐, 진’ ‘탐, 진, 치’ ‘갈애’의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상분결과 오하분결의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苦)의 고집멸도와 누(漏, 번뇌)의 누집멸도를 들었습니다.
이상에서 듣고 배운 것을 생각해보니, 보통 우리가 말하는 욕심과 성내는 일마음은 갈애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탐, 진, 치’의 자리가 아니고 행위의 자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자네는 욕심이 너무 많네.’ 할 때의 욕심이나 ‘자네는 너무 화를 잘 내.화내는 마음이 강해.’ 할 때의 화는 화 내는 마음은 저 깊은 내면의 ‘탐, 진, 치’의 자리가 아니고, 여기 바깥의 ‘신구의’ 삼업 할 때의 의업(意業)의 자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 글을 쓰면서 이제는 그렇게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네는 너무 욕심이 많네’ 할 때의 욕심이나 ‘자네는 너무 화를 잘 내.화내는 마음이 강해.’ 할 때의 화는 화내는 마음은 여기 의업의 자리이다.‘ 하고.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서 ’탐, 진, 치‘가 만들어지고 난디(즐김)가 생겨나서 갈애가 되고 난 후, 나는 이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몸과 말과 마노(意)로 행위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말하는 욕심이나 화는 화내는 마음은 여기 의업의 자리라고 이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화'를 -> '화내는 마음'으로 수정함, 당일 9시 48분)
첫댓글 말을 자꾸 하자니 그렇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그렇고... 참...
용어가 많은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필요하면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도 있기는 한데요. 말을 만들어도 적정해야 하고, 기존의 것과 조화롭고 통합적인 이해를 지향해야 합니다. '고집멸도'에 이미 번뇌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번뇌의 위치는, 고집멸도 중 '집'에 해당합니다. 번뇌는, '원인'이거든요. 그런즉 누집멸도는, 적정하게 만들어진 용어로 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요... 승려를 포함한 전문가 그룹에서, 말을 좀 무책임하고 부주의하게 만들고 주장한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안타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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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분노와 탐진치에서 진의 자리를 따로 잡아주는게, 이해가 잘 되던가요?
알아차림 연습으로 분별력과 집중력이 좀 개발되서요. 4념처 신수심법 중 심(마음)을 나름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나름 선명하게 알아차려질 때, 바로 그 순간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으면요. 강하게 붙잡을수록 즉 집중이 강해질수록, 점차 개성이 상실됩니다.
'개성이 상실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요. A분노든 B분노든 집중해 들어가면, 일상처럼 A분노와 B분노와 같은 분별이 성립하지 못하구요, C라는 상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C라는 공통된 모습을 가진다는 거죠. 그래서 위계를 상정할 수도 있고, 상정할 필요성도 있는 겁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는데요. C라는 공통된 모습을 가진다고 하여, A분노와 B분노 모두가 같은 C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들자면요. 영화에서 동일한 모습이 나와도, 순간마다 다른 필름인 것과 같습니다. "A분노-C" 그리고 "B분노-(A의 경우와 다른 것이지만 단지 같은 모습인) C"가 성립할 뿐이라는 겁니다.
누집멸도에 대하여
번뇌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저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고집멸도 다음에 누집멸도가 나오는 경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우선 찾아보니, 사문과경(D2)의 97절, 웨란자 경(A8:11)의 14절, 두려움과 공포 경(M4)의 31절에서 고집멸도가 나오고, 그 다음에 누집멸도가 나왔습니다. 그 밖에 여러 경전에서 고집멸도 다음에 누집멸도가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그 경전들에서 왜 고집멸도 다음에 누집멸도를 말씀하셨는지, 그 부분을 아직은 잘 모릅니다.
인식과 행위
저는 이제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갈애 상태의 마음이다.’ 하고.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인식하고 행위하더라도 나는 갈애 상태에서
인식하고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화내는 마음을 품는 것은 갈애를 형성하는 ‘탐, 진, 치’의 자리가 아니고, ‘수 → 애 → 취 → ...’에서 취(取)의 자리라고 이해합니다. 이 취의 자리가 신구의 삼업이 행해지는 곳이라고 이해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화내는 마음은 신구의삼업 중에서 의업(意業)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업은 ‘십선업, 십악업’의 위치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참고로 이런 십악업 중의 의업의 제거는 사념처 수행으로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탐진치의 멸진”이 열반이라고 할 때는 의업에 있는 ‘사견, 간탐하는 마음, 화내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탐, 진, 치의
멸진은 (염오, 이탐하여) 사마타-위빳사나의 영역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위치를 [ 수 → ‘번뇌의 개입’, ‘무명, 탐, 진이 만들어짐’ → 애 → 취 (신구의 삼업을 지음) → 유 ... ]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경우
방문객님이 자세히 설명해주신 알아차림의 예시는 제가 알아차림하지 못하고 얻지 못한 부분이라서 참고하겠습니다.
위에서, 번뇌는 고집멸도 중 집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적었습니다. 고요님이 언급한 [경]에서도, 괴로움의 원인을 멸했다는 취지에서 번뇌의 소멸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번뇌 중 '만'이라는게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라는 용어는요. 천년이 넘게 사용되어 왔구요. 그 용어에 사용된 글자만으로 살펴도, 이해를 그르치게 할만한 그 어떤 위험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멸도성제'라는 별도의 용어를 만드는 것은, 불필요한 혼동만 만드는 것으로, 지극히 오만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이제는 누집멸도 내지 누집멸도성제라는 용어도 따로 만듭니까? 장난도 아니고 도대체 뭐죠?
고멸도성제라는 이름을 만들어 놓으니까...님이 위의 꼬리말에서 인용한 [경]등에 나오는 '괴로움을 멸하고 멸하는 길'과 '번뇌를 멸하고 멸하는 길'이라는 설명에, '괴로움을 멸하고 멸하는 길'은 '고멸도성제'이고 '번뇌를 멸하고 멸하는 길'은 '누집멸도성제'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는 것 아닙니까? '번뇌를 멸하고 멸하는 길'에는 집에 해당하는 용어는 없잖아, 지금과 같은 조어의 원리로라면 누집멸도성제가 아니라 누진멸도성제가 되어야 하는데요. 그래도 역시 옥상옥입니다. 왜 번뇌에만 진멸이라고 해야 되요? '진(다함, 끝남)'이라는 글자만 쓰거나 '멸'이란 글자만 붙여야지... 도대체 이해는 등한시하고 얼마나 만들어야 만족하죠?
그렇게 글자만 가지고 닥치는 대로 만든 용어가, 무슨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거나 뭐 그런게 있습니까? 바른 이해의 장애였던 기존의 용어를 지양하는 효과가 있습니까? 오히려 도성제등을 고멸도성제등이라고 칭하면요, 대다수에게 불필요한 혼동만 일으킵니다. 특히 '고집멸도 말고 누집멸도도 있다'는 식의 표현은요. 더 많은 혼동을 일으켜요. 번뇌는 일차적으로 고집멸도의 집에 상응하는데, 고집멸도에 갈음한 누집멸도를 말하면, 일차적으로 집의 결과가 누라고 착각하기 쉽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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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의 3업이 애는 아니고 취에만 해당하는지 의문인데, 실제적 필요성등은 실참의 문제인 거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어떤 용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혼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